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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비가 떨어진 이유로 잠시 일하면서 정비중입니다.
다음 주 후반부부터 다시 ‘보령’에서 이어서 활동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참에 [둥글이세상의 정체성]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을 위해서
둥글이 활동의 의미를 정리해봤습니다.
길고 잡다한 글 싫어하시면 보라색 부분의 내용만 살피시면 됩니다.
한국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아래의 내용에서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한
한국의 지식인(활동가/교수 등)들이 거의 다루지 않은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분히 읽어주시고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조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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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깨임에 대한 문제의식
인간 사이의 갈등은 어느 시대에도 있어왔지만, 생태계 파괴에 따른
‘환경오염’ ‘이상기후’ ‘거주지축소’ ‘식량/물 부족’ 등의 문제로 인해서 앞으로 인류는
그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큰 환란에 휩 쌓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대중소비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사회적으로
생태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를 살필 여력을 갖지 못하고
하나라도 더 갖고 높이려는 욕망만 고도화한 결과 인간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저주가 될 것입니다.
문제요약
1. 현대 사회의 (하나라도 더 갖고 높아지려는)인간의 갈등과
(인간의 과도한 욕망으로 인한)생태계 파괴의 문제
2. 이런 문제 자체를 살피지 못하며 점점 악화시키는 대다수 대중소비사회의 구성원
따라서 우리세대는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시작될 이 지구적 차원의 파국에 대해서
본격적인 고민과 논의, 실천을 이뤄내야 합니다.
(이미 연쇄작용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근본요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볼라치면,
거기에는 ‘벌거벗은 임금님’속의 백성들과 같이 자기의 눈과 머리로 생각하지 못하고
대중적 견해와 관성이 ‘주체’(나)를 삼켜서 모두가 똑같은 길을 향하게 만드는
인간의 집단심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의 생존의 역사를 통해서 ‘집단(대중)’이 움직이는 방식에
따르는 것이 안전과 풍요를 가져온다는 것을 그 깊은 정신과 뼈에 새겨온 터입니다.
이렇다 보니 자신의 현재적 삶의 결과가 조만간 생태계와 후손들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을 살필 수 없는 것입니다. 설령 ‘눈으로’ 그 문제를 살핀다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실천을 이뤄낼 수 있는 힘이 나오지 않는 것이지요.
이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책임 있는 이들은 기존의 ‘하나라도 더 갖고 더 높이려는’
대중소비사회의 체제와 문화에 저항하고 이를 해체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이를 극복해야 하는 것은 그것의 성공 여부에
생태계와 후손들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적 사회현실까지를 살핀다면) 이러한 위기를 준비하는 우리들이
이 시대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기존의 삶의 관성(일상적 삶의 습관)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삶의 장으로부터 대중소비사회에 대한 저항의 물골을 틔우고
새로운 일상의 흐름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상업자본과 거대권력이 야합해서 만들어내는 사회체제, 조직, 문화.
그 속에서 집단적으로 휘둘리는 우리의 삶 자체를 해체시켜야 합니다.
이에는 대중과 집단이 만들어내는 삶의 관성으로부터 뛰쳐나와
올바른 ‘주체’를 세우려는 힘겨운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간 수백만 년 동안 뼈 속에 각인되어오며 익숙히 여겨지는 생존의 방식(집합적 삶)은
‘주체’를 세우려는 노력에 반하면서 내부에서 엄청난 갈등을 일으킬 것이지만,
이에 의한 몸부림은 시대적 책임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필히 감수해야할 고통입니다.
이러한 주체를 세우기 위한 ‘반대중소비사회적’ ‘일상 해체적’ 노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낱낱이 분해된
개별적 인간의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개개의 인간이 소유와 소비, 경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무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이상사회의 도래는 단지 ‘이상’일 뿐이고 다만,
기존의 사회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반성의 계기의 제공과 대중소비사회내부에서의
모종의 구조변화를 이끄는 동력 제공만으로도 그 노력의 성과로서는 충분합니다.
이렇기에 파국의 상황을 자각한 이들은 모든 변화의 시작을
‘대중으로부터의 이탈’과 ‘자기해체’에 두어야 합니다.
이 말은 사회에서 살지 말고, 사람들과 관계하지 말고, 산속으로 올라가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는 ‘인간관계’를 맺고 세상에서 살아가기는 하되,
기존의 ‘집단’ ‘대중’ ‘언론’ ‘정치인’들에게 휘둘리던 ‘가치’ ‘습성’을 철저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기 해체’ 역시 ‘나는 없어’ ‘나는 존재하지 않아’라는 식의 허무주의를 권장하는 표현이 아니라,
기존의 집단과 대중에 휘둘려서 ‘온전히 존재하지 않던 자기를 해체’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무너트린 사고의 기반을 차근히 다지고 온전히 자기 자신의
발로 대지를 밟고 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고민과 판단과 결정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수해야하는 실존적 고뇌가 따릅니다.
이러한 ‘주체 세움’의 노력은 ‘확장되는 자아’를 필요로 합니다.
확장되지 않고 단순히 자신의 ‘개인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자아는
‘개인적 자아’ ‘이기적 자아’ 일 뿐이지 온전한 ‘주체적 자아’는 아닙니다.
그 자아가 개인성을 탈피해서 ‘이웃’과 ‘사회’와 ‘자연’으로 뻗어나갈 때...
그래서 온전히 그것(인류와 자연) 까지를 ‘나’로 품어 낼 수 있을 때
주체는 바로 세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 또 함정이 있습니다. 단순히 ‘감각적’으로 ‘정서적’으로
‘관념적’으로 ‘인간과 자연’과의 하나 됨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한 주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많은 이들(기독교도, 불교도, 도교도들의 상당수)이
그것을 구분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관념’ ‘말’ 뿐인 인간과 자연과의 ‘하나 됨’은 신비주이이기는 할망정
결코 올바른 주체작용은 아닙니다.
‘인간과 자연’이 내 자신의 일부이자 내 자신이 그 일부인 그것임을 깨닫고,
‘나’라는 개체의 일상으로부터의 구체적 ‘고민’과 ‘실천’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에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올바른 ‘주체’의 길일 것입니다.
둥글이 활동은 바로 그러한 ‘주체 세움’의 노력입니다.
우선적으로 둥글이 자신이 온전히 주체가 세워져 있지 않기에 스스로부터의 수련이 필요한 바
굳이 돌아다니면서 주체를 찾을 필요는 없지만, 나름대로 보다
온전한 주체를 세우기 위한 기회와 자극, 근거를 찾고 있는 터라 ‘유랑’의 형식을 비는 것입니다.
활동 중에 쓰여 지는 단편적인 글(심각하고 장황한 글들)의 관점도
‘집단’(대중)으로부터 벗어난 ‘자기 찾기’의 문제에 주로 중심이 잡혀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의 글들은 몹시 생소할 수 있습니다.
(글 자체가 워낙 장황한 이유가 있겠지만,) ‘집단주의’ 사회의 한국사회는
‘주체’를 깨워낼 만한 역사를 거쳐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평소에 훈련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글이 생소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감각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그나마 사회가 좀 안정되고 사회적인/지구적인 책임감을 실천하는 유럽선진국의 국민들은
이러한 ‘주체 세움’의 기회를 (부족하나마)어릴 때부터 꾸준히
접하면서 나름의 훈련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러한 ‘기회’를 많이 만들어 내야하고 사회적인 체계로 구축해야 합니다.
‘주체 세움’의 필요성 인식 / 노력은 필연적으로 우리 국민(일반대중/시민사회구성원)들이
이 사회를 현재보다는 좀 더 ‘인간이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거쳐야할 수순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는 이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철학과 실천력을 동반한
이들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이를 사회적으로 전파하려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어설프게라도 둥글이는 이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굳이 메일링 리스트를 해서 때론 관심 없는 분들에게도 내용을 보내드리는 것은
나름대로 시민사회의 변화에 관심 있는 이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공유하고 싶은 이유이고요.
여느 기행일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문화 역사적인 박학다식함과
유려한 문체를 살피기 힘든 것은 아마 이 때문 일 것입니다.
둥글이는 문학을 하자고 그 잡다한 글들을 써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 세움’과 ‘사회변화’의 꿈을 함께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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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식’
‘주체의식’은 ‘나’를 인식하는 ‘감각’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주체의식’과 ‘나’라고 하는 ‘감각’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 ‘나’에 대한 감각을 ‘주체의식’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주체의식의 강렬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가 현실 생활 속에서 얼마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지의 사례를 든다.
그들이 말하는 바대로의 ‘나’와 ‘가족’을 위해서 현실에서 열심히
움직이는 것이 ‘주체의식’을 증거 하는 것이라면, ‘목숨 걸고’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야생 상태의 고양이, 개는 인간보다 더욱더 ‘주체의식’이 확고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이러한 말에 그들은 반발한다.
자신들이 개와 고양이와는 달리 ‘언어’를 익히고, 보고 쓸 줄 알며 예술을 즐기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음을 그들과 달리 ‘주체의식’이 갖춰 있음의 예로 들 것이다.
하지만 이는 ‘주체의식’이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능’이 있음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지능’은 인간 욕망 실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이다.
실로 인간은 자신의 지능을 이용해서 개와 돼지보다 더욱 개와 돼지다워 진지가 오래이다.
(혹시나 이러한 표현을 ‘인간에 대한 폄하’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기를...
그러한 생각 자체가 개와 돼지에 대한 모욕일 것이기에...)
오죽했으면 평생 동안 인간의 뇌를 연구한 한 과학자가
‘인간의 뇌는 돼지의 코와 같아서 먹을 것을 찾는 기관이다’라고 말을 했겠는가.
그렇다면 ‘주체의식’ ‘주체적 삶’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다.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대중소비사회의 일부분으로서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이 발 디딘 대지의 ‘주인’으로서 우뚝 서고자 하는 의지와 이의 실현이다.
현재와 같이 자연을 착취하고 타인의 상대적 결핍을 감수하면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열심히 살아가는 삶’은 생태계의 파괴와 후손들의 존립가능성을 떨어트린다는 의미에서
극히 ‘비주체적’이고, ‘이기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기존의 집단적 ‘욕망의 관성’이 우리를 끌어왔던 이러한 노예적이며
야만적인 삶을 청산하고, 인간과 자연과의 화합이 자연스러운 ‘개인’(주체)을 깨워야 하다.
이 시대 ‘자기주체’를 찾으려 하는 이들의 가장 큰 과제는
‘나’ 자신의 자연스러운 ‘행위’-‘삶’이 생태계의 붕괴와 후손들의
절멸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지양하고,
인간과 자연에 역동적으로 작용하여 화해와 공존을 이뤄낼 수 있는 길을
‘자기를 중심’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생태계파괴와 후손들의 존립기반을 무너트리는
대중 소비 사회적 삶의 양식, 가치, 질서에 대한 개인적 저항이 따라야 하고,
그러한 대중소비사회가 유도하여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자본/권력 지향적 사고와 관계를 해체해야 한다.
이러한 ‘내부적 투쟁’(자기와의 투쟁)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나’가 내 머릿속에 세워져 있는 기존의 세계관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면서
차분히 손 볼 수 있는 그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하다.
기존의 세계관, 생활습관은 나의 ‘정체성’ ‘존재감’과 한 덩어리로 얽혀 있는 이유로,
기존의 삶의 방식에 대한 저항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어 놓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이들은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지반이 무너지고 난 후의 새로운 세상을 접할 기회를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 하곤 한다.
따라서 기존의 세계관/생활습관을 무너트리는 노력은 근본적으로 기존의
‘자기’를 무너트리는 노력과 일치한다.
온전히 자기 자신을 무너트리고, 그와 동반해서 (주관적 관점에서)세계가 무너지고 난 후라야,
그 무너진 세계 위에 비로소 올바른 자기가 세워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존의 자기가 무너졌다는 것만으로 ‘주체’가 올바로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자기 무너짐’만 있는 상태는 현재의 ‘한국적인’ 기독교인들의 ‘자기 버림’,
‘한국적’인 불교도들이 추구하는 ‘해탈’과 ‘한국적인’ 노장 사상가들의 ‘도’와는 연관될 지언정,
이러한 무너짐만 있는 상태가 ‘주체’ 상태는 아니다.
(여기서 ‘한국적인’의 수식의 의미는 - 수많은 신도들이 바글거리고 있음에도
사회의 기본적인 정의도 세워지지 않을 만큼 - 그 믿음이 허구의 지반에 세워져 있고,
집단적이며, 자본과 권력지향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담 그 무너진 세계 위에 무엇을 어떻게 세워야 올바른 ‘주체’가 세워질 것인가?
그것은 영원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의 중심인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행위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보편타당한 것이 되게 하는
‘이해’와 ‘의지’와 ‘실천’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자신이 발 디디고 있는 대지의 ‘주인’으로서 우뚝 서는 것이
바로 올바른 주체로 깨어나는 길이다.
이에 따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부조리에 대해서 저항하고,
지속가능한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의 자연의 착취-파괴에 맞서서 투쟁
(물리적 투쟁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님)해야 하는 의무가 동반된다.
하지만 이것은 인류와 자연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 자기희생을 치러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올바른 주체적 행위에는 어떠한 ‘희생’도 따르지 않고, 보답의 필요성도 요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말 그대로의 언어화되어 구분되어지고 타자화 된
‘인류’와 ‘자연’을 위한 행동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포함하는, 그것이 포함된 ‘나’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일을 하는데 무슨 희생과 보답이 필요 있겠는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인류와 자연생명을 감싸 안아 낸 ‘개체’(개인/주체)의
‘지금’ ‘여기’에서의 능동적 사고와 행위... 이것이 바로 주체의 활동이다.
이러한 깨여진 주체의 노력의 성과가 정확히 인류와 자연에 파동 한다는 의미에서
그는 더 이상 그가 속해있는 세상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위기를 느끼는 기성 집단은 그를 ‘이방인’으로 인식하고 끝없는 반발과 압력을 행사한다.
(예수의 고난을 보라)
하여 야만적인 생산-소유-소비로 운영되는 집단(사회)의 중력을 무릅쓴
‘주체의 일어섬’은 그에게 끝없는 고독과 일상에서의 맞부딪치는
사안들에 대한 끝없는 갈등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것 자체를 감수하고 일상에서의 비루한 사건들 하나하나에 성실히 맞서는 것 자체가
‘주체’가 감당해야할...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체로 깨어나기를
노력하는 이들이 감내해야할 직면한 현실이다.
- 붙여서...
이러한 ‘주체 세움’의 노력이 함께한다면, 예수/신을 보다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다.
이러한 주체 세움의 노력은 현대 한국 기독교식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철저한 무지와 무책임에 기반을 둔’ ‘예수에 대한 집단적 추종’감(막무가내의 노예근성)을 지양하고,
‘예수의 믿음의 행위’를 본받게 하여 예수가 그러한 것처럼 이들 역시
그들의 각각의 삶의 장에서 신이 그리하라고 이르신 바를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틀림없이 행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자신의 생활의 장에서 겪는 수많은 갈등과 고뇌의 기회를 ‘주체적’으로 대면하고,
신이 그리하라 이르신 것처럼 ‘세상을 운영하는 이로서’의 시야로 자신의 현실을 직면한다면,
현재와 같이 대중소비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자신의 평범한 삶과 일상이
인류와 환경을 파괴시켜서 ‘자손을 번성시켜라’는 신의 뜻을 거스르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여,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존의 사회를 벗어날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한국사회에 기독교인들은 많지만, 신과 예수를 우상화시키고 무턱대고
떠받드는 노력만 경주되다 보니, 그들의 사회적 책임감은 온데 간데없어 지게
되는 것이고, 신을 거스르는 결과를 불러일으켜서
이 사회의 현실이 눈뜨고 봐줄만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주체 세움의 노력 부재로 인한 종교의 진수를 맛볼 수 없음의 사례는
기독교도(천주교도포함) 뿐만 아니라, 불교도, 도교도 들에게도 정확히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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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부재(자기 없음)와 자기 세움
1. 사회적 책임감
종종 TV나 신문을 통해서 평생을 만두장사를 하거나 폐지를 모아 수억,
수십억을 저축한 이들이 인생 말년에 이를 모두 사회에 환언하는 기사를 대하곤 한다.
우리는 그러한 기사를 보고 들으면서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라고 혀를 차곤 하지만
이는 ‘시민사회’의 성장을 위해서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자극제이다.
왜냐하면 이를 보고 ‘감동’하는 시민들의 대다수는
‘사회적 책임’감의 실현과 관련한 이러한 ‘블록버스터’급 기사를 대하고는
‘나도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병원을 짓거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언해야지’라는
원대한 바람을 갖을망정 자신의 일상에서 한 달에 1,2만원 후원하는
작은 관심을 통해서 ‘지금’ ‘여기’에서의 할 수 있는 실천적인
노력의 필요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일상에서의 자잘한 관심과 실천을 통해서 차근차근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에 시야가 가지 못하고, 이렇게 ‘한판’으로 크게 터치는 것에만 제 맞을
느끼는 한국인의 특성은 한국인들의 정치의식과도 연관이 되어 있다.
2. 정치의식
한국인들은 각자의 시민 된 도리가 차곡차곡 모이고 이것이 각자를
대표하는 정치인들의 성향으로 나타나서 사회를 올바로 이끌어가는,
‘나’ - ‘시민’이 기반이 된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시민 각자가 사회 속에서의 자잘한 문제의식과 이의 실천을
중요 기반으로 하여 완성되는 정치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한국인들은 ‘훌륭한 정치인’ 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이끌어 주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본인은 아무것도 안하더라도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똑똑한 정치인이 나타나서
세상을 변화시켜주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나라를 좀 잘 이끌고 나가는 듯하면 TV보며 박수를 쳐주고,
그렇지 못할 때는 TV를 보면서 손가락질을 하곤 한다.
하다못해 아이들 놀이터에 떨어진 휴지 한 조각 주워보지 않은 이들이
TV보면서 정치인들 비난하는 모습은 엄청난 아이러니이지만,
‘정치인들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정치의식은 자신의 태도의 문제의 모순과 허점을 인식조차 할 수 없다.
‘국가는 국민의 반영이라’(플라톤)는 말과 같이 모든 문제의 근본이
결국은 자기 자신에 있음을 반성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대상만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이들의 추세가 일반적이다 보니 정치가 온전한 기반에 설 수 없다.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이정도이다 보니 한국의 정치인들은 일의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에 대한
수사학적 언변구사에만 몰입해 있는 수준이다.
3. 시민사회단체의 운동
이는 시민사회단체의 운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시민사회단체의 회원 등은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사회를 위해서
‘일상생활’에서의 ‘자잘’하고 ‘비루한’ 실천을 통해서 세상이 ‘차근차근’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와 실천 보다는 ‘조직’ ‘단체’가 큰 힘을 발휘해서 ‘한방’에 대세를
바꿔내려는 것에만 집중을 하고 ‘대규모동원활동’에 주로 몰입해 있다.
물론 대화와 타협의 기회를 막고 민중의 생존권을 짓누르는 권력자와 자본가 세력에 대해서
그러한 활동이 분명 필요하기는 하다. (가장 필요한 활동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러한 활동 일색인 상황에서는 결코 조직의 성장과 사회의 변화를 일궈낼 수 없다.
구체적인 예로 집단적으로 모였을 때만 목소리를 낼 줄 알고 각자의
생활의 장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이를
과연 ‘시민사회구성원’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인가?
기존의 시민사회 영역에서는 ‘회비’ 걷고, ‘단체소식’ 전달하고,
필요할 때 한 번씩 단체 활동 참여를 종용해 오면서
‘그렇게라도 해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 온 터이지만,
‘각자의 생활의 장’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시민성을 깨울 수 있는
기회와 자극,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 운동은 분명히 한계를 맞을 것이고,
작금의 시민사회의 위기의 근본도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4. 종교의 문제
‘자기주체’ ‘일상의 소소한 사안’ 에 대한 관심과 실천의 문제를 제쳐두고,
‘지도자’ ‘한탕’에만 집중하며 매달리는 한국인들의 특성이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문제는 종교문제이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자신과 신과의 믿음의 관계를 정립하지 않으며,
자신의 일상에서의 자잘한 사안을 통한 믿음의 현실적 실천의 행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훌륭한 종교지도자’(주로 언변만 좋음)를 매개로 해서 천국가고 영생을 얻고
복을 받는 데에만 신경이 가있을 뿐이다. 종교지도자들도 ‘돈벌이가 나쁘다’고
비판하지 않음에야 설령 좀 부정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일주일 내에
열심히 돈 벌어서 십일조 교회에 갖다 바치고 회계하며 면죄 받으면 된다.
신과 자신과의 믿음의 관계가 잘 정립되어 있다면 신은 나의 일상을 나의 눈을
통해서 면밀히 살필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서 신은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가지
않도록 현실 생활 속에서 늘 길잡이를 해주며, 모두가 하나의 형제와
가족인 인류와 환경의 문제까지도 나의 것으로 여겨 이에 대한 노력의 필요를
충만 시켜주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동력이 되어준다.
낮춤과 비움의 일상의 실현은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의 상당수는 그렇게 했다가는 장사가 안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개인과 신과의 믿음의 관계’를 오히려 방해하고 자신을 신도와 신사이의 ‘매개자’로 세우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교회 잘 다니면서 헌금만 잘 내면 된다’는 것으로
신도들의 믿음의 관계를 정리해 버린다.
이렇다 보니 신도들은 다른 복잡한 것은 생각할 필요 없이 1주일에 한두 번씩 예배에 참여해서
찬송하고 기도만 하면 그걸로 만사 ‘땡’이 되는 것이다.
복잡하고 신중한 것을 싫어하는 인스턴트 시대에 이 얼마나 편리한 믿음인가?
이것이 바로 한국이 기독교 최고의 성장 국가 국임에도 후진국에서나 보이는
갖은 부정과 부조리가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천주교, 불교 신도들의 책임도 적지 않으리라)
이는 근본적으로 신도들이 자신과 신과의 믿음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 않고,
종교지도자들의 의도대로만 휘둘린 결과이다.
5. 자기 없음
앞서 말한 ‘기부의식’ ‘정치의식’ ‘시민사회운동’ ‘종교문제’를 비롯해서
거론하지 않은 ‘문화’ ‘경제’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 영역’에서 ‘주체 없음’(자기 없음)의
현상과 그로 인한 폐해는 보인다.
이러한 ‘한탕’ ‘대세’ ‘이끌어줄 지도자’ ‘거대조직’ 만 찾는 한국인의 습성은
민족의 역사적 경험이 핏속에 축적된 결과이다.
수백여 차례의 외침과 내부적인 분열을 통해서 ‘개인’의 주체적 사고와 행위보다는
‘집단-단체-조직’에 속해서 그 흐름에 따라가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판단했으리라.
그렇게 무리지어 생활하고 사고하던 습성은 결과적으로 ‘나’는 없고
‘우리’만 존재하게 만들어냈는데,
그 ‘우리’라는 것이 과거에는 ‘이타적인’ 동기를 발현시키며 공동체의 우애를 다지고,
민족의 미덕을 존속해온 인식의 빌미를 제공했는지는 몰라도,
하나라도 더 갖고 높아지려는 무한경쟁사회에서는 자신이 속한 이익집단의 경계가 된 터이다.
즉 ‘우리 회사’ ‘우리조직’ ‘우리지역’을 나누면서 조직 간, 집단 간,
지역 간의 이기주의와 분쟁을 점점 심화시키고 있는 처지이다.
따라서 다른 선진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이러한 총체적인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자기 ‘주체’(자기)를 세우기 위한 고민,
시민의 ‘주체’를 세울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에 힘써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실천은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문제’가 있어왔고,
그것이 바로 현재의 한국사회의 진보를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을
인지라도 하고 있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약자와 민중을 억압하는 시민사회세력에 대한 집단적 저항,
떠들썩한 활동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지만,
그와 동반해서 각자의 ‘주체’가 깨어나고 일상에서의 하잘 것 없는 사안에 대한
성실한 실천을 통해서 사회적인 기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집중적인 ‘자극’이 필요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단체와 조직으로 움직일 때는 효과 있는 파급력을 발휘하지만,
왜? 그 단체와 조직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시민들이 일상생활에서는
그 단체와 조직을 머릿수대로 나눈 개인의 몫의 10분의 1도
그 역량을 발휘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또한 이런 문제를 고민해오지 못하고 기존의 익숙한 관점의 활동만
지속되어 왔음에 의한 한계가 조직과 그 구성원 내에 어떤 정신적인 관성으로 작용하는지...
사회적으로는 어떤 파급력을 미쳤는지...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보는데 어떤 미숙함을 초래하고 있는지에 대한 신중한 숙고가 있어야 한다.
6. 자기 찾기
1) 개인에 있어서의 자기 찾기
한번에 ‘주체’(자기)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일상생활에서의 꾸준한 고민과 숙고를 통해서, 세계 속에 서 있는
자신의 위치를 살피는 노력과 이에 따른 체화된 실천을 통해서
주체를 세우려는 노력은 진행되어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적응되어온 ‘대중소비사회’의 갖은 세뇌공작은
우리의 뇌를 자본과 권력에 처절히 찌들게 만들어 낸 터이다.
이렇기 때문에 이 사회에 수십 년간 적응해 온 이들은 우선 스스로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려지는 감성과 가치와 논리가
‘사회 의존적’(톱니바퀴의 일부)인 것을 우선 깨닫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자기 자신이 ‘제정신이 아님’을 깨닫고 나서 이를 가능한도에까지
철저히 ‘해체’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정신적 해체 노력과 더불어서 자신의 현실생활 속에서의 구체적인 실천을 동반함으로
자신의 ‘앎’을 본격적으로 ‘체화’해 가야 한다.
이때 과거 ‘집단’(대중소비사회)에 안주 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자유’ (자기사고, 자기책임, 자기행동)를 순간적으로 맞보게 되고,
상대적으로 기존의 사회로 부터의 이 탈감을 느끼면서 극도의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취향’ ‘능력’ 에 맡길 일이며, 사회적 이탈감도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이는 사회를 떠나서 살라는 말이 아니라, (가능한 한도 내에서) 기존의
사회적 역학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라는 이야기이다.)
이에 따르는 잡다하고 조잡한 고민과 갈등과 행위의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의 ‘실존’의 문제이다.
이러한 자기 주체를 세우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다만 오해하면 안 될 것은
‘주체’라는 것은 ‘타인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대중 사회의 흐름을 거슬러서 자기 하고 싶은 것만을 하는 이들을
올바른 주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체’의 온전한 의미는 자기 자신을 시간과 공간의 중심에 두고 언제나
그 행위가 세상에 보편타당한 원리로 작용할 수 있는 그러한 존재를 말함이다.
자신의 개인성이 중요한 것을 아는 만큼 타인의 그것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유기적인 구심점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깨어난 개인’이 바로 온전한 의미의 주체이다.
현대사회의 문제 까지를 고민해 본다면 이 시대 ‘올바른 주체’는
직면한 ‘인류의 갈등’과 ‘환경파국’의 사안까지를 ‘나의 일’로 여기고,
이의 해결을 위한 실천성 동반된 삶을 사는 이들을 일컬을 수 있다.
2) 조직에 있어서의 자기 찾기
각 (시민사회)조직을 이끌어 가는 조직의 지도부들은 자신 스스로의
주체를 찾기 위한 노력이 우선 동반되어야 한다.
선행된 자기 찾기 노력 후에 조직의 지도부들은 그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자기 찾기를 위한 자극과 기회를 줄 수 있다.
조직에 있어서 조직의 구성원들을 향한 ‘자기 찾기’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이다.
첫째, 앞서 거론한 대로 ‘기존의 활동’은 조직적인 활동의 성과는 이룰 수 있지만,
조직적인 활동을 하지 않을 때의 개인의 힘이 무력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건강한 운동조직으로 성장할 근간을 다질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주체가 바로 세워져 있지 않은 이들의 민중을 억압하는 ‘반 자본’ ‘반 권력’ 투쟁은
결국 변질될 수 있다. 일예로, ‘반 자본 반 권력’을 부르짖으며 민중의 적들에 맞선 이들이
어느새 자본과 권력의 편이 되어 있음을 우리는 자주 살핀다.
굳이 권력과 자본의 편에 들지 않더라도 시민사회 진영 내부의 권력다툼은 어떠한가?
이는 꾸준한 자기 주체 세우기 훈련 없이(에너지의 내부집중/통찰 없이)
섣불리 외부의 세력(에너지의 외부분출)에 대한 투쟁만 일삼아온 결과 빚어지는 문제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운동과 함께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은 동반되어야 한다.
셋째, 주체를 바로 세우는 노력은 결국은 ‘반 민중세력’의 눈에 안 띄게
시민사회조직의 역량을 강화하며 그들에게 저항할 힘을 높이는 노력이다.
민중의 생존권 확보차원의 ‘단체 활동’ ‘집적적인 저항활동’의 상당수는
그것이 ‘눈에 띄는 이유로’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이 이를 인지하고,
그에 맞서서 교묘히 대응할 길을 열어주는 활동이다. 어렵사리 세력을 모아서
애써 일궈놓은 성과를 더 큰 세력을 규합해서 되돌리는 일(사립학교법 등)과
특정한 성과에 대한 물 타기, 진보진영의 운동에 대한 대중의 반발심부추김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민중세력들의 눈에 띄는 ‘투쟁적’ 활동은 자본과 권력의 직접적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 ‘이러한 활동’만으로는 결코 지능화된 자본과 권력을 전복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 민중을 억압하는 세력의 눈에 안보이게 시민사회내부에서는
꾸준히 힘을 길러야할 필요가 있는 바, 그것이 바로 내부적인
활동으로 조직 구성원 각자의 ‘주체역량’을 기르는 것이다.
=> 그렇다면 ‘조직’의 구성원에 대한 주체의식 강화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 져야하는가?
그건 별 것 없다. 일상생활에서 각 개인이 ‘소소’하게 고민하고 실천할 꺼리를 주면 된다.
조직의 운영 원리도 그에 맞게 짜 맞추면 된다.
가령 기존의 ‘회보지’에는 조직이 떠들썩하게 행했던 활동을 실어서
‘조직적인 소속감’을 강화고 조직적 자긍심을 고취 시켰다면,
이러한 ‘자기 세움’을 위해 제작되는 ‘회보지’에는 각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해야될만한 일, 그러한 일들이 하나하나 처리됨으로 인해서 빚어지는
‘서서한 변화’에 눈을 뜨게 만들어야 한다.
기존의 시민운동방식의 ‘한방’ ‘한탕’만을 강조하던 방식은(필요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에 물들어 있는 구성원들이 그들의 일상에서
작고 세세한 문제의 ‘서서한 변화’를 무시할 여지가 높음으로,
기존의 가치와 행동력에 대한 맹신을 접고 일상에서의 ‘별 볼일 없는 실천’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시켜야 한다.
(참고로 - 기존의 운동방식에 젖어 있는 이들은 이에 저항하면서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세상을 버꾸냐?’는 푸념을 하곤 하는데,
이 역시 ‘한탕’만 중요시 하는 한국적 사고의 반영이다. 새로운 운동방향의
접목은 당장 혁명을 하는 힘을 기르기 위함이 아니라, ‘혁명의 기반’을 닦기 위함이다.)
또한 주목할 만한 특정인물을 회보지에 소개할 때에도
단순히 그가 수행한 ‘훌륭한 과업’ ‘세계관’ 등만을 다루면서
‘이사람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추종하게끔 하지 말아야 하고
(이는 조직의 역량 강화에만 도움 될 뿐 회원들의 주체역량강화에는 도움이 안 된다),
그 개인이 운동을 하면서의 일상의 고민과 갈등, 이의 해결, 미해결 상태의 혼란,
비루한 실천 등을 소개하면서 ‘아... 이 사람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여지를 줘서, 그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살펴서
각자의 주체역량을 강화하는 데에 자극을 줘야 한다.
( 유럽 선진 사회가 잘 돌아가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완벽히는 아니겠지만)깨인
주체들이 올바로 사회조직의 하부를 받치고 있는 이유이다. 이 길을 열지 않고서
한국 사회의 시민운동이 올바로 될 리는 없을 것이기에
‘사회’ ‘세상’ ‘시민운동’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숙고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