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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으로부터, 결국, 그후가 있는 삶
“자신을 위해 올바른 이름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2권, 237쪽)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게 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이 이름의 있고 없음’도 작용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속 인물들은 이름이 특별하다. 이름은 반복되고, 꼭 도플갱어같고, 또 그들의 이름이 바꿔진다. 이렇게 이름의 이동한다. 다른 이름이 되어버리고, 그리고 또 이름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다른 이름을 갖게도 되고, 이름이 없는 채로 살아간다. 실체가 사라지는 것만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 이름은 잘도 사라지고, 잘도 지어진다. 이름은 자신도 모르는 정체성이다. 그런데 이름을 발견하고, 이름을 잃어버리고 다시 찾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다. 하여 변신이 가능한 세상을 열어둔다. 이름에서 이름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다른 존재로 변화시키는 그 능력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세계에는 있다. 변화, 변신의 바람이 있다. 여기에서 이름이란 정체성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름이 바꿔지면서, 하나의 존재는 상실되고,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면서 다른 하나의 존재는 생성된다. 어떤 무엇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버리는 경험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는 등장한다. 쉽게 말하는 무無는 없음이 아니고,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서 무無/공空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이 여럿이라면, 이름이 변화한다면, 그건 또한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존재는 이렇게 이름의 유무로 인해서, 있어지고 없어지고, 변화한다. 내가 변하는 게 아니라, 이름이 바뀌고, 주변의 바뀌는, 그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수동성의 진실이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조용히 받아들이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나갔다. 그것도 그가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게 만든 요인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4권, 80 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는 최선이란 단어가 무척이나 낯설다. 무슨 일이든 다만 하고 싶어서 할 뿐, 하다보니 가능해지더라, 길이 보일 뿐이다. 더불어 얘기들은 오래된 얘기처럼, 낯선 꿈처럼 늘 기묘하다. 기묘한 이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기담과 (무)의식세계이다.
<태엽감는 새>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이 작품도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상실/망각과 찾음/각성에 관한 기묘한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외삼촌이 오카다 도루에게 얘기해준 애기처럼, 뭘 모르겠으면 가만히 지켜보라고 하는데, 가만히 지켜보면, 기다리다보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오카다 도루의 변화가 전개되는 소설이다. 돈이 없으면 돈이 구해질 일이 찾아오게 되고, 사람을 찾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사람을 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사람 사는 곳이 어디 동화 나라 세상이기에, 마음 먹은대로 다 이뤄지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 뭐든 마음대로 가능한 세상이란 유토피아가 아닐까?
여기에서 갖는다/찾는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닌 다른 이의 것을 찾는 게 아니다. 원래 제 자리에 있어야 했던 내 것, 내 자리를 찾는 것이다. 나를 아는 것이다. 나란 이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에 있어야하는지, 무얼 잃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언제나 이렇게 되돌아옴이다. 그 돌아옴은 사실상 찾음이다. 소설 속에서 누군가를 없애고 싶으면, 누군가를 없앨 때라고 생각하면, 그 때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기다려라, (그 문이 열릴 문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열릴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라, 는 것이다.
“흐름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 하지만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려야 한다고. 그동안은 죽은 셈치면 돼.”( 1권, 99쪽)
자신을 지키는 마음을 가져라, 그 마음이 온전히 비워지지 않는다면, 삶은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주문과도 같은 말들이 <태엽감는 새>에서도 여전하다. 혹시나 마음이 비워져버렸다면, 너는 다른 네가 될 것이다.
<태엽감는 새>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품을 통해 가르쳐준대로 가만히 그대로 내버려두면서 생각해본다. 시작과 끝을 통해서 어떤 얘기들이 들려지고 흘러갔는지 읽혀졌는지를 들어본다. 바람의 노래처럼, 어떤 소리가 없을 때가 많은데...바람의 노래는 몸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느낌으로 듣는다. 있는지는 모르지만, 관통하는 무엇이 단순해지길 기다려본다.
법률사무소에서 심부름꾼 역할이나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느냐며 회사를 그만한 오카다 도루는 아내 오카다 구미코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기르던 고양이(애칭:와타야 노부루)가 사라진 것이다. 고양이란 불안한 (여인의) 마음을 상징한다. 고양이가 집을 나가버리더니, 얼마후 아내 구미코가 집을 나가버린다. 고양이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사랑하게 되어 두 사람이 공동 생활을 함께 했던 구미코가 사라진 데는 뭔지는 모르지만 분명 이유가 있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구미코가 사라진 이유를 오카다 도루는 알지 못한다. 어디로 갔는지, 왜 갔는지, 다시 만날 수나 있을지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때면 질문한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1권, 51쪽)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러나 이런 대답이 준비돼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아버지의 설교에서 들려 소리,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할 수는 있다, 라고. 그렇다. 그렇게 오카다 도루 역시 구미코를 찾는다.
아내가 집을 나갔고, 이어서 더욱더 이해할 수 없는 구미코의 편지가 도착하는데, 그 내용은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혼다씨의 유품을 전하러 온 마미야씨의 방문을 받는다. 유품을 전달하면서, 마미야 중위는 태평양전쟁 때 만주에 갔던 때의 얘기를 들려준다. 우물에 관한 얘기이다. 생을 바꿔버린 얘기라고 할 수 있다. 꼭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어찌됐든 그 얘기로부터 오카다 도루는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곳에 있는 우물을 찾아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밖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부를 파고들어가 길을 찾는 과정으로 우물이다. <태엽감는 새>에서 우물은 그렇게 자신을 온전히 바꿀 수도 있고, 자신을 온전히 찾을 수도 있는 공간이 된다.
이유모를 (음란성) 전화에서 시작한 <태엽감는 새>는 끊임없이 성이라는 유희/고통을 반복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러 소설에서 몸을 파는 매춘녀들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 역시나 등장한다. 이 여인들은 실제로 몸을 있는 여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들의 몸이란 실제 있는 몸이라기보다는 상상되는 몸이기도 한다. 다만 상상되건, 실제하건, 그 몸들은 다른 몸으로 인해 변화할 수도 있는 사건을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한 남자의 상상 속에 가능한 여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와도 부분 상통해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존재하게만 한 그 여성들은 성행위를 통해서 한 개인이 파멸되기도 하고, 다시 새로이 시작하게도 된다. 와타야 노보루와 가노 구레타의 성행위는 가노 구레타를 완전히 파괴해버린다. 그런 가노 구레타는 오카다 도루와의 소통/오고감을 통해서 다른 길이 열리게 된다. 이렇듯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성행위는 자본에 의해 교환되는 상품으로 전락된 현실을 보게도 하지만, 몸을 통해 마음의 상처가 위로되는 사례를 생각해보게도 한다. 그냥 가만히 안아주고, 그냥 가만히 옆에서 껴안아주고...그런 행위. 손 잡아주는 것보다 뭔가가 더 교류되는 느낌, 몸으로도 가능하지 않느냐고 하는데...동감이 된다. 물론 전제조건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 공격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행위란 분명 폭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성행위가 치유할 수 없는 폭력이 된다는 걸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주 반복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하게 위해 필요없는 걸 상상하게 한다고, 굳이 필요하지 않는 걸 말함으로서 다시 또 상기되는 필요악이란 생각도 한다. 성매매, 성폭력처럼 자극적이지 않는 방식을 선택할 수는 없었을까 싶은 것이다.
간단히 내용을 말하려던 게 또 어디론가 만들어진 지류를을 따라 흘러가려고 한다. 구미코가 집을 나갔는데, 그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카다 도루 자신이 몰라서 그렇지,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단순히 다른 남자와의 불륜으로 인해 집에 나갔고, 자신의 모든 물품을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제껏 자신이 살아왔던 어떤 근거를 온전히 버림으로써, 구미코는 다른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아니 다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집을 나간 구미코를 찾게 되는데, 그 찾는 과정 역시나 기이하다. 우물 속에서 의식세계에서만 가능하 듯, 호텔로 와카다 도루는 공간이동을 한다. 그리고는 구미코를 만나고, 구미코가 왜 그런 일을 하게 됐는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듣는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는 <태엽감는 새> 내용이다.
<태엽감는 새>는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사랑하게 된 남녀가 함께 생활했던 고양이가 먼저 가출하더니, 그후 아내 구미코의 가출하게 된다. 그렇게 가출이라는 것에서 상실이 따라오고, 상실에서 지켜야할 것이 따라오고, 가야할 게 따라온다. 저절로, 저절로. 하나하나. 이처럼 상실될 것이 있고 지켜야할 것인 있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구미코가 집을 나갈 시점에 그를 찾아온 여인들은 여럿이다. 그들은 모두 기묘한 이력을 지닌 여인들이다.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있는 여인,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는 가노 마루타, 그녀의 동생 가로 구레타,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걸고 그에게 편지를 쓰는 열여섯의 소녀 가사하라 메이가 그들이다. 그들을 만나면서 시작한 시간은 한 개인의 상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도 흘러간다. 그 와중 우물을 찾아 내려가는 어이없는 마음을 갖게 되고, 그 마음을 의지화한다. 그는 심령치료사 아카사카 너트메그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의 아들 시나몬을 알게 되고, 시나몬의 컴퓨터를 통해 ‘태엽감는 새의 연대기‘ 1-17까지의 연대기 중 하나를 읽는다. 그리고 결국 구미코가 왜 집을 나가게 됐는지를 알게 된다. 구미코가 오카다 도루를 떠난 건, 바로 그때 악의 단절/처단이 필요한 됨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물 속에 들어갔다가, 구미코가 있는 호텔 208호를 찾아가게 되고, 어느날 생긴 푸른반점이 칼로 도려내지는 경험을 한다.
여러가지 기묘한 얘기들을 길게 들려주는 가운데 진행되어왔던 <태엽감는 새>는 결국 오카다 도루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를 상기시키면서 끝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태엽감는 새님은 또다시 구미코 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겠군요? 그 집에서 말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다고 해도 될까요?”
가사하라 메이가 말했다. 나도 하얀 숨을 공중에 크게 내뱉었다.
“글세, 우리는 결국 이렇게 되도록 일을 몰아온 걸 거야.”( 4권 251쪽)
간단하게 보면 오카다 도루와 오카다 구미코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생각하면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뭔지 모를 무엇이 그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을 방해하기 시작한 걸 구미코가 감지한 것이다. 구미코는 그걸 느끼고서 사라진 뒤 자신이 할 바를 한다. 그리고 오카다 도루를 구미코의 사라짐을 통해서 자신을 알아가고 찾게 된다는 내용이 바로 <태엽감는 새>의 내용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는 늘 변화를 꿈꾸는 개인의 정신세계이지만, 그에게는 외부란 늘 아련하게 있다. 그 외부가 이번에는 가사하라 메이를 통해 들려진다.
“아저씨는 ‘외부’에서 만들어진 거예요.”(2권, 153쪽)
이런 말이 나오기 까지는 자신을 만들자고 생각했던 구미코와의 결혼 초를 얘기하면서이다. 그는 태엽감는 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태엽 감는 새는 실존하는 새요. 어떻게 생겼는지는 나도 잘 모르오. 나는 실제로 그 새를 본 적은 없으니까. 소리만 들었을 뿐이오. 태엽 감는 새는 주변의 나뭇가지 위에 앉아 조금씩 세계의 태엽을 감는 거요. 끼이이이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태엽을 감소. 태엽 감는 새가 태엽을 감지 않으면 세계는 움직이지 않아요.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훌륭하고 복잡하고 거대한 장치가 빈틈없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그렇지 않소. 사실은 태엽 감는 새가 여러 장소로 가, 가는 곳곳마다에서 조금씩 조그마한 태엽을 감아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거요. 그것은 장남감에 붙어 있는 것 같은 간단한 태엽이오. 그저 그 태엽을 감으면 되오. 하지만 그 태엽은 태엽감는 새밖에 보지 못한다오.”( 2권, 238쪽)
이렇듯 생각하는 오카다 도루이기에 그는 문제에 직면하면 우물을 찾는 것이다.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서도 나는 결정되기도 하지만, 내 안의 아주 자그마한 씨앗(태엽감는 소리)에 의해서도 나는 결정될 수도 있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읽혀지는 것일 것이다. 마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보여주는 알을 깨고 나오기 전의 세계로서 말이다. 그렇게 내부로 내부로 침잠하는 오카다 도루가 있다면 이동하는 오카다 도루도 있다. <태엽감는 새>에서 들려지는 얘기들은 사실상 믿기 어려운 일들이다. 하여 ‘해리‘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일 것이다. 분열된 주체의 문제, 쉽지 않다. 그에게 우물은 완벽한 어둠이다. 그 속에서 생각을 들어보자.
“나는 그 완벽한 어둠의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무(無)’뿐이었다. 나는 ‘무’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나의 심장 소리에 혈액이 체내를 순환하는 소리, 폐가 풀무질하듯 수축하는 소리, 그리고 미끈미끈한 내장이 먹을 것을 찾아 몸을 비비꼬는 소리를 들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는 모든 움직임이, 모든 진동이 부자연스럽게 확장되어 있었다. 이것이 나의 육체인 것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그것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몸뚱이였다.
그리고 또한 조금씩 나의 의식은 육체에서 빠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자신이 태엽 감는 새가 되어 여름 하늘을 날아, 어딘가의 커다란 나뭇가지에 앉아서 세상의 태엽을 감는 모습을 상상했다.
태엽 감는 새가 만약 정말로 없어졌다면 누군가가 태엽 감는 새의 역할을 계승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누군가 태엽 감는 새 대신 세상의 태엽을 감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의 태엽은 점점 풀려서 그 정교하고 묘한 시스템도 이윽고는 완전히 움직임을 정지해 버리게 된다. 그렇지만 태엽 감는 새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나 이외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2권 144-145쪽)
개인/나의 문제들이 가득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다. 그렇게 생각된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늘 세계를 얘기한다. 음악, 상품, 작품을 통해서 말이다. <태엽감는 새> 역시나 그렇다. 내가 악한 게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무엇, 와타루 노부루로 대표되는 이들, 껍질 벗기는 러시아인 보리스, 무자비하게 동물을 살상하는 이들이야말로 세계의 악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안다. 악한 사람에게도 선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악이란 게 악만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그런데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절대악으로 그들을 그려놓는다. 그래야만 그 악을 온 맘으로 공격하여 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혹여 선한 구석이 있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존재하게 된다면, 그 악을 사멸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악은 절대적인 악이다. 이에 대해서 예전에는 반감을 가지고 의문했었다. 과연 그들이 절대악 대 절대선으로 존재할까를 말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나-절대선'이고, 보이지 않게 조종하는 누군가는 절대악인가? ' 하고 말이다.
이번에 <태엽감는 새>를 읽으며 생각을 바꾼다. 그건 정말로 절대악/절대선이 아니라, 어떤 행위가 이뤄질 때의 마음상태는 그렇다는 것으로. 부정/죽인다는 마음이 극에 이른 마음일 때, 바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니까. 다시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아닐지 모르지만, 반대하는 행위를 할 때 인간은 맘은 절대적이라고 말이다.
특이하게도 하루키의 소설에는 몸은 있지만, 먹고 살아가야하는 삶, 노동하는 몸은 없다. 노동마저도 즐기는/쉬어가는 이들이다. 카페를 하고, 사업을 하고, 놀고, 지켜보고, 어디론가 떠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상은 고된 노동은 없다. 그 노동없는 세상이란, 어쩌면 언젠가 가능할 유토피아일 수도 있겠다. 상처받고도 아무렇지 않게 회복되는 세상이란 역시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겠다. 소설 속 그들은 아이가 아닌데도, 여전히 꿈꾸고 생각하기만 한다. 생각은 때론 치명적인 현실로 호환된다. 믿을 수 없게도 말이다. 기묘하게 말이다. 소설 속 그들은 생각만이 있다. 생각만이 있으면 된다. 노동이 힘들지 않는 이들로 얼핏, 얼마 지나지 않은 미래에 가능할 기계(로봇)를 생각하게 되는데...느끼는 꿈처럼, 사랑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는 기계라면, 그 기계는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려낸 인물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치명적인 생각까지 가능한, 그런 존재로 말이다. 이렇듯 인간의 정신을 얘기하는 듯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어쩌면 생각만 하는 기계들의 세계같다. 연계는 없고, 다만 조립되고 해체되고 기다리고 생각하는,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걸 받아들이는, 그런 존재들이다. 소설 속에 현실 속 세상이 등장해도, 악이 지배하는 세상을 구하려는 인물들이 보여도, 왠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려내는 세상은 절대적이다.
그들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는 없어 보인다. 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난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꿈인지,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 알 수 있는 어떤 척도가 없어 보인다. 과거는 미래화되지 못한다면, 그건 단지 생각 덩어리일뿐이다. 신조차도 바꿀 수 없는 과거지만, 인간이 경험으로 가능한 과거는 미래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게 오판이고 실패가 되는 삶일지라도.
물론 생의 지향이 아닌, 생의 진실은 뭐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그에 대해서, 나는 확실하게 답할 수 없다. 어쩌면 삶이란 대개 능동적 지향이라기보다는, 수동적 지향에 진실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인간이 산다고 느끼는 현재란 이미 지나와 버렸고, 언제까지나 바라는/욕망하는, 끝없을 사유의 흐름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있어서 하나의 특징을 <태엽감는 새>를 읽고 난 뒤 나는 생각한다, 깨닫는다. 그건 무라카미 하루키는 바로 실패로서 가능한 문학이 아니라, 성공으로 가능한 문학세계를 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울지만, 다시 돌아오지만, 혼자서 오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궁극적으로 실패한 게 아니다. 그들은 잃은 게 무엇인지를 아는 이룬 삶을 산 것이다. 누가 죽어야한다고 생각했으면 그들은 모두 죽었고,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소설 속 화자는 일이 저절로 되었다. 그리고서 화자는 자기 길을 (되돌아) 간다. 그게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의 공통점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면서, 아마도 그래서 이런 결말은 인간의 실제적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것이 진실일까? 물론 가능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다만 생각이 곧바로 되지 않는다.
무라키미 하루키가 그리고 있는 소설세계는 결국 무엇이든 가능한 유토피아? 아니 무엇이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후가 있는 삶이다. 분명 뭔가를 잃었지만 가야될 길을 가는 삶으로, 선한 의지를 지닌 존재들의 사유로 가능한 무한한 세계.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작품을 거부감이 조금 없게 읽게 될 것 같다. 왜 읽게 되는가를 생각하다가, 왜 부인하는가 대한 생각을 좇아가다가, 몇마디 써봤다. 그렇다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을 때 꼭 좋아해서 읽는 것만은 아니다, 다만 읽는다. 어떤 장점이 있고, 무엇이 있어 읽는다. 어떤 이유로 부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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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글은 지난 5월 29일 쓴 글입니다.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있어, 카페 올리기를 미뤘는데... 이번주 화요논평은 한살림님 다음이 소조님이라고 생각하신 로쟈님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먼저 올려도 좋을 것 같다는 로쟈님의 말에, 제가 사이에 올리게 됐습니다.
하여 소조님께 부탁드립니다. 이번처럼 소조님이 먼저 하셨을 경우, 카페 대문에는 엄연히 써졌지만 원래 무심히 지나다니는 통로만일 수도 있으니, 혹 기존의 순서와 바뀐 경우는 그 해당자에게 메일/쪽지를 보내는 센스가 있으면 안될까요? 다음달 순서의 경우, 제가 먼저 했으니, 아자비 님 다음에는 토마토님이 되는 것도 역시나 카페 대문에 알려주시겠지만, (많이 바쁜 줄 알지만) 거기에 1분이면 가능한 알림을 해주시면 좋겠다 는 마음을 갖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감는 새>(1~4권), 윤성원 옮김, 문학사상사
---2007년 5월 29일
첫댓글 흠, 순서가 그럼 어떻게 되는건지...헷갈리는군요. 게시판 꼭대기에 있는 논평자순서에는 아예 카페에서 빠지신 분들도 여전히 남아있고, 실지로 글을 올리신 분들의 순서를 봐도 잘 모르겠구요. 곧 한국에 들어가고 또 가자마자 주말-화요일까지는 일본에 가게 될 것 같아서 제 순서가 걱정이 되는데, 누가 교통정리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흠 순서, 정말로 헷갈리세요?...설마.^^ 이렇게 순서가 됩니다. 예정된 순서( 로쟈님-K님-아자비님-폭주기관차-토마토님-한살림님-소조님)가 이번에는 아마도 이렇게 될 것 습니다. 로쟈님-K님-아자비님-토마토님...,이렇게요. 아자비님은 그대로이고, 제가 토마토님에게만 알려드리면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저로 인해 순서가 바뀌어서요. 물론 순서가 그대로 진행된다면요. 소조님이 새로운 달이 되면 카페 대문에 이달의 책읽기 순서와 함께 다음 순서들을 기재하고 있습니다. 저만 보이는 게 아닐겁니다. 아자비님도 보이시죠?... 그걸 보시면서 날짜 계획을 세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소조님이 순서를 잘 파악하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각기 상황이 다른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올리는 화요논평이다보니, 변동되거나 미뤄지는 일은 간혹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서로 양해하면서, 얘기하면서 가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헷갈렸던 것 맞습니다. 아직 다음달 순서가 안올라온 상황이기도 했구요. 이젠 아닙니다. ^^ 그런데 제가 걱정했던 순서이긴 하네요. 음, 혹시 제가 7월 31일에 쓸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그 전에는 시간이 안 될 것 같습니다. (한 주 당기면 비행기 안에 있을테고 미루면 지방에 가 있을 가능성이...) 이 질문은 현 순번을 볼 때, 토마토님과 다른 논평자분들께 드리는 부탁이 될 것 같습니다. 안된다면 음...어떻게 해봐야죠...^^
예상되는 순, '로쟈님-K님-아자비님-토마토'에 의하면 저는 7월24일 순번이 되는군요. 17일로 제 순번을 당기든지 다른 논평자가 그러하든지 한 명이 순번을 당기면 ahjabie님께서 편안히 일을 보실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토마토님이 순번 (17일)을 당기고 제가 다음 (24일)에 쓰면 ahjabie님이 31일에 글을 쓰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지금 감사하다고 말씀드려도 되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두 분, 감사드립니다.
소조님께서 한 주를 더 보태어 주셨군요 (대문게시판 순서표 참조). 한살림님 소조님 감사드립니다. ahjabie님께서는 8월 화요논평을 여시면 될 것 같네요. 편히 다녀오십시오. / 폭주기관차님, 아이디 '태엽감는 새님,' 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