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1945년 무조건 항복 직후 점령군을 위한 위안시설 이른바 RAA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를 만들었다. 정부와 민간의 공동 출자로 만들어진 이 시설은 8월 27일
도쿄의 1호점을 시작으로 1946년 1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전국 20여 개 도시에서 7만 명 이상의 여성이 종사했다.
일본 정부와 민간 매춘업자들은 이들을 모집하기 위해 애국심까지 동원했다.
민간업자들은 RAA에 종사할 여성을 ‘소화의 도진 오키치’(昭和の唐人お吉)라고 치켜세웠다.
에도 시대 오키치가 그랬던 것처럼 나라를 위해 헌신해달라는 뜻이다.
오키치는 막부의 강권으로 일본주재 초대 미국 총영사 타운센트 해리스의 시첩(侍妾)이 됐다가
세상의 경멸 속에 살다 끝내 투신자살한 여인이다. ‘도진’(唐人)은 외국인의 경멸적 호칭으로, ‘도진 오키치’는 우리 식 표현으로는 ‘양공주 오키치’쯤 된다.
옥외 광고나 신문 광고를 통한 정부의 호소도 같은 내용이었다.
“전후 처리를 위한 국가적 긴급시설의 일환으로 진주군 위안이라는 대사업에 참가할 신일본 여성들의 솔선수범을 청한다
.” 미국인의 ‘사이즈’가 너무 커 다칠지도 모른다며 ‘직업 여성’이 ‘애국’에 나서지 않자 일반 여성을 꾀어내기 위해 짜낸 잔꾀였다.
일본 정부가 이렇게까지 위안부 모집에 열을 올린 것은 점령군에 의한 무차별 강간의 공포감 때문이었다.
전쟁 중 황군(皇軍)이 수많은 비일본인 여성을 위안부로 강제 동원했고, 점령지에서 무차별 강간을 자행했던 것을 알고 있는 일본 수뇌부에게 이 공포심은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부총리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가 RAA를 속히 만들라며 경시총감에게 한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부디 일본의 딸들을 지켜주기 바라오.”
일본의 우익성향 일간지 요미우리(讀賣) 신문이 한국 내 ‘기지촌’ 실태를 취재 중이라고 한다.
그 취지는 “한국에도 (일본군) 위안부와 유사한 것이 있다는 점을 보도한다”는 것이다.
기지촌의 성매매가 최소한 정부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님을 감안하면 이 말의 뜻은 분명하다.
일본군 위안부도 기지촌 여성처럼 강제동원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소를 자아내는 절망적 견강부회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의 다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