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김구’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먼저 큰 머리에 스마일을 하고 계시고 코가 큰 얼굴이 생각난다. 한남동 버스정류장 광고판에 새겨져있는 이 유명한분!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 게되었다.
김구 선생님 1876년 7월 11일 태어나셨다. 일본이 한참 독이 올랐을 때이랄까. 3세 때 천연두라는 병에 걸려서 어머니가 죽침으로 고름을 짜서 얼굴에 벼슬자국이 생기게 되었다. 나도 어렸을 때 아팠는지는 모르지만 (큭) 내가 천연두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완두콩이 생각났다. 왜일지는 생각했던 나도 모른다. 책에 나온 이름은 ‘김창수’ 인데, 이름이 ‘김구’인 이유는 김창수는 동학에 들어가서 이름을 바꿔서 그런 것이다.
나이가 6세쯤 되었을 때, 김창수는 (김구선생님은 나중에) 밖에 엿장수가 지나가면서 ‘헌 유기나 부러진 숟가락으로 엿 사시오’ 라고 하길래 김구는 아빠의 숟갈을 부셔서 숟갈 반쪽을 엿장수와 바꿔서 엿을 먹고, 또 한번은 창수의 아버지가 숨겨둔 엽전 스무 냥을 가지고 앞동네 떡집에서 떡을 먹을려다 걸려서 아버지에게 매를 맞다가 할아버지에게 구출되는 지금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웃긴 일을 벌였다. 현대의 나라면, 그걸 가지고 초밥을 사먹고 말겠다. 옛날사람들은 엿을 좋아하지만 나는 엿을 먹다가 어금니가 빠져버린 친구를 보면서 엿에 대한 트러블(?) 이 생겼다. 주면 먹어버리지만. 그리고 떡은 가래떡이나 꿀떡같은 걸 좋아하는데, 그 때 김창수는 무슨 떡을 먹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청년이 되어서 김구였던 그는 동학에 들어가 이름을 김창수로 바꾸고 신분이 제일 낮던 그는 동학 안에서 존경받는 대장(?)이 되었다.
‘치하포 사건’이라는 김구가 왜놈을 때려죽인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인천감리서에 끌려와서 영웅이 되었다. 원인은 김구를 심문하는 도중에 와타나베라는 왜놈을 김구가 꾸짖고 일본인을 죽인 이유가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이 왕비를 죽였으니 그에 대한 치욕을 씻기 위해 일본 놈 한명을 잡았다.’ 라고 말해서 감옥에서 면회를 오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한다. 내가 살인을 한다면(물론 그런 일은 없을거야!) 생명 하나를 없앴다는 죄책감 때문에 평생을 시달리면서 살 것이다.
그 후에 김창수가 사형을 당하려고 할 때 고종황제가 도입한 전화기의 통신 성공으로 김창수는 사형 바로 직전에 살게 되었다. 김창수(김구)께서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걸 도우셨는데 그 때 사형당하셨다면 지금 우린 일본에게 핍박당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하여 감사해야한다. 그 후 김구는 한 절에 들어가 법명을 ‘원종’ 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김두래로 변명하고 김주경을 찾아가는데, 만나지 못하고 동생 진경의 집에서 3개월간 훈장 일을 하게 된다. 김주경의 친구 유완무, 그의 동지들을 만났고, 유완무의 권유로 이름을 김구로 바꾸게 된 것이다.
1908년, 안중근이 한국 침략의 앞잡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여 김구는 감옥에 들어가고, 1달후에 풀려 나게 된다. 그리고 11년 후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김구는 문지기가 되고 싶었으나 안창호의 설득으로 경무국장이 되었다.
초 6을 거쳤다면 당연히 윤봉길 의사가 일본 천황과 장교들에게 폭탄을 던진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윤봉길은 홍커우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다가 김구를 찾아와 독립을 위한 큰 일이 있으면 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마침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이겨 4월 29일 천황의 천장절 경축식을 거행한다고 했다. 그래서 김구는 윤봉길에게 이 일을 부탁하고, 윤봉길을 일본인으로 위장시켜 홍커우 공원에서 거사할 위치를 점검하고 마침내 4월 29일이 오자, 윤봉길은 “제 시계는 6원이고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이니, 저는 이제 1시간밖에 쓸모가 없으니 저와 바꿉시다” 라고 김구에게 말하면서 시계를 바꾸었다. 윤봉길은 일본인 장교들에게 폭탄을 던지고, 자살하였다. 이 일로 여러 장교가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는 자기 목숨을 버려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일들이 있은 후, 1945년, 일본은 대한민국에 항복을 했다. 6.25전쟁 1년 전 6.26일, 김구는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했다.
김구 선생님은 얼굴을 보면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선생님과 닮았다.(무한도전 보길 바람) 그것 때문에 헷갈리기도 했었다(나만 그런가...) 김구 선생님께서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다른 높은 직위도 아니고 문지기를 선택하셨을 때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 같으면 중간정도에 있는 직위를 바랬을 텐데.... 그리고 사진상으로 김구 선생님은 언제쯤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1945년 이후에 찍은 사진일거라고 추측을 한다. 그 환하게 웃으신 모습은 대한민국이 독립이 되었으니 더 이상의 소원은 없는 모습으로 보인다.
2006. 1. 18. 목요일
김민석
첫댓글 아~동글이님! 그 두꺼운 책을 읽느라고 고생했어요. 앞으로 버스정류장 광고판도 자세히 봐야겠네요. 김구 선생님같이 훌륭한 분들이 역사속에는 아주 많지요. 그런 분들에 의해 되찾은 나라니까 우리도 이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모두 동글이님같은 어린이 불자들이 지켜나가야 될 나라예요. 우리 나라 화이팅! 동글이님도 화이팅!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동글이' 무진당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참 장하신 동글이 민석님. 글 속에서 성큼 성큼 커가는 마음이 읽힙니다. 겨울 방학 알차게 보내시고, 언제나 부처님 광명 아래 밝은 나날 이어나가시길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전, 김구선생님 하면 동그란 얼굴이 생각나는데... ^^ 김구선생님의 그 환한 얼굴처럼 우리 모두 환한 마음과 얼굴로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위해 노력해요~ 무진당님 초밥 많이 사 드려야겠어용~~~ ^^ 감사합니다. _()_
지난 주에도 두 번이나 사 줬답니다. 동글이님이 떼쓰는 방법은 참 독특합니다. 초밥 사 달라는 말 대신 광고지에 찍힌 초밥 사진에 동그라미를 그려서 책상 위에 올려 놓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안 사줄 수가 없습니다. ^^*
다음 부터는 보고 싶은 책에 동그라미를 하세요^^동글이 부처님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_()_ 아미타불!
좀더 지나면 자동차, 집 이런것에 동그라미 치는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미타불 _()_
그것은 나중에 내가 동그라미 쳐서 동글이 책상에 올려놓아야지...ㅋㅋㅋㅋ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늘 생활 할 것 같은 동글이님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이삔 동굴이님 글이 올라왔나 보러왔는데 온보람이 있네요.... 재밌게 잘읽었어요~동글이님도 장래 나라의 훌륭한 기둥이 대세여
아주 잘 읽었읍니다. 독후감도 잘쓰고 초밥도 잘먹고 동글동글 동글이님을 생각하면 항상 행복해집니다. 감사합니다..()..아미타불
백범일지 참 잘 읽으셨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처럼 큰 일하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