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 요나의 기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욘 2:1-10)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을 치는 요나가 풍랑의 원인으로 드러나자 요나는 선원들에게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 자신이기에 자신만 죽어 버리면 풍랑은 잠잠해 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하나님을 피한 죄를 회개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가겠다고 한다면 풍랑이 잠잠해지고 자신도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할 뿐 니느웨로 가겠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이 죽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왜 스스로 죽음을 자처할 뿐 회개하면서 니느웨로 가겠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 받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싫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이 죽을지언정 이방인이 용서 받고 심판에서 건짐 받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니느웨가 회개한 후에 요나가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3)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만 누릴 자격이 있을 뿐, 이방인은 결코 그러한 자격이 없는 멸망의 존재들로만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요나의 사고방식이었고, 요나를 통해서 드러내시는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기도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스라엘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못 박아 두는 것은, 이스라엘 외에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실천하는 민족이고, 이스라엘만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며 제사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은 오직 이스라엘 외에는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구원 역시 이스라엘에만 해당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이 율법도 없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는 이방인에게도 주어진다면, 그동안 이스라엘이 실천하고 지켜오던 모든 것들은 허망하고 헛된 수고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이 없이도 구원 받는 자가 있다면, 대대로 오직 율법을 중심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삶은 그 가치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이방인의 회개와 구원만큼은 설사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요나를 바다에 예비하신 큰 물고기로 하여금 삼키게 하십니다. 그리고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지내며 비로소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먼저 1,2절을 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을 스올의 뱃속으로 표현합니다. 스올이란 음부, 무덤을 의미하는 말로서 땅 속 깊은 곳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흔히 지옥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즉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깊은 어둠의 세계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요나로 하여금 스올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경험한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요나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한 사람입니다. 그런 요나가 죽음이 두려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을까요? 만약 죽음을 두려워 기도 했다면, 살려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기도에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3,4절을 보면 요나는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에서 요나는 자신을 두고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는 의미는 멸망의 자리로 내어 쫓김을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가장 비참한 자리로 내려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나는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는다는 말을 하고, 6절을 보면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산의 뿌리는 땅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비참한 자리로 낮아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요나를 낮은 자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낮은 자리에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실제로 요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을 주의 목전에서 쫓겨난 자로 보면서 주의 성전을 바라본다고 합니다. 주의 성전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고 제물을 바칠 때 하나님은 제물의 피를 받으시면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즉 요나는 낮아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겠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자신들을 살리는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것을 잊고 삽니다. 긍휼과 자비를 자신들의 죄가 아니라 풍요에서 확인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잘못됨을 드러내기 위해 등장시킨 것이 요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낮아지는 고통의 자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자리는 요나가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친 죄로 인한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풍요로움과 열심 있는 신앙생활로 인해 잊고 있는 것이 죄의 자리였음을 요나를 세워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그 마음을 잊은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풍요와 부지런한 교회생활로 인해 죄를 잊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한 보상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 자신을 살게 하는가를 잊고 있는 이스라엘과 같은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이 무너지게 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주의 목전에서 쫓겨난 멸망의 존재가 곧 자신임을 깨달으면서 주의 성전이 어떤 의미로 자신들에게 함께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즉 주의 성전은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는 종교적 행위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살리는 것이 주의 긍휼과 자비하심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은 주의 성전을 바라보는 것에 있음을 알고, 주의 성전을 바라봄으로 주께서 자기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요나는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고 기도합니다.
요나는 멸망의 자리에서 참된 것은 생명이 되는 주의 긍휼과 자비하심이며 인간이 추구하는 세상의 모든 것은 거짓되고 헛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속하였다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신자는 인간의 본질인 멸망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멸망이 나의 자리임을 자각할 때 나를 살리는 것이 십자가임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