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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HOP 사도적 기도의 집 원문보기 글쓴이: Lion 형제
역대기 속에서의 기도
송병현(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
들어가는 말
역대기는 중간사(intertestamental period) 시대의 시작을 눈앞에 두었던 때에 저작된 것으로서 구약의 다른 책들에서 발견되는 주요 테마와 신학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의 가장 마지막 책으로서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미래를 기대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데브리스(Simon DeVries)는 역대기에 대하여 “나는 역대기가 성경의 책들 중 가장 훌륭한 영적 광산(鑛山)(spiritual mine)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자들의 역대기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지난 2000년 동안 학자들이 역대기를 일종의 “2등급 정경”으로 간주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역대기 사가가 저술하고 있는 내용이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대부분 성경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비롯된 편견이었다. 결과적으로 역대기는 구약에서 가장 연구되지 않은 책들 중 하나가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포로후기 시대에 예루살렘에 형성된 공동체의 신학을 반영하는 데 있어서 역대기의 중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논할 수 있다. 첫째, 통치적 권력이 다윗의 후손을 중심으로 한 왕권에서 공동체에게 전수되어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제사장의 역할이 매우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성전이 이스라엘 예배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성전을 초월하는 신앙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형식을 초월한 예배의 본질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기도의 위치가 높이 부각되고 있다. 저자는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주요 순간들을 리더들의 기도로 장식하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추구하는 영성을 이 기도문들을 통하여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즉, 역대기 기자에게 있어서 기도는 가장 소중하고 힘이 있는 영적 매체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역대기 안에서 기도와 예배에 깊이 연관된 개념인 “참 이스라엘”을 간단히 정리하고 책의 주요 기도문들의 구조와 내용을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이 기도들이 역대기 저자가 추구하는 영성을 구상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하는 가와 이 내용들을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참 이스라엘 공동체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온 인류의 역사의 주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역대기 저자는 미래에 대하여 매우 낙관적이었다. 포로가 되어 타국으로 끌려가기 전 이스라엘은 예식과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들은 제사와 성전에 마치 부적과 같은 힘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역대기 저자도 성전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의식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파괴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성전재건을 통하여 연결하려 했던 것이지 결코 성전 자체가 어떠한 신비력을 지녔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저자는 성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기도의 힘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역대기는 구약의 역사서들 중 그 어느 책보다도 기도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다. 진정한 영성은 기도와 같이 비제도화 된 종교성에 있지 결코 눈에 보이는 예식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예배와 기도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온 이스라엘”이란 표현을 매우 자주 사용한다. 심지어는 북 왕국이 멸망한 후에도 이 말을 사용한다. 저자의 이러한 처사는 그의 진정한 이스라엘 공통체 형성의 정체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범위는 지리적으로 제한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숫자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을 때, 그 모임은 “온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특히 저자가 마지막으로 기록하고 있는 고레스 왕의 종교자유 선포배경을 살펴보면 저자는 그를 마치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viz., 진정한 이스라엘의 한 백성)처럼 묘사하고 있다(cf. 대하36:22-23).
저자의 이러한 관점은 매우 포괄적이며, 온 세상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듯하다. 특히 그의 계보정리가 인류의 첫 인간 아담에게서 시작되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있는 세대에서 끝이 나고 있는 것은 그가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는 가를 암시하는 듯하다. 성전 재건은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의 지속(extension)이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의 성전은 온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를 알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그의 세계관은 매우 넓은 것이다.
저자의 세계관이 매우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참 이스라엘이 될 수는 없다. 그에 의하면 누구든지 주의 백성이 되려면 무형(無形)적인 속성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올바른 마음자세와 기도로 무장된 영성을 일컫는다. 물론 마음자세와 기도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한다. 다음 사항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마음”이란 단어는 구약에서 850회 사용되는 비교적 흔한 단어이다. 역대기에는 이 단어가 63회 사용된다. 저자는 이 “마음”이란 단어의 광범위한 사용을 통하여 자신의 작품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출처인 열왕기로부터 구분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역대기 내용의 반 이상이 열왕기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란 단어는 역대기가 열왕기를 인용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곳에서는 고작 3차례만이 발견된다. 나머지 60회는 저자의 독창적인 사용인 것이다. 특히 저자는 “온전한 마음”/“온 마음을 다하여”라는 표현을 역대기 안에서 21차례나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에 따라서 “마음자세는 역대기의 한 테마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Braun).
열왕기 저자에 의하여 이스라엘 역사의 “전무후무한 자,” 유다의 가장 위대한 왕들에 속하는 자로 평가 받았던 히스기야 이야기(왕하16-20)는 역대기에도 대부분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대하29-32). 역대기 기자는 자신이 열왕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새로이 구성한 이 히스기야 이야기에서 “마음”이란 단어를 11차례 사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11차례 모두 열왕기의 히스기야에 대한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대하29:10, 31, 34; 30:12, 19, 22; 31:21; 32:6, 25, 26, 31). 우리는 올바른 마음자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마음을 귀하게 여기시지만 교만한 마음은 결코 환영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또한 기도생활에 있어서도 적절한 마음자세가 결정적이라는 것도 의심치 않는다. 저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믿음이 좋았던 왕으로 길이 빛나는 히스기야 왕의 일생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온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바라보았고 동일한 마음으로 그에게 기도했는 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히스기야는 역대기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참 이스라엘인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주요 기도
이미 참 이스라엘인은 올바른 마음자세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며 그가 여호와를 바라는 과정에서 기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저자는 이러한 기도의 기능을 “기도”/“기도하다”라는 단어를 29차례나 사용함으로써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어떻게 기도해야 한단 말인가? 역대기 저자는 자신의 저서 안에 다섯 개의 주요기도문을 수록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다섯 기도의 공통점은 모두 다 저자에 의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왕들에 의하여 드려졌다는 점이다. 기도문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다윗이 놀라운 축복을 받고 드린 기도(대상17:16-27)
다윗은 자신의 정권이 안정을 찾아가자 여호와를 위하여 집을 짓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제안을 거부하시고 오히려 그를 위하여 영원한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바로 일명 “다윗언약”이다(cf. 삼하7).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포하신 이 언약이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감격한 나머지 떨리는 마음으로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다윗이 얼마나 감격했는 가는 10여 절에 달하는 본문에서 여호와를 부르는 호소(invocation)(예, “오 여호와여!”)가 10차례나 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우리말 성경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히브리어 텍스트에서는 이 기도문이 다윗이 말한 것이지만 기도의 초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께 맞추어져 있다. 히브리어 텍스트에 의하면 그는 기도문 안에서 “나”라는 단어를 시작할 때만 사용한다(16절). 그러고 난 다음에는 자신을 언급할 때 3인칭(18절), 혹은 2인칭 접미사를 사용한다(예, “당신의 종”)(25절). 특히 하나님을 염두에 둔 2인칭 소유격 접미사는 20차례 이상이나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전형적인 감사의 기도나 여호와를 찬양하고 그분에게 새 노래를 부르라는 권면적 기도가 아니라 매우 신중하고 엄숙한 기도이다. 기도를 드리는 그의 자세를 살펴보면 일생동안 이 순간만큼 그가 진실했고 겸손했던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백을 하고 있다.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무한하심을 결코 감당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기도를 시작하다가 끝에 가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맞추어나가겠다는 각오로 기도를 마치고 있다. 이 기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인정하는 고백(16-22절); (2)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이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간구(23-24절); (3)처음 두 섹션의 요약(25-27절).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인정하는 고백(16-22절). 그와 그의 자손이 여호와 앞에서 영원히 주의 백성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받은 다윗은 제일 먼저 자기는 결코 이러한 은총을 입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함으로써 기도를 시작한다(16-19절). 옛적에 나발이란 사람이 “다윗이 누구냐?”라고 빈정댔을 때 자존심이 상한 다윗은 그를 죽이려 했다(삼상25). 아마 이 순간에도 만일 누가 다윗의 대인관계에 있어서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하염없이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만큼은 이것이 전적으로 사실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제가 무엇이기에, 저의 집안이 무엇이기에… 개만도 못한 저를 생각하시어…”(16, 19절). 그는 이 은혜가 오직 여호와의 선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섹션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성호를 여섯 차례나 부르고 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다윗과 그의 후손들에 대한 일만은 아니다. 범 우주적이며 특히 범 국가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본문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삼하7:18에 수록된 기도문에 의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주 여호와”라고 부르지만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을 두 차례나 “여호와 하나님”(16, 17절)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여호와 하나님”은 곧 창세기2-3장에서 하나님의 세상 창조사역과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이 축복이 “먼 훗날”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고백하는 것(17절) 역시 이 약속의 범 우주적인 효력을 암시하고 있다(Johnstone). 다윗에게 임한 축복이 온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앞으로 그의 집안이 영원토록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가장 잘 요약하는 예로 자신과 사울의 개인적인 갈등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과 축복이 아니라 국가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 중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던 출애굽 사건을 들고 있다. 저자는 다윗에게 임한 하나님의 축복을 우주적이고 국가적인 감사의 사례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이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간구(23-24절).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루셨던 놀라운 역사를 찬양한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 있는 사역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을 간구한다. 특별히 한 예로 그와 그의 집안에 허락하신 약속이 꼭 지켜질 것을 호소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지 않으시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에서 비롯되는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동안 약속하셨던 모든 것을 다 지키심으로 자신의 신실하심을 온 세상에 드러냈던 그 역사가 이번 약속에서도 변함없이 지속될 것임을 확신하는 간구이다.
처음 두 섹션의 요약(25-27절).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마무리 하면서 이러한 간구를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축복을 내리셨기 때문에 그분의 신실함을 믿고 그 축복이 실현되기를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지속되기를 바라며 내려주시는 축복을 영원토록 감사하며 누리겠다는 고백이다.
다윗언약은 역대기 저자에게 포로후기 시대의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성립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접어두고 다윗이 언약을 하사 받은 이후에 드린 이 기도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저자는 다윗의 기도를 통해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가면을 벗고 진실로 겸손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는 개만도 못한 존재입니다”를 서슴없이 고백했던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하나님께 기도함에 있어서 과거에 내려주신 축복과 은혜를 회상하고 기념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다윗은 출애굽이 있은 지 몇백 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그 사건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당연한 의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에 순종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에게 이 사건을 자손대대로 두루두루 기념하기를 명령하셨던 것이다. 저자는 또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즐길 것이 아니라 온 공동체가 함께 기뻐하고 즐길 일임을 시사하고 있다. 기도의 응답 역시 공동체가 함께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 저자의 관점인 듯하다.
다윗이 헌물을 드리며 드린 기도(대상29:10-19)
나단을 통하여 자신은 결코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할 수 없다는 말씀을 선포 받은 다윗은 그 이후 열심히 재산을 모았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비용을 마련한 것이었다. 드디어 인생의 모든 여정을 마친 다윗은 죽음에 임박하여 그 동안 모은 모든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며 백성들 중 뜻이 있는 자들도 함께 동참할 것을 권고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제안을 선하게 받아들여 하나님께 엄청난 물질을 기쁜 마음으로 드렸다. 백성들의 헌물에 감격한 다윗이 온 회중 앞에 드렸던 기도가 바로 본문이다. 저자는 이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마저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모든”(히, 콜)이란 단어를 10차례나 사용하고 있다(Japhet). 그리고 그는 또한 그와 더불어서 헌물이 결코 마음의 청결함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이 기도 역시 세 섹션으로 구분된다: (1)찬양(10-12절); (2)감사(13-17절); (3)간구(18-19절).
다윗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다(10-12절). 저자는 여호와께서 옛적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해 오시면서 주의 백성들의 끊임없는 찬송을 받으셨으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이들의 찬송이 끊이지 않기를 노래하고 있다(10절). 그 다음 저자는 비슷한 의미의 여러 단어를 연쇄적으로 사용하며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가를 노래한다: “위대하시고, 능력이 있으시고, 존귀하시고, 빛난 영화”의 하나님(11a절).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는데 있어서 한계를 느끼는 듯하다. 여호와는 또한 온 세상에 군림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으로서 이 세상 모든 것이 그의 소유이므로 그분이 허락하셔야만 사람이 명예를 얻고 부를 누릴 수 있다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있다(11b-12절). 다윗은 우리가 누리는 모든 부귀영화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시인함으로써 여호와만이 우리가 체험하는 축복의 근원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감사의 표현으로 이어간다(13-17절). 다윗은 이미 그가 누리고 소유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잠시 보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재산의 일부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데 사용될 수 있도록 들여놓게 된 것에 대하여 감격하고 있다(16절). 그는 하나님께 헌물하는 것을 커다란 특권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어떻게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그의 논리는 간단하다. 마치 땅 위를 스쳐가는 그림자처럼 소망 없이 떠돌던, 보잘것없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오늘 그가 누리는 것이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며 이 축복의 일부를 그의 모든 재산의 주인이신 여호와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영광스럽다는 것이다(17절). 뿐만 아니라 그는 재물을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마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14절). 그는 헌물을 준비해 주신 분도, 그 헌물을 기쁘게 드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신 분도 바로 여호와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건에서 어찌 드리는 자가 드리며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다윗은 간절한 마음으로 두 가지를 구하며 기도를 마무리하고 있다(18-19절). 첫째, 그는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특권인가를 항상 깨닫고 마음속에 간직하며 감사히 드릴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헌물을 통하여 드려지는 신앙의 고백이 끊이지 않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솔로몬이 오늘 다윗과 백성들이 드리는 재물을 가지고 성전을 성공적으로 완성할 수 있도록 모든 과정을 보살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다윗은 헌물을 드리며 그 대가로 영적인 축복을 바랄 뿐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있다. 다윗에 의하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이 그분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기도는 성경의 물질관이 어떤 것인가를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주의 백성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헌물은 우리의 소유의 일부를 하나님께 선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것을 그분께 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하다. 헌물하는 자는 하나님의 것이 주인께 되돌아가는 과정의 한 부분을 장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니 감격할 수밖에 없다. 저자에 의하면 기쁨과 감격은 헌물을 드리는 자의 올바른 마음자세일 뿐만 아니라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마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드려지는 헌물은 기쁨과 감격이 동반되는 것이다.
솔로몬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기도(대하6:12-42)
아버지 다윗의 숙원 사업이었던 성전을 7년 동안 건축하여 헌당하는 예배에서 드렸던 솔로몬의 기도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함께 모여 이 역사적인 사업에 종지부를 찍고 있다. 성전의 화려함과 건축과정에서 쏟은 정성과 심혈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겸손하게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이 기도는 (1)찬양(14-15절); (2)다윗언약을 이행해 달라는 간구(16-17절); (3)백성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호소(18-40절); (4)하나님께서 성전에 거하시면서 주의 백성들을 보살펴 달라는 부탁(41-42)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도의 분량이 너무 방대하므로 여기서는 중심 테마인 하나님의 임재와 성전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이해만 간략하게 요약하고자 한다.
솔로몬은 화려한 성전을 지어 여호와께 헌당하면서도 성전이 결코 하나님의 거처지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21절). 비록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실 만한 곳은 결코 될 수 없을지라도, 성전은 하나님께서 이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는 곳이기에 솔로몬은 이러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방인들의 땅으로 끌려가게 되더라도 그들이 그 땅에서 뉘우치고 이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을 호소하고 있다(36-39절).
솔로몬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떠한 공간에도 제한될 수 없는 자유로운 분이시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1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성전을 하나님의 거처지라 말하고 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25:8).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솔로몬은 자신이 건축한 성전의 압도적인 화려함과 웅장함에도 불구하고 이 성전은 결코 하나님의 거처지가 되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전을 하나님의 처소라고 부르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께서 쉬실 곳으로 드시옵소서”(41절). 성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였던 것이다.
저자는 성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처소로서 독특한 위치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처소가 하나님의 주거지는 아니다. 하나님의 주거지는 하늘이며 성전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들을 만나주시는 곳이다. 즉, 성전 자체에 어떠한 신비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그 곳에 거하는 한에서 특별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성전을 헌당하면서도 하나님께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늘에서 들으시고”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구원과 인도가 백성들에게 임하는 것은 성전 때문이 아니라 기도 때문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두드리는 것이지 결코 성전에 이러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호사밧이 위기에 처했을 때 드렸던 기도(대하20:5-12)
지금까지 살펴본 역대기의 기도문들은 모두 좋은 일이 있을 때 드렸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 기도는 여호사밧이 적군의 침략을 받아 국가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압과 암몬이 중심을 이룬 대군이 유다를 침략했다.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의식한 여호사밧이 전 국민에게 금식을 선포했다. 금식은 인간의 무능함을 시인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 다음 그는 그와 한 마음이 되어있는 유다 백성들을 이끌고 성전을 찾아가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며 기도했다. 두 가지의 대조에—막강한 힘을 가진 의롭지 못한 침략군과 연약하지만 의로운 이스라엘, 힘없는 인간의 호소와 전능하신 여호와에—바탕을 둔 기도는 하나님의 자비나 친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justice)를 요구하고 있다. 이 기도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탄원의 신학적인 근거(6-9절); (2)당면하고 있는 위기(10-11절); (2)여호와의 개입에 대한 호소(12절).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회고함으로써 기도를 시작하고 있다(6-9절). 그분은 하늘에 거하시면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누구도 그의 권능에 도전할 수 없는 위대한 분이시다(6-7절). 이런 놀라운 권능의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몰아내고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8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 성전을 건축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곳을 찾아 그들에게 땅을 선물로 주신 능력의 하나님께 간구하기로 다짐했다. 흥미로운 것은 솔로몬은 헌당기도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기도를 “하늘에서 들으시고”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함으로써 성전이 결코 하나님의 거처지가 될 수 없음을 역설한 반면, 여호사밧은 “이 집”(성전) 앞에 서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9절). 여호사밧은 비록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지가 될 수는 없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건물로서는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호사밧과 함께 한 백성들에게는 또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여호사밧은 국가적인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이 어떤 근거로 하나님의 전을 찾게 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인격과 과거에 베풀어주신 은혜가 이번에도 그분을 찾는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백성들과 함께 주님을 찾게 된 동기를 설명한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이 당면하고 있는 이번 위기는 사실상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해결해 주실 의무가 있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호소하고 있다(10-11절). 그는 출애굽 때 일을 회상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출발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는 과정에서 암몬과 모압 자손을 칠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스라엘과 피를 나눈 민족들이라 하여 그들을 치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땅을 지나가는 것도 금하셨다(10절).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일종의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지나 그들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침략해온 것이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그들을 치는 것을 허락하셨더면 이 순간에 드러난 그들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모압과 암몬을 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빚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암몬과 모압의 배은망덕한 침략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초래된 일이라는 점을 상기시킨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개입을 호소한다(12절). 그가 원하는 것은 그들의 배은망덕한 행위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의 연약함과 방황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힘은 보잘 것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의 백성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선처를 기대하는 일뿐이라는 것이 여호사밧의 마지막 고백이다.
이 기도는 위기에 처한 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는 것, 즉 하나님의 속성(attribute)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특히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기념해야 한다. 만일 당면한 위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빚어진 일이라면 하나님께 더욱더 강력한 호소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위기에 처한 자가 기도해야 할 것은 구원과 선처를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에서 모든 것을 들어내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히스기야의 예배를 위한 기도(대하30:18-19)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역대기 기자는 열왕기를 매우 포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자신만의 출처를 인용하여 많은 정보를 새로이 추가했다. 히스기야 이야기에도 우리가 열왕기에서 접하지 못한 추가 정보들이 있다. 이 기도의 배경도 이 부류에 속한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하여 막을 내린 후, 히스기야는 남아있는 북쪽 사람들을 초청했다. 그는 일종의 전도자가 되어 옛 이스라엘의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여호와께 돌아올 것을 호소하였다. 여호와께 돌아온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함께 유월절을 지내자는 것이었다. 물론 거부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의 초청에 응하여 예루살렘을 찾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북 왕국 사람들이 그 동안 너무 오랫동안 성전과 상관없이 살아왔기 때문인지 유월절 규례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여 부정한 몸으로 성전을 찾아왔고 또한 아무런 생각 없이 유월절 양을 먹었던 것이다. 평생 처음으로, 그러나 부정한 몸으로 유월절 예배에 참석하여 양을 먹음으로써 북 왕국 사람들이 자칫 잘못하면 억울하게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한 것이다. 히스기야는 이러한 정황 속에서 짧지만 의미심장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히스기야는 이미 그의 서신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품으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며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해 주실 것이라고 선언했었다(9절). 이 말씀을 믿고 돌아온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은 규례와 제식법 때문에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그는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다: “어지신 여호와여, 용서하십시오.” 히스기야는 비록 이들이 부정한 육신을 이끌고 예배에 참석했지만,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결하니 외형적인 면만 보시지 말고 그들의 마음자세를 보시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의도적으로 부정함을 벗지 않고 온 것이 아니라 무지해서 이렇게 했다는 것이 이야기의 배경을 살펴보면 역력하다.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의 마음자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암시하는 기도문이다. 외적인 정결함이 내적인 정결함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내적인 정결함이 외적인 정결함을 대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시사되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다(20절).
적용
지금까지 살펴본 기도문들의 내용을 종합하여 우리의 삶에 적용해보자. 첫째, 역대기 저자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모든 사건들이 기도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도는 즐거운 일, 감사할 일이 있을 때, 혹은 위기에 처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항상 하는 것이다. 다윗은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을 받고, 또한 많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며 기도했다. 솔로몬은 일생 최대의 걸작품을 완성해 놓고 기도했다. 여호사밧은 위기에 처했을 때 기도했고, 히스기야는 예배의 순수성을 위하여 기도했다. 이처럼 기도는 우리 인생의 사계절에 항상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저자는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가식과 가면을 벗어버리고 알몸이 되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언약을 축복으로 받은 다윗, 걸작품을 완성한 솔로몬, 위기에 처한 여호사밧, 마음의 중심을 보아달라고 호소하는 히스기야 모두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심지어 다윗은 “나는 하나님 앞에 개만도 못한 자”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결코 우리가 세상에서 쓰고 있는 어떠한 가면(persona)도 필요 없다는 것은 기존 사실이기도 하다.
셋째, 역대기의 기도 중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찬양하고 노래함으로써 그분의 속성(attribute)을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기도가 하나님의 속성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평소에 자신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사실들이 기도의 가장 큰 근거요 원동력이 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행위는 속된 말로 하나님을 “코너로 모는 것”에 해당된다. 평소에 하나님께서 “나는 이런 자다” 하고 말씀하시고 선포하셨던 내용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도 결코 가볍게 생각하실 수 없는 힘 있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넷째, 위(셋째) 사항과 연관하여 과거에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고 회상하는 것도 기도의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이 되고 있다. 과거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념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본분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체험한 은혜들을 두루두루 기억하고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회상하고 기념하는 것은 불확실한 현실을 이겨내고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논리는 간단하다.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에 그렇게 꾸준히 자비를 베풀어 주시던 분이 오늘 이 순간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헌물을 동반하는 기도는 올바른 물질관을 동반해야 한다. 다윗은 평생 모은 재산을 주님께 드리면서 드릴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물이니 우리가 드리는 모든 것도 주인께 돌려드리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을 드릴 때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이러한 신앙이 기도를 통해서 고백 되어야 한다.
여섯째, 저자는 기도만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솔로몬이 고백한 것처럼 성전과 같은 특별한 건물에 특별한 신비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에 의하면 주의 백성들이 성전을 찾거나 그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은 그들이 기도했기 때문이지 그 장소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서 기도하든 간에 항상 하늘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다.
여섯째, 기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처를 바라는 것보다 공의를 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위기에 처했던 여호사밧의 기도는 한마디로 “우리와 침략군 사이에 공평하게 판결해 주십시오” 였다. 기도는 하나님을 내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수단이 아니다. 올바른 기도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의가 이땅에 실현되는 것을 간구하는 수단인 것이다.
일곱째, 기도는 연약한 지체를 위한 중보가 되어야 한다. 히스기야는 죽음에 처한 백성들을 위하여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하나님께 호소했다. 함께 예배 드리는 지체들의 부정과 결함을 문제 삼기보다는 그것들을 껴안고 공동체로서 책임을 느끼고 함께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쇠고리 줄의 역량은 가장 약한 쇠고리의 역량에 의하여 정의된다”(A chain is as strong as its weakest link).
여덟째,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중심이다. 외형적인 부정함은 내적인 정결함이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내적인 부정함을 외적인 정결함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오는 것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올바른 마음자세요, 그 마음자세는 기도하는 것이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역대기 기자는 기도를 자신의 신학을 제시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위 기도문들을 통해 역대기 기자가 추구하는 영성이 어떤 것인 가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기도문을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과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가와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 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역대기의 기도가 한국교회가 기도문화를 보완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