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광화문 세종 큰 임금 동상 옆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백악산(白岳山)이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궁정동 팔판동 청운동 부암동과 성북구 성북동에 걸쳐있는 산이다.
한양의 중심부에 자리하면서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한양도성 안의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한양의 진산(鎭山) 경복궁의 주산(主山) 백악산(白嶽山)이다.

일제가 훼철하기 전 광화문과 경복궁 그리고 백악산의 모습이다.
광화문 앞에 한복 차림의 조선인들이 왕래하고 있고 좌우에는 육조의 관청 건물이 즐비하다.

경복궁 향원지 앞에서 바라본 경복궁의 주산 백악산이다.
조선왕조는 한양도성을 축성할 때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남산을 안산(案山),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삼았다. 이 네 산을 내사산(內四山) 명산으로 한양을 지키게 한다.

백악산 동쪽 말바위휴계소에서 바라본 백악산이다.
"삼각산의 내맥이 보현봉이 되고 보현봉이 우람하게 높고 낮은 언덕 땅으로 퍼져 가지고
거기에서 양편으로 갈라져 오른편 가닥은 반 마장쯤 내려오다가 우뚝한 봉우리가 되었으니
이것이 백악(白嶽)이다" -세종 때 술사(術士)들-

백악산은 나무들이 자라서 푸른 숲을 갖추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화강암이 주를 이룬 흰 돌산으로
서쪽은 흰 바위가 속살을 드러낸 채 가파르게 기운 절벽이 드러나 있다.
백악산은 높고 뾰죽하다. 안산 남산은 능선이 매우 부드럽다. 좌청룡 낙산은 밋밋하고 얕은 지세를 하고 있다.
우백호 인왕산은 길고 우람하다.
백악산은 국가와 왕실의 안위를 백악산신에게 비는 신성공간이자 사림의 은일처로 중시되어 왔다.
곳곳에 약수터가 있고 경치가 아름다워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백악산(白岳山) 정상을 알리는 표석이다. 해발 342미터의 한양의 진산 백악산이다.
"백악이 도성 북쪽에 있는데 평지에 우뚝 솟아났고 경복궁이 그 아래 기슭에 있다.
서울도성을 둘러싼 여러 산 중에 이 산이 우뚝 북쪽에 뛰어나니, 조선왕조 국초에
이 산으로 주산을 삼고 궁궐을 세운 것은 잘된 일이다."-<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2001년 그동안 일반인들의 출입금지를 과감하게 해제한다.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게 된 배경을 알리는 표석이다.
"우뚝이 높이 솟은 봉우리 북두성에 닿았구나. 突兀高峯接斗魁
한양의 아름다운 경관을 하늘이 열었다네. 漢陽形勝自天開
대륙을 깔고 앉은 봉우리가 삼각을 받쳤는데 山蟠大陸擎三角
오대산을 나온 긴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라. 海曳長江出五臺"
장주(長洲) 홍만종의 '소화시평(小華詩評)'에 따르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백악산에 올라가 지은 시(詩)이다. 무인이었던 이성계가 이 정도 시를 지었다면
그의 문인으로서의 자질도 확인할 수 있다.
새로 정한 수도 한양의 아름다움을 산줄기와 물줄기를 원용하여 잘 표현하고 있다.

인왕산 동쪽 자락 윤동주 동산에서 올려다 본 백악산 서쪽 능선이다.
동쪽으로 흐르는 능선에 비해 서쪽은 대단히 가파르기에 풍수상 약점으로 지적된다.

부암동에서 바라본 백악산 서쪽 자락 도성의 가파른 모습이다.

일제는 우리의 국토를 곳곳에서 훼철하였다.
생기가 흐르는 주요한 길목에 철심을 받아 기(氣)를 흔들었다.
숙정문 북서쪽 400미터 지점에 있는 촛대바위이다.
일제 때 바위 상단부에 일제는 쇠말뚝을 박았다.
해방 후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쇠말뚝을 제거했다.
그 자리에 국운융성을 기원하는 촛대를 세우고 이를 '촛대바위'라고 이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