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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장악의 경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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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주드 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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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3 / 허남웅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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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드 로는 왕가위 감독과 함께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 한없이 순수한 남자 제레미로 분했다.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1년 가까이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리는 주드 로의 모습에서 강함을 넘은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거친 갑옷을 걸친 달콤한 기사. 잔뜩 날이 선 새파란 눈동자에는 날카로운 검을 숨기고 있지만, 한순간 이완되는 눈웃음으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입력을 지닌 주드 로에게 어울리는 수사다. 시야에 들어온 적군은 절대 놓치는 법이 없는 소련의 저격수였다가(<에너미 앳 더 게이트>)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는 뉴욕의 바람둥이를 연기할 수 있었던 것도(<나를 책임져, 알피>), 약속한 의뢰는 지옥 끝까지 쫓아가 끝을 보고 마는 잔인한 살인청부업자에서(<로드 투 퍼디션>) 첫눈에 반한 사랑에 운명을 거는 순수한 소설가 지망생으로 환골탈태가 가능했던 것도(<클로저>), 그런 이중적인 인상 덕이 크다.
다면체 인간성의 극단을 횡단하며 필모그래프를 채워온 주드 로는 양가적인 감정을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 눈빛과 표정은 물론 인공적인 분장()과 의도적인 탈모(<로드 투 퍼디션>까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연기 수단을 총동원한 배우다. 그런 주드 로가 왕가위 감독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 참여한다는 소식은 기대만큼이나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사랑보다 이별에, 과정보다 순간에, 사건보다 감정과 관계에, 여자보다 남자 캐릭터에 집중한 왕가위는 언제나 남자 주인공의 눈 속에 무거운 눈물을 봉인해왔다. 하여 표정보다 눈빛을, 흔들림보다 떨림을, 변신보다 변화를, 과장보다 절제를 선호해온 왕가위의 페르소나 양조위와 비교해 주드 로가 상극으로 보였던 것이 사실. 아무래도 왕가위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주인공으로 그를 낙점한 건 모험으로 보였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 주드 로는 뉴욕 소호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제레미로 등장한다. 적당히 바쁘고 영업시간 틈틈이 담배 한 대 피워 물 여유도 즐길 줄 아는 그 앞에 연인과의 이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리지(노라 존스)가 서성댄다. 감정을 추스를 말벗이 필요했던 그녀를 위해 스스럼없이 친구가 돼주고 블루베리 파이 한 접시를 대접하는 그의 친절에서 사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리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깨닫지만, 그녀가 여행을 하겠다며 곁을 훌쩍 떠난 지는 53일째. 매일같이 그녀의 엽서를 기다리지만 조급해하지 않는 그는 그리움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순간이 만족스럽다. 300여 일이 지나고 카페로 찾아온 리지. 제레미는 예전과 다름없이 얘기를 들어주고 파이도 만들어주지만, 블루베리보다 달콤한 키스도 잊지 않는다.
제레미는 왕가위 영화라면 모름지기 기대할 법한 인물의 전형성을 배반한다. <해피 투게더>의 아휘처럼 사랑에 지쳐 상처받지도, <화양연화>의 차우처럼 사랑 앞에 머뭇거리지도, <2046>의 차우처럼 옛사랑에 얽매이지도 않는 제레미는 비극성이 배제된 순수의 캐릭터다.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했던 왕가위 영화로는 드물게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 사랑을 긍정하는 기운이 짙게 서려 있는 건 제레미의 공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미국에서 작업한 홍콩영화가 아니라 ‘그냥’ 미국영화를 만들려 했다”는 왕가위가 제레미 역에 처음부터 주드 로를 염두에 둔 건 그의 표정에서 미국식 여유가 묻어났기 때문이다. “주드 로의 표정엔 삶에 발목 잡힌 어두움이 없다. 가장 미국적인 캐릭터로 손색이 없다”고 이유를 단 왕가위는 주드 로가 가진 여유로움을 최대한 보여주기 위해 한 장면을 여러 개로 쪼개 갖다 붙이는 편집을 택했다.
“특정 순간의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그렇게 집중적으로 촬영해본 적이 없었다. 왕가위 감독의 연출은 내게 매우 특별했다.” 제레미와 리지의 키스 장면을 위해 주드 로와 노라 존스가 3일 동안 100번도 넘게 입을 맞춘 건 널리 알려진 일화. 배우 입장에선 무한 반복되는 연기에 진이 빠질 만도 한데, “리지의 입에 묻은 크림을 1갤런이나 먹어치웠다. 배우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노라 존스와 그렇게 키스를 할 수 있었을까. 하하.” 실없는 농담을 날리는 걸 보니 꽤 유익한 경험이었던 모양이다. “촬영 가능한 각도에서 모든 앵글로 키스 장면을 찍었다. 즉석에서 무언가 계속 결정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재미있었다”는 주드 로는 “다만 매번 바뀌는 요구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왕가위 감독이 요구한 건 역할에 대한 완전한 신뢰였다. 그의 카리스마와 에너지가 안정감을 부여할 것이라 여겼던 감독은 “주드 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했다”며 캐릭터를 대하는 그의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노력과 열린 자세 덕분이었을까.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가위의 연출보다 주드 로의 연기로 기억될 공산이 크다. 영국 영화비평지 ‘사이트앤사운드’는 “결핍된 연출 속에서 주드 로의 연기는 오래된 불꽃처럼 강렬하다”고 이런 심증에 힘을 실어줬다. 거친 인상이나 찌푸린 표정과 카리스마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기준에 비춰, 주드 로는 부드러움으로 장악할 수 있는 카리스마의 어떤 경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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