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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생각해보면 영화를 보는데 무슨 성향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오늘은 액션영화를 보고 싶고, 또 내일은 멜로드라마를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 구분을 할 수가 없을 것도 같은데, 사실은 그러한 기분이 드는 것도 역시 팔자의 십성구조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겠느냐는 팔자지상주의로써 관찰을 해보는 것이다.
가령 데이트를 하는데, 아가씨에게 잘 보고 싶은 총각이라면, 아가씨의 기본적인 영화선호도를 십성으로 관찰하고, 다음에 현재의 운세에 대한 성향도 대입을 시켜서 적당한 영화를 골라준다면 아마도 상당한 가산 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활용을 하는 것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다만 기본적인 형태를 분류해 놓으면 선택은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영화라고 하는 것이 종합예술이라고 하는 만큼 그렇게 간단하게 한가지의 십성으로만 분류를 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 내부에 흐르고 있는 느낌을 중시해서 고려해보도록 하겠다. 세상에 절대적인 법은 없으니까 참고적으로 알아두면 언젠가 쓰일 기회가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잠시 관찰을 해보도록 하자.
공상영화나 공포영화 등이 편인적인 영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종교성이 포함되어도 좋다. 요는 신비한 내용이 전편에 감돌고 있어야 한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또 다른 하나의 삶이 아닌, 전체적인 상황에서 대단히 신비로운 영화라면 흥미만점이다. 특히 생각나는 것은 레이더스에서 나타나는 신비로움은 편인에 속한다. 잃어버린 성궤를 찾는다는 것은 편인의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전개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은 반드시 편인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반면에 공포영화는 전편에서 흐르는 괴괴한 분위기로 인해서 흥미롭다고 하겠는데, 이것도 너무 황당한 이야기가 되어서는 역시 신비롭지 않다. 뭔가 사실적으로 일어날 수가 있는 그런 상황설정에서의 초현실적인 내용은 그대로 편인성분에 부합이 되는 줄거리라고 본다.
어떤 직감이 도입되는 영화가 정인에 가깝다고 생각하다가 보니까 '리틀부타'가 생각난다. 영감이 추가되는 것이다. 전혀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그러한 삶의 중간중간에 정인 적인 직관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리틀부타 같은 경우에는 정재에서 강제로 정인으로 이끌고 가려는 영화처럼 보였다. 즉 일상적인 일에서 점차로 윤회라고 하는 영역으로 방향을 유도하는데, 그 중에서 자신이 전생에 사용했던 모자를 집는 대목에서는 순전히 직관적인 영향을 강조하는 것 같은데, 물론 내용상으로는 전생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의미겠지만, 현실적으로 볼 적에는 직관적으로 마음이 가는 것에 손기 가는 것으로 보면 타당할 것 같다.
그리고 영화에 따라서는 편인과 정인의 경향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봐야 하겠다. 원래가 신비주의 속에는 직관주의가 포함이 되어있는 것으로 생각을 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정확하게 설명은 할 수가 없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는 것이라면 정인성분으로 간주를 하려고 한다. 즉 미주알고주알 따지고 드는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콜롬보의 경우라고 한다면 미리 어떤 예감이 들고, 그 예감을 힌트로 삼아서 차근차근 접근해 나가는 수사방식이 바로 정인 적인 성분이 아니겠는가 싶다.
(처음으로)
내 멋에 겨워서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생각을 해보다가 소오강호를 떠올렸다. 그리고 보면 무림의 인물들은 대개가 자신의 흥에 겨워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비견 성이 많은 것으로 분류를 해본다. 독존(獨尊)의 형태가 강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즉 자기 잘난 맛으로 산다는 이야기에 해당하겠다. 무술영화라고 하더라도 어떤 복수를 하기 위해서 무술 연마를 하는 형태는 비견으로 보기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영화로써는 '마이웨이' 같은 형태도 비견 성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라톤맨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주체성이 강력한 사람들의 삶을 다룬 영화라면 비견 성이 강한 것으로 보겠다.
일단 겁재를 생각하면 건달들의 생활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어서 연결되는 상상은 어쩐지 사기꾼의 냄새가 약간 풍기는 듯 하다. 목적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존재를 남들이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겁재의 특징이라고 보겠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동기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십성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가령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식신과 편재가 도와야 하고, 순간순간의 위기를 넘기는데 에는 상관의 재치가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방이 허점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려면 편관도 필요하다.
이렇게 서로서로 연관되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 어느 영화에서나 공통적이라고 봐야한다. 다만 그 주된 줄거리는 남들과의 대결에서 돋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깔려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형태의 영화로 다른 예를 들어본다면 스포츠를 다룬 형태가 될 것이다. '록키'의 형태가 특히 이에 해당할 것 같다. 어차피 견겁은 남들과 어울리는 것에는 서투르기 때문에 호흡을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축구나 야구는 어울리지 않는다.
도박을 하는 것이나, 권투를 하는 것이나, 서로 통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혼자서 주연이라는 이야기이다. 겁재는 남들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에는 서투르기 때문에 주로 솔로가 되는 것이다. (처음으로)
식신이 다루는 영역은 항상 신선 감이 있다. 그리고 계획적이다. 또 황당하지 않은 가장 사실적인 바탕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가장 합리적이면서도 가장 황당한 이야기가 백투더퓨쳐가 아닌가 싶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에 언제나 사실 감이 있어서 속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문득 느껴보면 전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주인공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검색하기 위해서는 여간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식신의 매력이다.
이러한 것이 어울리는 것에는 '에어리언'과 같은 영화도 있다. 식신 성으로 연구를 하는 형태의 영화를 보노라면, 실제로 외계의 생명체가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물론 '이티'도 같은 의미로써 식신 성이 강하다고 본다. 사실 스필버그의 영화를 보면 어느 구석이던지 식신적인 성분이 대단히 많이 숨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쥬라기공원'의 경우에 모기의 혈액 속에서 공룡의 유전인자를 찾는다는 것은 식신의 섬세한 탐구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는 낭월이의 영화 취향이기도 하다. 차근차근 풀어가야지 갑자기 영화를 시작하자마자 괴물이 인간들을 밟아버리는 장면은 대번에 식상해버린다. 그러다 보니까 식신 성이 강한 사람들에게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는 서서히 달궈가야 하는 것이다. 단번에 끝장을 내버리려고 서두르는 영화는 도무지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6) 傷官 - 터미네이터, 슈퍼맨, 피터팬, 의적홍길동
그야말로 영웅천하이다. 영웅이 아니고서는 이 땅을 구제할 수가 없다는 형태의 영화는 모두 상관성분이 강한 것으로 놓고 본다. 그러고 보면 원래 영화라고 하는 특성이 상관성분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모든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고 그 주인공의 움직임에 따라서 관객들도 숨을 죽이고 관찰하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특히 액션영화의 형태라고 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경향이 매우 강하겠다.
죽으려야 죽을 수조차 없는 영웅은 상관의 모델이라고 할만 하다. 특히 썩어빠진 정치권을 향해서 대갈일성 외치는 주인공이라면 충분히 상관이라고 봐야한다. 현실성은 없더라도 재미는 있다. 그리고 어쩌면 관람객 자신의 내부에도 이러한 영웅적인 기질이 숨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심리도 부여한다.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고, 맘만 먹으면 안돼는 것이 없는 주인공의 멋진 활동을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 그러한 착각 속에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영화니까 그렇게 통쾌한 액션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처음으로)
소설로 치면 3인칭으로 전개되는 불특정다수에 대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가장 많다. 관찰자는 관객이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관찰의 대상이 되어서 냉정하게 전개되어 가는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는 것이다. 주변의 그만그만한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이야기들에 대한 줄거리는 가장 인간적인 동질성을 갖는다. 그래서 꼬방동네와도 같은 군상들의 삶을 잠시 들여다 볼 수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한사람을 편들고 있는 영화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누구나가 다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마도 가장 진실의 바닥을 본다면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의 주인공일 것이 분명하다. 편재성이 살아있는 영화는 그렇게 모두를 살리고 싶어하는 욕심이 발동하게 된다. 그래서 자칫하면 영화가 개성이 없는 두루뭉실한 내용으로 전개되어서 흥미를 유발시키는 것에는 부족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흥행적인 면에서 본다면 아마도 불리한 것이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영화가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삼국지에는 결의형제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을 한다. 그것도 매우 구체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흥미 있게 담아놓는 성공적인 사례로써 삼국지를 꼽는다. 삼국지에는 주인공이 없다. 어찌 보면 모두가 다 주인공이다. 만약에 유비가 주인공이라면 그렇기 죽어서는 안 된다. 가장 역사적인 내용이기에 주인공은 모두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편재적인 영화라고 생각을 해봤다. (처음으로)
프렌치키스로 인해서 맥라이언이 스타가 된 모양이다. 이렇게 가장 인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영화라고 한다면 아마도 정재의 영역으로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휴머니즘이라고 하던가? 인간의 오욕을 주제로 해서 전개해 나가는 내용들이다. 그 속에는 영웅도 없고, 호걸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이웃들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정재와 닮았다.
정재는 매우 여성적이다. 삼각관계나 불륜관계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여인도 있고, 총을 겨누는 여인도 있다. 이들은 모두 영웅호걸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그 나머지는 별 관심이 없는 셈이다. 이러한 영화들은 주로 여성관객들에게 호소력이 깊게 다가온다.
예전에 있었던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든지, '엄마 없는 하늘아래' 등은 그러한 여성심리를 노려서 크게 히트한 작품일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영혼'이라고 하는 것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단지 연인의 죽음과 위험에 처한 연인을 보호해야 하는 죽은 영혼이 서로 어우러져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지만, 실상은 역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내면에 깔려있다. 그래서 여성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게되는 것이다.
그 좋은 본보기가 아침드리마이다. 아침드리마는 언제 봐도 그 내용이 그 내용이다 특별한 쟁점이 부각되지 않는 것이다. 약간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도 인기가 대단하다. 아침드라마를 보고 있을 사람은 과연 누구이겠는가? 거의 90%이상의 시청자는 주부일 것이 확실하다. 이들에게 인기 있는 영화를 만들려면 이들에게 물어야 한다. 홍콩영화나 영웅주의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된다. 오로지 가장 인간적인 사랑과 미움을 주제로 다뤄야 만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주부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에는 무술영화를 좋아하는 여성도 있겠지만 일단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는 취향은 무시되는 것이 텔레비전의 속성이다. 언제나 꾸준한 시청률을 얻고 있는 아침드라마는 그래서 너무도 당연히 정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처음으로)
스릴 있는 모험에 대한 이야기들이 편관에 속한다고 분류를 해봤다. 이런 면에서는 '인디아나존스'도 역시 편관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하겠다. 어느 성에 초청이 되어서 갔을 때 그 곳의 사람이 풍뎅이를 씹어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편관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꿈을 심어주는 내용이 들어있다. 어찌 보면 서부영화도 편관적인 내용이 된다. 목숨을 걸고서 서부를 누비고 있는 건맨들은 아무리 봐도 모험을 즐기는 것같다. 그 중에서도 황금을 찾아서, 또는 돈을 찾아서, 그리고 명성을 찾아서 금광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한결같은 광기가 있다.
그냥 평범하고 수수한 보통사람들은 그 곳에서는 생명을 부지하기조차 어렵다. 그리고 보안관도 상식적인 행동으로는 존재할 수가 없다. 거의 폭력배가 되어야 통치가 가능한 지역이라면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부영화는 이러한 매력으로 인해서 오랜 시간을 사랑 받아 왔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쩐 일인지 서부영화가 제작되지 않는 것 같다. 촬영을 할 장소가 모조리 개발이 되어서인지, 아니며 관객들의 관심이 달라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후자의 쪽이 더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즉 관객들이 황당한 모험에 대해서 별로 흥미를 못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오히려 컴퓨터를 통해서 살인청부를 수행하는 킬러의 이야기들이 더욱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편관에 속한 영화는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잠시도 긴장을 풀어서는 곤란하다는 듯이 그렇게 마구 긴장 속으로 관객을 몰아간다. 유머도 없다. 오로지 냉정한 자신과의 싸움만이 존재할 뿐이다. 긴장을 풀면 그 즉시로 표적이 된다는 냉엄한 현실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숨을 돌리지 못한다. 이러한 긴장감은 오로지 편관에 와서야 그 진면목을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타워링을 생각했던 것은 교훈적인 의미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불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인식시켜주는 교훈이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냥 웃고 떠들다가 끝나는 영화로는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관객들에게는 재미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그 내용이 교훈적인 면이 들어있다면 남들에게 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이런 관객들은 주로 위인의 삶을 각색한 영화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영웅적인 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그냥 묵묵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의 용감한 이야기들이면 된다. 그래서 현란한 몸짓이나, 타락한 사회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사회에서도 다시 재생을 할 수가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이 정관의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흥행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런 대로 문교부나 사회교육에 연관된 단체에서 관람을 해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권장영화의 목록에도 끼여들게 된다. 이러한 의미로 볼 적에 수익에 연연하지 않고, 제작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에 따라서 봐주는 사람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정관성의 영화도 존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