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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 박은하
조원: 백상현, 송영주, 장은혜
다다이즘[dadaism]
[개념]
전쟁은 인간의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인류 문명은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더욱 편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위치로 전진 해왔지만 전쟁은 이 모든것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파괴해 버렸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후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시달렸던 지구촌 곳곳의 예술세계는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급기야 전쟁이전의 인류를 찬양하고 보존하려했던 그 모든 문명의 결과와 정신은 부정하는 현상이 싹텃다. 그것이 다름아닌 다다[dada]였던 것이다.
다다라는 명칭은 1916영 2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결성된 국제적인 전위예술가 그룹이 그들의 회합 장소인 카페 볼테르에 증축한 화랑을 위해 시인인 트리스탄 짜라가 선택한 것이었다. 사전에서 우연히 찾게된 '다다'라는 어원은 프랑스어로 '목마' 또는 '장난감 말' 이란 뜻을 지닌말로 독일어로는 출산의 기쁨, 유모차, 바보스런 순진함의 의미를 지녔다.
다다는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온 유럽을 급속히 전염 시켯고 결국 현대미술에 흐름까지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문화는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시작 되었건 결국 전쟁을 야기하는 하나의 보조적 가치를 지녔음으로 아주 나쁜 문명이라고 주장 하였고 이는 당연히 거부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갖도록 한것이다.
다다는 미래주의[futurismo:이태리]와 함께 20세기 초반의 가장 강력한 문예 운동이었다.
전통을 거부하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미래주의가 산업혁명에 따른 과학과 과학기술을 찬양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미래주의가 전쟁을 긍정한 반면 다다는 전쟁을 반이성적이고 반인륜적인 행태라고 하며 격렬히 반대 했다.
다다는 이성과 합리에 대한 다른 의미를 지향 했으며 부정과 파괴, 다시 말해 '반예술'의 태도로 우연에 의거한 작업 태도를 보였다. 특유의 유머가 있었고오브제[object]를 사용하여 기성관념을 부정함으로써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발생배경]
1914년에서 시작하여 1918년까지 계속되는 전쟁은 이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지적, 문화적, 사회적 체계를 붕괴시키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다는 세계대전의 불안감이 인류의 심리를 지배 하면서 그 이전의 문명과 사회체제를 부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급속도로 발전한 산업과 기계기술의 급성장에 의해 현대 문명이 약속 했던 모든 낙관주의는 바로 그 기계에 의해 파괴되어 버렸다. 세계제1차 대전의 결과가 예술언어의 성격을 변화 시킨 정도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종교, 합리적인 사고, 그리고 인간적인 가치들은 유럽 문명국들이 앞장선 대량 학살에 의해 절대적으로 부정 되었으며, 정치인과 군인 뿐만 아니라 지성인과 예술인까지도 점차 이러한 사실에 대해 무감각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자양분 삼아 기성의 것과 전통을 거부하는 다다는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다다이스트들과 당시의 예술가들의 눈에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이미 파멸 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미술과 문학, 과학, 정치 등 모든것이 이제는 다른 기반으로 부터 출발하여 다시 생각 해 보아야 하는 것으로 비쳐졌다.모순된 기존의 통념과 질서를 파괴하기 의해 다다는 결정론에 비해 비 결정론을, 범주에 비해 탈 범주를 , 예술에 대한 반 예술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그 당시 상황속에서 맞아 떨어 졌으며 전통적 문명에 대하여 정식적으로 반기를 든 예술에 있어서 거의 혁명적인 사고 였다. 다다이즘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 되었다.
[전개]
다다이즘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 되었다.
1916년 2월 작가겸 연출가인 H 발이 카페 볼테르를 개점하고 시인 트리스탄 짜라 와 장 아르프, 마르셀 앙코, 휄젠벡 등과 함께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 반도덕, 비 심미안적인 것을 찬미 하였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20년 까지 계속되었다.독일에 있어서 다다이즘은 베를린, 하노바, 퀠른 등 세곳에서 진행되었다. 베를린에서는 하우스만,그로스, 메링, 헤이 등이 다다운동에 참가 하였다.
베를린은 정치적 중심지 답게 다다이즘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하우스만의 아쌍 블라쥬나 헤히의 포토 몽타쥬, 그로스의 격렬한 반전 시리즈인 [이사람을 보라]등을 탄생 시켰다.
[이 사람을 보라]는 제 1차 세계대전중의 군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전후의 황폐,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변해가가고 있는 사회 상층 계급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베를린에서의 다다는 전쟁이 끝난 18년 부터 33년 까지 계속 되었다.
하노버에서의 중심인물은 슈비스터였다. 그는 시와 조형에서 다양한 활동을 보였고 23-32년 까지 잡지 [메르츠]를 간행하고 있었는데 주목할만한 작품은[메르츠 바우]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널조각과 잡동사니를 소재로 하여만든 기중기인데 조각에서 표현한 콜라쥬의 선구적 예이다.
콜라쥬는 다다의 유력한 무기로서 일찍이 입체주의의 파피에 콜레에서도 같은 종류의 경향을 볼수 있었다. 특히 슈비스터는 폐품을 이용한 정크 아트를 한 작가이기도 했다.
퀠른에서는 에른스트와 바르겔트가 활약 했다. 바르켈트는 잡지 [선풍기]를 창간 하였고 아상 블라쥬 작업을 했다. 에른스트의 기법은 콜라쥬 이며 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쥬전은 이제까지의 회화 개념을 바꿔 놓았다. 그는 또한 초현실주의 운동에도 참가 하였는데 프로타쥬 기법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따라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거의 큰 차이가 없는 종이 한장 차일라고 할수 있었다. 한편 파리의 다다는 1919년에 이루어졌다.
요절한 시인 바쉐 외에도 [검은 유모어]의 브르통 등도 다다이즘의 선봉자로 빼놓을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엘리 아르, 아라공, 페레 등도 동참 한다.
뉴욕에서의 다다는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 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또는 전쟁 전부터 전위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19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인 아오모리쇼의 영향이 었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 오는 누드]는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 작품은 메커니즘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마치 고속 사진의 한 장면 같이 역동적이고 미래파 작가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했다.
그 뒤 뒤샹은 기성품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ready made]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만 레이의 [선물]이냐, 아니면 뒤샹의 [샘]이냐 할 정도로 상징적인 존재가 된다.
다다이즘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네오 다다` 라는 명칭으로 부활되어 전후 고조 되던 기계문명, 인간소외 등의 이유에서 생겨 났으며 대표적 작가는 리히텐 슈타인, 쟝 팅겔리, 올덴버그 등을 들수 있다.
1920년대 초반에 다다는 대중적인 의식에 대한 조직화된 공격이나 타락한 사회 예술적 가치의 단호한 공격수로서의 효용성을 상실하게 된다. 다다이스트들의 난동이나 도발적인 헤프닝도 표준적인 일들로 간주 되었고 충격적인 모든 일들이 점차 내성화 된것이다.
[작가]
1.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55]
프랑스 출신의 미국 화가로 현대 미술에서 사물과 관념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서민위주의 작업을 하면서 브르조아 딸과의 결혼식을 이벤트화 하여 2주만에 이혼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다다이스트로 평가되고 있으며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린 [L,H,O,O,Q]를 통해 기존의 가치를 조롱하였고 레이드 메이드를 이용한 [샘]을 통하여 일상품과 예술품,그린다는 것의 의미, 장소 등 여러가지 사변적인 미술을 이끌어냈다. 자전거 바퀴를 의자 위에 거꾸로 고정 시켜 관객이 돌릴수 있도록 고안한 작품은 후에 키네틱 아트에 영향을 준다.
그의 작품의 원천은 다다와 초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미술보다는 문학 작품이었다. 현대 초기의 많은 회화와 조각이 전념 햇던 비해학성 때문에 아마도 뒤샹은 그것을 거부하게 됐을 것이다. 1912년 그는 스스로 고안한 기계적 회화로 전향 하였다. 이중 맨 먼저 나온것이 [날랜 누드가 가로질러간 왕과 왕비]의 여러 변형작이다.
뒤샹은 [처녀], [처녀에서 신부로의 이행], [신부], [총각들에의해 발가 벗겨진 신부] 등의 습작에서 기계적인 환상을 추구 하였다. 많은 작품을 남기진 않았지만 미술의 형태를 변화 시키기 보다는 미술에 대한 개념 자체에 혁신을 가져온 뒤샹은 20세기 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가이다. 그는 훗날 많은 미술사조의 연원이 되기도 하였는데 [너는 나를 ]이란 작품에서도 하드에지 미니멀 아트의 양상을 보였고 옵아트의 기법도 보여 졌다.
2.한스 아르프 [Han Arp,1887-1966]
스트라스부르 출생(집안은 스위스계). 바이마르의 미술학교에서 배움,뭰휀에서 칸딘스키를 만나 [청기사] 운동에 참가해서 전위적 경향으로 들어가기 시작 했다. 가끔 파리를 방문하여 여러 화가를 알게 되었고 병역을 기피해서 스위스에 망명하였으며 곧 후고 발을 통해서 츠아라, 얀코, 세르너,휄젠벡 등과알게 된다. 1920년 까지 취리히 다다의 중심의 한 인물이 된다.1920년 그는 쾰른에서 에른스트와 바르겔트와 함께 다다운동의 한 지파를 만들었다.
2년 후부터는 파리에 정주하며 27년엔 쉬르,30년 세르클 에 카레[Cercle et Carret], 31년에는 [추상 창조]의 운동에 참가하는 등 다다와 추상 미술을 결합 하는 특이한 입장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 하였다. 작품도 회화, 콜라쥬, 채색 릴리프, 조각등 폭 넓은 작품을 구사 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둥근 타원형의 뉴기적 형태의 조각을 시도 하였으며 아르프는 초상조각이란 말을 싫어해 자기의 작품을 구체 미술 [Art Concret, 아르콩크레]이라고 불렀다.
3.피카비아, 프랑시스 [Francis Picabia, 1879-1953]
파리 출생, 부친은 스페인계 뒤샹과 동세대이며 후의 다다이스트 보다도 연장.
그 때문에 20세기 초의 근대파의 운동과 제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새로운 운동과의 과도기를 잇는 존재로 평가된다. 조숙한 화가이며 1900년 부터 인상파풍의 풍경화가로서어느정도의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기질은 늘 변화 하였다. 새로운 경험을 늘 기다리고 있는 그는 추상 예술의 선구자의 한사람 이였으며 뒤샹과 유럽에서 망명자 일행으로 만나 다다의 활동을 시작 하였다. 1917년 기관지를 간행 취리히에 이어서 파리에서 24년 까지 간행을 계속 하였다. 뒤샹과 경쟁 하며 더욱 노골적으로 된 독자적인 기계양식의 회화, 비예술적 재질에 의한 콜라쥬 등을 제작 하였다. 1918년 취리히에 가서 츠아라와 만나서 그곳 다다운동과 합류했다. 피카비아는 다다의 최전성기에 시집[사기꾼 예수,그리스도](1920) 를 출판 햇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을 어리둥절 하게 하는 출품을 계속 하였다. 1921년 5월 그는 다다와는 결별 하였으나 스캔들을 일으키는 독자적 행동으로 파리의 신문에 주목감이 되었다.
22년 소위 [몬스터 시대]가 시작 되어 때로 에나멜 도료를사용한 반 예술적인 타블로를 제작 하기도 하였다. 그는 파리의 사교에 출입하면서 발레의 장치와 의상을 제작 하엿고 영화에 협력 하기도 하였다.1924년 브르통이 선두가 된 쉬르레알리즘 그룹에 지도자급으로 끼려고 했으나 좌절 당한다. 그후 파리의 생가에서 정주하다가 사망.
4.만.레이 [Man Ray,1890-1976]
미국 필라 델피아 출생, 미국의 사진가, 화가, 전위 사진의 선구자, 여러가지 일중(조형예술, 사진 영화, 문학,건축) 결국 하나를 최종적으로 선택 할수는 없었다.
그는 모든 재능에 뛰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1914-18년 까지 뉴욕의 아방가르드의 모임 장소 특히 알프렛,스티 글리츠의 화랑에 자주 출입 하다가 15년 그곳에서 마르셀 뒤샹과 만나 이후 다다의 모험적인 운동에 참가 한다. 16-21년까지 뉴욕에서의 시위운동이나 전람회에 참가하고 출판물에 협력 했다. 1919년에 3월에는 개인 잡지 (TNT)까지 발행 했다. 이어 1921년에는 뒤샹을 따라 파리에 가서 츠아라, 브르통, 피카비아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다. 파리 다다의 중심에 있으면서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 하엿으나 그의 관심 은 조형예술의 제작에 있었다. 다다시대를 통해서 상상력을 자유로이 구사 하기위해 그는 타블로의 제작을 중지 하고 사진[Aerograpy,Rayograme등]과 영화 [이성에의 회기,1923] 시각적 실험 기계 (뒤샹과의 협력),다양한 콜라주의 구성, 오브제등 온갖 실험을 하였다.그 중에는 쉬르레알리즘 운동에 참가하여 그룹의 공식 사진가가 되었다. 그러나 작품은 늘 아이러니와 다다특유의 불순함을 띄고 있었다. 결국 그는 사진가로서 피사첼를 쓰지 않고 직접 필름을 감광 시키는 레이요 그램이나 포토그램을 창시한 작가로 기억하게 되었다.
[영향]
다다가 현대 미술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많다고 해야 할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적 표현주의와 1960년대 신 사실주의를 거쳐 1970년대의 신 회화 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추상화에 이르기 까지 영향을 준다.
특히 다다는 초현실 주의(surrealisme)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데 초현실주의는 다다운동의 자연스러운 결과 라고도 할수 있다. 이것은 고정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이었고 논리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가려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가 그 소산이라면 이러한 다다 운동이 필연적으로 관련 지어졌을 것이다.
초기의 초현실주의자들은 다다운동에서 일종의 근거를 잡았고 다다의 정신과 그 표현 수단 또한 알고 있었다. 우연성의 이용이라는 것과 계획적이 없는 상태, 즉 [자동기술]과 모든 표현을 원점으로 환원 시킨다는 점 등이 다다 표현의 최상이었던 바 이것이 초현실주의에서 엿보이게 된다.
그리고 다다의 작가 중 마르셀뒤샹[Marcel Duchamp]은 현대 미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 영향은 어느 작품이 어느 사조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만큼, 다시 말해 작품 하나가 하나의 사조를 포괄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실제로 현대 화가 조각가들의 어휘 속에 자주 등장 하는 오브제[object]라는 말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 메이드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 표현주의의 관념적이고 과장된 논조가 지배적일때 야스퍼 죤스[Jsper Johns]와 라우젠 버그[Robert Raus-Chenberg]등 네오 다다[Neo-Dada]라고 불리워지는 일련의 미국 작가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작가들도 뒤샹의 예술개념을 찬양하고 받아 들였다.
이후에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의 액션 페인팅이나, 현대에 와서 앗상 블라쥬, 팝아트, 유럽의 신사실주의 등등 다다운동의 원리를 확대 발전 시켰으며 예술 양식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다가 이렇게 현대 미술에 끼친 영향은 대단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현대예술 영역의 확장'이다. 예술이 정형성을 과감히 파괴한 것이다.
그것의 확장은 예술의 개념에서 부터 재료에 있어서도 오브제의 등장을 가져 왔고 표현의 방식에 있어서도 엄청난 변화를 초래해 키네틱, 비디오 아트 등 토탈 아트의 개념으로 확대 시켰다. 이것은 곧 예술의 장식성, 회화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도 됐다. 설치와 개념 미술을 통한 조형적 미의식은 물론 미술을 사물의 세계로 끌고 나간 것이다.
초현실주의[surrealism]
[개념 및 전개]
초현실주의는 상상으로 부터 내용을 취했던 형이상학파 회화와 사물들의 우연한 배열을 강조 했던 다다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전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다이즘[Dadaism]의 연장선상에서 파악 해야 한다. 초현실주의라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다다이즘 시기 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까지 약 20년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적인 문학 예술 운동으로 그 기본을 형성하는 많은 요소들은 이미 1924년 이전의 다다 시기에 존재 해 왔었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는 다다가 시도 했던 것처럼 기존 예술을 파괴하는 데 중점을 두기 보다는 무의식적인 정신을 탐구 하고 설명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견해가 너무 오랫동안 전면에 나서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상상력을 해방 시켜 사람들의 과학적인 면보다는 시적인 면들을 더 의식 할수 있게끔 만들자고 했다.
초현실 주의자란 말은 기윰 아폴리네르가 그의 한 희곡을 설명하기위해 새로 만든 말이었다. 이 예술 운동은 1924년에 시작 되어 30년대 까지 계속 되었다. 초현실주의의 뿌리는 멀리까지 올라간다. 무의식의 정신세계에 대해 많은 글이 씌여졌던 20세기 초에 문학과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그 뿌리를 15세기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oh]까지 추적해 가장 깊은 욕망과 공포를 상징 함으로써 표현 햇기 때문이다. 그 상징 가운데 어떤 것은 전통적인 것이 었고 또 어떤것은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중세에서는 이러한 강한 감정들이 거의 표현으로 드러나는 정도 였음으로 단지 약간의 계기만으로도 그것들을 그림으로 가시화 시킬수 있었다. 보쉬의 뒤에 프로이드가 더욱 과학적으로 보여준 것을 자신의 시대에 모여 주었는데 그것은 상징이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연결체가 될수 있다는 점이다. 초현실주의는 인간, 사회질서, 윤리, 예술까지 부정하는 허무적인 다다이즘의 개념을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학과 헤겔의 변증법을 토대로 인간의 무의식 혹은 잠재 의식에 의한 상상의 세계와 결부시켜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했다. 이 운동은 앙드레 브르통을 주축으로 한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합리적인 월리와 이론적 토대 위에 그 개념을 체계화 시켜 나갔다.
초현실주의에서의 문학성은 배제할수 없는 어떠한 지적 태도의 조형 장르 일것이다. 물론 초현실주의 회화 전부가 문학의 범주 안에서 해석 할 필요는 없으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초현실주의 회화는 시적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의 공식적인 탄생은 1924년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비롯, 혁신적이고 혁명적으로 그 방법을 시도 해 나가게 된다.
이 선언은 초현실 주의를 의식적이고 지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순수한 상태로서의 심리학적 자동 기술법이라고 지칭 하면서 어떠한 도덕적 규범에도 구애 받지 않고 이성에 의하여 훈련된 어떠한 조정도 받지 않은 상태내에서 사고에 의하고 지배 받고 있다는 사전적 정의를 내리게 된다. 브르통에 의해 기초 되어 쉬르알레즘의 기관지에 발표된 [쉬르레알리즘 선언]등은 제1선언이 1924년에 출판 되었다. 그 근간을 이루는 사상은 인간 상상력의 해방이며 합리주의가 도달한 관념적인 막다른 길에 대한 반격과 타개였다. 그는 그 선언에서 "쉬르레알리즘이란 구두, 기술, 기타 온갖 방법으로 사고의 참된 작용을 표현 하려고 하는 순수한 성격 오토마티즘이다.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 없이 또한 미학적, 윤리적인 일체의 선입 관념 없이 행해지는 사고의 진실을 기록한것이다." 라고 주장 했다.
제2선언이 1929년에 발표되었는데 "예술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거의 자각하지 않는 미나, 애정이나, 재능으로 훌륭하게 빛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표현 되지 않았던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브르통은 프로이드의 학설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성의 통제가 없는 초현실성을 인정하여 이를 상상력이나 환각력에 의하여 무의식속에 표출 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초현실 주의 선언과 함께 브르통이 언급한 초현실주의자들로서는 엘뤼아르[Paul Elurard], 아라공[Louis Aragon], 페레[Benjamin Peree], 레라르[Francis Gerard]등의 문필가들이 있다.
1924년 급격하게 대두 되는 일련의 초현실주의적 회화에 힘입어 브르통은 1929년 '초현실주의 회화' [Le surrealisme et la peintere]라는 평문에서 초현실주의개념을 자동 기술법과 꿈 이미지[Dream image]의 두 요소로 축약 시킨다.
1924년 초현실주의 잡지에 등장하기 시작한 마쏭[A.Masson]의 오토매틱 드로잉[Automatic Drawing]은 작가 자신이 외부세계와 완전히 분리 시킨 상태에서 생겨나는 환상적인 추상 작품으로 에른스트의 해괴하게 춤추는 이미지 가능성을 실제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예가 되었다. 다다이스트들이 중요시 했던 '우연의 법칙'은 초현실주의에 의해 체계화 되어 자동주의라는 수단으로 승화 하게 되는데 이는 미로나 마쏭류의 작업을 말한다.
또 마그리뜨[Rene Magritte], 탕기[Yves Tangry], 달리[Salvador Dali]등은 서구의 아카데믹한 전통에 새롱느 주체 의식으로서 프로이드의 꿈, 이미지를 삽입시키는 등 초현실주의 회화 양식적 특징을 추상과 형상이라는 두 부류의 극단적인 양상을 유지하면서 발전한다.
그러나 추상성과 형상성에 관계없이 모든 초현실주의 회화는 상상적이고 시적이며 어떠한 주제를 은유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성격이 강했다.
미로나 마쏭, 에른스트 ,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등은 초현실 주의자들은 기본 이념에 있어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방법적으로 표현 하는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기법적인 측면에서 매우 다양한 표현 양상을 띠게 된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이 도달 하고자 했던 목표는 '상상력의 공간' 을 통해 작가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표현 하는데 있었다.
[기법]
초현실주의 회화 표현 방법
초현실주의는 깊숙히 숨겨진 정신 생활을 보다 절실한 현실이라고 보아 직관적이며 물질적인것에 의해 그 가능한 표현의 극한에 까지 이르도록 노력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어떤 새로운 기법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방법을 크게 나누면 오토 마티즘과 데페이즈망으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의 회화 표현 방법에는 우연성의 발견으로 발전된 오토마티즘은 언어 기능을 구사하여 유머와 릴리시즘을 방맹, 페레의
두 시인과 사랑을 테마로 해서 새로운 미의 기준을 창조한 폴 엘뤼아르, 콜라쥬 기법에 의해 초회화적 세계를 개척한 막스 에른스트와 독자의 편집광적 비판 활동을 에로틱한 욕망의 개발에 적용한 살바도르 달리 두 화가를 들 수 있다. 쉬르레알리스트들은 이런 기법에 의한 최초의 전람회를 1925년에 열었다. 그 후 1930년 일부 회원들이 마르크시즘에 접근 함으로서 운동은 분산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달리, 탕기, 에른스트등이 도미함으로서 운동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초현실적 표현 방법들은 무의식과 꿈 , 환상의 세계를 표현할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 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에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초현실주의 선언을 실제로 뒷받침 해 주었다.
1.오토 마티즘[Automatism]
자동기술법 또는 정신 자동법을 의미하며 이는 일체의 이성의 통제나 미적, 도덕적 선입관이 배제된 경지에서 행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의 한 방법이다.
미술의 영역에서는 자동적 소묘라 하여 외계의 대상과는 관계를 맺지 않고 무념 무상의 상태에서 순수하며 무한한 현상을 무의식의 정신 현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정신의 실체를 노출 시켜 주고 또한 그 정신을 사상과 분리 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초현실주의자들은 자유스럽고 논리적인 무의식의 세게를 진실되게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순수한 심리의 자동 현상을 중요시 하였다.
초현실주의에 있어서 오토마티즘은 다다이즘의 '우연의 법칙' 에서 발전 확대 되었으며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추상적 형태성을 부여 하였다. 에른스트에 으해 시작된 프로타쥬, 데칼코마니등도 오토마티즘의 일종이며 오브제도 그와 같은 것이다. 오토마티즘을 자신의 표현 방법으로 선택하여 화면에 정착 시킨 대표적인 화가로는 안드레 마쏭, 호안 미로, 이브 탕기등을 들수 있다.
2.프로타쥬[Frottage]
문질러 나타내는 표현 방법으로 에른스트에 의해 초현실주의 에 채용된 기법이다.
나무조각, 돌, 나뭇잎, 조마포등 용절이 있는 표면에 종이를 대고 목탄이나 연필등으로 위에서 문지르면 피사물의 무늬가 배껴진다. 이러한 효과를 조형상에서 응용한 수법을 프로타쥬라고 하는데 작가의 의식이 작용하지 않은 차원에서 우연히 나타나는 효과를 얻을수 있을뿐아니라 피사물을 몇번이고 바꾸어 놓고 이것들을 문질러 베낀 것을 의식적으로 조합하거나 거기에 나타난 무늬에서 힌트를 얻어 붓을 가하면 한층 흥미로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막스 에른스트는 이것을 뉴화에 바꾸어 사용하고 있는데 물질에 의해 촉발된 의식화의 물안한 이미지가 나타나 있다.
3.데칼코마니[Decalcomanie]
1935년 오스카 도밍게스가 이 기법을 발명 하였다고 하는데 그 방법은 유리판이나 아트지 드의 비 흡수성 소재에 그림 물감을 칠하고 거기에 다른 종이를 덮어놓고 위에서 누르거나 문지른 다음 떼어내면 기이한 형태의 무늬가 생긴다. 이는 무의식, 우연의 효과를 존중하는 비 합리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그러한 우연성 속에서 여러가지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는 흥미에 이끌려 제2차 세게대전 직전에 에른스트가 종종 이용한 이래 쉬르레알리즘의 작가들이 이 기법을 즐겨 쓰기 시작 하였던 바 후에는 중요한 표현수단의 한 방법이 되었다.
4.데뻬이즈망[Depaysement]
데뻬이즈망이란 '사람을 타향에 보내는 것' 또는 '다른 생활 환경에 두는 것'을 의미 한다.
초현실주의에 있어서 데뻬이즈망은 전위 전치법, 또는 병치등의 의미로 사용되어 지며 이는 물체나 영상을 그것이 놇여 있던 본래의 일상적인 질서나 배경, 분위기에서 떼어내 전혀 그 사물의 속성과는 연관성이 없는 엉뚱한 장소에 놓음 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외관상 이질적인 상황으로 인한 심리적인 충격을 일으키게 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함으러서 보는 사람의 마음속 깊이 은폐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 할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적인 데뻬이즈망의 원리는 입체파의 꼴라쥬로부터 출발하여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뜨 등과 같은 초현실 주이 작가들에 의해 더욱 발전 확대 되었다.
5.꼴라쥬[Collage]
'종이 붙이기' 로서 1910년경 피카소, 브라크가 시작한 큐비즘의 한 표현 형식을 말한다.
그림 물감으로 그리는 대신 포장지, 신문지, 우표, 기차표, 상표, 인쇄물 등 의 작은 것에서 부터 모래, 깃털, 철사 등에 이르기 까지 모두 발라 붙여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조리한 충동이나 아이러니칼한 연쇄 반응이 일어나도록 출발 되었다.
다다이즘에 있어서는 이 방법이 한층 대담하게 이루어 지면서 마침내 꼴라쥬로 발전 되었다. 그것이 초현실 주의로 전해 지면서 부터 그 응용의 영역이 더욱더 확대 되어 갔다.
꼬라쥬는 첫째로 비유적,상징적, 연상적인 효과를 거둔다. 찢어 붙이는 재료로는 잡지나 카탈로그의 오려내기, 사진이나 책의 삽화 단편 등도 채용 되었다.
이를 이용한 대표적 작가로는 에른스트가 있다.
[작가]
1.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스페인의 마드리드 근처의 피게라스 출생. 1921년 마드리드 미술 학교에 입학 하였으나 두번씩이나 퇴학 처분을 받고 끝내는 추방. 1929년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그는 상징적으로 오브제에 기여한 바가 많았고 더욱이 루이 부뉴엘과 공동제작한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 그의 그림 [기억의 고집], [만종] 1931-34 등 주요 작품을 발표. 그의 독창적인 회화 이론인 <편집광적 비판적 방법>을 창시 했다.->"회화란 구상적 비 합리성 또는 모든 상상적 세계의 수공적인 색채 사진이다."라며 그 특유의 정밀한 사실적인 기교와 편집광적 환각을 결합 시켜서 쉬르 회화에 하나의 전형을 이루었다.
그러면서 <편집광적 -비판적 활동은 객관적 우연을 조직하며 생성하는 하나의 힘이다. 또한 그것은 초현실적인 현상과 이미지를 하나의 고립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대로 체계적이며 의의있는 제 관계의 정돈된 전체 속에서 파악된다.>(1930-1940) 고 하는 그의 방법은 쉬르 회화를 거의 지배 하고 있엇다.
1937년 이탈리아 여행후 바로크 예술을 절충 한다. 그러면서 그는 늘 기발 하여 괴상한 자기 선전과 엉뚱한 스캔들로 또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나 그런 행위로 38년 제명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41년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을 연다.
고전 주의의 복귀를 주장한 51년 이내의 그림에서는 카톨릭 원자력 시대의 절충에 의한 현대 종교화 시리즈를 우주 공간적으로 그리기도 하고 [포르토 리카토의 성모,1950]60년대 이후 고향 피게라스에 정주 하면서 우주 돔을 본 뜬 화실에서 갖가지 기행을 연출하며 살다가 1989년에 사망 하였다.
2.안드레 마쏭[Andre Masson]
브리세로과 파리 미술학교에 조금 다니긴 했으나 거의 독학으로 회화를 습득하였다.1924년 쉬르레알리즘 운동에 있어서 최초의 화가 미로, 브르통 등과 친교를 맺음. 그의 오토매틱한 뎃생을 기관지[쉬르레알리즘 혁명]에 거의 매호를 장식 쉬르 회화의 효시를 이루었다.
1927년에는 해변가에서 [모래의 타블로]를 제작. [쥐스티노]의 초판본에 삽화[동물의 운명]의 연작을 비롯 다채로운 활동을 하였으나 1929년 에는 동인들과 같이 쉬르에서 이반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중중에 브르통의 책에 삽화도 그렸으나 종전후 귀국해서는 샤르트르의 실존주의 그룹에 어울려 활동, 마쏭은 쉬르레알리스트라기 보다는 오히려 몽환파[onirique]의 경향이 있으며 그가 젊어서 경험 했던 입체주의적 수법이 겹쳐 있어서 독자적인 몽환적, 주술적 화풍과 철학적인 사색의 오토매틱한 화가로서 중요시 되며 또한 영향력도 있었다.
3.호앙 미로[Joan Miro,1893-1983]
스페인 바로셀로나 출신. 미술을 시작한 이후 80여년 동안 다양한 세기초의 모든 운동을 거쳤지만 어느 한 사조에도 빠지지 않고 자기 나름의 독특한 세계를 창출 했다.
그래서 미로는 언제 어디서나 미로 작품임을 곧장 알수 있을 정도로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개척햇다. 또한 금세기 초의 거의 모든 작가들이, 또한 스페인의 대부분의 화가들이 인간의 고뇌, 비극과 쓸쓸한 인생, 어두운 부분을 주제로 삼았다면 미로는 유일하게 인생을 즐겁게 표현 했다. 미로는 동심과 유아적인 표현 방식 작품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즐겨 찾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풍부한 공상, 강렬한 형상, 미래 지향적 암시, 한없이 밝은 너털 웃음 등의 인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감을 주어왔다.
특히 미로의 미술은 환상적으로 표현 되고 있다.미로가 처음 바르셀로나 성 루카 미술 학교에 입학 했을때 그의스승 호세 파스코는 눈을 감고 물체를 만지면서그 촉감으로 뎃생 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이 촉각적인 데생의 기법이 미로의 예술을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과 같은 환상적이고 철학적인 예술 작품을 이룩해 놓았다.
피카소, 달리 등 재능 많은 스페인 출신 화가들이 조각을 많이 햇던 것 처럼 미로 역시 조각에 조예가 깊었다. 작가들에게 있어서 조각은 회화로 부터 조형성을 찾아가는 작업으로서 회화에서 옮아가는 한 중요한 과정으로 볼 수 잇겠지만 미로의 조각 작품은 그 자체로서도 완성도와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24년 파리에서 초현실 주의의 일원이 된 미로는 환각적 오토마티즘적인회화를 거쳐 오브제와 꼴라쥬를 시도하게 된다. 초현실주의에서으 인간의 욕망을 축으로 하여[벌거벗은 인간] 과 [벌거벗은 물체] 를 지향 하면서 벌거벗은 물체의 개념을 '오브제'라 이름 지었다. 이들은 기성품의 오브제 외에 수학적 오브제(구성된것), 자연의 오브제(돌이나 나무뿌리), 재해의 오브제(불타거나 부서진것)등을 사용 하였다.
미로는 유아적 천진 난만한 성격에 절묘한 기술이 매치된 시적 조각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나무, 조개 껍질,깃털, 돌등을 모은 오브제 였다.
4.막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초현실주의자중 새로운 기법의 창안에 아주 큰 공헌을 했다.
독일 쾰른 근교의 브뤼르에서 출생 하여 파리에서 사망햇다. 본 대학에서 철학을 배우고 이때부터 피카소와 키르고의 작품에 관심을 마케의 지도하에 표현주의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 함. 1913년 살롱 도톤르에 작품 첫 출품. 1919년 미술계의 동향을 알기위해 폴 클레를 방문 하여 다다 간행물을 전함 (다다센터를 만들고 자극 받아 제1회 다다 전시회를 개최)
1921년 자신의 꼴라쥬, 데칼코마니 작품이 호응을 받자 쉬르알레스트의 시인들과 교우를 맺음.1924년 쉬르레알리즘 운동의 대표적 화가로 활약 1925년 프로타쥬 기법을 고안. 1930년 파리 미술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라 달리와 부누엘이 제작한 [황금시대]라는 영화에 출연 하기도 함. 1936년 뉴욕 현대 미술관이 기획한 [환상적 미술 다다와 초현실주의] 전에 참여 -->이때부터 초현실주의 그룹에 점차 환멸을 느끼기 시작 한다.
1938년 그룹 탈퇴. 1946년 여류 화가 타닝과 결혼 ,아리조나에 거주 하는 동안 사막속의 새와 사람을 그려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에서 회하 대상을 수상함 .2차 대전중 독일군이 진격해 오자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가서 뉴욕과 시카고에서 전시화를 가졋고 브르통, 뒤샹과 함께 [V.V.V.]이라는 잡지를 발간 했다.
[영향]
여기 서술한 내용은 초현실주의의 영향보다는 지금의 초현실의에 대한 일종의 생각이라고 할수 있다. 왜냐면 아직도 초현실주의의 작업은 계속 이어지고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전(1950-60년대)에는 쉬르레알리즘은 운동으로서는 비록 하양길에 있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정신 상태로서 지금도 살아 있다. 이젠 아무도 이 운동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누구나가 거기에 참가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쉬르레알리즘은 사라졋는가? 그것은 이제는 여기저기에 있다고 하는것이 아니라 어디든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유령이며 빛나는 망령이다. 이번에는 쉬르레알리즘이 그 명칭에 알맞게 초현실적으로 된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 ,방화 조치.)
현실적으로 1966년 다다의 부정적인 몸부림이 전통을 다 털어버린 알몸에다 프로이드 정신 분석과 그리고 중간에 트로츠키즘의 세계혁명론-예술적 인간 각성을 통한 - 을 가미해서 쉬르레알리즘을 한 몸에 구현한 앙드레 브르통은 70세로 장수 사망 하였지만 그 유산은 68년 5월의 파리 혁명에서 다시 그 마지막 사회의 불꽃은 계승자 쟝 쉬르의 잔당에 의해 일어 났다. 오늘날 쉬르 레알리즘은 전 세계의 대학 강의에서 20세기의 정신과 문화와 예술사조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방대한 [자료정리적인 계시] 의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