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궤도(金櫃圖), 조속, 1656년, 123.4 x 48.8cm, 비단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창강(滄江) 조속(趙涑)의 금궤도(金櫃圖)
최근 신라시대 마지막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경주월성 지구 발굴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나의 마음을 무척이나 설레게 하고 있다.
초승달 모양의 성이라는 뜻을 가진 월성은 2세기부터 신라가 멸망한 10세까지 8백여 년 동안 왕궁이 있었던 곳으로 인근의 첨성대, 황룡사지등과 더불어 신라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거라 추정된다고 한다. 건물터와 각종 유물이 땅속에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한국 고대사 유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힌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남벽 부근을 처음 파헤친 지 100년 만에 우리 손으로 실시하는 최초의 내부조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경주 월성 조사는 천년 고도 경주의 역사정체성을 규명하고 대통령 공약 사항인 ‘경주 역사문화도시 조성(왕궁복원)’의 이행을 뒷받침한다는 두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최소 40년의 발굴기간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행정적으로 보여 주기식이 아닌 정말 문화재를 사랑하고 후대에 훌륭한 자긍심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서둘지 말고 신중하게 발굴하는 안목이 필요한 것 같다.
이와 관련된 그림이 있어 소개한다.
금궤도(金櫃圖), 조선시대 사대부 화가 창강(滄江) 조속(趙涑,1595-1668)이 그린 그림 중에서 찾아보기 힘든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이다.
문인화가로 영모와 화조도에 뛰어난 재능이 있고, 산수화에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전해지는 산수화 작품은 없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우고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서화 수장가로도 유명하다. 조속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사헌부에 속한 종4품 장령(掌令)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사대부 화가가 궁정의 회화제작에 참여한 일은 드문 일이며 화원식의 청록산수 화풍으로 그린 점 역시 특이하다.
이 그림 위에 어제(御製)에 의하면 이 그림을 제작하라는 지시는 1636년(인조14) 봄에 이루어졌으나, 실제 제작은 20년 뒤인 1656년에 그려졌다. 그 이유는 1636년 가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흐지부지되었다가 20년 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알지가 금궤에서 태어난 설화를 다루면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순순히 나라를 넘겨주어 경순왕이란 시호를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인조가 여러 가지 시련으로 나라가 뒤숭숭하여 위기의식이 고조되자 신라가 멸망한 역사를 되새기면서 나라를 굳건히 보존하려는 교훈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제작을 지시한 것 같다.
신라의 김 씨 왕조를 열었던 경주 김 씨의 시조 김알지 신화를 그린 금궤도는 처음 보아도 화사하며 세련된 녹색과 청색으로 산과 나뭇잎을 표현한 청록산수화이다. 실제로 전해지던 이야기로 삼국사기(三國史記) 제1권 신라본기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9년(65년)의 기사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에 전해진다.
화면 위쪽에 어제(御製)를 김익희(金益熙, 1610-1656)가 다음과 같이 해서체로 적었다.
“이 분은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시조로서 금궤 안에서 그를 얻었기에 성을 김 씨라 하였다. 금궤는 나무 위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울고 있어서 보고 가져와 보니 금궤 안에는 남자 아이가 있는데, 석 씨의 뒤를 이어서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그의 후손인 경순왕이 고려에 들어오매 순순히 온 것을 가상히 여겨 경순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을해 다음해 봄 삼국사기를 보고 그리게 명령하였다. 이조판서 김익희가 교시를 받들어 쓰고, 장령 조속이 교시를 받들어 그렸다.”
김익희는 효종 때 문신으로 1656년 5월 이조판서가 되었지만 7월에 병으로 사직했으며, 12월에 사망하였다. 이로 미루어 그림에 글을 쓴 시기는 그가 이조판서로 있던 1656년쯤으로 여겨진다.
금궤도를 통해 역사의 정통성과 민족의 자긍심을 느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출처 : 한국 미의 재발견/이원복
정미영(rano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