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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영적 하방운동
누가복음21장34-36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고, 또한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여라. ○그 날은 온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 욕망은 하늘을 찌르고, 행복은 저 먼 ❙
영국의 BBC 방송국이
성형 수술, 상류층 소비, 포르노 문화 등 13개의 항목을 가지고
세계의 190여 국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욕망지수를 보면
우리나라가 1위였습니다.
이 조사 결과만 가지고 본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그릇된 욕망이 강하다는 말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포르노 문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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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욕망지수가 높다는 것은 뭘 말하는 걸까요.
사람들이 그 만큼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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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속담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돈을 어떻게 벌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번 돈을 어떻게 잘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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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속담의 의미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많은 재산 생기면
정승처럼 행세를 하며 살면 된다’는 말로 대부분 해석하고 있습니다.
해석이 이렇게 바뀌는 까닭도
높은 욕망지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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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욕망지수가 세계최고인 반면에 행복지수는 어떨까요.
세계 178개의 행복지수를 조사한 자료를 보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거의 바닥인 102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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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세계 11위의 무역교역국가입니다.
경제 수치로만 보면 세계적인 빈곤 국가이면서도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세계8위인 <부탄>과는 상당하게 대조적입니다.
이 조사결과가 보여주는 높은 욕망지수에 비해
형편없이 낮은 행복지수는 뭘 의미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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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의 조사결과는 우리 국민들이 대부분
스스로 자신의 현실에 대해서 만족하고
감사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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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욕망지수가 높다는 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공동체적인 신명이 없다는 말과 서로 상통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행복지수가 낮다는 말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의 여유가 절대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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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하늘을 찌르고, 행복은 저 먼>,
오늘 우리사회의 이 두 지표를 보면서,
우리 주님 안에서 사는 모습은 어떤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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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의 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우리 사회는
사회 생리적으로 일상적인 연대(連帶)가 불가능하거나
쉽지 않은 바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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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에 대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연대란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고
그의 옆자리에서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하방연대-불편함이 정신을 깨어있게 한다 ❙
사회 생리적으로 연대가 어려운 오늘 우리 사회를 보면서
성공회대 신영복 석좌교수는 어려운 시대일수록
하방연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연대만이 희망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진정한 연대는 하방연대(下方連帶)입니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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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는 하방연대란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우리 삶을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에게 기울이는 겁니다.
내 존재를 그들을 향하게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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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방연대는 단순히 내가 가진 일부를 어려운 이들과
함께 나눈다는 차원보다 더 의미가 있습니다.
하방연대는 ‘함께 나눈다’는 의미보다
‘같이 존재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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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는 그의 동양고전-『강의』에서
하방연대의 바탕 즉 사상적 근거를 무일사상(無逸思想)이라고 했습니다.
무일사상은 중국고전 『서경(書經)』주서(周書)의
「무일(無逸)」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직역하면 무일은 ‘불편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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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부분 ‘불편함’을 ‘고통’이자 ‘불행’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불편함이 정신을 깨어있게 한다>는 사실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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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는 불편함을 고통과 불행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다’고 평했습니다.
한 마디로 불편함을 감수하며 아래로 나아가는 하방연대가
정신적인 삶을 고양해나가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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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일사상에 근거하여 중국은 1957년부터 1980년까지
대대적으로 하방운동을 일으킵니다.
당 간부나 정부 관료들을 일정기간동안 농촌이나 공장으로 내려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군의 고급장교들을 병사들과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게 해서 현장을 체험하도록 한 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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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현장체험이 하방운동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방운동이 <노동과 현장의 체험>이라는 말로서는
그 의미를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또 그것으로는 하방운동의 본래 뜻을 드러내는 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방연대가 단순히 체험의 문제가 아닌
존재론적인 문제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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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하방연대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삶과 행동은 그 자체가 하방연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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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5:40)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이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를 당신과 동일하시며
하방연대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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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한
이 <존재론적 자기동일성(存在論的 自己同一性)>은
그야말로 하방연대의 알짬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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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하방운동은 단순히 노동과 현장의 <체험>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한 ‘같이 존재’하는데 연대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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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중국에서는 하방운동의 목표를 지식인 개조운동으로 잡았던 겁니다.
지식인개조라는 ‘사람의 변화’는 곧 ‘세상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1천만 명이 넘는
당 간부들과 정부 관료들 그리고 고급 장교 등
중국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을 하방운동에 참가시켰던 겁니다.
❙ 사람의 사람다움을 지킬 수 있는 길 ❙
하방운동이 동양 고전의 의미로는
<사람의 참 사람됨을 위한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영감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성화의 삶을 사는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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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25장40절의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신
예수님의 <존재론적 자기동일성>으로 보면,
하방운동은 이웃과 내가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칼릴 지브란」이 이웃을
<나의 또 다른 영혼(My another self)>이라 표현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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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사실 가난한 이웃과 <존재론적 자기동일성>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온전한 성도’가 되기를 원하고,
교회공동체와 세상의 본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열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온전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깊은 영성과 헌신적인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와 능력을 드러내는
<거룩한 무리들(聖徒)>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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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인 영감으로 하방운동이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운동이요,
성화의 삶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는 실천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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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말씀은 ‘어찌하면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을지?’
깨달음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고,
또한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여라.
○그 날은 온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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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4가지 주문사항이 있습니다.
➀스스로 조심하라-방탕과 술 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도록 하고.
➁그 날이 덫과 같이 닥치지 않게 하라-그 날은
온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다.
➂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라
➃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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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주문사항입니다.
➀스스로 조심하라-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에서
[방탕과 술취함]은 세상적으로 타락하고 퇴폐적이며
세상의 문화에 젖은 삶을 경계하라는 의미입니다.
✚
그리고 [세상살이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은
세상살이의 걱정과 염려 때문에 영적인 감수성이 둔해지고,
심령의 영성이 건조하고 고갈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걱정과 염려는 신앙생활을 좀먹는 바이러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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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➁[그 날이 덫과 같이 닥치지 않게 하라-
[<그 날>은 온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라는 말씀에서
<그 날>은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심판의 날은 모른다는 겁니다.
심판의 때는 알 수 없지만, 날마다 우리 삶이 심판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복음서에 나타난 심판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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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도 그렇습니다. <그 날이 덫과 같이>온다고 했습니다.
덫에 걸리듯이 느닷없이 오는 심판은 미래 어느 시점 있을
최후의 불가피한 심판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늘 하루 삶에서도 우리는 덫에 걸리듯이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당하고 있다는 현재적인 심판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판은 죽은 다음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 내 언행과 심사 일거수일투족이
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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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입니다. ➂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은
구원받은 자로써 날마다 합당한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도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며, 말씀의 향기를 잃어버리지 않은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합당한 성화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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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 서기에 아쉬움이 없도록
날마다 가득 찬 믿음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이라는 말의 의미는
<앞으로 다시 오게 될 주님 앞에 제대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미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역시 미래적인 의미로만 쓰인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이 하루하루 시시때대로 <주님 앞에서(Coram Deo)>
온전함을 성찰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현재적입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구원의 하방연대 ❙
네 번째, ➃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어느 시대나 사람다움을 지키며 살기 힘든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특별히 시대가 모질어 사람다움을 지키며 살기 힘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지 우리 안의 지어놓으신 주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는 것은 자기의 몫이었습니다.
이 자기 몫의 사람됨을 지키며 살아가게 위해서는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자기영혼을 매만지는 노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기도란 바로 이 노력의 치열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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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험한 세상에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는
도우심에 나를 위탁하고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가 없이는 온전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다움을 위한 성찰은 자연스럽게 우리 삶을
기도의 삶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겠노라는 자기긍정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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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기도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은
깨어있는 자의 몫이었습니다.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는 말씀은
타락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자존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진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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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언제 하신 말씀인지, 그 시점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그날 밤 주님께서는 체포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이미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곧 체포당하시고
이후 어떤 길을 가시게 될지를 다 아셨습니다.
눈앞에 죽음이 선명하게 보이는 그 길을 가며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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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본문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동안 가르치신 복음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 결론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방연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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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삶은 철저하게 하방연대의 삶이었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이 땅 낮고 낮은 자리에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하방연대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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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요1:14).
이 도성인신(道成人身)의 거룩한 역사는 하방연대가 그 핵심이었습니다.
하방연대가 아니었다면 주님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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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주님의 하방연대를 위하여 히브리서기자는
[(히5:8)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서 순종하셨]다고 했고,
또 바울은 [(로마 5:6)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다는
말씀으로 주님의 거룩한 하방연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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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방연대는
자기를 버린 수준에서 머무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이 되신 그 수준을 넘어서
[(갈3: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신 자리까지 나아가셨습니다.
‘자기 비움의 하방연대’를 넘어, 자신을 쏟아
세상과 사람들을 생명으로 세워주신 ‘구원의 하방연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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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됩니다.
성도들의 하방연대는 우리가 물처럼 자연스럽게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에게 자신을 기울이는 겁니다.
내 존재를 그들을 향해 쏟아 붓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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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낮은 자리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우리가 주님처럼 하방연대하기란 그리 녹녹치가 않습니다.
❙ 사순절, 울안공동체 형제들을 통한 영적 성찰 ❙
욕망지수가 높다는 것은 그 안목이 아래를 헤아리며 자족하기보다는
대부분 위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왜곡된 욕망이 죄악이 되는 까닭은
낮은 자리에 처한 이웃을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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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지수가 세계최고인 나라에서는
사회 생리적으로 하방연대란 말이 낯설고 생소합니다.
하방연대를 생각하지 못하는 사회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소비취향은 넘칠는지 모르지만, 사람의 얼굴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욕망지수가 최고인 나라의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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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사순절을 보내면서 거듭거듭 주님께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울안공동체 형제들을 통해서 빈들공동체의 영적인 하방연대를
진지하게 묵상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
사순절 새벽기도회 내내 자리를 채운 울안공동체 형제들은
창립25주년 빈들공동체를 위해 주님의 거룩한 선물입니다.
울안공동체 형제들이 동행하고 있는 사순절 새벽기도회는
우리 빈들공동체 정신과 영성에 그리고
담임목사의 목회를 가다듬게 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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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목요일 새벽기도회에서 이학재집사님의 기도에서서
저는 제 가슴을 울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집사님은 새벽에 일어나기가 정말 힘들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깨워주셔서
말씀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 올린
그 감사기도가 며칠째 제 가슴을 잡고 흔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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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한 사실은 지난 해 빈들공동체가 울안공동체와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하나가 되는 역사를 허락하신 주님께서,
이번 사순절을 통해서는 울안공동체 형제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해주셨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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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빈들공동체의 많은 교우들이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예배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울안공동체 형제들이
이번 사순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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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금번 사순절은 많은 빈들공동체 교우들에게,
대부분 오래 신앙생활을 해온 빈들 교우들에게
울안공동체 형제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해준 사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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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는 연조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 먼저 된 자라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번 사순절,
울안공동체 형제들을 통해서 성찰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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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찰은 울안공동체를 향하여 우리 빈들 교우들
한사람 한 사람이 온전하고 신령한 영적 하방연대로
응답해야 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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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안공동체를 향한 영적 하방연대는
창립25주년 빈들공동체에 지어주시는 주님의
새롭고 거룩한 선물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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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기드온의 300용사>라는 우리 빈들의 부흥지로가
온전한 영적 하방연대를 가로막고 있다 한다면
부흥지로는 위장된 우리 욕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라는 부흥의 비전은 온전한 영적 하방연대의 빛 속에서
그 생명과 의미가 더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이렇게 사순절을 보내면서 빈들의 신령한 영적 하방연대를
묵상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순절 새벽마다 울안공동체 형제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우리 귀를 열어 듣게 해주신 주님의 은총을 감사드립니다.
❙ 새 영적의기투합의 장으로 부르시는 주님 ❙
<세상에 수많은 교회가운데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새로운 교회>는
우리 빈들공동체의 창립정신이자 선교적인 정체성입니다.
이 <새로운 교회>가 울안공동체 형제들을 관통하지 못하면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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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들공동체에서 울안공동체 형제들의
영적인 회복과 구원의 삶이 가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울안공동체가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울안의 형제들이 빈들공동체 안에서 온전하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체로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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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담임목사 목회의 두 가지 중심축 가운데
중요한 하나인 <빈들공동체 벧엘사역>의 핵심이
영적인 하방연대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신 사순절이었습니다.
이 귀한 깨달음을 주신 주님께 감격의 고백과 감사를 지어 올립니다.
✚
우리는 자신을 열어 성령께서 우리 영혼을 아래로-
울안공동체 형제들을 향하여-자연스럽게
흐르게 하시도록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울안공동체와 우리가 함께 빈들 부흥지로의 바다를 지어가시도록
주 성령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내어 주 성령님께 온전히 드려야 하겠습니다.
✚
빈들의 신령한 영적 하방연대는 주 성령님께서 사순절을 통해 보여주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또 하나의 섭리임을 고백합니다.
또 이 하방연대는 울안공동체 형제들의 회복과
빈들공동체 온전한 신앙과 거듭난 영성을 위하여-
새로운 영적의기투합의 장으로-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거룩한 초청임을 믿습니다.
✚✚
중국의 하방운동은 지식인 개조운동이었습니다.
개조운동이란 기독교적 의미에서는 거듭남의 운동입니다.
빈들공동체의 영적 하방연대는 빈들공동체 전체가
영적으로 온전하게 거듭나
새로운 교회 영성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
주님께서는 이번 사순절에 이 거룩한 과제를
우리가 진진하게 묵상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이 과제를 위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을 빈들공동체 우리가 깊이 묵상하면서,
늘 기도하면서 깨어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높으신 주님께서 낮아지심은 낮은 자를 높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요한 주님께서 가난해 지심은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심입니다.
거룩한 주님께서 겸손하셔서 제자까지 발을 씻기셨습니다.
죄 없이 흘리신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인들을 구원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속죄양 되심은 우리들을 구원하심이요,
하늘이 몸을 숙인 하방연대였습니다.
✚
하방연대로 주님께서는 우리 빈들공동체를 하늘의 크신 뜻으로
새롭게 지어 가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계획과 섭리에 순종하여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부흥지로를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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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말씀을 가슴 뜨겁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움츠러듭니다. 하방연대라는 주제는 너무나 크고 무거운 도전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고 더불어 사는 삶을 살라는 말씀으로 듣습니다. 목사님의 진정성 넘치는 성찰에 깊이 공감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빈들이 울안을 향해 가는 것이 하방일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빈들이 영적으로 성숙해 있거나 준비되어 있다는 자신감을 아직은 도저히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성찰하고 영적 성장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장로님 지적에 뜨끔해지는 것이 저만의 심정일까요!? 중심이 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반성합니다. 주여, 번잡한 것들을 제하고 주님일을 하는데 더 촛점을 맞추고 거기서 보람을 찾는 저희들 되게 도우소서.
장로님의 말씀을 우리가깊이 묵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자비하심과 긍휼 가운데서 우리가 심령들이 성숙하게 부흥되도록 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