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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등불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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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진실 스크랩 야훼 하느님은 아들과 딸이 있었다
아리영 추천 0 조회 38 09.09.20 19: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회원 벗님 여러분의 많은 참석바랍니다.    

강연회 안내

일  시

2009년 9월 26일 오후 2시

장  소

칭기스칸그룹 미팅홀,

지하철 1호선, 4호선 창동역 1번출구

도보 약 2분 거리 (여의도순복음교회 백상빌딩 15층)

전  화

TEL 02-903-8981~3

010-4622-0211 // 031-253-0732

제  목

인류시조를 올바로 깨닫자

강  사

인류시조성전건립회 琇巖 朴炳譯(박병역) 선생

주  최

칭기스칸그룹, 한국정신문화선양회,

 

 

 

◆ 야훼 하느님은 아들과 딸이 있었다

 

? 수신 하백(河伯)은 여호와 하느님의 딸이다.

 

 중국신화학자 원가(袁珂)가 지은《중국신화전설사전》에서 하백(河伯)은 또한 “빙이(憑夷), 풍이(馮夷), 무이(無夷)라고도 한다. [유양잡조-낙고기(諾皐記)]에는 사람의 얼굴에 물고기의 몸(人面魚身)이라 하였다. [시자(尸子)]에는 (白面長人魚身) 얼굴은 희고 몸이 길다란 人魚(인어)라고 하였다.

 

[초사(楚辭)-구가-하백]에서 홍흥조(洪興祖)가 쓴 보주(補注)에는 진(晉)나라 때 갈홍의 [포박자-석귀(釋鬼)]를 인용해 말하기를 풍이(馮夷)가 8월 상경일(上庚日)에 황하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자 천제(天帝)가 하백(河伯)을 황하의 수신(水神)으로 명하였다. 라고 돼 있다. 즉 풍이(馮夷)가 하백(河伯)이란 말이다.


 [장자-대종사]의 석문(釋文)에는 사마표(司馬彪)의 말을 인용해 [청령전]에 이르기를 풍이는 화음(華陰), 동향(潼鄕) 제수(堤首) 사람이다. 팔석(八石)을 복용하고 물의 수선(水仙)이 되었다. 이 수신(水神)을 하백(河伯)이라 하였다. 하백은 곧 황하의 수신(水神)으로서 은상(殷商)이래로 주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며 받들어 숭배했다.

 

《장자-인간세》에 (不可以適河) 즉 하백을 인간 세상에 시집을 보내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라는 구절이 있다. (不可以適河)의 뜻을 (석문에는 사마표의 말을 인용해 적하(適河)는 사람을 황하에 빠뜨려 제사함이다. 라고 해석 했다) 사기-육국연표-진영공8년에 (初以君主妻河)라는 기록이 있는데 “인간 세상 최초의 군주가 하백을 처로 맞이하였다. 하고, [사기색]은 하백은 공주(유화)를 처음 인간 세상에 시집보낸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

 

[산해경-해내북경]과 [초사(楚辭)-구가-하백]을 살펴보면 하백은 고대에 본래 천신(天神)이었다. 고대 은(殷)나라 사람들이 황하에 제사할 때 자(煮), 방(枋), 매(埋)등의 명칭이 있었다. 또한 우폐(シ牛嬖 : 총애하는 자를 황하에 빠뜨린다)라는 제사가 있었다. (갑골문의 복사(卜辭)에 두루 보인다)


 [楚辭(초사)의 河伯(하백)] : [주목왕(周穆王)]은 하백의 딸과 구하에서 물수레에 올라타고 폭풍을 일으켜 물결을 가로지르며 즐겁게 놀았다. 연꽃으로 덮은 가마에 두 마리 용을 타고 곤륜산에 올라 4방을 바라보니 마음은 끝없이 넓은 하늘을 날아올랐다. 해가 저물어도 즐겁게 놀다가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물가 언덕에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고기비늘로 지은 용당이 있고 자색 빛 조개로 꾸민 궁궐에 어떤 신령(해모수)이 있었다. 물속에서 흰 자라를 타고 문어를 쫓으며 하백의 딸과 놀았다. 하백의 딸(유화,사소)은 황하의 강물이 마를 때 까지 살았다. 먼 장래에 인간 세상에 내려가서 자식들과 손잡고 동쪽의 (신라)로 가서 아름다운 미인(동신성모, 사소 유화)이 되었다. 남포의 물이 파도를 치며 넘실거리자 물고기들이 무리지어 찾아와 나를 반갑게 환영해 주었다

.

[산해경 海內西經(해내서경)18]의 서북쪽의 崑崙虛(곤륜허)는 천제님이 하늘에서 내려와 도읍한 곳이다. 곤륜허는 사방 800리이다. 높이가 만길이나 되는 木禾(목화)나무 다섯 거루가 둘레에 있고 五尋(5심) 깊이의 큰 우물이 있는데 九井(9정)이라 한다. 우물은 5面(면)이고. 둘레의 난간은 옥으로 장식하고 4방면마다. 9문이 있고 4면마다 開明獸(개명수)가 지키고 있다. 이곳은 많은 神人(신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산기슭에 8개의 바위가 있는데 東夷(동이)의 ?(예)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바위에 오를 수 없었다.


[초사-천문]번역에 보면 옥황상제가 이예(夷?)를 지상에 내려 보내 夏(하)나라 백성들을 혁파하여 재앙을 내렸거늘, 어찌하여 하백을 쏘고 저 낙빈을 처로 삼았는가? (帝降夷?革蘖夏民胡射夫河伯而妻彼?嬪)라는 구절이 있다.하백을 쏘다(射河伯)와 낙빈을 처로 삼다(妻?嬪)는 본시 한 사건이다. 왕일(王逸)은 처낙빈(妻?嬪)에 대한 주(注)에서 낙빈(?嬪)은 수신(水神) 복비(宓妃:태호복희의 딸)를 일컫는다.

 

예(?)가 또한 꿈속에서 낙수여신 복비와 더불어 교접했다. 라고 했다. 사하백주전(射河伯注傳)에 이르기를 하백이 백룡으로 화신하여 황하강에서 바람과 풍랑을 일으키다 箭神(전신)인 后?(후예)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게 되었다. 하백은 천제에게 하소연하기를 저를 위해 예를 죽여주소서 하니 천제는 너는 무슨 연고로 화살에 맞았는가? 하백이 대답하기를 그 때 제가 백룡으로 변화하여 나가 놀고 있었습니다. 천제가 말했다 네가 깊은 곳에서 신령함을 지키고 있었다면 예가 무슨 수로 너를 범할 수 있겠는가? 지금 벌레나 짐승이 되어서 사람에게 피격 당함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예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라고 했다.


  [산해경 해내북경의 18], 崑崙虛(곤륜허) 남쪽 4방 300리에 울창한 나무가 있다. 19, 從極淵(종극연)의 연못은 깊이가 300길이며 곤륜산은 ?夷(빙이)가 도읍한 곳이다. 빙이는 사람의 얼굴에 두 마리의 용을 타고 다녔다. 종극연을 혹 忠極淵(충국연)이라고도 한다. 《포박자(抱朴子)》에는 "빙이는 8월 초이렛날 강을 건너가다 빠져죽었는데, 천제(天帝)가 하백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회남자(淮南子)》에는 "?夷(빙이)가 구름수레를 타고 하늘을 달린다"고 기술되어 있다.


 [삼신5제본기]의 하백은 천하(天河:은하수)의 사람으로 나반(那般)의 후손이다. 7월 7일은 바로 나반(那般)이 강을 건너는 날이다. 이날은 천신(天神)이 용왕(龍王)에게 명하여, 하백을 불러 용궁으로 들어가게 하여 사해(四海)의 뭇 신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천하(天河)는 천해(天海)이며 지금의 북해(北海)이다. 천해(天海)의 주(注)에 이르기를, 천도(天道)는 북극에서 일어나므로 천일생수(天一生水)라고 했다. 대저 북극은 [생명체를 낳는] 수정자(水精子)가 기거하는 곳이다.

 

  

                ▲ 고구려 고분벽화의 하백(河伯)

 

[淮南子齊俗訓(회남자제속훈)]에서 ?夷(빙이)는 馮夷(풍이)이며, 혹은 風夷(풍이)이며 河伯(하백)을 말한다. 馮夷(풍이)는 득도하여 큰 河川(하천)에 숨어있다. 河伯(하백)은 옛날 황하의 水神(수신)이며 풍류를 즐기는 방탕한 성격의 소유자라 했다. 태호복희와 여호와 상제는 禹(우)가 治水(치수) 할 당시 인간 세상에 있었다.


1. 하백(河伯)은 지혜의 수신(水神)이며, 이름은 天吳(천오)이며, 복비(宓妃)이다. 箭神(전신)인 后?(후예)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고 여호와 옥황상제에게 하소연 했다. 하백과 복비(宓妃)는 같은 사람이며 곧 복비(宓妃)는 태호복희의 딸이다. 즉 태호복희와 여호와 상제는 부부이며, 곧 여호와 옥황상제의 딸이었다.


 

 

[산해경 해외동경 7,]

朝陽谷(조양곡)에 살고 있는 水神(수신) 天吳(천오)는 머리가 8개이고 사람의 얼굴이고 여덟 개의 다리와 여덟 개의 꼬리가 달려있다. 북쪽에 두 강물 사이를 두고 虹虹(홍홍)과 天吳(천오)가 살고 있는데 천오신을 水神(수신) 河伯(하백)이라 한다.

《장자(莊子)》에서는 하백은 득도(得道)하여 큰 강에서 놀았다고 하였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하백은 낙수(洛水)의 수신과 싸웠다 하고 후한(後漢) 때의 고유(高誘)는 "풍이(馮夷)는 하백이라 했다. 화음동향(華陰潼鄕) 사람으로 물 여덟 섬을 마시고 수선(水仙)이 되었다"고 하였다. 수계의 지도를 전해 주고 우의 치수를 도왔다. 하백은 백성을 위해 온힘을 다하여 백성들이 감동하였다. 한다.


◆ 천제 북부여왕 해모수는 야훼 하느님의 사위이다

[구 삼국사 소재 이규보(李奎報:1168-1241년)의 동명왕편] 단군(壇君) 해모수께서 처음 하늘에서 강림하신 날은 임술년(BC 239) 4월 8일이며, 秦始王政(진시왕정) 8년이었다. 천제(天帝:하느님)의 아들 해모수를 부여의 옛 도읍터에 내려 보내어 놀게 하였다. 해모수는 5룡거(五龍車)를 타고 백여 명의 시종들은 모두 백곡(白鵠:흰 고니)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올 때 채색 구름은 위에 띄우고 구름 속에 청아한 음악 소리가 들리었다.

 

해모수는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며 십여 일이 지난 후에 비로소 내려왔는데 머리에 까마귀 깃으로 된 烏羽冠(조우관)을 쓰고 용의 형상을 刺繡(자수)한 龍布(용포)를 입고, 항상 허리에 빛나는 龍光劍(용광검)을 차고 오룡차에 오르면 백여 명의 시종이 모시었다. 아침에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시니 세상 사람들은 해모수를 천왕랑(天王郞)이라 불렀다.

 

 

▲ 둔황 막고굴 237굴의 ‘유마경변상도 ’벽화에서 발견된 ‘조우관을 쓴 해모수


성북(城北) 청하(靑河)의 하백(河伯)은 매우 아름다운 세 딸이 있었다. 장녀의 이름은 유화(柳花)이고, 차녀는 훤화(萱花)이고, 계녀는 위화(葦花)라 불렀다. 그녀들이 청하로부터 웅심연(熊心淵) 위로 놀러 나와 있었다. 그녀의 자태는 신 같았으며, 용모는 빼어나게 아름답고 몸이 빛났으며 장식한 패옥이 어지럽게 울려 한고(漢皐)와 다름이 없었다. 해모수 왕은 이들을 보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왕비로 삼았으면 아들을 얻겠구나." 하자 그녀는 왕을 보자 즉시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좌우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궁전을 지어서  여자들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닫고 어찌하지 않고 무례를 범하려 하십니까?" 하니 왕이 옳게 여겨 말채찍으로 땅을 그으니 갑자기 금빛 찬란한 동실(銅室)이 생기어 장관이었다. 방 가운데 세 사람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술동이를 두었다. 그 여자들이 각자 그 자리에 앉아서 서로 권하며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게 되었다. 해모수왕은 세 여자가 크게 취하기를 기다려 급히 뛰어가 막으니 여자들이 놀라서 달아나고 장녀 유화만이 해모수 왕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하백은 크게 노하여 해모수 왕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말하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나의 딸을 지상에 머물게 하였는가? 하니 해모수 왕은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지금 하백에게 구혼을 청하고자 합니다." 하백이 다시 사자를 보내 말하기를 "네가 천제의 아들로서 나에게 구혼을 청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중매를 보내야 될 터인데 지금 갑자기 나의 딸을 붙잡아 둔 것은 어찌 실례가 아닌가?

 

해모수 왕은 부끄럽게 여겨 장차 하백을 만나고 나서 보내려고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여자를 놓아주려고 하였으나 여자는 이미 왕과 정이 들어서 떠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에게 권하기를 "5룡차만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해모수 왕이 하늘을 가리키며 고하니 문득 5룡거가 공중으로부터 내려왔다. 왕과 여자가 수레를 타니 갑자기 풍운(風雲)이 일어나며 하백의 궁전에 이르렀다. 하백은 예(禮)를 갖춰 이들을 맞이하고 자리를 정한 뒤에 말하기를 "천하에 혼인예법이 통용되고 있는데 어찌하여 혼례 법을 잃고 나의 가문을 욕되게 하였는가? 왕이 천제의 아들이라고 주장 한다면 무슨 신이함이 있는가?


하니 해모수 왕이 말하기를 "오직 시험해 봅시다." 라고 했다. 이에 하백이 뜰 앞의 물에서 잉어가 되어 놀자 왕은 수달로 변해서 이를 잡았다. 하백이 다시 사슴이 되어 달아나니 왕은 늑대가 되어 이를 쫓고 하백이 꿩으로 변화하자 왕은 매가 되어 그 뒤를 쳤다. 하백은 이 사람은 진실로 천제의 아들이라 여기고 예로써 혼인을 이루고 혹 해모수 왕이 자신의 딸을 데려갈 마음이 없을까 도리어 겁이 나서 잔치를 베풀고 왕에게 술을 권해서 크게 취하게 한 뒤 딸과 함께 작은 혁여(革輿)를 넣어 용거(龍車)에 실어서 승천하도록 하였다.


그 수레가 물을 채 빠져 나오기 전에 해모수 왕은 바로 술이 깨어서 여자의 황금 비녀를 취해서 혁여를 찌르고 그 구멍으로 홀로 나와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하백은 크게 노하여 그의 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아니하고 나의 가문을 욕되게 했다." 하고 좌우에게 명령해서 딸의 입을 잡아 늘려 그 입술의 길이가 삼척이나 되게 하고 다만 노비 두 사람을 주어 우발수(優渤水) 강 가운데로 귀양 보냈다. 어느날 어사(漁師) 강력부추(强力扶鄒)가 금와왕에게 고하기를 요즈음 양중(梁中)에 고기를 잡아가는 자가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자 금와 왕은 어사를 시켜서 그물로 끌어내게 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졌다.


 다시 쇠 그물을 만들어 끌어내니 비로소 한 여자가 돌 위에 앉아서 나왔다. 그 여자는 입술이 길어서 말을 할 수가 없으므로 그 입슬을 세 번 자른 뒤에야 말 했다. 금와왕은 천제 해모수의 왕비임을 알고 유화(柳花)를 별궁에 두었는데 유화(사소)는 햇빛을 받고 그로 인하여 임신을 해서 신작(神爵) 4년 계해(BC 58년) 여름 4월에 고주몽을 낳았는데 골격이 매우 크고 의표가 영웅답고 울음소리가 기이했다.


[註:환단고기는 [藁離郡(고리군)왕 高辰(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沃沮(옥저) 諸侯(제후) 弗離支(불리지)는 高辰(고진)의 손자가 된다. 모두 다 도적 위만(衛滿)을 토벌시킨 공로로 제후에 책봉되었다. 불리지는 과거 “하백의 딸 유화”를 서압록에서 만나 장가들어 漢弗陵(한불능 昭帝(소제) 2년 임인(BC79년) 5월 5일“고주몽(추모왕)”을 낳았다]


유화가 처음 주몽을 낳을 때 왼편 겨드랑이로 알을 하나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쯤 되었다. 금와왕이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 사람을 시켜서 이 알을 마 굿간에 버렸으나 여러 말들이 밟지 않았고, 깊은 산에 버렸으나 온 갓 짐승들이 모두 보호했다. 구름이 낀 날에도 그 알 위에는 언제나 햇빛이 있으므로 왕은 알을 가져다가 그 어미에게 보내어 기르도록 했다.

 

마침내 알이 열리고 한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낳은 지 한 달이 못 되어 말을 했다. 주몽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여러 파리들이 눈을 물어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저를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어 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그의 어머니는 갈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자 이 활로 방거(紡車) 위에 날으는 파리를 쏘아서 모두 다 맞았다. 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 이라고 하여 이름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장대해지자 재능과 덕을 겸비하였다.

 

금와왕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같이 사냥하였다. 금와왕의 왕자와 그를 따르는 40여명은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으나 주몽은 사슴을 쏘아 잡은 마리가 매우 많았다. 왕자는 이를 질투해서 주몽을 잡아 나무에 매어 놓고 사슴을 빼앗아 가 버렸으나 주몽은 나무를 뽑아서 돌아왔다. 태자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신비한 용맹이 있고 눈길이 남과 다른 사람입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뒷날 우환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 그 뜻을 시험코자 하였다.

 

주몽은 속으로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자손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말을 먹이고 있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남쪽 땅으로 내려가서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어머니가 계시니 감히 마음대로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도 밤낮으로 속을 썩이고 있느니라. 내가 듣기로는 먼 길을 가는 사람은 모름지기 좋은 날에 떠나면 도움을 받는다 했으니 내가 말을 골라 주겠노라. 하고 드디어 말을 기르는 마구간으로 가서 긴 말채찍으로 말을 치니 여러 말이 모두 놀라서 달리는데 한 누른 말이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 넘었다.


주몽은 그 말이 준마임을 알고 몰래 말 혀끝에 바늘을 찔러 놓았다. 그 말은 혀가 아파서 물과 풀을 먹지 못하고 야위어 갔다. 왕이 馬牧(마목)을 순행하다가 여러 말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마른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은 마른 말을 얻어서 바늘을 뽑고 더욱 잘 먹였다. 고주몽(추모왕)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 같이 남쪽으로 행하여 개사수(蓋斯水:엄리대수)에 이르렀으나 건널 배가 없었다. 추격하는 병사들이 갑자기 닥칠까 두려워서 이에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개연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외손자입니다. 지금 난을 피해 여기 이르렀으니 황천후토(皇天后土)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급히 주교(舟橋)를 보내소서." 하고 활로써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이루어서 주몽이 건널 수가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추격병이 뒤를 따라 이르렀는데 추격 병이 물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들의 다리는 곧 없어지고 이미 다리로 올라섰던 군사들은 모두 다 몰사하였다. 주몽이 어머니와 이별 할 적에 차마 떨어지기 아쉬워 말을 못하자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의 어미는 염려하지 말고 떠나가거라, 하고 이에 오곡의 씨앗을 싸서 주었는데 주몽은 생이별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보리 씨앗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주몽이 큰 나무 아래서 쉬고 있었더니 한 쌍의 비둘기가 날아왔다.

 

주몽은 이 비둘기는 응당 신모(神母:하백의 딸 유화)가 보리씨를 보내는 것이다." 라고 말한 후 이에 활을 당겨 이를 쏘아 한 살에 함께 잡아서 목구멍을 열고 보리씨를 꺼낸 다음 비둘기에게 물을 뿜으니 비둘기는 다시 살아나 날아갔다. 주몽왕은 스스로 잔디밭 위에 앉아서 임금과 신하의 위계를 정했다.


비류국왕(沸流王) 송양(松讓)이 사냥을 나왔다가 왕의 용모가 비상함을 보고 불러서 자리를 양보하며 말하기를 바닷가에 편벽되게 있어서 일찌기 군자를 본 일이 없었는데 오늘날 만나 뵙게 되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대는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하니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천제의 자손으로 서국(서천축국)의 왕이거니와 감히 묻고 있는가? 군왕은 누구를 계승한 왕이냐?" 하자 송양은 "나는 선인(仙人)의 후예로서 여러 대(代)로 왕 노릇을 했는데 작은 지방에서 두 왕이 땅을 나누는 것은 옳지 못하니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가 얼마 안 되었으니 나에게 부용(附庸)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하자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천제를 계승하고 지금 그대는 신(神)의 자손이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라고 하는 구나. 만약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송양은 왕이 여러 번 천손이라고 일컫자 속으로 의심을 품고 그 재주를 시험코자 말하기를 왕과 함께 활쏘기를 하자."고 제의했다. 사슴을 그려서 백보 안에 놓고 쏘았는데 그 화살이 사슴의 배꼽에 들어가지 못했는데도 힘겨워 하였다. 왕은 사람을 시켜서 옥지환(玉指環)을 백보 밖에 걸고 이를 쏘니 기와가 깨어지듯이 부서졌다. 송양이 크게 놀라며 왕에게 말하기를 나라를 새로 창업해서 아직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국의 사자가 왕래하되 내가 능히 왕에게 예로써 환영하며 전송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를 가볍게 보는 까닭이다." 하였다.


종신 부분노(扶芬奴:奴客(노객)가 나와 말하기를  "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국의 북을 취해 오겠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타국의 감춘 물건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준 물건인데 어째서 취하지 못하겠습니까? 대왕은 부여에 계실 적에 어려워하실 때 누가 대왕이 이곳에 오실 줄 알았겠습니까? 이제 대왕은 만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위태로움에서 몸을 벗어나 요수 왼쪽[遼左]에서 이름을 더 날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천제(하느님)가 명해서 된 것인데 무슨 일이든지 이루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에 부분노 등 세 사람이 비류국에 가서 고각을 가져왔다.


비류왕이 사자를 보내 와서 고각을 볼까 겁이 나서 북의 색을 어둡게 칠하여 오래된 것처럼 하였더니 송양은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송양은 도읍을 세운 선후(先後)를 따져 부용(附庸)시키고자 하므로 왕은 궁실을 짓되 썩은 나무로 기둥을 하니 오래됨이 천년이 된 것 같았다. 송양이 마침내 와서 보고 감히 도읍 세운 것의 선후(先後)를 다투지 못했다.

 

왕이 서쪽으로 사냥을 가서 흰 사슴을 잡아 해원(蟹原)에 거꾸로 매달고 주술을 행해 말하기를 하늘이 만약 비를 내려서 비류의 왕도(王都)를 표몰(漂沒)시키지 않으면 나는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 난관을 면하려면 네가 능히 하늘에 호소하라. 하니 사슴의 그 슬픈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장마비가 칠일이나 쏟아져 내려 송양의 도읍이 떠내려가 버렸다. 왕이 갈대 새끼줄을 가로질러 늘이고 압마(鴨馬)를 타니 백성들이 모두 그 줄을 잡았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그으니 물이 줄어들었다.


6월 송양은 나라를 들고 항복해 왔다.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 嶺)을 덮어 사람은 산을 볼 수 없고 오직 수천 명의 사람이 나무 베는 소리만 들렸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해 성(城)을 쌓고 있다. 고 하더니 칠일 만에 구름과 안개가 저절로 걷히고 성곽과 궁대(宮臺)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동명성왕은 하늘에 절하고 나아가 살았다. 9월에 추모왕은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그 때 나이는 사십이었다. 태자는 왕이 남긴 옥편(玉鞭)으로 용산(龍山)에 장사를 지냈다.


▶ 해모수는 여호와 하느님의 사위이다

북부여의 천제 해모수(BC 239-195년)는 그의 나이 23세에 [여호와 하느님]의 명에 따라 세상에 내려오시니 이때 진한의 단군 고열가 재위 57년 임술(BC 239년) 4월 8일 이었다. 북부여 해모수 천제는 청하(靑河)에서 나와 웅심산(蘭邊(난변:길림성 서란)에서 즐겁게 놀던 하백(河伯)의 장녀 유화(柳花)를 만나 궁전으로 유인하여 밀취하고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추모왕,동명성왕)과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하백(河伯)은 여호와 하느님의 딸로서 해모수는 여호와 하느님의 사위이며, [고주몽과 박혁거세왕은 여호와 하느님의 외 증손자가 된다.]


[1]. 혁거세왕과 고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이다

[삼국유사,북부여] 고기에 이르기를 재위 3년 임술(BC 239년) 4월 8일 해모수 천제님은 하늘에서 내려와 5룡거(五龍車)를 타고 홀승골성(訖升骨城: 의주(醫州)에 있음)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북부여라 칭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라 하였다.

 

[환단고기의 고구려 본기 제 6] 사로(斯盧: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은 선도산성모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 혹자는 말하기를 西述聖母(서술성모)가 혁거세왕을 낳았기 때문에 中華人(중화인)들이 선도산 성모를 찬양했다. 또 성모(聖母)가 동국의 선도산으로 가서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聖人)을 낳았기 때문에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를 찬양했다. 는 말이 있다. 또한 상서스러운 게룡(鷄龍)이 나타나서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것도 西述聖母(서술성모)님께서 인간 세상에서 몸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 고구려 고분벽화의 달신(동명성왕의 어머니 월신(月神) 유화,사소)


 [2]. 혁거세왕과 고주몽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삼국유사 제5권 감통 제 7]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본문:[仙桃山神母本 中國帝室之女,名娑蘇] : 선도산 신모(神母)는 본래 중국(북부여 해모수 황제)의 궁전에 계셨던 여인(하백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이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깨우쳐 해동(海東:신라)에 들어와 오래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 그 성모(聖母)가 시초로 진한(辰韓:신라)에 도착하여 성자(聖子) 혁거세를 낳아 동국의 시조 임금이 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본문에서] 史臣(사신) 김부식은 정화년(政和年)에 사신으로 송(宋)나라에 들어갔는데 대궐의 우신관(佑神館)에 一堂(한당)을 설치하고 여선상(女仙像)을 모셔 놓은 곳을 보았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輔)가 말하기를 이 상은 귀국의 신(神)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이윽고 말하기를 고대 중국제실지녀(中國帝室之女(북부여 황제의 궁전에 계셨던 여인)이 바다 건너 진한(辰韓신라)에서 아들(혁거세)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늘 선도산(仙桃山)에 계셨는데 그분의 상(像)입니다.

       

[3], 혁거세왕과 고주몽은 여호와 하느님의 외증손자이다
[삼국사기 고구려의 시조편]에서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아 북 부여를 떠나 동부여(가섭원)를 개국하게 된다. [모두루비문과 광개토대왕비]에서 하백의 외손자이며 일월의 아들 추모성왕은 처음 [북부여 해모수의 아들]로 출생 하셨다. 이 國郡(국군)에 계신 聖人(성인)의 덕치가 최고라는 것을 천하 4방에서 다 알고 있다.

 

즉 북부여 해모수 황제 궁실의 여인은 선도산성모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이며 또한 유화 부인이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추모왕,동명성왕)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해모수 천제이며,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柳花), 또한 사소(娑蘇)이며,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 혹은 동신성모(東神聖母)라 칭했습니다.


즉 고주몽의 어머니는 유화이고 박혁거세왕의 어머니는 사소(娑蘇)이며 아버지는 해모수로서 혁거세와 고중몽은 형제간이 된다. 또한 하백(河伯)은 여호와 하느님의 딸로서 [고주몽과 박혁거세왕은 여호와 하느님의 외 증손자가 된다.]


▶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의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비문에서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과 형제이기 때문에 장수왕 9년 신유(辛酉 421)년에 신라 눌지왕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구려는 신라와 형제와 같은 나라이다. 라는 [여형여제(如兄如弟)]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신라와 고구려는 서로 화합하여 천제(天帝)의 나라를 지키자는 '수천'(守天)의 구절이 있습니다.


여화와 하느님을 배제하면 우리역사를 논할 수 없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로 밝혀진 본 고증은 세계사적, 종교적, 일대사건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인류의 부모와 종교의 조종(祖宗)를 올바로 깨닫고, 장차 종교적 일대 변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본 고증은 시비하거나 논쟁할 사안이 아닙니다.

 

태호복희, 여호와 하느님은 BC 3500년경 3황5제(三皇五帝)로서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지상에서의 행적이 분명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태호복희와 여와는 부부이며, 남매로서 농업의 시조이며 의학의 시조 염제신농과 황제헌원을 낳은 신인이며 곧 사람입니다. 그리고 배달국 제14대가 치우천왕이며, 황제헌원의 3촌이 됩니다.


제18대 거불단이 단군왕검의 아버지가 됩니다. 태호복희, 여호와 하느님은 인류의 부모이며, 인류문명의 시조이며 종교의 조종(祖宗)으로 밝혀졌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조상이며, 태고적부터 삼신으로 신앙했던 하느님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여호와 하느님을 배제하고는 대한민국 고대사 자체를 논할 수 없습니다.

 

즉 우리나라는 고조선 3한 시대부터 여호와 삼신(하느님)을 숭배하고, 제천단(원구단)에서 제사를 주제한 제사장(祭司長)을 단군(壇君)이라 칭했으며, 단군은 삼한 영토를 관리하고 각 제후 왕을 임명하는 왕권을 갖고 있었다.


  1, 고조선 3한의 단군왕검은 여호와 하느님의 외 증손자이며, 2, 북부여의 천제 해모수는 여호와 하느님의 사위이며, 3,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과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은 천제 해모수의 아들로서 형제이며, 신라와 고구려는 형제국입니다. 또한 혁거세와 고주몽은 여호와 하느님의 외 증손자로 밝혀졌습니다.


만약에 태고사(太古史)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인류의 시조 여호와 하느님을 논설하지 않고 배제한다면 사학자라 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태고사를 탐구하는 사람이나 종교적 사유로 [여호와 하느님을 배제하고 우리나라 국사를 정립한다면 정통국사]라 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 야훼 하느님의 아들 황제헌원와 염제신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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