
양녕대군은 1437년(세종 19) 정월 초 3일 세종대왕의 특명으로 20년만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왔다.
처음에 태종은 양녕대군을 서울 밖으로 내보냈으나 그후로 세종대왕이 항상 청하자 마침내 서울로 오게 한 후로는
우애가 더욱 두터워졌다. 세종대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궁중에 불러 잔치를 베풀고 서로 즐겁게 놀았다.

어느 때는 세종대왕이 대군과 같이 한강에 배를 띄워 선유(船遊)할 때 대군에게 술을 권하며 말하기를
“저 강변의 그윽하고 경치 좋은 곳에 정자 하나 지으면 어떨까요.” 하니 대군은 북쪽 강 언덕 그윽하고
풍경이 좋은 곳을 가리키며 “저기 저곳에 하나 지었으면 좋겠군요. ”하였다.
상감은 관에 명하여 정자를 짓게 하고 그 낙성연에 친히 나와 대군에게 하례하기를,
“형님은 길이길이 백년 복을 누리세요.” 하니 대군은 배사(拜謝)하며,
“참으로 일세에 영광이로소이다.” 하자 세종대왕은 정자이름을 `영복정(榮福亭)'이라 명명하고
편액을 친히 써서 걸게 하였다.
세조실록 16권, 세조 5년 6월 1일 신해 1번째기사는 영복정과 관련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관가(觀稼)하고, 이내 마포(麻浦)에 있는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새로 지은 정자(亭子)에 나아가서 어서(御書)로 그 정자를 이름 짓기를, ‘영복정(榮福亭)’이라 하고, 그 아래에 주(註)를 달기를, ‘한평생을 영화롭게 살며
한평생 복(福)을 누리라.[榮一世福百年]’라고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강맹경(姜孟卿)에게 명하여 서문(序文)을 짓게 하고,
병조 참판 김순(金淳)·도승지(都承旨) 윤자운(尹子雲)·좌승지(左承旨) 김질(金礩)·우부승지(右副承旨) 이교연(李皎然) 등에게
명하여 시(詩)를 짓도록 하였다. 양녕 대군(讓寧大君)에게 쌀 50석(石)을 내려 주고, 또 호위(扈衛)하는 군사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 주었다.
작가 신봉승은 그의 저서 실록대하소설 8권 '고운님 여의옵고'에서 세조가 마포강가에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나아가 영복정 편액을 써주게 된 과정을 보다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세조 5년(1459년) 6월 1일
세조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마포강가로 나갔다.
양녕대군이 새로 지은 정자에서 연회를 베플기 위해서다.
"어서 오르시오소서,전하."
양녕대군은 정자 아레서 세조를 맞았다.
"큰아버님, 정자가 아주 훌륭합니다. 허허허."
"모두가 전하의 성은이옵지요. 그저 망극할 뿐이옵니다."
"오르시지요. 큰아버님."
"예.전하."
주상과 종친이라기 보다는 그저 여염의 다정한 숙질과 같은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자 위로 올랐다.
그 뒤를 따라 내노라하는 중신들이 정자 안에 배석을 하고
연회는 시작되었다. 우선 한 순배씩 술이 돌고난 뒤였다.
"어서 대령하라,"
양녕대군이 나직하게 지시를 하자 곡 지필묵이 세조 앞에 대령되었다.
"웬 지필묵입니까?"
세조가 의아해서 묻자 양녕대군은 조용한 미소를 띤 채로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 신의 이 보잘것없는 정자에 이름을 내려주시오면
이 양녕, 그 성은을 뼈애 새길 것이옵니다."
"이름을요?"
"그러하옵니다."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양녕대군의 마지막 안식처라 해도
좋을 이 정자의 이름은 세조가 지어 마땅한지 몰랐다.
"제가 지은 이름이 큰아버님의 풍류에 어떠할지....."
"당치않으시옵니다. 전하."年
"하오면...."
세조는 붓을 들어 먹을 찍었다.
그리곤 넓게 펼쳐진 종이를 한참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세조에게는 마음의 기둥이라 해도 좋을 양녕대군. 힘을 일고 비틀거릴 때마다
호된 채찍을 마다하지 않은 양녕대군. 그를 위해 좋은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은혜 갚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세조가 이윽고 뭇을 움직였다.
일칠휘지, 용틀임하는듯한 글씨로 써내려간 것은
'榮福亭'
세 글자였다. 그리고 그 아래 주(註)를 달기를,
'영일세복백년(榮一世福百年)'
이라 하였다.
한평생을 영화롭게 살고 백 년토록 복을 누리라는 뜻으로
영복정이라는 이름을 짓는다는 뜻이다.
첫댓글 2020년 경자년에 더욱 행복하세요.
이정희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