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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경
심정부침(審情浮沈), 감정의 뜨고 가라앉음을 살피는 관심법(觀心法). 터득하는데 10년이 걸렸다. 희노애락, 욕심, 분노, 갈등, 공포 등을 꿰뚫어 보는 심의心醫가 됐다.
금오 김홍경씨. 마음으로 침을 놓는다는 심침心針한의사. 그는 오랜 세월 사장되어 있던 사암침법을 복원한 주인공이다. 사암침법이란 '침구요결'이란 책에 전해지는 신비의 침술. 그러나 원리체계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사암 도인은 허준, 이제마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의성醫聖입니다. 사암은 사명당의 제자로 독창적인 침법을 남겼습니다. 구한 말때 일본인들이 이 사암침법을 도용해 '오행침'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것인양 시술하고 있지요. 의식, 감정의 통로인 경락에 의한 유심론적 진단법이기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는 직관이 가장 중요합니다."
침은 대부분 환부에 놓지만 사암침은 손과 발 끝에 놓는다. 침은 중국, 일본의 침보다 굵다. 좌우로 돌려가며 침을 놓기 때문에 고통이 엄청나다. 하지만 그의 침을 맞은 꼬부랑 할머니가 허리를 폈고, 중풍환자가 지팡이 없이 걸어 돌아가는 기적이 일어났다.
김씨는 경희대 한의학과가 설치된 이듬해인 67년 과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시절의 대부분을 회의와 절망속에서 보냈다. 당시 한의학은 사회에서 홀대를 받고 있었다. 코미디 프로에서는 한의사가 돋보기 들고 사주를 보는 사람으로 묘사됐을 정도였다.
"일본에서 한의사로 활동하다 해방 후 충남 금산에서 한약방을 차리신 조부(김기양)의 유업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냉대받는 한의학보다 양의를 권유했어요."
일본에서 법대를 나온 아버지(김준구), 경성대 사범대 출신 어머니(박진순)는 한동안 한의학을 배우는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씨는 대학을 졸업하던 73년 대전에 한의원을 개업했다. 상당한 돈을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2년에 동안 술과 도박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했다. 약혼녀는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지 파혼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좌절의 나날이었다.
어느날 꿈 속에 조부가 나타났다. 방탕한 그를 몹시 꾸짖었다. 붉은 만장에 쓰여진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글귀는 잠을 깬 뒤에도 생생했다.
"당시 사암침법은 한의대에서 5~10분 정도 언급하고 지나치는 정도였습니다. 워낙 난해하고 신비하기 때문에 해독이나 응용이 불가능했습니다. 꿈을 꾼 뒤 불현듯 사암침법이 생각났습니다."
75년 10월 '침구요결' 책 한권만 들고 돌연 속세를 등졌다. 사암도인처럼 스님이 되어 참선을 통해 침을 깨치겠다는 생각이었다. 송광사로 출가해 금오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러나 침법에 대한 욕심이 앞서 행자생활에 적응이 안 되었다. 절간 생활 6개월. 그는 '행자는 일주문을 나설 수 없다'는 불가의 계율을 어겨 쫒겨나고 말았다.
그 후 몇년동안 주역학자와 선승을 찾아 전국 각지를 돌았다.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 주역학자 아산 선생에게도 사사받았다. 방황을 통해 점차 인생과 의술의 세계를 폭넓게 헤아려 볼 수 있었다.
한동안 서울의 한약방에서 월급쟁이 한의사로 지내기도 했다. 83년 동국대 한의학과 학과장인 동기생의 권유로 정신과 임상의학 강사를 맡았다. 김씨는 한의학의 본질은 종교와 철학이라고 강조했다. 서양학 위주로 가르치는 당시의 한의학계를 비판해 학교측과 갈등을 빚었다.
"한의학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저 역시 정답을 모르고 있었죠.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만 알았지 이를 화음으로 만들수 없었던 거죠. 회의와 절망감이 밀려왔습니다."
이무렵 만공스님의 '보려는 자가 누구냐'는 선문답 책에 심취하면서 다시 방랑벽이 도졌다. 속세를 떠나 수덕사 방장 혜암선사(85년 5월 입적)의 선문답 제자로 입문했다. 사암침법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 내면의 심리를 파악하지 않고는 질병치료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 삼아 침과 뜸을 놓아가며 마음의 흐름을 관찰했다. 온 몸에 태운 자국이 늘어갔다. 주역 등 동양철학을 통해 '인체'를 연구했다. 결국 인체 12경락의 유물, 유심적 특성을 재구성해 낼 수 있었다.
84년 광화문에 한의원을 열었다. 혜암스님은 '신농백초'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신농씨는 인신우수(人身牛首)의 모습으로 인간을 위해 모든 약초의 효능을 가르쳤다는 전설 속의 의성(醫聖). 그해 12월부터 한의대생들에게 사암침법을 공개했다.
'사암도인 침술원리 40일 무료강좌'는 학생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전국에서 몰려든 학생들이 10여평 남짓한 한의원을 가득 채우고 계단까지 줄을 섰다. 그 후로는 폐교된 학교를 물색해 강좌를 열어야 했다. 지금까지 방학기간에 실시한 강의는 19차. 학생들은 잠을 자지 않는 고통을 통해 심정부침의 관심법을 개안했다. 지금까지 배출해낸 제자는 1000여명.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을 이끌고 무료 진료 봉사활동을 펼쳤다.
그는 한의원 운영을 후배들에게 맡겼다. 전국을 구름처럼 떠돌며 동양의학 저술활동에만 주력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한의학의 대중화.
'욕치기병(欲治其病) 선치기심(先治其心). 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마음을 먼저 다스려야 한다. 김씨는 '스스로를 자세히 이해하면 저절로 마음의 뜨고 가라앉음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금오 김홍경씨가 가르치는 심정부침의 수양방법이자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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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면 죽고 살다보면 늙는다. 죽음은 결코 피할수 없는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일때 오히려 치유의 효과가 있다. 체념은 절망이지만 순응은 희망이 될수 있다. 늙음 역시 마찬가지다. 실제로 순순히 늙음을 인정하는 노인들은 곱게 죽음을 준비하며 분수에 맞지 않는 욕망을 일으키지 않는다.
한의학계의 재야스타 금오 김홍경(50)의 역설 건강학이다. 조선조 3대 의성으로 꼽히는 사암선사의 비전침술인 사암침법을 복원한 김홍경 신드롬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EBS 기획시리즈 '김홍경이 말하는 동양의학' 을 진행하면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 10월 30일 이후 매주 월∼목요일 밤 10시 40분에 방영되고 있는 김홍경의 TV 강의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인기를 끌고 있다.
그의 인기가 어느정도인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 지난 12월 2일(토) 오전 10시 목동 방송회관 4층 녹화장을 찾아 그의 강의를 들어보았다. 빈자리가 없이 방청객들이 꽉 들어찼다. 4회분의 녹화를 오전 내내 몰아서 하는 이날 기자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강좌가 끝났지만 단 한명의 방청객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더욱 놀란것은 빡빡하게 잡힌 그의 스케줄 때문에 점심식사를 겸한 인터뷰를 하기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서울·광주등에서 1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어 그의 인기를 실감하였다.
말총머리에 개량한복을 입고 나와 특유의 재치와 익살을 섞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그의 강의를 듣다보니 한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어려운 한의학을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걸칙한 입담으로 방청석을 메운 주부들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린다. 카랑카랑한 목소리, 도도한 언변, 도사를 연상케 하는 외모로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면서 금오 김홍경은 스타로 떠올랐다.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세를 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음양관을 곁들인 해박한 한의학 지식이 그의 카리스마를 높여주고 있다.
보약장사라는 눈총을 받기 싫어서 잘나가던 한의원을 어느날 갑자기 때려 치웠다는 금까마귀.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파란만장한 과거가 있었다. 서울대 의대 두차례 낙방후 경희대 의예과에 원서를 내려고 접수창구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의예과 앞에 '한' 자를 더 써넣어 즉석에서 지망학과를 한의예과로 바꿔 버린다. 당시 국내 처음으로 생긴 한의예과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이왕이면 국내1호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벌인 해프닝이다. 학과 수석으로 들어간 한의대. 그러나 학교 생활은 평탄하지가 않았다. 재학중 3차례나 낙제위기에 몰렸다.
"한의대 다니면서 주위로부터 쏟아지는 멸시를 참아내기가 가장 힘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한의사라는 인식이 별로 안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딴따라식 강의를 들여다 보자. 방청석에서 배꼽을 잡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연신 터져 나온다. 위험수위를 넘을 듯 말 듯 야한 농담이 이어지기도 한다. 걸쭉한 입담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쇼맨십이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심어준다.
칠판에 분필글씨를 쓰면서 떠들어대는 폼이 인상적이다. 칠판앞에 비스듬히 선 모습으로 오른손에 백목을 들고 뒷걸음치면서 신들린 사람처럼 휘갈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도사같다는 착각이 든다. 방청객들의 시야를 조금도 가리지 않고 오른팔을 쭉 뻗은채로 손목을 흔들흐들 움직여 뒷걸음질 글씨를 쓰면서 입으로는 연신 속사포처럼 떠들어댄다.
몸짓, 표정 하나하나가 배꼽 잡도록 웃긴다. 방청객들이 하나같이 두눈을 크게 뜨고 두귀를 쫑끗하고 그의 이야기속으로 깊숙히 빠져든다. 재미 있으니까… 유익하니까…
"이론에만 집착하는 학자들이 불쌍해요" 등 독설도 서슴치 않는다. 어떤 환자에게 '별거' 라는 처방을 내린적도 있다는 별난 한의사.
"같이 살면서 남편한테 속썩어 암에 걸려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헤어져 암에 안걸리고 사는 것이 훨씬 좋지 뭐 그래! 별거가 별건가 뭐!" 라는 말에 여기저기서 포복 절도 할 정도로 웃어댄다.
강의 끄트머리엔 어김없이 그때 그때 분위기에 맞는 노래반주가 흘러나오고 그의 멋진 멘트를 섞어서 피날레를 장식한다. 녹화 중간 중간 쉬는 시간에는 더욱 웃긴다. 갑자기 마이크를 잡고 나의 살던 고향 노래를 부르지를 않나… 희한한 몸짓으로 엉거주춤 춤을 추지를 않나…
17년동안이나 재야강의를 해온 그는 한의대생들로부터 정신적 지주로 통한다. 녹화장에도 한의대생들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니면서 강의에 필요한 업무를 보조하는등 그의 바쁜 일손을 덜어주고 있다. 대본도 없이 작가도 없이 멋대로 떠들어대면서도 NG 한번 안내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뛰어난 언변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런 오랜 강의 경력에서 터득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4회분 분량의 강의 녹화를 한꺼번에 마치고 나오기가 무섭게 그는 몰려든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린다. 피곤한 내색 하지 않고 묻는 말에 하나 하나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표정으로 보아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그렇게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기자들의 질문공세는 점심시간까지 이어진다.
한의대 졸업후 한동안 술과 도박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 폐결핵과 간경화등 병마에 시달렸다. 세차례나 폐결핵이 재발하여 군대까지 면제받을 정도로 건강을 잃은 적도 있다. 75년 결혼을 약속했던 여성과 파혼하고 송광사로 출가했다 6개월만에 환속하기도 했다. 이후 10여년간 전국을 떠돌아 다니며 재야학자들로부터 의술과 주역을 배웠다.
"군대가는 대신에 출가해서 혹독한 수련을 했습니다. 사찰에서 몇번 문제를 일으킨 죄로 결국은 6개월만에 쫓겨나고 말았지요. 그뒤로 무당처럼 떠돌기도 하고, 거지생활도 해보고, 수상한 사람으로 몰려 파출소에 끌려가 혼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산 선생님 만나서 한의학에 대한 생각을 확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때 많이 배웠어요"
83년 수덕사 방장 혜암스님을 만나 선문답을 수행하면서 완전히 그의 인생이 달라진다. 선문답을 공부하다가 엉뚱하게 사암침법에 대한 가설이 떠올랐다. 사암침법에 대한 요체를 이해할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 전국의 한의대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학기간 40일씩 사암침법 무료특강을 실시해 오고 있다. 그를 거쳐간 한의사만도 1천여명이 넘는다.
"실험삼아 침을 놔보니까 효과가 빠르더라구요. 소문이 퍼지면서 한의예과 학생들이 비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강의를 했지요.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한마디로 인기폭발이었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15년이 넘도록 강의를 해오면서 돈한푼 안받았어요"
하지만 그에게 또한번의 시련이 닥친다. 철석같이 믿고 미국 유학까지 보내주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여자가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이별의 아픔을 잊기위해 도피성 여행을 떠나는 심정으로 그는 티벳과 인도에 1년간 머물며 구석구석을 혼자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체험하고 왔다. 이때부터 수염을 기르고 말총머리를 하고 있다.
그의 EBS 한의학강의는 40회로 진행될 예정이다. 내년 1월쯤 강의가 끝나면 장기프로는 맡지 않을 생각이다. 내년 2월쯤엔 이미 초청을 받아놓은 인도에 다녀올 계획이다. 지금 심정으로는 방송강의 시리즈를 마친후 6개월정도 잠적해서 혼자 재충전을 하고 싶다.
그는 대본 없이 자신이 즉흥연주를 하듯 강의를 이끌어 나간다. 그의 독특한 강의는 어렵고 딱딱한 한의학을 재미있고 즐겁게 전할수 있도록 나름대로 강구한 방법이다.
"처음부터 작가없이 할뿐만 아니라 음악도 쓰겠다고 조건을 내걸었지요. 그랬더니 방송국 측에서 저를 보고 마음대로 알아서 연출을 하라고 모든 것을 맡기더군요. 처음에는 이렇게 까지 인기를 끌게 될 줄 몰랐습니다. 허준 드라마가 만들어낸 한의학 붐을 탔을 뿐만 아니라 김용옥·임동창 선생에 이어 3번타자로 나온 덕을 톡톡히 본셈이지요"
가족관계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아직 싱글입니다. 서울의 여관에서 동가식 서가숙 합니다. 야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여관에서 지내다 보니까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의 강행군은 쉬지않고 계속된다. 점심 식사 시간을 이용한 인터뷰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자 그는 의료봉사를 하기 위해 곧바로 인근 경로당으로 향했다.
두 마리 토끼몰이를 할수 없어 한의원을 운영하는 대신 재야강사로 나섰다는 한의학계의 이단아 김홍경. 그의 폭발적인 인기몰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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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희끗한 꽁지머리, 다듬지 않은 턱수염, 늘 털털한 생활한복 차림. 왜 머리를 기르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그냥 좀 특이해 보이려구요. 아마 세상 사람들이 다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면 그때 전 빡빡 밀고 다닐 걸요” 하면서 호쾌하게 웃는다. 금오는 외모만큼이나 살아온 과정도 독특하다.
일본 오사카 근처에서 광병(狂病) 치료로 이름이 높았던 조부, 명문대학을 나온 부모 슬하에서 그 역시 청소년기에 이른바 ‘서울대병’을 앓아야 했던 사람이다. 서울대 의대를 두 번 떨어지고 꿩 대신 닭으로 선택한 것이 경희대 한의학과.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의학에 대한 주위의 멸시와 천대가 심해 좌절하다, 수석으로 입학한 대학을 꼴찌 문턱에서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한의원을 개원하여 부족하지 않을 만큼 돈도 벌었으나 술과 노름에 빠져 약혼녀마저 달아나버리고, 몇 번이나 자살할 생각까지 하였다는 그의 젊은 시절은 그야말로 방황의 연속이었다.
“돈이 없으니 월급쟁이 생활도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마산에서 남의 집살이를 하던 어느 날, 꿈속에 조부님이 나타나더군요. 발가벗고 요가 자세를 취한 채 붉은 만장을 든 모습이었는데, 그 만장에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사암침법’을 터득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전국을 떠돌며 ‘스승’을 찾아 다녔다. 사암침법은 동의보감의 허준, 사상의학의 이제마와 함께 조선의 3대 의성(醫聖)으로 불리는 사암(舍岩)도인의 전설적인 침법. 그러나 그 해설서라 할 수 있는 ‘침구요결’은 처방이나 응용법은 없이 온통 난해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 한의과 수업시간에도 그저 몇 분만 설명하고 넘어가는 정도였다. 그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금오는 주역과 선(禪)을 배우러 다니는 데 주력하였다.
좋은 스승이 있다면 천릿길을 마다않고 달려가 만났던 재야의 스승 중 그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주역학자 아산 선생과 85년 102세로 입적한 수덕사 방장 혜암 스님. 금오는 이 두 사람을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산 선생에게는 주역을 배웠습니다. 정통으로 입문한 것은 아니지만, 저는 거기서 가설, 힌트를 얻어 나왔습니다.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혜암 스님의 선문답(禪問答). 선문답을 탁마하면서 뒤집어 생각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선문답은 알 듯 말 듯 아리송하지만 의외로 답은 대단히 단순합니다. 사람들이 선문답은 골치 아프다고 하는데 답이 너무 코앞에 있어서 못 푸는 겁니다.”
난해했던 ‘침구요결’의 구절들을 하나하나의 원리로 깨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뒤집어 생각하고 도식화된 이론과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게 되니 ‘마음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400년간 주저앉아 있던 사암침법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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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 침법이 아닌 원리 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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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볼 때 사암침법은 사용하는 침이 약간 더 굵고, 손과 발에만 시술하는 것, 그리고 약간 비스듬하게 침을 꽂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침법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지금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가느다란 대롱침은 한의학 용어로 이야기하면 보사(補瀉)가 불가능합니다. 보사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사침법(斜針法)으로 경락의 흐름에 따라 시술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모든 침술경전에는 보사를 행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쓰이는 모든 침법은 보사를 무시한 일종의 체침법(온몸에 침을 꽂는 침법)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엇을 쓰면 어디에 좋다, 어디가 아프면 어디에 침을 놓아라. 이건 완전히 암기식 침법이죠. 진정한 침법은 원리(原理) 침법이 되어야 합니다.”
사암침술의 원리를 어느 정도 깨달아갈 즈음 방랑생활을 정리하고 대학 강단에 서보기도 했고, 종로에 있는 큰 건재 약방의 관리의사, 종로구 한의사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자신의 침술을 알리고 싶은 생각에 친구에게 부탁하여 채용된 곳은 동국대 한의과 대학 외래 임상강사. 그러나 원리에 대한 가르침은 없이 암기만 강요하는 한의학 교육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이를 성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1983년 한 해 만에 물러나야 했다. 약방 직원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처방된 약재의 양보다 줄여서 조제하거나 무면허 의사가 진료하는 것을 보다못해 보건소에 고발하는 등 타고난 반골기질로 인해 스무 군데를 옮겨 다니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던 1984년 12월. 1년 동안 그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사암침법을 알고 싶다고 찾아왔다. 열 평 남짓한 약방에 스무 명을 모아놓고 ‘사암도인 침술전수 40일 강좌’라는 이름의 과외수업을 시작하였다. 수가 늘어나 폐교를 빌려 사용하기도 하면서 이어진 것이 현재까지 22차에 걸쳐 30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고 ‘사암 한방의료봉사단’의 요람이 되었다. 지금도 방학 때면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든다. 이제 금오의 40일 강좌는 한의대 학생들의 ‘학점 없는 필수과목’이 되었다고도 한다. 처음엔 한의대 학생들만 수강하다가 이젠 개업 한의사들이나 공대, 법대 출신 등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들도 찾아오고 있다.
합숙훈련 방식으로 진행되는 40일 강좌는 그 수업방식부터 독특하기로 유명하다. 정작 배우고 싶어하는 침술은 가르치지 않고 하루종일 논밭 일을 시키고 해가 저물 때 몇 시간씩 명상 시간을 갖게 한 다음, 밤이 깊어 시작되는 수업은 새벽녘에야 끝난다. 취침시간은 길어야 두세 시간뿐.
“일반인을 상대로 한 강의야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대학생들은 나중에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환자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혹독하게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칩니다. 가르치다 보면 애들이 너무 똑똑해서 탈이라는 걸 느껴요. 한의학을 제대로 배우려면 지금까지 배워온 것, 고정관념, 이런 걸 다 무시하고 비워둬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하면 자기 과거의 기억으로 자꾸 연상하려 들어요. 원리를 따르지 않고 제 지식을 따르는 거죠. 그래서 그런 것을 부수는 데 가장 큰 힘을 쏟는 건데, 못 견디면 거의 쫓아내다시피 합니다. 100명 들어와서 열댓 명 남는 수준입니다.”
이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재야 한의학자, 언더그라운드 강사, 청개구리, 돌팔이 한의사 등으로 부르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죄값은 받아야죠, 뭐. 대학원이나 박사코스 같은 정상적인 과정을 밟지 않았고, 또 그것을 제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약간은 좀 안티 유니버시티하게 대학가의 공부를 거부하고 재야학자들에게 배우러 떠다녔기 때문에 정규코스를 밟은 사람들한테는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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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은 배운 다음 잊어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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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어떻게 소개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사암 한방의료봉사단장이라고 불러주면 제일 영광이고, 한의사 김홍경이라고 불러주면 더 영광”이라고 대답하는 금오는, 그러나 한의사라기보다는 오늘도 사람들의 잘못된 건강상식과 사고습관을 질타하는 데 더욱 많은 힘을 쏟으며 돌아다니는 아방가르드에 가깝다. 벌써 10여권의 책을 냈고, 최근에는 밀려드는 강의 청탁을 ‘거절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이론보다는 직관을 강조하고 과거의 권위나 상식에 얽매이지 말라고 주장하는 그의 강의는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저는 이론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론을 배운 다음 어느 날은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는 것입니다. 옛날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글을 열심히 써 숙필 단계에 이른 다음에는 다시 생필, 즉 어렸을 때 필법으로 돌아가라고 했거든요. 바둑으로 말하면 정석을 배운 다음에는 지금까지의 정석을 내던져야 응용이 가능한 거죠. 저는 한의학 강의를 쉽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단순하다, 심하게는 저질스럽다고도 하는데, 저는 이건 몸에 좋으니 먹어라, 어디가 아플 때는 무엇을 어떻게 먹어라 하는 이런 암기식 한의학이 아니라 ‘생각하는’ 한의학을 만들자는 것이고, 제가 이렇게 쉽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기까지는 저 역시 수많은 언어와 이론을 넘어선 고충이 있었습니다.”
파격적인 주장으로 과거의 권위를 흔들면서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기존 권위는 무시당해야 마땅하다’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학문의 시작은 의심 아니겠어요. 의심을 자주 하고 질문을 자주 하는 건 ‘지혜의 시작’입니다. 저는 강의중에도 약이면 독을 한번 생각하고 독이면 약을 한번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탄력성 있는 두뇌를 개발하자는 거죠. 그런데 지금까지의 한의학이나 양방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해 있습니다. 정치적인 용어로는 절대주의죠. 저는 좀 상대주의적으로 사고하자, 의심을 가져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달변가다. 질문을 하면 주저없이 대답한다. 손짓 발짓 섞어가며, 영화와 음악을 두루 예로 들면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금오의 강연을 듣다보면 저절로 흥이 난다. 그가 늘 강조하는 화두(話頭)는 ‘매사를 뒤집어 사고하라. 상식에 매이지 말고 원리에 눈떠라’. 그러나 정작 환자들 앞에서는 웃기고 울리며 진지하게 진료하는 그를 지켜보면 그가 단순히 기존 권위와 질서에 무작정 덤벼드는 돈키호테적 기인(奇人)만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