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운 고향은 아니러뇨/산꿩이 알을 품고/뻐국이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머언 하늘만 떠도는 구름/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한점 꽃이 인정스리 웃고/어린 시절에 불던/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하늘만이/높푸르구나
이 시는 '고향'의 노랫말이다. 작사자는 한국 문단사에 빛나는 거목으로서 큰 자리를 차지했던 정지용이다. 이 곡은 고향에 대한 애절한 감성을 서정성 깊은 선율로 노래하면서 오랫동안 나라 잃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위로를 주었다. 하지만 이 곡은 도중에 박화목 작시의 '망향' 또는 이은상 작시의 '그리워'로 노랫말이 바뀌어져 불려야만 했던 '비운의 가곡'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의 작가 정지용이 6·25때 월북한 시인으로 낙인찍혀 금지가곡으로 묶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가곡 '고향'은 이미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상태였고, 당시 출판된 명곡집에 예외 없이 수록되는 인기가곡이다 보니까, 각 출판사들은 급한대로 박화목의 '망향'으로 그 가사를 대신하였고, 후에 정지용의 시를 텍스트로 한 채동선의 모든 가곡을 다른 가사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가면서 '고향'의 가사는 노산 이은상 '그리워'로 대체된다. 지금의 4·50대 중장년층에게 특히 잘 알려진 이 곡이 '그리워'란 제목으로 더욱 잘 기억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 곡이 본래의 노랫말을 되찾은 것은 1988년 정지용을 비롯한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진 이후였다.
'그리워' <이 은상>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
마음은 어디두고
먼 하늘만 바라 본다네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
그대 가슴엔 내가
내 가슴엔 그대있어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진종일 언덕길을
헤메다 가네.
쓸쓸한 느낌의 곡으로, 곡 중에 느림표가 많고, 악상의 변화가 심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의 민족적 울분과 애국을 노래로써 표현하였다
가사가 어찌 되었건,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 일본인에 의해 짓밟히고 있자 그 분통을 이기지 못해 가슴이 빠개질 정도의 처절한 곡조로 한숨을 쉬며 이 곡을 지었을 채 동선님을 생각해 본다.
하나의 곡이 가사를 바꾸어 불리워지기도 여러 번 이지만, 파묻혀 오는 애절한 정서는 어느 걸로 불러도 빠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론, '망향'의 가사를 제일 맘에 들어한다. 그 이유는 대학 합창반 시절, 이 가사로 발표회에 나가기도 했지만, 가사 부분 중 "내 맘 속에 사는 이 그대여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 들 것일레라." 를 부르다 보면, 이유모를 그리움에 콧날이 시큰해지곤 했으니까. 몸이 태어난 곳이 어디 메건, 마음의 고향을, 삶의 좌표를 찾지 못한 젊은 시절의 방황과도 잘 결합이 되어 이 노래에 무척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잃은 슬픔을 가곡의 형태로 대신 승화시켰던 분들의 정신에 비하면 이러한 감정은 행복에 겨운 것이긴 하지만...
봄바람이 얄미운 여학생마냥 매섭고 야멸차게 거리에 불고 있다. 무표정한 일요일 텅 빈 거리에 해묵은 낙엽들과 쓰레기만 이리 저리 뒹굴고 , 사람들은 제각기 제 생각에 몰두하여 갈 길이 바쁘다. 눈부신 봄햇살과 화려한 꽃들로 주위가 어수선할 때, 홀로 침잠되는 자신을 보며 잔인한 느낌마저 들었었던 시절,괜하게 그리움으로 가슴이 시려 와 봄이 끝나는 자락까지 입어야 했던 베이지색 스프링 코트는 옷자락에 때가 보일 때쯤에야 벗을 수 있었다.
다음은 한국종합예술학교 예술연구소 연구위원, 김 용환님 글에서 발췌하였다.
바이올리스트요 작곡가요 음악사상가로서 식민지 생활에 저항하고 민족정신을 실천한 음악가 채동선. 그의 아버지 채중현은 당시 벌교의 이름난 부자로 현재 송덕비가 벌교 남초등학교에 세워져있을만큼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재산을 희사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채동선은 당시 벌교면에서 학교가 없어 순천공립보통학교까지 왕복 80리 길을 머슴과 함께 걷거나 업혀 다녔다. 졸업 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당시의 제일고보에 입학한다.
음악가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은 1918년 당시 장안의 손꼽히는 바이올린 연주가였던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면서부터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해 퇴학을 당하고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나왔다. 졸업과 동시에 영문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독일로 옮겨가 베를린 슈테르텐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고 1929년 귀국한다.
귀국 후 서울에서 4회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고 1932년 현악4중주단을 만들어 동료인 최호영·이혜구씨 등과 실내악운동을 펴기 시작하면서 연희전문학교에서 현제명씨 등과 바이올린을 지도했던 것이 채동선의 청년기다. 채동선은 당대 유명한 소프라노였던 누이 채동엽의 소개로 이소란 여사와 결혼, 서울 성북동에 터를 내리고 가끔 이화여전에 나가 외국어 강의를 하는 것 외에는 작품창작과 바이올린 연습에 열중했다. 당시 많은 음악가들이 후생단 등 일제 전시체제에 순응하는 활동을 했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하면서 흰 한복에 두루마기, 검은 고무신을 신고 낮에는 농사꾼으로 밤에는 국악채보에 전념해 민족음악 수립의 기초를 이 시기에 쌓았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당시 좌경음악가와 극우 세력의 중간에 서서 민족주의적인 음악가들의 단합을 역설하고 곧 고려음악협회를 창설하고 협회장이 됐다. 이때 교향곡 ‘조국’ ‘한강’ ‘독립축전곡’을 작곡했으며 ‘입성가’ ‘3·1절의 노래’ ‘개천절의 노래’ 등을 작곡했다. 선생의 음악가로서의 활동은 3기로 나눠볼 수 있다. 1기는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바이올리스트와 작곡가로서 활동한 시기이며 2기는 은둔하면서 작곡가로서 내실을 기하고 국악채보를 통해 민족음악수립을 한 시기, 3기는 해방과 더불어 관현악·합창·취주악 활동을 한 시기이다.
그러나 채동선은 쓸쓸하고 외롭게 세상을 등졌다. 부산 피난 시절, 양담배 등을 친구 김창국씨에게 얻어 장사를 했는데 고집이 강해 하루종일 하나도 팔지 못하고 모든 식구들이 쫄딱 굶은 적이 많았다. 1953년 2월 2일 종전을 알리는 포성이 한창일 무렵 부산 생활의 고생으로 병을 얻어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나 영양실조에다 복막염이 겹쳐 53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사후 부인 이소란 여사가 1963년 6·25때 서울 성화동 집 마당에 묻어둔 악보의 원본을 찾아내면서 사후 10년 뒤 빛을 보았다. 1989년에는 그가 자랑스런 보성사람임을 자각한 보성군 관계자들에 의해 총사업비 1천3백만원을 들여 높이 3.6미터, 넓이 3미터 크기의 기념비가 벌교공원에 세워졌다.
입술이 메마른 어둠의 세월 속에서도 불멸의 노래, 부활의 노래를 풀어 이 땅에 떨구고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는 가곡 ‘추억’ ‘동백꽃’ ‘그 창가에’ ‘또 하나 다른 세계’ ‘동해’ ‘갈매기’를 우리들 가슴에 아름답게 숨겨두고간 민족작곡가의 흔적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