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목동 집은 우리 가족을 면목없게 만든 집이다.
2층집을 지으며 빚 보증을 서주었다가 결국 재판정에 서보기도 하고, 사람에 대한 불신도 얻었다. 늘 새집에 살던 우리가 유배길에 오르듯 시내에서 멀리멀리 이삿짐을 싣고 하늘이 가까운 면목동 산동네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고통스럽게 해주어 미안하다고 죽음으로 삶을 정리하고 싶어 우리가 없는 틈을 타 연탄불을 피워 올리다가 나에게 들켜버렸다. 그 순간부터 어머니를 내가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각인된다.
부정적 변화는 잔인하다. 그러나 떨어지는 공은 땅에 닿아야 다시 튄다는 것을 그 때 알았더라면 묵묵히 코 안다치게 빨리 떨어졌을 텐데, 어렵기는 하여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아 나에게는 그 시절이 죽음보다 더 어려운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부모가 계시고 아버지의 직장이 반듯하고 자식들이 다 대학에 다니는 집에서 사는 것이 한풀 꺾였다고 자살하였다고 하면 아마 세상이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고 싶었다. 그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붕이 낮고 겉모습은 초라해도 터가 넓고 하늘이 가까워 노을 지는 풍경을 만나게 되고 여태 만나지 못한 삶터의 사람들을 날마다 보게 되면서 나는 세상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애환과 접할 때마다 “미안합니다”를 뇌이면서도 흔적도 없이 어디로 사라지고 싶었다. 죽음의 종류를 그 때 생각해보았다. 생활의 변화로 일시적 우울증이 왔던가보다.
어느새 나는 알약을 사모으고 있었고 비오는 날이면 벼락맞아 죽으라고 우산도 없이 걸었다. 그래서 나는 IMF때 힘들어진 사람들을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잘 이해한다. 급작스런 변화는 서리맞은 풀처럼 얼어서 일어나기가 어렵다.
여태의 것을 포기하면 되었지 목숨까지 버릴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은 내가 안사는 것은 좋은데 부질없이 나의 죽음이 오해되는 것은 싫었다. “그 집 언니가 자살했대 라든가 시집도 가보지 않고 죽어간 딸년 생각,...의 것들이 더 부담스러웠다.
어려서 삶을 힘들어 하던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리에 섞여 놀리던 기억이 나를 괴롭혔다. 만나서 용서를 청하고 싶어 늘 마음에 두고 살다가 놀랍게도 종로3가에서 그 친구를 뒷모습으로 만났는데 용기가 없어 놓치고 말았다. 성찰의 시기라 하면 맞을 것같은 시절이었다. 보속하는 마음으로 직업청소년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며 나는 오히려 생명을 얻게 되었고 날마다 별보고 나가 별보고 들어오는 그 초라한 집이 좋아졌다.
그 때, 어머니에게 큰 딸은 구세주가 된다. 교통비도 아까워 할까봐 가짜 전보를 쳐서 고향으로 내려 보내 염소 한 마리를 그곳에서 드시게 하고 한 마리를 가지고 올라오게 하였다. 어머니는 두고두고 그 말씀을 하신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생긴다. 그 때 많이 잃고 많이 얻었다. 가족이 결속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상처날까봐 표현을 하지 못하면서 아픔이 깊어지기도 하였다.
나는 친구에게 아주 좋은 핑계거리를 찾아 집의 외모로부터 자유로와졌다. 친구들을 일부러 불러서 나의 현실을 드러내면서 자존심을 지키면서 길러지는 위선이나 과장을 막아내었다. 너무 일찍 하늘로 간 친구는 “그게 느이 부모의 집이지 너의 집이냐? 걱정 마 너는 이 담에 그렇게 안 살거니까. 믿어줄께. 그 때 잘 살라고 미리 겪는 거다.”
마치 도인같은 말을 한 친구가 얼마나 고맙던지 나는 그만 집껍데기로부터 해방되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그 곳에서는 많았다.
동네 아래 쪽은 부촌이라 그 길에 들어서면 으례 그 곳에 우리 집이 있는 줄 알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고시 준비생이 항상 버스에서 자리를 잡아주더니 하루는 우리 집이 구체적으로 어디냐고 묻는다. 빗물이 뚝뚝 듣는 언덕을 보란 듯이 가리키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어 주었다. 그는 그날 이후 일본으로 발령을 받아 간다는 말을 하고 버스를 타지 않았다. 아마도 외무고시에 합격했는가보다.
마음이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10년쯤 지나야 내면화되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때는 어려워도 단단히 각오를 하고부터 마음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세월 지나 오히려 누가 보아도 든든하리만치 안정이 왔을 때에야 내가 얼마나 가난하게 마음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한 10여년 여유를 누려야 그 여유가 안으로 스며들어 나를 부요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부터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지 않기로 한다.
가족 중 성인 4명이 남녀동등한 조건에서 벌어들였다. 처음에는 절망감에 시달리다가 오히려 긴장을 하며 일치감이 키워졌다. 어머니는 그때를 악몽인 듯 기억하지만 나는 인생의 반전을 가르쳐준 명당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어둠을 뚫고 빛을 바라며 뚜벅뚜벅 걸을 줄도 알아야지 한결같이 곱고 편한 길만 걸었다면 우리에게 인생의 저항력이 길러질 틈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터를 잡아 불하를 맡아 집을 지으려는 심산으로 들어간 그곳에서 나는 인생을 깊게 사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집의 변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어머니의 옷 품이 한 뼘이나 접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감당 못할 것 같은 아픔을 겪는다. 누가 그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모든 짐이 내게 얹히는 듯한 중량감으로 나는 질렸다. 그 때 조병화의 한 줄 싯귀를 만나며 나는 일어났다.
“포기한다는 것은 현명하다”
한 줄의 문장이 구원의 문이 되어주던 날, 과거의 나는 죽었다. 새롭게 누군가에게 희망이되어주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처음부터 이런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기에 희망이 되어주고 싶었다.
집이란 구체적으로 보여지는 곳이기에 집을 통해 자각이 들기도 쉽고 그 안에서 개인적 역사가 이루어져 골목으로 집이야기가 흘러다니기도 하지만, 아무튼 나는 정신의 자유를 누렸다. 결혼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집을 예전대로 회복시키는 것이 당면과제였다.
버스정류장에서 숨을 헐덕이며 올라가기는 어려워도 하늘의 별을 가장많이보았고 그 길을 내려오면서는 인생을 생각하였다. 그 곳에는 평생 구경하지도 못한 빈민의 생활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던 곳이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가 우뚝 우뚝 솟아있는 곳이지만 그 때에는 공동수도를 사용하였고 오밀조밀하게 들어앉은 집집마다 한 사연씩 짊어지지 않은 집이 드물었다.
도무지 나는 어떻게 저들이 살아가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팔려고 가지고 나가는 것을 몽땅 팔아서 용돈으로 쓰라고 하여도 성이 차지 않을 물건을 팔러나간다. 그런가 하면 하루가 멀게 아내를 구타한다는 사람을 길에서 만나도 너무나 착해 보여 그 집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인정하기 어려웠다. 국수를 뽑아 말리는 집 사람들은 그래도 일이 있고 아기를 업고도 팔면 돈이 되는 것 같은데 말단 세무서 직원의 집에 가면 화장대에 외제 화장품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산다며 우리집에 와서 나팔을 부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국가의 비상전화를 달아야 했다. 전화국 사람이 우리 집 앞에서 집을 찾지 못한다고 전화를 달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그 다음날 그들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일을 하였다. 지금 이 말을 하기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어도 그 당시에는 꼭꼭 찌르듯 아팠다.
세상의 모든 곳은 다 좋은 곳이다. 다만 그 곳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인생을 살찌우기로 치면 어느 곳에서건 챙길 것이 있고 돌볼 것이 보인다. 그곳에서 나는 높은 곳이 주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용마산을 뒤로 하고 있어 산의 맛을 바로 생활로 즐겼다. 밤이면 야경을 원없이 바라볼 수 있었고 그 집에서 산 이후 나는 낮은 곳에서 살고싶지 않았다. 뒷마당에는 해바라기가 고개를 높이고 있었고 깻잎이 울 안에서 향을 내었다. 막내동생이 한쪽 모퉁이에서 샌드백을 휘둘기도 하였고, 화약을 사다가 불꽃놀이를 한다고 하다가 눈썹을 태우는 일도 벌였던 곳이다.
어둠가운데 있을 때는 그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아무 것도 생각없이 살다가 지나고 나면 그 어둠이 훗날 얼마나 쉼이 되기도 하고 도움닫기의 힘이 되기도 했는지 알게 된다.
나는 살아온 인생에 대해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다른 여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볼 수 없었고, 내 인생에 비쳐지지도 않았다는 것이 죄스러웠다. 조금의 연민과 안쓰러움은 가졌을지라도 삶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기에 지난 삶에 대한 보속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배고파보지 않았고 부모 없어 보지 않았고, 직업이 없이 허덕이지 않은 세월 속의 시간에 대해 무어라 왈가왈부하는 것 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죽고싶도록 견딜 수 없어 한 뒷면에는 이때까지의 삶을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가까운 이웃을 들여다보면서 그 생각은 감히 말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았다.
나는 누가 묻지도 않은 내 인생의 보속으로 직업청소년 아이들의 야학을 맡았다. 구두를 닦으면서도 배우고자 하는 청년들의 눈동자는 돈 주고 배우는 학생들과 달랐다. 인생의 시작부터 부모가 없기도 하고, 사람인데 사람이라는 증명이 없이 사람만 있는 아이들도 만났다. 그들이 어느 곳에서라도 자리잡고 참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동참하는 ymca의 직업청소년학교 운영 팀에는 참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저들의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주고 입적을 해주기도 하고 직업을 알선하여 주기도 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하는 동안 나는 삶이 깨어나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들과 함께 밤을 밝히고 효창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올 때, 그들 가슴에 뜨는 별을 보았다. 그들에게 진정한 마음을 주었고 그들은 내게 참 사람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응답하였다. 직장을 알선해준 아이는 첫 월급으로 예쁜 거울을 사다주며 얼굴을 붉히기도 하였다.
한번 환경이 엎어지는 경험을 하였어도 정신은 시퍼렇게 살아났다. 우리 집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집채는 볼 품이 없어도 서울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좋은 터로 하늘과 가까워 하늘 마음을 선물로 받았다. 그 곳에서 거듭나는 인생을 체험하였다.
장소가 높아도 내려다보며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 같다. 최근 발표한 내 친구의 글에서 그것을 확인하였다. 늘 일반주택에서 살다가 고층아파트에 오니 세상 위에 군림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 같아 좋다고 술회하고 있다.
아픈만큼 큰다는 말을 실감하였다. 집이 좋아지면 타인의 시각은 이내 회복되지만 그곳에서 다친 마음은 머문 만큼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정리되었다. 어둠이 거의 없는 삶은 죽음과 가까이 닿아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집이 주는 초라한 고통이 정신적 고통이나 배고픈 고통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보호막 정도로 해석해버리면 주관적 행복은 박탈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 무엇을 담느냐의 문제였다.
집은 사람 몸과 필요한 물건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정신만 살아있으면 이내 금상첨화로 아름다워지고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다. 편리하고 안정감을 찾아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정신이 심장이라면 의복도 날개고 집도 날개다. 그러나, 정신을 황폐하게 방치하면 아무리 집이 달라져도 껍데기에 불과하다. 정신이 죽은 상태에서 집이 좋은 변화를 가져와도 그것은 날개를 다는 일이 되지 못한다. 공간은 꾸며진 주택조건을 넘어 위치와 환경조건의 영향또한 강하게 받기에 지나고나면 얼마나 그 공간에서 좋은 소프트 웨어를 따 담았는가가 관건이다. 공간의 기억을 더듬으며 웃을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축복의 시간인가를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