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 >
“태산이 높다하되…” 시 남긴 풍류 문신
암송의 힘과 문화적 기억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시조’ 하면 떠오르는 게 ‘태산이 높다 하되’이니 말이다. 이런 기억에는 학창 시절의 암송이 한몫한다. 내용의 교훈성 덕분에 많이 가르친 데다, 본래 입에 잘 붙고 외기도 쉬운 시조의 특성 때문이다. 아무튼 황진이 시조 같이 문학성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 시조 본연의 묘미는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덕에 지은이 ‘양사언(楊士彦)’을 모르는 사람도 이 시조는 다 알고 있다. 아무리 유명한 서예가에 좋은 한시를 많이 쓴 시인이라도 시조 한 수의 명성이 더 높다고 할까. 어쩌면 산수 간에 노닐다 한 수 뽑은 게 양사언의 명편으로 길이 남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양사언의 삶과 자취
봉래 양사언(1517∼158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시와 글씨, 거문고에 두루 능했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본관은 청주이다. 해서와 초서에 특히 뛰어났으며, 안평대군·김구·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린다. 형 사준(士俊)과 아우 사기(士奇)도 글에 능했고, 아들 만고(萬古) 역시 문장과 글씨로 이름을 알렸으니 문의 내력이 강했나 보다.
양사언은 포천군 신북면에서 태어나 성북촌에서 자랐다. 지금 유허지만 남아 있는 집터는 포천 제일의 명당이라고 한다. 1540년(중종 35) 진사시에 급제, 그렇지만 아버지, 어머니의 연이은 타계로 상을 6년간 치르고, 1546년(명종 원년) 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이후 삼등현감과 함흥부사 등을 역임하다 병으로 귀향하는데, 이후 10여 년 동안은 포천 집에서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에 공부를 깊이 했는지 뛰어난 재주에 책 또한 안 읽은 게 없다고 전한다.
이후 양사언은 40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함경도 안변부사 때는 풍속이 까다로운 북쪽 관문 도시라 정무를 효제로 하고 교화에 특히 힘썼다. 그러다 보니 고을 사람들이 부모보다 고맙다고 칭송하며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기도 했다. 또 변란의 예측과 대비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바로 안변성 옆에 큰 못을 파고 마초(馬草)를 저장케 한 일이다. 이듬해 북쪽에서 변란이 일어나 마초와 물이 없는 고을 관리들이 책임 추궁을 당해도 안변지방은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에 베 한 필 가져가지 않았다는 등의 글로 미루어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양사언은 대부분의 관직을 외직으로 마쳤다. 현실의 벽을 넘기 어려운 서얼 출신에 교유도 넓지 않아 먼 곳의 직이 오히려 편했을 법하다. 게다가 방외인적 성향이 강했으니 좋은 경치 찾아다니며 시 읊고 글씨 쓰고 하는 데는 외직이 더 좋았을 것이다. 시에 나타나는 탈속의 느낌이나 ‘신선의 풍채와 도인의 기골’을 지녔다는 세간의 인물평 역시 이런 면모를 보여준다. 도교에 심취해 점술도 능했다는데, 여진난과 임진왜란의 예견이 유명하다. 하지만 관직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아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관할 구역 내의 지릉(이성계 증조부 익조의 능) 화재사건에 책임을 지고 귀양 간 곳에서 그만 숨을 거둔 것이다. 작품집으로 ‘봉래시집’이 있고, 280여 편의 시·부·기·문(詩·賦·紀·文)이 전해진다.
詩·書·琴과 더불어 산수 간에 노닐다
봉래 양사언은 시와 글씨만 아니라 거문고에도 능했다. 또 산수자연을 사랑하는 병 이른바 ‘천석고황(泉石膏?)’에 풍류도 꽤나 즐겼던 것 같다. 당대 중심 사회로의 진입이 어려운 사정도 있었지만, 산수 좋은 시골 외직의 자원에는 이런 입장이 더 작용했던 것이다. 경치 좋은 곳으로 다니며 선정을 베풀고 틈틈이 시와 글씨 그리고 거문고를 즐기는 삶이 문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법하다.
명산 중에도 양사언은 금강산을 유독 사랑했으니(호도 봉래다), 그곳에 가면 신선처럼 세월도 잊을 정도였다. 금강산에 대한 몇 편의 시와 남겨놓은 글씨를 보면 그가 얼마나 호방하게 놀았는지 짐작이 간다. 특히 만폭동 바위에 지금도 남아 있는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은 최치원이 쓴 ‘쌍계석문’보다 낫다는 평을 들을 정도다. 명산의 풍광에 도도해지는 시의 흥을 어쩌지 못해 글씨를 쓰던 시절의 흔적이 경치 좋은 데는 다 있기 마련. 조선 최고의 명산인 금강산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중 필체가 빼어난 것은 문화유산 대우를 받기도 하지만, 지금은 다 자연 훼손이니 어떤 감흥도 마음에만 담아올 일이다.
높고 낮은 산을 안주 삼고(山岳爲肴核)
푸른 바닷물은 술을 빚어(滄溟作酒池)
미친 노래를 힘 다하도록 부르며(狂歌凋萬古)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으리(不醉願無歸)
이 시는 불정대에서 차식의 시를 차운해 지은 것으로, 양사언의 시품과 사람 품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상의 전개도 대범하거니와 이미지나 비유도 호탕하기 짝이 없다. 산을 안주 삼고 바다로 술을 빚어 마시면서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니, 그 기세가 ‘유배당한 신선’을 자처한 이백도 부럽지 않아 보인다.
그런 양사언에게도 시를 알아주는 지음이 절실했을 것이다. 시란 혼자 쓰는 것이지만 더불어 이야기 할 글벗, 술벗은 필요한 법. 그런 그에게 허엽(허균의 아버지)은 더없는 문우였으니, 같은 해에 출생하고 사마시 문과에 같이 급제하면서 연이 깊어진 것이다. 그런 까닭에 포천 두문동에 이웃한 적도 있는데, 허엽은 3당(唐) 시인으로 이름난 이달과도 가까이 지낼 것을 권했다. 문장은 뛰어나건만 시사(詩社) 같은 것 하나 없이 외롭게 지내는 양사언의 입장을 헤아렸던 것 같다.
푸른 점을 찍은 듯 눈썹 산 홀로 있고(點碧獨蛾眉)
허공에는 이지러진 달이 비껴 있는데(浮空橫缺月)
요사스런 두꺼비 언제 먹어치웠는지(妖?食何時)
바람은 그림자진 산 위의 눈만 날리네(風落影山雪)
포천의 반월산을 보고 지은 이 시는 정경 묘사가 담담하다. 눈썹모양의 반월산에 달이 비껴 있는 모습, 그리고 그림자 머금은 눈 날리는 산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두꺼비가 무엇인가를 먹었다고 표현하는 대목에서 상상이 더 즐거워진다. 달이 이지러졌으니 달을 먹은 것인가 하고 보면, 뒤의 그림자진 산이 나오니 그게 곧 두꺼비 형상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발한 표현도 잘 썼다는데, 양사언은 보편적인 선을 넘지 않는 정도의 창의성을 발휘한 듯하다.
꼭 새겨보고 싶은 양사언의 편지글도 있다. 안변에 있을 때 백광훈에게 보낸 글이다.
삼천 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히 지내고 있소 (三千里外, 心親一片雲間明月)
단 열두 자의 짧은 글. 하지만 양사언은 이 속에 자신의 근황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심정을 담아내고 있다. 글자 밖이 천만리이니, 여백을 부릴 줄 아는 이의 격조 높은 편지가 아닐런가. 한 조각의 구름 사이로 보이는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히 지낸다지만, 그 ‘심친’에서는 고적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그렇지만 여러 말 구구하게 늘어놓지 않아도 헤아리려니, 백광훈 정도 시인이라면 그 행간을 다 짚었으리라.
독특한 유택의 감동
양사언의 무덤은 아주 독특하고 아름답다. 마침 햇살이 막 퍼질 때 갔기에 그 기운을 더 누릴 수 있었다. 해가 먼저 드는 곳에 자리한 무덤은 자연석을 두르고 있어 더 아담하게 다가들었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앞에 위치한 부인의 묘였다. 그것도 둘이나 나란히 있으니 말이다. 그동안 본 묘들은 거의 다 합장인데, 부부의 묘를 따로 쓰면서까지 부인의 묘를 둘이나 쓴 것이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그 모습 자체만으로 감동이었다. 지금까지 부인을 앞에 두는 묘도 못 봤는데, 게다가 부인을 둘씩이나 앞에 둔 묘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무덤 입구에는 시비도 옛 표기를 따라 단정하게 세워 놓았다. 그 외진 곳에 누가 자주 가랴만 시비가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를 뇌고 있다. ‘태산’이라는 중국 지명이 좀 걸리지만, 아이들에겐 꼭 들려줄 만한 좋은 시조이다. 그만큼 어릴 때 많이 외면서 즐기도록 이끌어야 하는 시교육에는 시조가 제격이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삶과 정서를 700년 이상 노래해 온 전통시라는 점에서 더 그러하다. 일본은 가부키(전용극장이 있음)와 하이쿠 같은 전통예술을 전 국민이 즐기면서 일본 미학으로 세계에 ‘포교’도 하는데, 우린 전통을 너무 홀대하는 것 같다. 그러다 혼도 뿌리도 다 잃지는 않을런지, 양사언 앞에서 새삼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