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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말릴 늙은이
어정과 비행장 등 두 교차로를 지나 강릉 시내권에 들어섬으로서
무리라고 여겼던 삼척 ~ 강릉 강행이 마침표를 찍어가고 있었다.
섬석천, 청량교차로 이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병무청
앞쯤부터는 우산을 꺼내야 할 만큼 제법 내렸다.
평해에서 예까지 잘 오도록 맑아준 날씨가 고맙기만 했을 뿐이다.
남대천(강릉교)을 건너 옥천오거리에 도착해 성내동길을 물었다.
그리고 옛 기억을 더듬으며 성내동 일대 골목을 뒤졌다.
참으로 못말릴 늙은이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오는 밤중에 4반세기도 더 지난 집을 찾겠다고 헤매고 있으니.
끝내 찾아낸 집은 발길을 연지 근40년이나 된 설렁탕집'춘하추동'.
개업한 해인 1971년부터 이따금 들르다가 1980년대 들어 여름철
마다 애용한 음식점이다.
한 대학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던 1980년대초였다.
강의실 대신 거리에서 산다(데모만 한다)는 대학 이미지의 개선을
위해 나는 나름의 방안 강구에 골몰했다.
사학과(史學科) 답사팀(踏査)에게는 늘 대형플래카드(placard)를
부착한 학교버스를 제공했다.
건실한 동아리로 하여금 낙후지역 학교 또는 기관과 결연을 맺게
하고 적극 후원했다.
대학의 사명인 탐구와 봉사의 적극적 실천을 통해 저간의 부정적
이미지를 벗겨보려 했던 것으로 상당히 주효했다.
데모하는 대학으로 알았는데 탐구열도 있다고 알려졌고 적극적인
봉사활동에 지자체로부터 감사장이 오기도 했다.
이즘에는 일부 대학들이 홍보수단으로 대학의 이미지와 동떨어진
TV방송 황금프로의 스폰서(sponsor)가 되고 있다.
오죽하면 그러랴는 연민도 일지만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학은 소비자의 구매심리를 자극해야 살 수 있는 기업이 아니다.
연구하고 가르치고 배워 봉사하는 일이 사명인 특별한 구성체다.
대학의 현명한 소비자(학생)를 끌어들이려면 이런 거금의 낭비가
아니라 우수한 교수진의 확보와 장학제도의 확충 등 사명의 충실
도를 높여야 한다.
등록금 인상 반대가 연중 행사인 학생들이 어렵살이 바친 자기의
등록금이 마구 새는데도 무반응인 점은 참으로 기이안 일이다.
나는 강릉의 한 해변에 대학 구성원과 가족을 위한 하계휴양소를
개설하고 학교버스를 투입, 영동고속국도를 누비게 했다.
대학 구성원 간의 유대는 물론 상당한 홍보효과도 거두었다.
적잖은 위험이 따르는 이 프로그램을 체크하기 위해 강릉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 때마다 들렀던 집이 바로 이 춘하추동이다.
그리고, 강릉시의 한 대학에서 개최된 세미나에 참석한 한 주간을
묵었던 집도 기어히 찾아갔다.
그 집이 찜질방을 겸한 호텔로 성장해 더없이 다행이었다.
이같은 행태가 내 모습이다.
구연(舊緣)의 중시(重視)인가 변화를 거부하는 몸부림일까.
새 것을 두려워함일까 옛 것에 대한 신뢰인가.
대관령 옛길 (prologue) - 제민원 -
밤새 눈(雪)으로 바뀔까 염려했는데 고맙게도 맑고 포근했다.
일기예보에 촉각을 세운 채로 평해 ~ 강릉길을 서둔 것은 폭설로
마비되기 전에 대관령을 넘어야 한다는 일념에서 였다.
대관령은 고위평탄면지형(高位平坦面地形)으로 목축업과 고냉지
채소업의 적지(適地)지만 영서와 영동을 가르는 지형적 특성으로
겨울에는 늘 설국(雪國)이며 동토(凍土)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겨울의 평해대로 긴 여로는, 또 여의찮은 몸상태에서는
대관령만 무사히 넘으면 만만하다고 할 수 있다.
나흘의 강행으로 지친 몸을 추스려야 했고, 새벽길을 재촉하느라
강릉땅을 살펴보기는 커녕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실은, 강릉시의 명소들은 물리도록 드나들어 미련이 없다.
그리고 나는 지금 관광중이 아니고 오직 평해대로를 걷고 있다.
복원중인 객사문과 임영관, 칠사당 등 옛 강릉관아 일대는 살펴볼
기회가 다음 스케줄에 있으므로 새벽 걸음이 가벼웠다.
객사문사거리 이후 남대천을 끼고 경강로를 걸었다.
성산면 이후 왕산, 임계(정선), 하장(삼척)을 거쳐 태백으로 가는
35번국도다.
성산면 구산리 삼거리
성산면사무소 앞 도착에 맞춰 먼동이 터왔다.
구산역(邱山驛:이중환의 택리지와 여러 기록에는 丘山)터를 알아
보려 했으나 대꾸해줄 사람이 있을리 없다.
무심코 면사무소 문을 밀어보았을 뿐인데 열렸고, 홀로 무얼 하는
중이었는지 중년남이 화들짝 일어섰다.
그를 통해 대충 확인했고, 복원된 대관령 옛길도 안내받았다.
그는 밤샘 야근을 했을까, 급한 용무로 새벽같이 출근한 것일까.
아흔아홉굽이의 옛 영동고속국도는 터널과 직선의 신 고속국도에
밀려서 한가하기 그지없는 지방도로(456번)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보행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평안한 길로 변했다.
성산삼거리에서 35번국도를 떠나 이 평안한 길로 들었다.
강릉국도유지관리소를 지나 평해대로에서 처음 느껴보는 평안한
마음으로 걸었다.
보광리길 415번지방도의 분기점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다.
우측 보광천 건너의 원통형 건물이 다녀가라 손짓하는 듯 했다.
<대굴령마을>이다.
성산면 구산리에 본부(도농교류센터)를 두고 야생화마을(어흘리)
자동차마을(보광1리), 전통먹거리마을(보광2리)등 전국제일의 농
산촌테마관광 종합타운을 지향하고 있단다.
"사는게 뭐 그리 급하나?! 대굴령마을에서 쉬다 가세!!"
슬로건 대로 잠시 쉬며 살펴보았다.
전국도처에서 시도하는 이런 테마타운들이 오래지 않아서 흉물로
변하는 불운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
대굴령마을(상, 하)
대관령 옛길 - 이병화유혜불망비 -
참 평안한 걸음으로 어흘리 제민원(濟民院) 앞에 당도했다.
어흘리는 대관령 아래 여러 마을을 총칭한 지명이란다.
於屹(어흘)은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수하는 지명을 말한다나.
지금은 "토기, 토우(土偶), 목기, 목불, 목각인형, 청자, 백자, 옹관
(甕棺), 석검, 청동주전자, 청동정병(淨甁), 민화, 설화도.... " 등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제민원을 대신해 있다.
1993년에 오픈했다는 대관령박물관이다.
고미술 수집가 홍귀숙(洪貴淑)이 평생 모은 유물이라고.
대관령박물관(상)과 대관령옛길 들머리(하, 제민원)
대관령, 험한 산 오르막 시오리(15리) 길이기에 제민원의 역할은
막중했을 것이다.
'제벵이'라 불렀던 제민원마을에서 좀 가면 '원울이재'(員泣峴)다.
강릉부사가 부임때 울었고 이임때 또 울었던 고개라나.
도성발 600여리의 먼먼지방으로 좌천당한 신세를 한탄해 울었고
떠날 때는 정든 백성과 후한 인심이 아쉬워 울었다는 고개다.
내가 사는 삼각산 자락 우이동을 두고도 그랬다는데.
어쩌다 산골까지 밀리게 된 것을 탄식하며 울었고, 공기좋은 곳을
떠나기가 아쉬워 울었다고.
하제민원 마을의 띄엄띄엄한 집들은 옛길 복원과 때를 같이 하여
리모델링을 했나 새로 들어섰나.
식당, 민박 등 영업태세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집들이다.
시멘트포장과 차량들이 깊숙한 이 산속까지 들어오다니?.
영업 용도의 차량도 유감인데 하물며 등산객들이 몰고 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다.
옛길 복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제왕산 갈림길이 나온다.
남쪽의 841m 제왕산(帝王)은 고려32대 우왕(禑王:1374~1388)이
왕위에서 축출돼 유배되었던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대간을 오르내릴 때 늘 능경봉에서 바라만 보다가 마침내 하루를
접고 올라본 적이 있는 산이다.
과거길의 선비들이 쉬어갔다는 주막자리에는 귀틀초가집이 복원
되어 오가는 이들의 휴식공산으로 제공되고 있다.
오르기를 계속하면 간이쉼터가 조성돼 있고 능선마루에서는 강릉
도심뿐 아니라 멀리 동해까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복원된 옛길의 주막(상, 하)
좌우 원근의 터널들이 들락거리는 차량들의 소음만 없다면 한 폭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대관령은 7개의 터널을 가진 터널공화국이다.
스위스는 시계로 유명하지만 터널왕국이며 모노레일의 원조다.
따라서 토목기술과 톱니기계공업이 세계에서 으뜸이다.
3450m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까지 모노레일을 깔았으니까.
우리나라도 토목기술만은 버금갈 것이다.
우리기술이 진작 이랬더라면 낙남정맥 남강절개를 비롯해 수많은
산들이 난도당하지 않았으련만.
영동고속국도 대관령터널(상, 하)
도로는 차량들로 몸살 앓을 때 비로소 존재의의와 생명력이 있나.
신바람난 터널들에 비해 각종 차량들이 꼬리를 물어 활력 넘치던
옛 고속국도는 이름 없는 임도인양 쓸쓸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율곡(栗谷)의 자당 사임당 신씨의 한양 왕래 길이라 사친시(思親
詩)도 띈다.(詩碑는 옛 영동고속국도 변에 있다)
반정에 오르기 직전에 한 불망비가 늙은나그네를 감동먹였다.
기관 이병화 유혜불망비(記官李秉華遺惠不忘碑)다.
어흘리 주민과 이 길을 오가던 장사꾼들이 이병화의 선행을 기리
려고 이조23대 순조24년(1824)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단다.
당시, 험준한 대관령길을 왕래하는 길손이 많은데도 도중에 숙박
시설이 없어 동사자가 속출했단다.
없었던 게 아니다.
군림하는 관리와 내로라 하는 양반등쌀에 화중지병이었을 뿐이지.
'기관'은 고려땐 하급관리였고, 이조때는 지방하급관리직이었다.
향리(鄕吏)에 불과했으나 인정많은 기관 이병화는 반정에 주막을
짓고 어려운 길손에게 침식을 제공했다는 것.
百緡殖利 惠此店幕(백민식이 혜차점막)
賴以資生 不耕猶食(뇌이자생 불경유식)
行旅得息 居者有廬(행여득식 거자유여)
銘之片石 以永來譽(명지편석 이영래예)
백냥을 늘려서 나그네를 위한 집을 지었으니 나그네가 먹을 거리
걱정 하지 않고 쉬고 머물다 갈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조각돌에
새겨 오래오래 자랑하려고 세웠다는 뜻이리라.
기관 이병화 유혜불망비(뒤에 보임)
말단 향리도 벼슬인데, 우쭐대지 않고 괄시받는 상민들을 위하여
그리 했다는 점이 돋보이지 않는가.
유행병처럼 번져있으며 침소봉대와 허례허식의 흔해빠진 공덕비,
불망비에 비해 얼마나 가식없고 진솔한가.
'선질꾼'의 작품은 아닐 것이고 길손중에는 선비를 비롯해 유식한
이들이 있었기에 저 비문이 나왔으리라.
대관령 옛길(epilogue) - 반정 -
곧 옛 영동고속국도상의 반정(半程)에 올라섰다.
강릉에서 대기상태로 겨울을 넘겨야 할 지도 모를 일인데 날씨가
큰 부조를 했다.
'대관령 옛길'은 구산(성산면소재지) ~ 반정 ~ 대관령 ~ 횡계(평
창군)까지를 말하며 그 중간이 반이라는 뜻의 반정이다.
대관령이 한양길 구구절(九九折)높고 크고 험한 영마루로 영동과
영서를 가르며 교류의 큰 관문[大關]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관령 반정
'옛길' 안내판에 따르면 강릉의 진산으로 높이865m(현 고도는 공
사중에 많이 낮아졌음), 길이 13km의 대령(大嶺:신라), 대현,굴령
(大峴, 崛嶺:고려), 대령산(大嶺山:이조태종실록)이었다가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처음으로 대관령이라 기록되었단다.
그러니까,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이 음차(音借)
되어 대관령이 되었다는 설은 단지 속설일 뿐이다.
반정에서 영마루를 버리고 국사성황당(國師城隍堂)길로 들었다.
오르는 도중에 성황당을 거쳐 내려오는 지적장애인 팀을 만났다.
상당한 빙판길을 인솔 교사들의 도움 받으며 용하게도 내려오는
그들은 서울 구로정진학교 각급졸업생들의 졸업여행중이라는데
'예원의 집' 가족처럼 인사성이 특별하게 밝아 쉬이 알아봤다.
그들 역시 백두대간을 비롯해 산들을 극복과 단련의 장으로 삼는
예원공동체처럼 산을 택하고 있나 보다.
의지와 신체의 발육과 강인, 선량, 행복을 동시적으로 성취하게
하는 힘은 오직 산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으니까(J.Coste)
반정 ~ 국사성황당 옛길(상)과 대간 능선마루의 이정표(중)
국사성황당 입구(하)
겨울 대관령이 만만할 리 있는가.
고도를 높이면서 옛길은 빙판으로 변했다.
어렵살이 올라선 930m 삼각점에서 성황당길을 잠시 미루고 백두
대간 마루금을 밟으며 선자령쪽 항공관제탑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도 고장중인 몸으로 대관령 옛길을 걸어 백두대간 대평원의
품에 안긴 환희!
백두대간 종주길에서만도 4번이나 되지만 비할 데 없는 환희다.
뿌듯하게 풍만한 가슴으로 성황당을 거쳐 영마루로 내려갔다.
옛길이 새삼 고마웠고, 이 길을 복원한 강릉시도 고마웠다.
이 길이 없었다면 굽굽이 지루한 포장길을 돌고돌아야 했으니까.
한데, 겨우 사람 하나 통행할 만큼 좁고 험한 길을 사재(私財)들여
여러 달에 걸쳐 확장한 사람을 부관참시했다니?
주인공은 이조11대 중종때 강원관찰사였던 고형산(高荊山)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사후 일어난 병자호란때, 주문진 상륙의 적군이
이 탄탄 대로 덕에 쉽사리 진격하여 도성을 점령했다 하여 인조의
진노를 사서 부관참시 당했다는 것.
그러나, 대관령이 병자호란과 밀접한 관련이 없을 뿐더러 경강로
(京江路)의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그의 무고함이 입증되고 재평가
받았다니 다행이다.
하긴, 그가 조광조 등 신진사류를 축출한 기묘사화를 일으킨 주동
자중 하나였으니까 부메랑이 됐을 수도 있겠다.
평창은 왜 일방통행을 했을까
선자령 ~ 대관령 일대는 풍차왕국이다.
마구 파헤친 것은 정비되었지만 풍력발전소가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도 되는 듯 올인하고 있다.
20년 후라야 겨우 이익이 창출될 수 있다는데 벌써 부정적이다.
너무 멀리 잡은 손익분기점이 문제란다.
풍차의 나라 네델란드와 합작했으므로 믿을만 하다고?
기술 사대주의 아닌가.
아무리 난동이라 해도 해발800m이상의 막힘 없는 영마루다.
오후에 들면서 얇아가는 햇볕에 기온의 하강음이 들리는 듯 했다.
횡계에서 5일간의 평해대로를 일단 접고 평창 대하리 소정님네에
(동그라미황토방) 가기를 조금 전 통화에서 약속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횡계길을 재촉하는데 K로부터 전화가 왔다.
바부산님에게 해외원정 계획이 있었던가.
산악훈련중 추락,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고.
고전하던 출판사를 접고 새 직장(월간지 편집장)에서 일한지 겨우
보름인데 이 무슨 액운인가.
섬과 해안 거주자에게 익사를 비롯해 해난사고가 다반사인 것처럼
산과의 교분 기회가 많을 수록 대소 산악사고 또한 불가피다.
다만,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도전 의지를 불태우는 곳에 잠복
중인 대형사고는 잠시라도 느슨할 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산악서적출판사를 경영했고 산악지의 편집장인 그가 이를 모를 리
없겠기에 더욱 안타깝고, 천근 무거운 걸음으로 횡계에 도착했다.
횡계리(橫溪)에는 대관령이 속한 도암면을 대관령면으로 바꿨다는
홍보판이 곳곳에 붙어있다.
실은, 대관령 영마루는 강릉과 평창의 경계다.
고루포기산부터 능경봉, 대관령, 선자령, 곤신봉, 매봉, 소황병산,
노인봉, 진고개(泥峴), 동대산, 두로봉까지 긴 백두대간 마루금이
강릉과 평창을 가르고 있다.
그러므로, 풍작과 풍어의 키를 쥐고 있다는 강릉의 국사 '범일'(梵
日)을 모신 성황당과 대관령 산신의 거처인 산신각도 평창땅이다.
그러나, 대관령과 강릉은 동지이명(同地異名)으로 인식되어 있다.
관동의 큰 관문(關門)이라 해서 대관령(大關嶺)이라 잖은가.
그러기에, 대관령 옛길도 강릉시가 공들여 복원한 것이리라.
대관령을 평창땅으로 알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고원지대인 평창에는 대관령은 평범한 고개일 뿐이다.
오직 강릉에만 높고 크고 험한 영(嶺)이다.
대관령터널 7개중 6개가 강릉땅에 있다.
이런 정황에서 평창군이 대관령면으로 일방적 개명을 단행했다.
강릉시가 발끈할 것은 자명한 일.
강릉이 애써 지은 농사를 평창이 추수해간 형국이라 할까.
그래서, 지명위원회가 있다.
이해당사자간의 사전 조율을 시도한다.
터널 하나가 뚫려도 양쪽 지역대표가 상호 협의를 거쳐 명명하고,
합병과 분리지역에서는 더욱 예민한 것이 전국적인 현상이다.
개인은 물론 단체와 기관, 상호 기타 등, 이름이 명운을 좌우하는
듯 유난한 민족 아닌가.
평창인(人)까지도 평창군측의 일방통행에 부정적인데 하물며....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홍보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더욱 설득하고 협조를 구하는 자세여야 할 것이다.
이해지역인이 아니고 단지 길손일 뿐이면서도 귀추가 주목된다.
그 까닭은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지만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와 자세도 중요하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