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월 27일은 6·25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54주년이 되는 휴전협정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6·25전쟁은 우리 한민족이 5,000년 역사를 통해 치른 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처절한 전쟁이었다.
3년 여의 전쟁기간 동안 이 좁은 한반도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25개국 약 150만 명의 다국적 군인들이 동시에 모여 인류사상 보기 드문 살육전을 벌였다.
그 결과 한국군의 전사자 17만 8천여 명을 비롯한 62만여 명과
미군과 UN군의 전사자 4만 1천여 명을 비롯한 16만명,
북한군 93만 명, 중공군 100만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그 밖의 이재민 37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전쟁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000만 명을 고려할 때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이 넘는 1,800여 만 명이 각종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피해는 미국이 5년 간 치른 남북전쟁에서 당시 미국 인구의 3%에 해당하는 100여 만 명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유럽이 인구의 10%인 3,000만 명의 손실을 입은 것을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물적 피해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커서 전국토가 초토화되어 살아 남아있는 사람들조차 당장 헐벗고 굶주림에 지쳐서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민족적 참화를 딛고 일어서 오히려 전쟁이 끝난 후 진정한 의미의 근대화된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광복 이후 친일 청산 문제와 남로당 및 북한의 정치적·사상적 공세로 인해 한 동안 국론 분열을 겪었던 우리 민족은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미증유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국민단합과 경제 발전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건설로 승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한말 근대화의 과정에서 지도층의 무능과 국력의 부족으로 나라를 잃고 일제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우리 민족은 6·25전쟁이라고 하는 역사적 불행을 오히려 미래의 민족웅비 기회로 활용하는 저력과 지혜를 보여주었다.
또한 6·25전쟁 수행과정에서 미국을 위시한 UN군의 도움이 매우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6·25전쟁사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전쟁의 주체였으며, 최후의 승자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개전 초기부터 맨주먹으로 몸을 던져가며 용전분투했던 국군들의 고귀한 희생과,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교과서적 지식보다 먼저 나라사랑의 진리를 선택한 청년학도들의 피 끊는 애국심,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들을 전선에 보낸 후 끝까지 가정과 가족을 지켜준 아내와 어머니들의 눈물겨운 용기와 사랑 등 온 국민들의 피와 담과 눈물이 었기에 우리는 끝끝내 이길 수 있었으며, 오늘의 자랑스러운 이 나라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전쟁과 민주주의의 기본이 '노블레스 오블리쥐(noblesse oblige)'에 있음을 얘기하며, 다른 나라 국민들과는 달리 우리 국민에게는 마치 그런 미덕이 없는 양 이야기하곤 한다.
실제로 6·25전쟁에서도 미국의 장성급 이상의 아들 142명이 참전해서 35명이 전사 또는 부상했다.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의 아들 존(John) 육군소령,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아들 샘(Sam) 대위,
유엔군총사령관 클라크 대장의 아들 빌(Bill) 대위,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아들 밴플리트 2세 공군중위, 해병 제1항공사단장 해리스 소장의 아들 해리스(Harris) 해병소령 등.
그 중에서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공군 조종사가 된 밴플리트 2세는 야간 폭격임무 수행 중 북한 상공에서 실종됐고,
미 해병 제1사단 제7연대 제3대대장이었던 해리스 소령은 장진호 철수작전에서 전사했다.
그 외에도 제34연대장 마틴 대령과 해군참모총장 셔먼 제독,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 그리고 제9군단장 무어 중장 등 고급장교들이 전사하거나 순직했으며,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실종되어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했다.
그러나 당시 신생 독립국가인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노블레스 오블리쥐'가 있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전사 또는 순직했다.
우선 부자(父子)로 참전한 경우는 전쟁 초기 제3사단장인 유재흥 준장, 청년방위대 수도서울 고문단장인
안병범 대령과 안광수 대령 등이 있고,
장인과 사위의 경우는 전쟁초기 제5사단장인 이응준 소장과 제2사단장인 이형근 준장,
전쟁초기 육군참모총장인 채병덕 소장과 백홍석 대령 등이 있으며,
형제인 경우로는 전쟁초기 제1사단장인 백선엽 대령과 제17연대장인 백인엽 대령,
이형근 준장과 이상근 중령,
그리고 1952년 제7사단 제5연대장이던 채명신 대령과 채명세 소위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가문의 인재들이 앞을 다퉈 참전하였고 또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노블레스 오블리쥐를 실천하고 전사한 수많은 이들 중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만 꼽더라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채병덕 소장을 비롯해,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 이용문 준장, 박범집 준장, 함준호 대령, 김현수 대령, 이형근 장군의 동생인 이상근 중령, 권태순 대령, 박노규 대령, 안병범 대령, 김용배 대령, 전성호 대령, 권동찬 대령, 이근석 공군대령, 그리고 채명신 중령의 동생인 채명세 소위 등이 있다.
7월은 3년간에 걸친 동족간의 피비린내 나던 지긋지긋한 전쟁이 막을 내린 달이니 기뻐해야 마땅하건만, 우리에게는 1953년 당시나 지금이나 7월이면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오히려 더욱 아려오는 것은 웬 일일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독일, 그리고 미국과 일본의 경우에서 보듯이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당사국들 간에 서로 용서와 화해 그리고 미래의 평화와 번영을 향한 공동 노력의 분위기가 싹트게 마련이다. 하지만 6·25참전 용사들의 손자들이 여전히 휴전선을 지키고 있는 오늘날에도 압록강을 건너 중국과 동남아를 거쳐 천신만고의 대장정 끝에 늙고 지친 몸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고 있는 팔순의 국군 포로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에게 있어 6·25전쟁은 끝난 전쟁이 아니라 휴전이란 말뜻 그대로 아직도 다만 '멈춘 전쟁'일 뿐임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의 6·25참전 노병들에게는 노병의 특권이자 영광스러운 은퇴를 의미하는 '죽지않고 다만 사라질' 기회조차도 아직 주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시 휴전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조인식이 끝난 지 2시간 후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고 고난과 파괴를 더 하게 하며,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군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에 조인하는 것을 반대하여 왔다.
그러나 이제 정전이 조인되었음에 나는 정전의 결과에 대한 나의 그 동안의 판단이 옳지 않았던 것이 되기를 바란다.…
남한의 부흥은 즉시 그리고 효과적으로 진전될 것이다. 공산측은 북한을 위하여 이만한 일을 할 것인가? 차후도 당분간 공산 압제 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될 동포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동포들에게 '당분간'만 고생하라고 했는데 그 '당분간'이 벌써 54년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북한동포들에게 '잊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우리는 정작 국군포로조차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다행히 정부는 최근 휴전 직전인 1953년 7월에 주로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 철의 삼각지대 등지에서 포로가 되어 송환명단에서 누락되었던 분들을 우선으로 미귀환 국군포로들의 송환을 추진해 오고 있다. 만시지탄이나, 마땅히 우리 정부와 온 국민들이 힘과 지혜를 합해 적극 추진해야 할 것이다.
휴전협정이 맺어졌던 무더운 7월을 맞이하여, 포로송환의 매듭을 풀음으로써 온 국민들을 시원하게 해줄 진정한 평화가 이 땅에 오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konas)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 부장)
출처: 월간 '自由' 7월호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