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공에 살며 글 : 최 재 호 [짜오베트남 칼럼] |
많은 외국 사람들은 사이공보다 하노이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사이공이 너무 현대화되어 이 도시의 개방성과 포용성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11세기에 도읍한 용의 도시, 하노이의 역사적 깊이와 고요함에 더 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이공도 300여년의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도시이긴 하지만 그 나름의 개성과 문화적 매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크메르, 중국, 베트남 등의 문화가 상호 유입되어 변용되는 중심에 서 있는 곳. 서방열강들의 침략의 근거지. 수많은 전쟁이 치러진 현장. 일찍부터 국제적인 무역항이자, 비옥하고 번창하는 남쪽의 정치. 경제. 문화적 수도였던 도시. 저는 이 도시가 하노이 보다 더 좋습니다. 이 도시 사람들의 성격도 마음에 듭니다. 개방적이고, 복선을 깔지 않고 직선적입니다. 베트남 땅으로 복속된 후 프랑스가 이곳을 점령하기 전까지 이곳의 공식명칭은 ‘자딘’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862년 프랑스에 의해 ‘사이공’이라는 이름이 채택되었습니다. ‘사이공’이라는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자주 인용되는 한자 어원으로는 자( ‘차이’로 발음) 곤(‘군’으로 발음)입니다. 자는 장작, 잔가지, 울타리 등의 뜻이고, 곤은 막대기 등의 의미에서 목화를 뜻하는 베트남어로 진화했습니다. 일찍이 크메르인들이 이 지역에 심었던 무성한 목화 숲에서 이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보는 게 유력해 보입니다. 그러나 베트남에 사는 화교들이나 중국인들은 자곤(한자로 쓸 것)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1859년 프랑스가 이곳을 점령한 후 고전적인 서구식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게 되고 그래서 “아! 멋진 도시, 사이공! 사람들은 이곳을 좋아 하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네. 어쩌면 그 공간, 또는 최면 때문인가. 아니면 하얀 사각형의 집들이 그리스의 조그만 무덤같이 보이는 곳에 우거진 무성한 신록 때문인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베트민에 패한 후, 베트남은 남북의 두 개의 나라로 분리되고 사이공은 남베트남의 수도가 됩니다. 1975년 4월 30일 전쟁의 종결과 함께 이 도시는 베트남 인민의 군대 관할로 들어오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보통 ‘사이공 함락’이라고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사이공 해방’으로 부르지요.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5월 1일 이 도시는 국부의 이름을 따라 호치민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처음엔 한가롭던 조그만 어촌에서 도시로 발전하고 격동의 베트남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 모습을 지켜온 도시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