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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황추생)와 아비(임설), 아태(오진우)와 아묘(장요량), 그리고 아화(장가휘)는 어릴 때부터 절친했던 친구 사이. 그런 이들이 성인이 되어 고향 홍콩을 떠나 마카오에서 재회한다. 하지만 예전의 순수했던 관계는 끝난 지 오래. 이들에게는 제각각 목적이 존재한다. 화와 아비는 조직을 배신한 아화를 죽이기 위해, 아태와 아묘는 그런 아화를 보호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위기의 순간도 잠시, 다시금 우정을 확인한 이들이지만 화는 보스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며 고민하고, 아화는 친구들에게 아내와 자식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돈을 남겨주길 원한다. 친구들은 조직의 명령을 배신하고 크게 한탕 한 후 마카오를 떠나려 하지만 그런 이들 앞에 조직의 보스 대비(임달화)가 나타나 훼방을 놓는다. [[2]] <익사일>은 남자들의 의리를 바탕으로 한 기존 홍콩 누아르의 ‘하늘을 찌르는’ 비장미를 고스란히 재현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서로의 오해를 풀기 위해 격렬한 총싸움을 벌인 뒤 우정을 재확인하는 오프닝만 보더라도 우리가 열광하던 그 시절 그 감성의 홍콩 누아르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유위강, 맥조휘 콤비와 함께 ‘신 홍콩 누아르’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평가받는 두기봉이 옛 정서를 재현하는 수준에 머물기는 만무할 터. <익사일>이 과거의 홍콩 누아르와 유별나게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면 주인공들이 머무는 공간이 더 이상 홍콩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니 <익사일>에는 우리 눈에 익숙한 홍콩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카오 ‘올 로케’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다시 말해, 두기봉 감독은 홍콩 반환 이후 지정학적으로 변모한 홍콩의 시대상과 이에 따른 혼란한 정서를 이웃한 공간에서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제목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Exiled’, 즉 ‘추방당한’을 뜻하는 제목처럼 영화 속 주인공들이 처한 위치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하다. 뚜렷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화의 경우, 조직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모든 연을 끊고 홍콩을 떠나 마카오에서 가족과 함께 은둔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와 아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서 보스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친구인 아화를 처리하기 위해 마카오로 파견됐다. 이처럼 <익사일>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마카오에 집결한 것으로 설정돼 있다. 낯선 공간에서 다시금 전개되는 친구들의 우정은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보다 폭력과 음모에 의해서만 관계가 성립되고 결국 추방된 곳에서마저 정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화가 틈만 나면 친구들에게 되풀이하는 “난 집을 갖고 싶었어.” “정착할 곳이 필요했어.” 등과 같은 대사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홍콩인들의 무의적인 심정을 반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익사일>에서 과장되게 구현되는 비장미는 정신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홍콩인에 대한 연민의 정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들의 고독하고 쓸쓸한 심정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한 편의 아름다운 시처럼 묘사되는 건 바로 그런 영화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0]] 말로 우정을 논하기보다 행동을 우선하는 극중 주인공들처럼 <익사일>의 세계를 구성하는 건 몇 마디 비장한 대사가 아닌 두기봉의 스타일리시한 연출력이다. 과장된 비장미 속에 고요를 잡아내는 절제의 순간은 그중 백미다. 폭력 묘사가 극단을 치닫는 가운데서도 카메라의 움직임은 동요하지 않고 슬로우 모션을 연상하듯 최대한 느린 움직임을 보여준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음악은 아수라장 가운데서도 단조로운 선율로 거룩한 순간을 강조한다. 특히 두기봉 감독은 총격 신 대부분을 닫힌 공간에서 구성, 인물의 감정을 새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면서 변화의 순간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계산된 연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홍콩 누아르라면 의례 과잉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낭만과 절망을 오가며 잔잔하게 유지하는 건 연출의 힘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보다 놀라운 것은 강약을 살린 리듬감 있는 연출, 공간을 통한 시대상의 반영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가늘고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다층적으로 구현된다는 점이다. 사실 <익사일>의 이야기는, ‘마카오에서 다시 뭉친 친구들이 멋지게 한탕 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려다 조직의 보스와 대결한다’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빈약하다. 그런 점은 이 영화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상이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 ‘버라이어티’의 데릭 엘리는 <익사일>을 두고 “더욱 스타일리시해지고 재미가 강화됐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순해졌다”고 평했을 정도. 하지만 이 얘기는 바꿔 말해 두기봉 감독의 연출을 거칠 경우 어떤 형태의 이야기가 됐든 일정 정도 이상의 퀄리티가 가능함을 증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단조로운 이야기 구성을 들어 <익사일>의 성취를 깎아내리는 건 일견 부당하다. 두기봉의 전작 <흑사회> 연작의 연장선상에서 <익사일>을 볼 때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흑사회> 연작은 삼합회 보스 선출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두고 전혀 다른 함의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흑사회>(2005)가 삼합회 내부의 권력 암투를 통해 의리가 파괴돼가는 과정을 보여줬다면 <흑사회 2>(2006)는 삼합회와 중국 정부와의 밀월관계를 통해 홍콩과 중국 간의 변화하는 정치적 현실을 반영했다. 특히 <흑사회 2>는 새로 보스가 된 지미(고천락)의 아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막을 내림으로써 홍콩 누아르(혹은 홍콩)의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것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바로 그해 발표된 <익사일>은 우연찮게도 홍콩도 중국도 아닌 제3의 공간 마카오에서, 갓 태어난 아이와 함께 숨어 사는 남자를 중심에 놓고 또 다른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존 포드가 서부극을 통해 보여줬듯 두기봉 감독 역시 일련의 홍콩 누아르를 다루면서 각 편마다 장르의 진화를 꾀한다. <익사일>은 그런 두기봉 영화의 현재이자 미래이며 홍콩 누아르의 또 다른 정점을 만들어낸 영화다. 그러니 <익사일> 이전 두기봉의 전작 역시 하루 빨리 국내 극장에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두기봉의 화려한 날들 [[1]]두기봉 감독의 작품이 국내에 개봉하는 건 <더 히어로>(1998) 이후 10년 만이다. 그동안 두기봉은 세계적인 감독으로 거듭났다. 그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미션>(1999) 때부터다. 과잉의 감정을 절제된 이미지로 구현한 연출이 홍콩 누아르의 새로운 미학으로 평가받은 것. 이후 <풀타임킬러>(2001)
GOOD? BAD?
"<더 히어로>에 이어, 장르적 요소들이 비등점까지 가열될 정도의 극단적 유희정신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장르에 대한 경의를 증명한 포스트-홍콩 누아르의 걸작이다." 유운성(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긴장감 있는 정치적 풍자가 돋보이는 흥미로운 홍콩 누아르" 피터 브래드쇼(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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