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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해로(蘇海路)와 소해(蘇海) 노종룡(盧鍾龍)선생
譯者: 愚堂 盧 炳 德
Ⅰ. 머리말
광주북구 일곡마을은 광산노씨(光山盧氏)와 광산이씨(光山李氏)의 유서 깊은 집성촌(集姓村)이다.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광주의 토반(土班)인 광산노씨이다. 고려평장사(高麗平章事) 노만(盧蔓)의 22세손 노흔동(盧欣東)이 현 우치공원 맞은편에 있는 모산리에서 옮겨와 터를 잡았으며, 이보다 약간 후에 광산이씨 11세손인 이남(李楠 1603~1653)이 목포 달동네에서 옮겨와 살게 되었다한다.
이 고장 일곡동(日谷洞) 출신 소해 노종룡 선생은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한말(韓末)의 대학자(大學者)인 송병선(宋秉璿)과 최익현(崔益鉉) 두 선생과 함께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한 바 있으며, 학문(學問)이 높아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일제의 강압통치에 항거(抗拒)하기 위하여 후진(後進) 양성(養成)에 힘썼으며,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왜경(倭警)에게 붙들려 여러 차례 곤욕(困辱)을 치렀다. 이에 광주광역시에서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2009년 11월 19일 만주사(晩洲祠) 앞길을 소해로(蘇海路)라 명명(命名) 고시하였다. 이에 덕은(德殷) 송재성(宋在晟)이 찬(撰)한 선생의 행장에 근거하여 선생의 일대를 살피고자한다.
Ⅱ. 선생의 생애(生涯)
1, 가계
선생의 휘(諱)는 종룡(鍾龍), 자(字)는 운호, 호(號)는 소해(蘇海) 또는 농아(聾啞)라 칭한다. 광산노씨(光山盧氏)의 근원은 중국의 범양(氾陽)에서 출발하여 대대로 혁혁하였다. 고려 말엽 준공(俊恭) 호(號) 심계(心溪)에 이르러 지극한 효행이 있었으며, 아조(我朝)에 망복(罔伏)하였는데, 정종임금[恭靖] 때에 마을에 정려(旌閭)를 명하고, 절효(節孝)로 증시(贈諡)하여 사당을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고조 유광(有光)은 증(贈) 시정(寺正), 증조 필원(弼元)은 호 이소헌(履素軒)으로 문학(文學)이 있어 증(贈) 좌승지(左承旨), 조부 진권(鎭權)의 호는 모당(慕堂)으로 증(贈) 호조참판(戶曹參判), 부친 재규(在奎)의 호는 농암(聾巖)인데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어 감찰도정(監察都正)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일찍이 농암정(聾巖亭)을 지어 만년을 유유자적하였다. 모친 진주정씨(晉州鄭氏)는 석원(錫源)의 따님으로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芬)의 후예이다.
2. 출생
선생은 병진년(1856 철종7) 11월 3일 일곡리(日谷里) 집에서 출생하였다. 이에 앞서 모친의 꿈에 백룡(白龍)의 기이한 조짐이 있었는데,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이마가 반듯하고 얼굴은 옥과 같았으며 양손에 무늬가 있어 문자(文字)를 이루었다. 총명이 비범(非凡)하고 기품 이 단아하며 성품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워 예닐곱 살 때부터 어버이를 받들 줄 알아 성인(成人)처럼 엄연하였다. 집에서 공부를 시작할 무렵에는 교독(敎督)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능히 일과(日課)에 골똘하였다.
3. 수학(修學)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뜻을 오로지 하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동생행(董生行)을 법으로 삼아 낮에 밭을 갈고 밤에 글을 읽으며, 몸소 물고기를 잡고 나무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힘써 가꾸고 집을 다스려 산업(産業)이 조금 윤택해지자 분발하여 뜻을 다잡고서 책을 메고 나의 조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선생 문하에 수업을 청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얻어 듣고는 더욱 뜻을 굳게 하였다. 그 후 다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선생 문하에 수학[摳衣]하며 경의(經義)를 강질(講質)하여 자주 칭찬과 인정을 받았다.
4. 교유(交遊)
한 시대의 현덕(賢德)들과 두루 교유하여 우리 조부 심석재(心石齋)선생 같은 이를 높이 받들었으며,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ㆍ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ㆍ소산(蘇山) 안성환(安成煥)ㆍ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ㆍ황매헌(皇梅軒) 박노준(朴魯準)ㆍ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선생과 도의로 사귀어 심히 두터웠고, 또한 서울로 가서는 상서(尙書) 신기선(申箕善)ㆍ상서 이도재(李道宰)ㆍ상서 윤용구(尹用求)와 종유하며 강의하니, 제공(諸公)이 모두 사모하였다.
5. 선생의 기개(氣槪)와 성품
갑오년(1894)에 비류(匪類)가 창궐하자, ‘정도(正道)를 붙들고 사특(邪慝)을 내쳐야한다’는 말로 분별을 매우 분명히 하여 온 고을에 부르짖어 전파하니, 원님 이희성(李羲性)이 듣고 존경하였다.
을미사변(乙未事變)에는 송사(松沙)와 왜적을 토벌하여 국권을 회복하기로 은밀히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의리(義理)를 주창한 의사(義士) 신암(愼菴) 노응규(盧應奎) 선생이 진양(晉陽)에서 패하여 선생 댁에 숨어 3년 동안 함께 식사를 하였으나, 옆 사람이 알지 못 하였으니, 사람을 대함이 인후(仁厚)함을 상상할 수 있다.
을사년(1905)에 스승이 서거하는 슬픔[山頹之痛]을 당하여 가마기년복(加麻朞年服)을 입고, 정미년(1907)에 면암선생 상을 당하여 가마 3월복을 입었는데, 더욱 애통한 심정을 가눌 수 없어 뇌문(誄文)을 지어 각각 올리고 통곡하며 슬픔을 쏟았다. 세상일이 날로 어긋나 일본군대가 본교 명륜당에 병원을 세우고자 와서 지세(地勢)를 살피면서 공갈하는 짓이 보통이 아니었다. 선생이 가까운 친구 서헌(瑞軒) 안규용(安圭容)과 함께 의리(義理)를 들어 준열(峻烈)히 따지고 지엄하게 항거하자 적들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그 후 정미년 초에 고을에서 예전 풍속대로 지신밟기를 하려하자 선생이 큰소리로 저지하며 말하기를, “이번 변란에 철인(哲人)이 서거하였거늘, 이런 습속을 차마 행하겠는가?”하고, 정풍론(正風論)을 지어 그의 의지(意志)를 드러냈다.
6. 경술국치와 상소[封事] 사건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변고에 선생이 강개비분(慷慨悲憤)을 스스로 참지 못하고, 봉사(封事)를 지어 가슴에 품고 궐문으로 달려갔으나, 저지당하여 생각을 아뢰지 못하고 부득이 우체통에 투입하였는데, 그 소(疏)에 이렇게 말하였다.
“삼가 신(臣)은 시골에 엎드려 사는 일개 초망지신(草莽之臣)으로서 구중궁궐 하늘보다 높고 아득한 곳에 아룁니다. 가볍기 초개(草芥)와 같고, 또한 근본이 둔하고 학문이 얕아 문사(文辭)가 졸렬한 까닭에 지난 태평시절에 과거 공부를 못하고, 단지 농사일을 즐기며 이 목숨 마치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구구히 그만두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이윽고 저에게 명하기를, ‘사람으로서 사람 되는 도[爲人之道]를 다하지 아니함은 불가하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를 돌아보건대, 저의 나이 이미 옛사람이 도덕을 성취할 시기에 속하고 한편 몽매하여 아홉 길 산에 한 삼태기 흙을 붓는 격으로 아득하고 망망하였습니다. 다만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이 있기에, 35세 경인년(1890)에 비로소 책을 짊어지고 고(故) 좨주(祭主) 신(臣) 송병선(宋秉璿)을 좇아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知)、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도리를 대략 듣고, 계사년(1893)에 다시 고(故) 참판(參判) 신(臣)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받아 춘추(春秋)를 강(講)하였으나, 미련하여 순치(馴致)되기 어려운 관계로 함양(涵養)하고 성찰(省察)하는 공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어쩌다가 국가의 운명이 다난하여, 동학(東學)의 비적(匪賊)이 횡행하고, 을미화란(乙未禍亂)으로 이어지니, 통한을 어찌 말로 다하겠습니까. 전(前) 참봉(參奉) 기우만(奇宇萬)과 토복(討復)을 은밀히 도모하였으나, 하늘이 다시 신(臣)의 가정에 재앙을 내려 상란(喪亂)과 질고(疾苦)가 해마다 이어지고, 우만(宇萬)의 거사가 실패하자 사림(士林)이 의기를 상실하였습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라 하니, 묘당(廟堂)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의당 경척(驚惕)을 배가하여 보좌를 꾀해야 할 것이거늘, 뭇 소인배가 자리를 차지하여 재앙이 점차 자라났습니다. 곽개(郭開)、화흠(華歆)의 무리가 도적의 창자로 통하여 총명을 가려 선왕(先王)의 전범(典範)이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지고, 의관과 문물이 변하여 오랑캐가 되고, 금위(禁衛)는 무장을 해제하며, 무기고를 텅 비워 전국의 초병(哨兵)이 방어를 하지 못하도록, 5조(五條)니、7조(七條)니, 하는 조약(條約)에 이르렀으니, 어인 일입니까?
재신(宰臣) 중에 뉘우쳐 혹 목숨을 버리는 이가 있으며, 의사(義士)는 격분하여 빈주먹을 써보지도 못한 채 대부분 총칼에 죽거나 오랏줄에 묶이고, 또한 조용히 자결하는 자를 손으로 꼽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신의 아비는 연로한데다 울분으로 병을 더하여 형세가 심히 위급하니, 신은 형제가 적어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 두 스승이 연이어 순국(殉國)하였지만, 한길을 서로 따르지 못하고, 단지 원한을 품고 고통을 참으며 적막한 물가에 구차하게 목숨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터에 폐하께서는 유화(柔和)할 뿐 강극(剛克)이 없음에 소인배[狐鼠輩]들이 자의적으로 기망(欺罔)하고, 끝내 오백년 조종(朝宗)의 강토를 헌신짝처럼 버리게 하여, 갑자기 양위(讓位)의 조서를 내리게 하니, 이 어찌 충심에서 우러나 그리하였겠습니까? 5,7적(五七賊) 무리의 가식(假飾)에 불과합니다.
천지에 비춰보고, 귀신에게 물어본들 요ㆍ순(堯舜)의 양위가 과연 이와 같았겠습니까? 남의 군주를 속이고, 남의 나라 빼앗기를 고아나 과부를 농락하듯 하니, 이 불인(不仁)ㆍ불의(不義)의 무리를 잠시라도 부도(覆燾)의 사이에 용납케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득한 하늘이여, 그 끝이 어디인고! 접때 적이 폐하를 협박하여 보위(寶位)를 전하게 함은 실로 까닭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예성문무(叡聖文武)의 자질로 극(極)에 임한지 40여 년, 은위(恩威)를 함께 갖추어 엄중하니, 조정이 외복(畏服)하는 바이며, 생령(生靈)이 의대(依戴)하는 바이며, 열국이 신앙(信仰)하는 바입니다. 보위에 엄연한즉, 저들이 비록 흉특(凶慝)할지라도 감히 기롱하여 이에 이르겠습니까? 삼가 3천리 강토는 폐하의 강토가 아니라, 조종(朝宗)의 강토이며, 또한 조종의 강토가 이니라, 실은 2천만 생령의 강토이거늘, 몇몇 적신(賊臣)의 무리가 농락하여 남에게 줄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폐하께서 실제로 친히 주었다할지라도 심히 불가합니다.。
하늘에 계시는 조종(祖宗)의 영(靈)이 두렵지 않습니까. 2천만 생령의 구가(謳歌) 송옥(訟獄)을 모두 그들에게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순(舜) 임금과 우(禹) 임금이 피하지 아니한 것은 천하의 구가와 송옥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까. 조정으로 말할진대, 몇몇 적신(賊臣)을 제외하고는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환관ㆍ궁첩ㆍ서리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받들기 원하는 이를 기필코, ‘태황제폐하(太皇帝陛下)’라고 말하거늘, 폐하는 홀로 깊은 궁궐에 임하여 국내외 현상이 어떠한지를 살피지 아니하고, 앉아서 원수들이 바치는 것을 누리시니, 또한 ‘안락하다’ 말하겠습니까?
막중한 강토를 한사람의 우유부단 때문에 저들이 편탈(騙奪)하는 것을 놔두고 불문에 그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구천(句踐)은 회계의 치욕을 잊지 아니하여 마침내 포악한 오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전단(田單)은 즉묵(卽墨)을 사수(死守)하여 제나라를 온전히 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한 오늘의 계책은 군신상하(君臣上下)가 마땅히 치욕을 뼈에 새겨 죽을지언정 목숨을 돌보지 아니 할 것이며, 감히 스스로 주저하여 오늘을 허송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귀향한지 얼마 안 되어 광주경무소(光州警務所)로 부터 저들이 이른바, “상부(上部)에서 명령이 있었다.”고 하며 사령(使令)을 보내 구인하였다. 선생이 체포되어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과 하늘의 태양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다. 차라리 죽어 복수하리라.”하여 말 기운이 준엄하니, 적들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대개 전날의 상소[陳疏]가 주광(黈纊)에 도달하기 전에 적들이 열어보고 이토록 간악을 부린 것이다. 고을의 다사(多士)들과 여러 일가들이 달려가 주선하여 며칠 안 되어 석방되었지만, 이 어찌 선생이 다행으로 여겼는가? 그 늠름한 충의(忠義)는 사절(死節)한 제공(諸公)들에게 부끄럽지 아니할 것이다.
이로부터 문을 닫아 발길을 거두고, 세상과 서로 단절하여 농아(聾啞)라 자처하니,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공이 설(說)을 지어주었다. 기미년(1919)에 고종(高宗)이 승하하시자 선생이 북으로 향하여 통곡하고 죽고자 하였으나, 8십 노친(老親)이 병석에 있어 운신을 부축하는 일과 음식 공양을 맡을 이가 없어 분을 참고 그만두었다.
Ⅲ. 선생의 효행(孝行)과 목족(睦族)
자제에게 명하여 농암정(聾巖亭) 아래에 정사(精舍)를 짓고 소해정(蘇海亭)이라 편액을 걸었다. 노친을 봉양하는 틈틈이 늘 그곳에 거하며 경전[墳典]에 잠심하여 깊은 뜻에 골똘하였다.
학문이 더욱 진취하고 덕이 더욱 우뚝하니,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함으로써 서로 가슴에 우분(憂憤)을 품고 원근(遠近)에서 찾아온 학자가 많았다. 서로 인의(仁義)의 설을 강토(講討)하다가 충ㆍ역(忠逆), 사ㆍ정(邪正)의 분변에 이르러서는 일도양단(一刀兩斷) 하듯 하여 범접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부모 상을 당하여 슬픔이 예(禮)에 지나쳐 죽(粥)을 마셔 얼굴이 초췌하였다. 비록 한여름이라도 질대(絰帶)를 벗지 아니하고, 날마다 반드시 성묘하여 풍우가 몰아쳐도 그치지 아니하며, 상여(喪餘)에도 애통해하기를 초상[袒括]때와 같이 하였다.
자녀 교육은 반드시 의방(義方)으로 하며, 종족에 돈독히 하며, 향당에 접함에 각각 정의(情誼)를 다하였다. 더욱 봉선(奉先)에 통촉(洞燭)하여 위토(位土)를 마련하고, 석물(石物)을 세워 제사에 정성과 정결을 다하였다. 시조(始祖) 한림공(翰林公)과 구백(九伯)의 묘가 모두 실전(失傳)함에 선생이 개연(慨然)히 국내의 일가에게 발의하여 마침내 단(壇)을 쌓아 제향을 올리고, 다시 9관(九貫)의 후예를 합하여 대동종안(大同宗案)을 편수하니, 흩어진 종족이 하나로 합하여 돈목(敦睦)의 의리를 밝히게 되었다.
범문정(范文正)의 의장(義庄) 제도를 본받아 양전(良田)을 떼어내어 일가들로 하여금 돌아가며 경작케 하여 빈궁(貧窮)을 구제하고, 은의(恩意)을 곡진하게 하였다. 선생 같은 이의 행의(行誼)는 무너진 풍속을 경계할만하거늘, 어찌 세상의 명예를 좇고 실질을 망각한 자들이 미칠 수 있겠는가?
경진년(1940) 5월 23일에 향년 86으로 생을 마치니, 마을 뒤편 부친 묘소 아래 건좌(乾坐) 언덕에 장사하였다
Ⅳ. 결론(結論)
아, 선생은 강의(剛毅) 근인(近仁)한 자질로 조집(操執)이 견고하고 언행이 정직하여 자못 기절(氣節)이 있었으며, 의리(義理)의 관문에서는 소매를 떨쳐 앞장섰으며, 우국(憂國) 일념으로 초야에서 흠결 없이 단주(丹朱)처럼 빛났다. 일찍이 현사(賢師)의 문하에 나아가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얻어듣고 몸가짐과 일처리에 하나같이 사문(師門)의 성법(成法)을 준수하였으며, 독실히 배우고 힘써 행하여 그 조예(造詣)가 울연(蔚然)하여 호남의 고사(高士)가 되었으니, 성인(聖人)께서 이른바, “노무군자사언취사(魯無君子斯焉取斯)”를 어찌 믿지 않겠는가?
평소 저술이 적지 아니할 것이나, 왜놈의 손에 다 빼앗겨 불길 속에 사라져버렸다. 선생의 자제 진영과 여러 벗들이 널리 찾아 수습(收拾)하였으나, 보존된 것이 얼마 되지 아니하니, 애석하다 할만하다.
옛적 황숙도(黃叔度)는 언론(言論)과 풍채[風旨]가 없었어도, 오직 명사들의 한 두 마디에 힘입어 능히 천추(千秋)에 향기를 전하거늘, 군자가 세상에 전하는 것이 어찌 많기를 기하겠는가? 하물며 선생은 사우(社友)들로부터 존중[推重]받는 이가 아니던가! 이에 명하여 가로대,
日谷村裏일곡마을에
有氣節人기절인 있었도다
見危國步나라가 위태함 보고서
奮袂馳塵떨쳐 먼지 속 달렸거니
當局追崇당국이 추숭하여
穌海路命소해로라 명했도다
《晩洲祠誌》〈蘇海盧鍾龍公行狀〉
先生諱鍾龍字致雲號蘇海又稱聾啞。盧氏貫光山者。其源出自之氾陽。歷世顯赫。至諱俊恭號心溪有至孝罔伏於我朝。恭靖朝命旌其閭。贈諡節孝。立祠俎豆之。顯於麗末。入我朝。有諱光利號式齋官大司成。累傳而諱希瑞號晦齋秉節校尉。當龍蛇之亂。募義旅赴錦山。同霽峯高忠烈先生一時殉節。參勳錄。贈兵曹參判。四傳諱重采號誠齋有學行。負望當世。寔公五代祖也。高祖諱有光贈寺正。曾祖諱弼元號履素軒有文學。贈左承旨。祖諱鎭權號慕堂。贈戶曹參判。考諱在奎號聾巖以學行剡薦。除副司果。歷監察都正。至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皆不就嘗築聾巖亭。閑居養德。晩年自適。妣晉州鄭氏錫源女。忠莊公芬后。以哲宗丙辰十一月三日先生生于日谷里第。先是母夫人夢有白龍之異,生有異質。額正而面玉,兩手有紋成文字。聰慧非凡。氣度端偉。性且至孝。自齠齔能知事親儼若成人。及就學家庭,不俟敎督,能勤課矻矻。而家甚貧窶,不得專意爲恨,以董生行爲法,朝耕暮讀,躬自漁樵,以養父母。力穡治家,産業梢潤,奮發厲志,負芨請業于我祖考淵齋先生之門,得聞爲己之學,益自勵志。後又摳衣於勉庵崔先生之門,講質經義,亟蒙奘許。遍交幷世賢德,如我生庭祖考心石齋先生尊事之。奇松沙宇萬ㆍ吳難窩 吳繼洙ㆍ安蘇山成煥ㆍ吳後石駿善ㆍ朴皇梅軒魯準ㆍ高弦窩光善,以道義交契甚厚。又往京師,申尙書箕善ㆍ李尙書道宰ㆍ尹尙書用求,從遊講義。諸公皆眷眷焉。不以俗士追詡也。甲午匪類猖獗。 以扶正斥邪之說,辨析甚明,聲播一鄕。李侯羲性聞而欽服。乙未之變。與松沙密謀討復,事前發覺竟莫伸。義倡義士愼菴盧應奎敗於晉陽,遁跡于先生家,三年共食,傍人莫知。其待人仁厚槩可想矣。乙巳。遭山頹之痛。加麻朞年。丁未。又遭勉翁師喪。加麻三月,益不勝安倣之痛,裁誄各進,痛哭洩哀。世事日乖。島夷軍隊擬設病院於本校明倫堂,來覘地勢,威喝非常。先生如隣友瑞軒安圭容擧義峻責,抗拒至嚴,賊乃止之。後已丁未歲初。鄕俗循例,將儺鳴鼓。先生厲聲止之曰: “當此變亂,哲人云逝,此等俗習忍何爲哉"。因著正風論,以見其志。庚戌屋 社之變。先生慷慨悲憤,不能自己,搆草封事,懷而直詣闕門,被沮不能進思,不得已投入郵筒。其疏曰: "伏以臣以一介草莽之臣,跧伏窮巷。九重閶闔,高遠於天,千里江湖,輕微如芥。又以根鈍學淺,文辭甚拙,所以在昔昇平之日,無以做擧業,祗甘耕鑿矢終此生。然區區不能自已者。天旣命我以人不可不盡爲人之道。顧其時。犬馬之齒已屬古人道成之期,而一樣蒙騃,九仞初簣,渺茫無涯。第惟朝聞夕可聖人遺訓。故年三十有五歲庚寅。始乃負芨,從故祭酒臣宋秉璿,粗聞誠、正、格、致、修、齊、治、平之道。癸巳。又就正於故參判臣崔益鉉之門,講春秋矣。而駑駘難馴,不能做涵養,省察之功矣。夫何國步多艱,東匪搶攘。繼之以乙未之禍,痛恨曷極。與前參奉臣奇宇萬,密謀討復。天又降禍于臣家,喪亂疾苦,連年沈綿。宇萬事敗。士林喪氣。易曰: ‘履霜堅氷至’。在廟堂之位者,宜其倍加驚惕,以圖匡扶,而群宵尸位匪孼沈長。郭開ㆍ華歆之類, 相連賊肚, 壅蔽聰明。先王之典一朝掃地,衣冠文物變而爲夷,禁衛解裝,武庫空虛,以至全域消兵,無以禦侮,曰五,曰七所約何事。宰臣悔悟,或有捐軀。義士激憤,空拳莫施。擧皆死於刃丸。錮於縲絏。又有從容自裁者,指不可勝數。當此之時,臣父年老,且病添以憤鬱勢甚危迫。臣終鮮兄弟莫可離側。故兩師連殉,一未相隨。但含寃忍痛,苟存性命於寂寞之濱矣。玆者。陛下柔變而不有剛克。狐鼠輩恣意欺罔。竟使五百年祖宗疆土,棄之如脫屣。遽降讓位之詔。是豈出於宸衷而然乎?不過是五七賊流之所假飾也。天地旣鑑。鬼神可質。唐虞揖遜。其果如是乎哉? 欺人之君,奪人之國。如弄孤兒寡婦。此不仁不義之類。不可使暫容於覆燾之間也。悠悠蒼天,曷有其極。曩者,賊之脅陛下傳寶者,良有以也。陛下以叡聖文武之資, 御極四十有餘載,恩威俱重,朝廷之所畏服也。生靈之所依戴也。列國之所信仰也。儼然當宁,則彼雖凶慝焉。敢欺弄至此乎? 伏惟,三千里疆土,非陛下之疆土也。是祖宗之疆土也。亦非惟祖宗之疆土也。實二千萬生靈之疆土。幾個賊臣輩,不可幻弄與人明矣。而假使 陛下實親與之,甚不可也。祖宗在天之靈,可不畏哉? 二千萬生靈之謳歌訟獄,其盡歸乎彼耶? 舜禹之避之不得,以其天下謳歌訟獄之歸也。今也不然。以朝廷言之。則除幾個賊臣,自公卿大夫,至於閹宦宮妾胥吏之流,悉皆願戴者。必曰: '太皇帝陛下也。'而陛下獨御深宮,無以燭中外現狀之如何。坐享讎賊之供奉。亦可謂之安樂乎? 莫重疆土,不可以一人之優柔,而彼人騙奪者寘之不問而止也。句踐不忘會稽,而竟沼暴吳; 田單死守卽墨而全齊。爲我今日計,君臣上下,當刻耻於骨,有死而無生,不可妄自沮抑玩愒時日也"云云。還鄕未幾。自光州警務所, 彼所謂 ‘上部有令’, 遣使拘引。'先生被逮而大罵曰: "不可與爾共戴天日,寧欲死而復讎矣" 辭氣峻嚴,賊不敢輕視。蓋前日陳疏未達黈纊,而賊輩披閱,發此惡憎也。鄕中多士,及諸宗族馳往周還。不幾日放還。此豈云先生之爲幸歟? 其凜凜忠義,無愧於死節諸公也。自是杜門斂跡, 與世相絶, 以聾啞自處。松沙奇公著說贈之。己未。高宗昇遐。先生北望痛哭,意欲溘然。親癠大耋,常淹床第,扶將之適,滫瀡之供,任託無人。故乃含忍自止。命其子搆一舍於聾巖亭下,扁揭蘇海。養親之暇,恒處其中,潛心墳典,覃思奧旨,學益進德愈嵩,以國讎未報,相抱憂憤底意,遠近來學者衆。相與講討仁義之說,至於忠逆邪正之辨,如一刀兩斷,有不可犯之像。及遭內外艱,哀毁踰禮,歠粥面墨。雖盛暑不脫絰帶,日必展墓,風雨罔廢,喪餘號擗如袒括。敎子必以義方。敦宗族,接鄕黨,各盡其誼。尤洞屬於奉先,置田竪石,祭盡誠潔。始祖翰林公,及九伯墓俱失無傳。先生慨然刱議于國內諸族,乃設壇薦享。又合九貫之裔,修大同宗案,散族一會,以明敦睦之義。倣范文正義庄之規度,劃出良田,使族輪耕,濟其貧窮,曲盡恩意。若先生行誼,可警頹俗。豈世之循名忘實者之所能及哉?庚辰五月二十三日考終,享年八十五。葬于村後,考兆下,乾坐原。 配光山金氏,箕彩女,忠肅公沈后,幽閒貞淑,婦德咸備。生于丁巳。先生十八年癸亥六月二日卒。墓在本郡瑞坊面於梅峯北,妣兆下,負丙之原。生一男,四女。男軫永,女忠州朴泳柱,幸州奇宇貞,奇世永,河東鄭選采。孫男柄斗,林碩,柱琯。內外孫,曾,不盡錄。嗚呼!先生以剛毅近仁之資,操執竪固,言行正直,頗有氣節。義理關頭,奮袂挺身,憂國一念,無間草野,炳然如丹。早登賢師之門,得聞春秋大義,持身處事,一遵師門成法。而篤學力行,其所造詣,蔚然爲南州之高士,聖人所謂魯無君子斯焉取斯者。詎不信哉? 平日著述,不爲不多,而盡奪於犬羊之手,入於燒火。先生之胤軫永與諸友,廣探收拾,所存無幾,可惜哉! 昔黃叔度無言論風旨,而獨賴諸名士一二語,乃克流芳千秋。君子所以傳世者,奚必多爲。況先生見推於士友者乎? 胤子軫永誠孝篤至,善繼善述,而內外孫蕃,其不食之報,將無窮矣。一日軫永屬余,先生狀德之文。竊念未嘗爲人記述,恐若拙畵肖人,爽實其精神眉目也。於先生,義不敢辭,就其本狀,檃栝如右,以備來世之考信焉。
時戊子大壯之旣望德殷宋在晟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