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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제 15 구간(기개재 ~ 큰덕골재)
1. 산행일자 : 2009년 2월 21(토)
2. 산 행 지 : 계당산(桂棠山, 580.2m) - 전남 화순
3. 출발일시 : 2월 21일(토) 04시
4. 출발장소 : 수원 월드컵경기장 정문 옆 여권민원실 앞
5. 산행개요(이양면의 자연)
이양면은 화순군의 남서부에 위치하며 대부분이 산지로 형성되어 있고 산의 골짝과 지석천 주변에 퇴적평야가 발달하고 있다. 평지는 특히 금릉리 주변에 넓게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 보성군 복내면과 경계로 예재 및 계당산(桂棠山, 580.2m)으로 경계되며 산줄기가 북으로 이어져 두봉산(斗峰山, 629.5m)이 있고 북쪽은 말머리재로 한천면과 나뉘어 있다. 남으로는 봉화산(烽火山, 484m)이 있어 보성군 노동면과 경계를 이루며 고비산(高飛山, 422m) 두고 장흥군 장평면과 구분된다.
하천과 증리에서 쌍봉리로 흐르는 내와 구례리에서 매정리로 흐르는 하천이 합해 지석천 상류를 형성하여 서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북으로 흐르는 초방천을 합하고 이양리에 이르러 청풍천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흐른다. 하천의 또 한갈래는 옥리에서 묵곡리, 장치리를 거쳐 강성리로 흐르는 내가 있는데 금능리 앞들에서 지석천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흐른다.
국도 29호선은 포장도로로 면의 서편 대부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이양리에서 동쪽으로 굽어 예재를 넘어 보성군 노동면으로 이어져 있다. 지방도 818호선은 금능리에서 동쪽으로 뻗어 강성리, 묵곡리, 옥리를 경유하여 보성군 복내면으로 이어져 있다.
경전선 철도는 품평리 들에서 오류리 이양역으로 이어지고 도림역을 거쳐 국도 제29호선과 비슷한 방면으로 예재터널을 지나 보성쪽과 이어져 있다. 면적은 군 내에서 가장 넓은 92.25㎢이다.
6. 산행 계획(일정 및 소요시간)
(1) 총 산행 거리 및 시간 : 약 25.9km, 12시간 20분 정도 소요
(2) 구간별 거리 및 주요 산 높이
개기재(290m,58번도로)--3.1km--계당산(580.2m)--1.7km--524m봉--1.6km--375m봉--2.7km-- 예재(29번국도)--1.4km--시리산(465.3m)--0.4km--봉화산(480m)--1.3km-봉화치--1.6km--가위재--0.5km--고비산(416m)--3.1km--큰덕골재(290m)--2.0km--군치산(412m)--0.5km--땟재(360m)--2.7km--숫개봉(496m)--2.2km--봉미산(505.8m)--1.1km--웅치(290m, 839번도로)
(3) 산행일정
① 산행 출발지(서밧재) 가는 길
수원(04:00) ∼ 천안논산간, 호남고속 ∼ 동광주IC(06:58) ∼ 화순(07:20/아침/08:10) ∼ 29번, 58번도로 ∼ 개기재(08:45)
② 산행 통과 지점 및 진행 시간(산행 과정)
개기재(08:50) → 무명봉(09:35/09:45) → 헬기장(10:10) → 계당산(10:20/10:30) → 523m분기봉(10:55) → 378봉(12:00/12:10) → 349봉/헬기장(12:40) → 예재(12:48/점심/13:35) → 465.3봉(14:15) → 봉화산(14:20/14:30) → 가위재(15:35/15:45) → 고비산(16:15) → 큰덕골재(17:00/17:10) → 군치산(18:00/18:10) → 땟재(18:20) → 숫개봉(19:20/19:30) → 봉미산(20:30/20:40) → 곰치(21:10)
③ 숙박지 : 개기재(20:30) ∼ 보성, 식사 및 숙박(21:10 ∼ )
곰치(21:30) ∼ 839, 820, 23번도로 ∼ 유치 ∼ 봉림 ∼ 835번 ∼ 금정 ∼ 영암, 식사 및 숙박(22:30 ∼ )
(4) 탈출로 및 편의사항
○ 이양면개인택시(061-372-6000), 녹차먹인돼지식당(061-372-9537),
○ 곰치모텔(061-373-8202), 청하식당(갈낙탕, 061-473-6993)
7. 산행 참가자 : 박봉하, 박상호, 설경자,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6명)
8. 날 씨 : 맑음(찬 기운이 살짝 얼굴을 스쳐가는 최상의 산행 날씨)
9. 산 행 기
[1] 會員들의 動靜
이번 산행(호남정맥 15구간, 개기재 ~ 곰재)은 약 25.9km로 12시간 20분이 소요된다고 하며 21시 10분에 산행 끝 지점 『곰재』에 도착하는 것으로 계획이 되어 있다. 4, 500m급 山도 8개를 넘어야 하고 오후 산행 때는 굴곡도 심하다. 그런데도 9명(산타, 강동규, 심마니, 노승애, 산향, 박봉하, 까치sla, 새둥지, 산악대장)이 참가 의사를 밝혔고 이튼 날 영암 월출산 산행에 합류를 하겠다는 대원도 있다. 모처럼 많은 대원들이 참여를 하는 산행이다.
2월 21일 산행 당일 03 : 00시 기상, 어제 꾸려 놓은 배낭을 다시 점검하고 박사장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03 : 45분, 박사장이 차를 운행하여 집 앞에 도착, 승차하여 출발지 경기도 여권민원실 앞으로 이동을 했다.
여권 민원실 앞에 도착해 보니 카페에 산행을 신청했던 몇 분 대원들이 보이지 않는다. 강동규사장과 안상경교장선생님은 개인 사정으로 참여 할 수 없다 하고 노부장은 저녁에 영암으로 온다고 한다. 결국 평상시 인원이 되고 말았다.
[2] 산 행 전
(1) 아침식사와 개기재로의 이동
04 : 05분, 출발, 겁나게 달려 07 : 20분경, 아침 식사 장소인 화순군 이양면사무소 옆에 있는 「녹차먹인돼지식육식당(전남 화순군 이양면 오류리 674-6 / ☎ (061)372-9537 / 주 메뉴 : 녹차먹인 돼지고기--->녹차와 참숯을 가축사료화해 돼지에게 공급함으로서 저지방, 저콜레스테롤의 최고급 육질의 기능성 포크)」에 도착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인아주머니,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녹차먹인돼지식육식당」에서 맛깔스런 아침식사를 한 후 주인아주머니의 넉넉한 인심과 정성으로 준비해 준 점심 도시락을 챙기고 『개기재』로 이동을 하기 위해 이양면개인택시(061-372-6000)를 불렀다. 박사장의 차는 지난 산행 때 계획했던『큰덕골재』아래에 있는「대덕마을」에 주차를 시켜 놓고 택시에 同乘해『개기재』로 이동을 했다.
(2) 쌍산의소(雙山義所)
대덕마을을 뒤로 하고 계곡으로 난 길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다보니 『쌍산의소(雙山義所)』라 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쌍산의소(雙山義所)』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있는 한말(韓末)의 의병활동 유적지로 1994년 1월 31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구한말 의병들이 왜경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던 창의소터로서 당시 호남의병뿐만 아니라 한말 義兵史에 빛나는 유적지로 국내에서는 이러한 유적이 완벽하게 남아있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며 의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1907년 3월 梁會一(1856 ~ 1908) 등에 의해 이곳 증리를 중심으로 쌍산의소에서 거병하여 능주, 화순, 동복일대에서 왜경과 전투를 벌이다 동복 도마재에서 패하기까기 의병들의 거점지로 이용되었으며 1908년 1월부터는 都大將 李白來( = 允善, 1862 ~1909) 를 주축으로 호남창의소가 설치되어 전남 동남부의 의병 거점지로 왜경과 전투를 준비했던 義兵寸으로 1909년까지 단독으로 또는 연합으로 왜경에 항전을 하던 곳으로 주요 유적지로는 무기를 제작하였던 대장간터(산33번지), 화약을 채취하던 유황굴(산172번지), 자연석으로 쌓은 의병성과 막사터(산13번지), 훈련장(산12번지), 호남창의소 본부 가옥(60번지) 등이 있다고 한다.
(3) 쌍봉사(雙峰寺)
표지판을 뒤로하고 잠시 더 가다보니 왼쪽으로 산사가 눈에 띈다. 사진으로 보았던 『쌍봉사(雙峰寺,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산741-1 번지(사동마을)』다.
쌍봉사(雙峰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다. 조선시대에는 대흥사의 말사였다고 한다.
절의 앞으로는 조선시대에는 중조산(中條山)이라 했던 계당산(桂棠山)이 있고, 뒤로는 야트막한 쌍봉산이 있다. 그래서 쌍봉사는 계당산에 있다고도 하고 쌍봉산에 있는 사찰이라고 하기도 한다.
쌍봉사란 절의 이름 또한 지형이 절의 앞과 뒤에 산봉우리 두개 즉, 쌍봉이 되므로 쌍봉사라 하였다는 설과 철감선사의 법호인 쌍봉을 따라 지어졌다는 설, 그리고 쌍봉리에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쌍봉사의 문화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대웅전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고 한다. 조선시대 중기에 지은 대웅전은 총 높이 12m의 정사각형 3층 건물로, 우리나라 목조 삼층탑의 모습을 한 유일한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1984년 화재로 불타 없어졌고, 1986년에 옛날의 모습대로 복원했다고 한다.
그 밖에 창건주인 철감선사의 부도와 탑비가 전한다. 국보 제57호인 부도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 유행하였던 이른바 팔각원당형 모습을 하고 있는데 세부 표현에 있어서 목조건축 양식을 충실히 본 떠 당시 건축기술의 한 면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며 또 부도 옆에 있는 탑비는 보물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양면소을 출발하여 『개기재』를 가는 도중 한말의병사에 빛나는 유적지인 『쌍산의소(雙山義所)』의 표지판과 신라 경문왕(861~876년재위) 때 철감(澈鑑)선사 도윤(道允, 798~868)이 창건했다는 『쌍봉사(雙峰寺』를 走馬看山으로 확인만하고 지나쳤다. 정맥 산행도 중요하지만 잠시 시간 여유를 갖지 못하는 아쉬움이 너무 크다.
[3] 산행 출발의 상황
08 : 35, 오늘 산행의 들머리 『개기재』에 도착해 택시를 돌려보내고 배낭을 챙겨 宜寧 南氏 墓碑를 지나면서 26km, 12시간 산행 행보를 내디뎠다.
개기재 절개지가 급경사라 오르는 것이 쉽지 않은데 오늘은 2시간 단축 산행이라며 시작부터 뛰는 걸음이다. 단숨에 개기재 절개지 상단을 지나고 또 급경사 무명봉에 오른다. 평소 걸음으로 30분은 족히 걸어야 할 거리를 20여분에 주파를 한 것 같다.
잠시 휴식,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풀며 옷을 갈이 입고 다시 출발을 한다. 이 속도로 걸으면 2시간은 가볍게 당길 것 같다. 그런데 체력이 버텨 줄지 모르겠다.
[4] 계당산(桂棠山, 580m)
무명봉을 지나면서 완만한 능선 길로 이어진다. 수월한 길을 걷는다 했는데 빽빽하게 들어찬 철쭉과 억새, 그리고 싸리나무 등이 이유도 없이 뺨을 후려친다. 참 고약한 길이다.
뛰는 걸음으로 걷기를 7, 8분, 안부를 지나고 다시 10여분을 더 가니 임도가 나온다. 잡목을 헤치며 봉 하나를 오르니 시야가 툭 터지는 헬기장이 나오고 바로 앞에 높은 봉이 솟아 있다. 오늘 산행의 첫 고비 『계당산』인 모양이다.
헬기장을 지나면서 길도 넓어지고 며칠 전 내린 눈이 나무 가지에 그대로 남아 목화송이 같은 눈꽃을 피웠다. 나무 가지에 조롱조롱 매달린 얼음 알갱이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금년 들어 처음으로 대하는 雪景이라 뛰는 걸음 잠시 멈추고 영롱한 보석을 연신 카메라에 담는다.
09 : 50, 계당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복내면 산악회」에서 설치한 정상 표지판(계당산 정상 / 산높이 580m, 등산거리 5.5km)이 있고 여러 개의 정맥 표시기와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시야가 확 터져 산 아래로 저수지와 마을도 조망된다.
휴식.
『雙峰寺(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66호로 지정)』와 한말(韓末)의 의병활동 유적지『雙山義所』가 자리 잡고 있는 『계당산(桂棠山 / 속칭 쌍치재)』은 전남 화순군 이양면 중리와 보성군 복내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본래 「중조산(中條山)」이었으나 현재는 계당산(桂棠山)이라 부르고 있으며, 신라 말 『雙峰寺』를 창건한 철감(澈鑒) 선사와 제자 징효(澄曉) 선사가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을 연 곳이라 하여 「사자산(獅子山)」이라고도 부른다. 오래 전부터 현지 주민들은 계당산 일대를 가리켜 「쌍산」이라 했는데 언제부터 『계당산』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계당산』중턱에 위치한「증리(甑里)마을」을 「시리적굴」이라 부르며 마을이 시루(시루 甑)처럼 생겼다 하여 「증동(甑洞)」이라 부르는데 「증동마을」은 동. 서. 북으로 산으로 둘어 싸여 있는 산간으로 동쪽으로 계당산이 있으며 계당산 아래에 왕피골( 옛날에 왕이 피난하였다고 전함)이 있다. 동쪽으로는 보성군, 서쪽으로는 사동마을, 남쪽으로는 서원동마을, 북쪽으로는 옥리 상촌마을이 있다.
산악 마라톤 대회라도 하듯 『개기재』를 출발하여 정신없이 『계당산』정상에 오르라 진맥진이라 느긋한 휴식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늘 그렇듯 10여분이 지나자 실실 배낭을 지고 일어선다.
[5] 『예재』가는 길
계당산을 출발하여 10여분 후 봉 하나를 오른다. 계당산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철쭉을 비롯한 잡목이 앞을 가려 뛰는 걸음의 발목을 잡는다. 약 20여분 후 능선이 분기하는 523봉에 올랐다. 523봉 이후부터는 고도표에 표시된 대로 잠깐 잠깐 짧은 봉을 오르내리며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안부를 지나자 급 오름 봉이 버티고 있다. 378봉이다. 시계를 보니 11 : 00시를 막 넘고 있다. 점심 식사 장소로 계획된 예재까지는 약 40분 더 진행을 해야 할 것 같다. 다소 지쳤지만 점심시간을 이용해 충분한 휴식을 가질 수 있고 허기진 배를 채워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선두를 따라 간다.
[6] 전설 속으로 사라질 『예재』
378봉을 뒤로한지 약 5분, 안부에 내려섰다. 고도표에 『남덕동 사거리』라 표시되 있다. 378봉 능선을 지나오며 좌측으로 보였던 저수지(학동저수지?)로 내려가는 안부인 모양이다.
안부를 지나 잠시 더 진행을 하니 편백나무 숲이 나온다. 호남정맥 산행을 하면서 가끔 대하는 수종이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 좀 더 진행하여 오른 곳이 헬기장(349봉)이고 2, 3분 더 가다보니 이동 통신 중계 탑(11 : 40분경)이 우뚝 솟아 있다. 통신탑에서 5분여를 더 내려가니 2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예재』다.
『예재』는 전남 화순군 이양면과 보성군 노동면을 이어주는 29번 국도상의 고개로 「예재터널」이 개통됨에 따라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도로가 되고 말았다.
http://news.chosun.com/의 記事에 따르면 「익산지방국토관리청은 22일 "확장 공사 중인 29번국도 가운데 5.5㎞에 달하는 보성읍~예재터널 구간을 2009. 1. 23일 오후 4시부터 부분 개통 한다."고 밝혔다. 현재 4차로로 확장 중인 보성읍~화순군 이양면 구간(10.14㎞)의 일부를 설 연휴 차량 혼잡을 대비해 조기에 개방하는 것이다.
익산관리청은 "이번 부분개통으로 29번 국도가 보성읍 우회도로와 직접 접속돼 광주에서 녹차 밭까지 가는 길이 약 10여분 단축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확장 공사는 6월 마무리된다.」라고 했다.
지금도 차량 통행이 없는데 6월 「보성읍~화순군 이양면 구간(10.14㎞)」이 마무리 되면 『예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전설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 생각된다.
[7] 『시리산(465.3m)』정상
『예재』포장 도로를 가로질러 완만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다소 지쳐 있는 상태라 걸음 속도도 둔해진다.『예재』를 출발하여 10여분, 다소 급 오름 능선 봉(온수산? / 표시 없음)에 올라보니 우측으로 벌목된 산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를 잘라낸 탓으로 시야가 터져 눈이 시원하다. 봉우리에서 모처럼 주변 경관을 살피며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다 안부에서 다소 급한 경사면을 오르면 山竹밭이 나오고 다리에 힘을 불끈 주고 올라선 곳(12 : 16분경)이 삼각점이 있는 『시리산(465.3m)』정상이다. 잡목만 무성할 뿐 별 특징이 없다.
[8] 봉화산(465.3m)
시리산 정상을 뒤로하고 봉 두 개를 넘어 오른 산이 『봉화산(465.3m)』정상이다.
보성읍 앞쪽에 자리 잡은 『봉화산(烽火山)』은 해발 468m 밖에 되지 않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호남정맥의 줄기에 자리 잡은 산으로 왜적의 침투상황을 전달하기 위하여 고려 공민왕 때 봉화대를 축조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東으로는 고흥의 정기산 西쪽으로는 장흥의 천관산과 억불산 봉화대와 상응하여 보성군 관아에서는 봉화불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출전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름으로 보면 봉화대를 설치한 흔적이 분명 있을 법 한데 넓은 공터로 특별한 시설물의 흔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시계를 보니 12 : 30분이고 먼저 온 대장과 장부장이 코펠과 버너를 꺼내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예재』에서 하기로 계획한 점심을 한 시간 더 진행하여 하게 된 것이다. 오전에 한 시간 빨리 진행을 했고 오후에 한 시간을 앞당기면 어둡기 전에 목적지『곰재』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산행의 점심 별미는 장부장이 집에서 3일간 끓여 육수를 만들고 ‘고사리’와 고기를 듬뿍 넣어 맛을 낸「육개장」이다. 아침「녹차먹인돼지식육식당」아주머니가 마련해 준 饌 만으로도 족한데 맛과 정성이 듬뿍 담긴 뜨끈한 육개장을 곁들이니 錦上添花다. 삼겹주물럭이 있었다면 더 좋겠다는 윤사장! 입맛을 핑계 삼아 노부장의 산행 불참을 은근히 아쉬워한다. 함께하면 즐겁고 빠지면 허전해 하는 것이 산행을 함께 해온 한배 산꾼들의 情인 모양이다.
[9] 『가위재』와 『연화리(蓮花里)』
점심 식사 시간의 휴식과 즐거움도 잠시, 윤사장, 오후 산행도 한 시간을 앞당기겠다며 식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배낭을 챙겨 일어선다. 대장과 윤사장, 장부장은 계획대로『곰재』까지 완주하기 위해 서둘러 출발하고 박사장, 설부장과 함께『큰덕골재』에서 중간 탈출을 하기로 하고 좀 더 쉼을 취하고 『큰덕골재』로 출발을 했다.
봉화산 정상을 출발하여 우측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가니 산죽 밭과 큰 바위가 나오며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큰덕골재』에서 산행을 끝내기로 했기 때문에 시간에 쫓길 이유도 없고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빨리하지 않아도 된다. 만만디다. 따뜻한 햇살을 머리에 이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산 능선을 걷는 걸음이 너무 가볍다. 그러면서도 허전한 것은 계획된 구간을 완주하지 못한데서 오는 아쉬움이리라.
고만 고만한 산봉과 몇 개의 안부를 지나니 돌무더기가 나온다. 『가위재』에 도착(14 : 10분경)한 것 같다.
『가위재』는 화순군 이양면 연화리와 장흥군 장평면 진산리를 넘나들던 옛 고갯길로 지금은 사람 왕래가 거의 없는 듯 가지가 무성하게 뻗은 나무 한 그루와 성황당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雜木에 덮여 있다.
『가위재』성황당 터를 지나 1분여를 더 진행하니 넓은 임도가 나온다. 연화리와 진산리를 연결시켜 주는 도로인 모양이다.
휴식을 취하며 지도를 꺼내 보니『가위재』에서 우측으로 잠시 내려가면 『연화리』가 있다. 화순군의 지명유래와 풍수지리에 따르면 「연화리(鳶花里)」는 ‘연소형국(鳶巢形局)’으로 연화동 뒷산이 제비(燕)가 알을 품고 있는 연소지(鳶巢地)가 있다고 하며 옛날 어느 名僧이 이 고을에 ‘연화도수형국(蓮花倒水形局)’이 있다고 하면서 이 명당에 묘를 쓰면 大成할 것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게 됨에 따라 마을이름을 「연화리(蓮花里)로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연화리에는 「날아온 명주베」에 관한 이야기가 傳해 오는데 朝鮮 純祖 때 「黃基源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교육열과 본인의 학문에 대한 열의로 과거에 나가려 하였으나 노자는 물론 지필묵을 준비할만한 처지가 못 되어 근심하였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가으재(가위재)』로 나물을 캐러 나섰는데 홀연히 돌풍이 불어와 명주 베 4∼5필을 논두렁에 떨어뜨리니 이를 신기하게 여기고 가져다가 아들의 옷을 지어 입히고 지필묵대를 준비하여 과거에 나가게 한 바 廷試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다고 한다.
[10] 고비산(高飛山,422m)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임도 절개지를 치고 올라 급경사를 이룬 산으로 올라붙었다. 산 높이도 만만치 않다. 오후 산행의 첫 고비『高飛山』인가? 다리에 힘을 주고 숨을 몰아쉬며 약 9분여를 빡시게 산봉을 올라보니(14 : 35분경) 시야가 툭 터진다. 박사장, 지도를 꺼내보더니 『고비산』정상이란다. 정상 표지판도 있고 정맥 표지기도 여럿 달려 있을만한데 별 특징이 없어 쉼 없이 앞에 보이는 산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 잡목이 앞을 가려 진행이 어렵다. 『고비산』직전봉을 뒤로한지 8분여, 사거리 안부를 대하고 墓群을 지나 峰에 올랐다가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峰 하나를 올라보니 그곳에 『고비산(高飛山,422m)』표지판이 나무에 매달려 있고 능선을 따라 길게 뻗은 방화선이 눈에 들어온다.
『고비산(高飛山,422m)』화순군 이양면과 장흥군 장평면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새가 높이 난다.」는 의미를 지닌 산이라고 한다.
[11] 큰덕골재
고비산에 올라 정상 표지판을 확인하고 억새와 잡목을 헤치며 방화선 길로 접어들었다.
15 : 40분, 방화선 능선 지점에서 휴식을 취하고 진행하다보니 완주 팀들의 발자국 흔적이 이어져 있다. 흙에 남겨진 足跡으로 보면 좀 전에 지나간 것 같다. 지금쯤 『군치산』오르고 있거나 정상쯤 다다랐으리라 어림을 해 보며 左右前後로 길이 훤하게 뚫린 방화선 능선을 따라 산책을 하듯 걸음을 옮겼다.
16 : 00시, 『큰덕골재』에 도착을 했다. 넓은 임도로 「副護軍竹山安公正宅之墓」碑石을 세워 놓은 곳으로 정맥 표지기가 여러 개 나무에 매달려 있다. 우리는 이 고개 마루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아침에 주차를 해 둔『대덕마을』로 1.2km를 내려가면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하게 된다.
『큰덕골재』는 화순군 이양면과 장흥군 장평면을 이어주는 고개 마루다. 지난 산행 때 이곳『큰덕골재』에서 산행을 끝내고 『대덕마을』로 내려가는 것으로 계획이 되 있었는데 내려오면서 보니 차량통행은 가능하지만 군데군데 길이 파여 승용차를 운행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 같다. 계획대로 진행을 했더라면 오늘 1.2km를 걸어 올라와 산행을 해야 했기 때문에 산악대장이 계획을 변경하여 『천관산』산행을 한 것이 현명하게 판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12] 대덕마을(초방리2구)
16 : 20분경,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시간 여유가 있어 봄나물이나 한주먹 뜯을 요량으로 논으로 들어서 보니 냉이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 見物生心이라 스틱으로 땅을 파고 냉이를 캐니 금방 비닐주머니가 가득하다.
16 : 30분, 흡족한 마음으로 『대덕마을』에 도착하여 「초방리2구 경로당」옆에 설치된 수돗물로 세수를 하고 냉이의 흙을 씻기 위해 마을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했다. 시골의 넉넉한 인심이라 쓰던 그릇과 고무장갑까지 빌려 준다.
凉風亭과 느티나무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정경이 넉넉한 인심을 베푸는 아주머니만큼이나 아늑해 보인다.
[13] 곰재(熊峙)
16 : 50분경 『대덕마을』을 출발하여 완주팀이 도착할 『곰재』로 이동을 했다.
17 : 10분, 『곰재』에 도착, 휴게소에 들려 어묵꼬치에 이스리를 마시며 완주팀을 기다렸다. 이스리 세병을 마시노라니 완주팀이 휴게소 문을 밀고 들어선다. 시계를 보니 19 : 10분이다. 산행 시작부터 뛰는 걸음으로 걸은 보람이 있어 계획된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앞당겨 산행을 끝냈다. 그동안 산행으로 다져진 저력이 여실히 드러난 순간이다.
[14] 산행 마무리
완주팀이 도착을 하자 곧 바로 영암으로 이동, 20 : 30분경 영암 외곽지역 도착 해 월출산 산초갈비집에서 저녁식사(전남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414-1 ☎ 061-471-2800-1, 010-9018-3033, 신선주)겸 산행 뒤풀이를 하는 것으로 호남정맥 15구간 산행을 마쳤다.
[참 고 자 료]
1. 군치산(414m)
[1] 전남 화순군 청풍면과 장흥군 장평면 경계에 있는 산
[2] 화순군 청풍면 상신풍마을(上新豊) 「신석2리」
① 지명유래
신석리(新石里)의 지명은 신풍(新豊)의 신(新)자와 독재(石峙)마을의 독석(石)자를 각각 취하여 신석리라 하였다.
신석리는 석치마을, 상신풍마을, 하신풍마을, 회수정마을, 조항리(鳥項里)마을 등 5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조항리는 폐촌되었다.
상신풍마을의 뜻은 1,500여년경에 개안산 아래에 전주이씨가 터를 잡았으나 기근을 면치 못하고 살고 있었는데 이곳을 지나는 과객이 이씨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터다운 터가 아니라고 하면서 현 마을 터를 가르키며 이곳에 터를 잡으면 풍요롭게 살것이란 말을 남기고 가자 과객이 일러준데로 이곳에 새로운 터를 잡아 풍요롭게 살아간다는 뜻으로 신풍이라 했다고 전하는데 위쪽에 있다하여 상신풍이라고 한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능주목(綾州牧) 서면(西面), 1867년 대동지지에는 능주목 웅남면(熊南面), 1895년에는 나주부(羅州府) 능주군(綾州郡) 신풍면(新豊面),1896년에는 전라남도(全羅南道) 능주군 신풍면(新豊面),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능주군 신풍면 신풍리(新豊里)로 나오며, 1913년 능주군명을 화순군(和順郡)으로 변경하면서 화순군 신풍면 신풍리(新豊里),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 세청면과 신풍면을 통합하여 청풍면(淸豊面)으로 변경하면서 화순군 청풍면 신석리(新石里)(석치리, 조항리,신풍리)로 편입되었다. 현재 신석2리이며 하신풍과 함께 1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② 마을형성
상신풍마을은 동으로 지석천이 흐르며 그 너머로 깃대봉이 자리하고 서쪽과 북쪽으로는 옥녀봉 줄기가 가로막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천변에 약간의 평지가 있다. 마을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1500여년경 전주이씨가 개안산 아래에 터를 잡고 살다가 지나던 과객의 말을 듣고 현재의 터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후 전주이씨, 수성최씨, 신안주씨, 제주양씨, 광산김씨, 김해김씨가 차례로 입향하였다.
1850년경 전주이씨 李成春(1825∼1892)이 해남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1915년경 전주이씨 李大燮(1889∼1975)이 장흥 두봉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동쪽으로는 회수정, 서쪽으로는 석치마을, 남쪽으로는 이만리 강촌마을, 북쪽으로는 청룡리 안터마을이 있다. 지방도 제839호선이 남→북→동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③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 옥녀봉(玉女峰, 409.9m) : 산의 형태가 한 여인이 누워 있는 형태라 이렇게 부른다.
⊙ 절터 : 신풍 동북쪽 절터골에 절이 있었다.
⊙ 산,등 : 옥녀봉, 숫개봉, 군치산, 깃대봉, 개안산
⊙ 들 : 민안들, 개양들, 집앞들, 춘쟁이, 대포리, 초장배미, 시구배미.
⊙ 골짝 : 선박골, 중산골, 바람골, 뒷골, 절터골.
⊙ 터 : 절터, 독삼굿터, 사기점터.
2. 뗏 재
[1] 화순군 청풍면 회수정마을(廻水亭,새목,鳥項)에서 장흥군 장평면 복흥리 복흥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2] 뗏재(群峙) : 옛날에 기러기 떼가 몰려와서 이렇게 부른다고 전한다.
[3] 화순군 청풍면 회수정마을(廻水亭,새목,鳥項) 「신석2리」
① 지명유래
○ 신석리(新石里)의 지명은 신풍(新豊)의 신(新)자와 석치(石峙)마을의 돌석(石)자를 각각 취하여 신석리라 하였다. 신석리는 석치마을, 상신풍마을, 하신풍마을, 회수정마을, 조항리(鳥項里=새목)마을 등 5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조항리는 폐촌되었다.
○ 회수정마을의 뜻은 조항리에서 내려오는 물과 신풍마을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인 곳이라 하여 회수정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 조항마을은 원래 새목이라 부르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조항이라 하였다. 무등광업소가 있는 골짜기에 있었으나 폐촌되었다.
○ 1789년 호구총수에는 능주목(綾州牧) 서면(西面), 1867년 대동지지에는 능주목 웅남면(熊南面), 1895년에는 나주부(羅州府) 능주군(綾州郡) 신풍면(新豊面), 1896년에는 전라남도(全羅南道) 능주군 신풍면(新豊面),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능주군 신풍면 조항리(鳥項里), 1913년 능주군명을 화순군(和順郡)으로 변경하면서 화순군 신풍면 조항리,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 세청면과 신풍면을 통합하여 청풍면(淸豊面)으로 변경하면서 화순군 청풍면 신석리(新石里)(석치리, 조항리, 신풍리)로 편입되었다. 현재 신석2리이며 하신풍과 함께 1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② 마을형성
회수정 마을은 동으로 지석천이 흐르며 그 너머로 깃대봉이 자리하고 서쪽과 북쪽으로는 옥녀봉 줄기가 가로 막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천변에 약간의 평지가 있다. 마을의 방향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전주이씨, 수성최씨, 신안주씨, 제주양씨, 광산김씨, 김해김씨가 차례로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③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 산, 등 : 옥녀봉, 숫개봉, 군치산, 깃대봉, 국사봉
⊙ 들 : 방아다리들, 회수정들, 소청굴들.
⊙ 골짝 : 소청굴, 탄광골, 백목안골, 도주골, 대밭모퉁이골.
⊙ 터 : 조항마을터, 탄광터, 송림사절터, 독삼굿터, 먹점터, 기와점터, 사기점터, 서당터, 물레방아터, 주막터.
⊙ 샘 : 동네시암.
⊙ 고개 : 뗏재(∼장흥군 장평면 복흥리 복흥마을).
[4] 장흥군 장평면 복흥리 복흥마을
○ 복흥리는 복흥과 압곡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장흥읍에서 약30km, 장평소재제에서 약9km 북쪽에 위치한 해발 약250m의산간마을이다.
○ 북으로는 해발 412m의 군치산을 경계로하여 화순군 이양면과 경계하고. 동으로는 진산리, 서로는 어곡과 경계하고 남으로는 내동리와 경계한다.
○ 복흥리에서 발원한 林川은 6.754m를 흘러 보성강에 합류한다. 옛날에는 뗏재와 큰덕골재를 넘어 화순 이양과 왕래를 빈번히 하였다.
○ 세대수 및 인구수 : 16세대.31명(남:16명,여:15명),2007년4월13일현재.
3. 수캐봉(496m)
[1] 전남 화순군 청풍면, 장흥군 장평면에 있는 산
[2] 강촌마을(江村) 「이만리」
① 지명유래
○ 이만리(二晩里)의 지명은 내만경(內晩경, 진전, 학송리, 너멍굴)과 외만경(外晩頃, 강촌, 이목동, 세류동)을 합하여 이만리(二晩里)라 하였다. 즉 이만리는 6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강촌(江村)마을의 뜻은 냇가에 위치하고 있어 갱변몰이라 부르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강촌이라 하였다. 큰비가 오면 마을 앞이 큰 강을 이루어 건너다닐 수 없었다고 전한다.
○ 1789년 호구총수에는 능주목(綾州牧) 서면(西面), 1867년 대동지지에는 능주목 웅남면(熊南面), 1895년에는 나주부(羅州府) 능주군(綾州郡) 신풍면(新豊面), 1896년에는 전라남도(全羅南道) 능주군 신풍면(新豊面),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능주군 신풍면 외만경(外晩頃)으로 나오며, 1913년 능주군명을 화순군(和順郡)으로 변경하면서 화순군 신풍면 외만경(外晩頃),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 세청면과 신풍면을 통합하여 청풍면(淸豊面)으로 변경하면서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二晩里)(내만리, 외만리)로 편입되었다.
② 마을형성
강촌마을은 동쪽으로는 깃대봉, 서쪽으로는 지방도 제829호선, 남쪽으로는 곰치재, 북쪽으로는 범바위산이 있다.
마을의 방향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입향성씨는 고려말에 이천서씨가 난을 피하여 처음으로 입향하였다고 전한다.
③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 망월봉 : 전쟁때에 장수들이 진지를 치고 망을 보면서 싸웠다고 한다.
⊙ 조리봉 : 마을 서쪽 2㎞지점에 조리형국이라고 전해지는 산이 있는데 조리처럼 생겼다.
⊙ 왕여굴: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여왕의 형국이 있다고 전해지며 남일장군의 동굴도 있다.
⊙ 범바우산 : 신석리와 이만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 산, 등 : 국사봉, 망월봉, 조리봉, 깃대봉, 숫개봉, 범바우산.
⊙ 들 : 곰골.
⊙ 바위 : 메산바위.
⊙ 골짝 : 왕여굴, 영녀굴, 모사굴, 통시굴, 지레댕기, 용문굴, 사착굴, 사기정굴, 세류굴, 배나무굴, 작은재굴.
⊙ 터 : 독삼굿터, 마을터, 배나무골 탄광터, 감남쟁이 주막터, 사기점터.
⊙ 쏘,방죽, 내 : 가재거리(합수거리).
⊙ 고개 : 곰재(∼장흥 장평 노리목), 작은재.
4. 봉미산(506m)
[1] 전남 화순군 청풍면, 장흥군 장평면에 있는 산
[2] 봉미산 : 마을 앞의 산으로 봉황의 꼬리와 같은 형국이라 하여 이렇게 부른다.
[3] 산의 위치 : 화순군 청풍면 석치마을(石峙,독재) 「신석1리」
① 지명유래
○ 신석리(新石里)의 지명은 신풍(新豊)의 신(新)자와 석치(石峙)마을의 돌석(石)자를 각각 취하여 신석리라 하였다. 신석리는 석치마을, 상신풍 마을, 하신풍 마을, 회수정 마을, 조항리(鳥項里) 마을등 5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조항리는 폐촌되었다.
○ 석치마을은 마을 뒤가 경사가 심하고 돌이 많은 독재의 이름을 취하여 독재라 부르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석치(石峙)라 하였다. 마을을 세분하면 동쪽,서쪽으로 구분된다.
○ 1789년 호구총수에는 능주목(綾州牧) 서면(西面), 1867년 대동지지에는 능주목 웅남면(熊南面), 1895년에는 나주부(羅州府) 능주군(綾州郡) 신풍면(新豊面), 1896년에는 전라남도(全羅南道) 능주군 신풍면(新豊面),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능주군 신풍면 석치(石峙)로 나오며, 1913년 능주군명을 화순군(和順郡)으로 변경하면서 화순군 신풍면 석치(石峙),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 세청면과 신풍면을 통합하여 청풍면(淸豊面)으로 변경하면서 화순군 청풍면 신석리(新石里)(석치리, 조항리, 신풍리)로 편입되었다. 현재 신석1리이며 2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5. 곰치(熊峙)
[1] 장흥군 장평면 화순군 청풍면의 경계로 839번 지방도로 / 마루금 초입에 " 호남정맥 등산로 입구" 라는 안내판도 설치 / 3~4분 거리, 휴게소와 함께 모텔, 주유소가 자리 잡고 있음
[2] 웅치의 위치와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① 위치 : 전남 화순군 청풍면 이목동마을(梨木洞,세류동,細柳洞) 「이만리」
②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 산, 등 : 국사봉, 망월봉, 조리봉.
⊙ 골짝 : 왕여굴, 영년골, 모사골.
⊙ 터 : 고려자기 가마터, 마을터(웃배나무골,작은재골)
⊙ 고개 : 곰재, 백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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