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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의 일곱 교회
1. 에베소 교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심판을 받게 되고 세상에서 신령한 빛의 전달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그 존재의 정체성과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만일 교회가 그 처음 영적인 능력에서 떠난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원리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나타나신 것에 대한 참 증인이 되도록 세우신다. 또한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셨을 때, 예수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가(예수님이 취하신 위치)에 대한 증인으로 세우신 것이다. 만일 교회가 이에 합하지 않을 때, 교회는 거짓 증인이 되고, 따라서 제해지게 되는 것이다.(증인으로서 자격을 박탈당하게 됨).
하나님은 교회를 향하여 처음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제안하셔야만 했고, 교회가 듣지 않는다면 촛대는 옮겨져야만 하며,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빛의 전달자로서 역할을 그치게 된다. 처음 상태는 유지되어야만 했다.
모든 피조물은 오염되게 마련이다. 모두 실패하고 심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곧 둘째 사람이 붙들고 있는 것, 또는 그 안에 있는 것은 예외다. 에베소 교회는 일관성을 유지해 나갔다. 하지만 점차 자신에 대해선 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은혜의 처음 익은 열매임 - 에서 멀어졌다. 수고와 인내의 역사가 있었지만 그들의 참된 능력이었던 믿음, 소망, 사랑은 사라져버렸다. 뛰어난 일을 하였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는 옮겨지는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원리 – 교회가 충성해야할 자리에서 떠났을 때, 교회가 집단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증거하는 것을 중지했을 때, 하나님은 개인들에게로 돌이켜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교회는 심판을 받게 되고, 따라서 교회는 믿음의 보장이 더 이상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개인들이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도록 부르심을 받게 된다. 여기서 촛대를 옮기신다는 경고는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이심으로써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을 격려하고자 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랑을 버린다면 촛대는 옮겨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모습과 약속의 말씀도 일반적이다. 그리스도는 오른손에 별들을 붙들고 계시고, 촛대 사이를 거니신다. 이는 특별한 상태를 묘사하기 보다는 다만 교회들 사이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위치를 나타내준다. 이미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에게는 어떠한 약속의 말씀이 없다. 교회가 책망과 심판을 받게 될 때 교회는 신자를 지도할 수 없게 된다. 그 때는 약속이 이기는 개인들에게 주어진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매우 일반적인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신다.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은 첫째 아담의 경우처럼, 개인적으로 처음 상태를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이기는 문제이다. 이겨야하는 것은 세상과 (우리에 대한) 세상의 적대감 뿐만 아니라 지역교회의 영역안에서의 문제들이다.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부르심은 이기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교회에게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 메시지는 개인들에게가 아니라 교회에게 증거되었다. 교회는 직무태만에 대한 경고를 받았고, 성도 개인은 이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2. 서머나 교회
교회의 분깃인 환난과 가난; 하나님은 자비하심 가운데 그것을 허락하셨다: 둘째 사망.
사단에게 허락된 적의와 권세는 사망의 권세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는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시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친히 사망을 맛보시고 통과하셨다. 성도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 너머가 사단의 한계이면서 또한 그리스도의 영역이다. 죽도록 충성한 사람은 생명의 면류관을 주님으로부터 받게 된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유대인이건 기독교인이건 역사 가운데 항상 박해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온갖 환난과 헐벗음과 경멸을 받은 것은 참된 교회였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신다. 퇴보해가는 교회에게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자비였다.
환란은 무감각하게 세상속으로 흘러들어가는 또는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써 세상으로 흘러들어가는 일을 무감각한 가운데 막 행하려는 교회로 하여금 세상은 사단의 손아귀에 있고, 세상은 결코 성도들의 안식처가 아님을 깨닫도록 해준다. 그럼에도 주님이 허락하시면, 환난은 축소된다. 모든 것이 주님의 손안에 있다. 고난 받는 자를 위한 면류관이 있다. 이기는 자가 누구든지, 그의 분깃은 확실하다. 심판으로 인한 사망, 둘째 사망이 이기는 자를 해하지 못한다.
3. 버가모 교회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모습으로 계시되신 그리스도 : 박해 가운데서의 충성과 교회안에 악한 가르침으로 인한 미혹
심판. 그리스도는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이 선 검을 가진 분. 서머나와 버가모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특별한 성격이 특별한 상태에 적용되었으며 교회에 대한 설명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에베소 교회에서 그리스도는 촛대 사이에 거니시는 심판자로 소개되며. 교회는 이 땅에서 증인의 자리에서 제함을 받게 될 것을 경고 받고 있다.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소개된다.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들이 심장과 폐부를 살피며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최악의 상황가운데 있음이 드러난다. 새로운 상태 지향에 대한 전반적인 축복이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충성심을 보게 된다. 빌라델피아의 경우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버가모는 인내의 말씀을 지키지 못했음)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박해 중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지키라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악이 교회안에 들어왔는데, 곧 교회안에 악한 가르침이 허용되었다. 세상적인 방법을 따르도록 하는 유혹이 있었으며 발람의 교훈이 있었고 우상숭배가 들어왔다. 교회안에 당을 짓는 일(니골라당-뛰어난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는 편당 또는 분당)이 있었고, 그것이 거룩을 추구하는 듯이 보였지만 실상은 악을 행하는 것이었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이다.
경고를 받거나 심판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모든 것이 완전히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타락하여 부패케 된 자들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종들은 우상숭배와 악에 빠져 있었다. 그리스도가 개인에게 주시는 칭찬, 미래적인 축복으로서(지금은 영으로) 전에는 겸손하여 거절을 당하신 주님과의 교제, 그리스도가 사랑 가운데 주시는 새 이름, 받은 사람만 아는 주님과의 교통, 이런 것들이 비밀한 기쁨가운데, 개인들에게 주시는 교제이며 축복이다. 이것은 교회의 부패가, 아직은 교회안에 현저하지 않지만 방해 없이 계속 진행중일 때,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이다.
4. 두아디라 교회
우상숭배와 이세벨을 용납함, 변할 수 없는 의 가운데서 받을 심판, 주님의 오심, 교황주의자들, 종말까지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의 증인의 모습을 갖지 못함.
파국을 향하고 있음. 이런 상황속에서 그리스도가 소유하고 있는 헌신된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었지만, 이세벨을 용납한다. 세상과 우상숭배가 결탁하여 교회안에 그 자녀들이 태어나게 된다. 심판.
이세벨은 큰 환난에 던져질 것이고 그 자녀들은 죽임을 당한다. “너희” “남아있는” 자들은 두아디라에 남은 자들로서 특별하고도 점진적으로 헌신된 자들이다.
주님의 오심은 시간 문제이다. 천년왕국의 축복이 이기는 자에게 약속되었다. 축복이란 새벽별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것이다. “귀있는 자”는 이기기를 추구해야 한다. 귀있는 자에게 하시는 말씀은 교회와 관련되어 있지 않고, 교회안에 이기는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 이 교회의 상태는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러한 모습으로 끝까지 존속된다. 하나님의 증인으로서의 특징을 끝까지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세상 끝날까지 존속된다. 이세벨에 대한 심판은 최종적이다.
주님이 이세벨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회개하지 않았다. 이는 이세벨이 전에 파멸로 이끌기 위해 미혹시켰던 사람들과의 강력한 연합때문이다.
전반적인 특징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기준에 따라 사람의 동기까지도 살피는 심판이다. 특별한 시련과 심판이 있고 또 특별하진 않지만 성도들이 가진 분깃, 즉 넒은 의미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축복이 언급되어 있다. 배도와 그에 따른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음행의 문제는 단순히 처음 사랑을 버린 정도가 아니다.
5. 사데교회
교회역사의 새로운 평행선,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 영적 힘의 부족, 세상처럼 다루어짐, 개혁주의
사데교회는 교회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평행선을 시작함. 일곱 별들을 가진 것을 제외하면, 교회들 사이를 거니시는 교회와 관련된 그리스도의 모습이나 특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사데 교회는 그런 교회이다. 그것이 또한 교회의 역사이다. 주님의 오심을 언급했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장차 왕국에서 취하실 모습이다. 일곱별을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은 교회에 대한 절대 주권이 주님께만 있음을 보여준다. 일곱 영 – 완전한 충만을 상징하며, 이 땅을 다스릴 것이다. 교회가 어떠하든지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되신다. 이 사실이 큰 위로가 된다. 교회가 증인의 역할에 실패하는 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을 실패하게 만들지 않으신다.
사데교회의 상태는 그 자체로 쓸모 없음을 보여준다.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이다. 두아디라 교회의 악한 모습에 비해 사데 교회는 허식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데교회에는 이세벨이나 타락의 문제는 없었으나, 실제적으로 죽어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은 악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에너지의 결핍의 문제이다. 이 일은 신자 개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자기 옷을 더럽힌 채로 있도록 했다. 사데교회는 처음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받았고, 무엇을 들었으며, 또 자신에게 맡겨진 진리, 곧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데 교회는 세상처럼 대우받게 될 것이다. 주님이 도적같이 오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이 곧 임박 했기 때문이다.
촛대를 옮길 것이라는 경고는 없다. 이미 옮기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촛대를 옮기는 심판이 이미 집행되었다. 이제 이교회는 부패한 교회(살전5장과 비교. 도적 같이 임하는 주님)로서가 아니라 세상처럼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 소수의 신자들은 자신의 신실성을 보존하고 또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의를 행한 자로서 그리스도와 동행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람들과 세상 앞에 실제적으로 고백했기에, 장차 명목상의 교회가 세상처럼 다루어질 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이름이 공개적으로 인정될 것이다. 그들인 세속적인 신앙고백자들(거듭난 일이 없이 입술로만 신앙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이름은 결코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 땅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을지라도 하늘의 심판대에서는 결코 부정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오심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이기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들을 귀를 가지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남은 자만을 주님은 찾으신다.
6. 빌라델피아 교회
그리스도와 특별한 연합을 이룸, 거룩하고 진실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특징, 그리스도의 이름이 공개적으로 고백되고 말씀이 지켜지며, 그 이름이 부인되지 않음.
행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지만,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특별하게 연관된다. 마지막 시대 교회들 가운데 그리스도는 더 이상 교회 가운데를 거니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지 않고, 교회가 더 이상 유기체가 아니라 조직체화 됨으로써 부패의 온상이 되었을 때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 인식할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특징이 있다.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거룩하고 참된 분이시다. 말씀이 보여주고 또 요구하는 것 자체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이시다. 도덕적 성품과 신실성이 그리스도의 인격적 성품을 이룬다. 그리고 신실성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리스도는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소개된다. 외형적인 교회조직이나 교회인체 하는 조직은 거룩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합당한 것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시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진실된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는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원리를 가지고 교회를 다스리신다.
우리처럼 그리스도는 아버지(또는 은혜)를 의지하신다.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참되시다. 사람의 눈에는 적은 능력을 가진 듯이 보였지만, 말씀을 지키셨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셨고, 인내가운데서 주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문지기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리스도는 한 세대의 끝자락에 사시면서 거룩하고 진실된 분이셨지만 거절당하신다.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실상 사단의 회당이었던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한 인생으로 보인다. 여기에 참된 성도들의 길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길에 있다. 그들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킨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말한바 성령의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진 않을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의 모든 행동의 특징이자 동기이다..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말씀을 지키며, 그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엔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우주적인 배도의 시기에 거짓 교회들과 교권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이성을 숭배할 때, 거룩하고 참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며, 그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완전한 믿음의 특징 : 열린 문, 주님의 칭찬
거룩하고 참되신 그리스도는 기다리고 계신다. 여기 이 땅에서 그리스도는 인내가운데서 여호와를 앙망하셨다. 이것이 완전한 믿음의 특징이다. 믿음은 이중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견디는 힘과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기다리는 인내(히11:8-34)이다. 인내의 말씀이 지켜졌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정해진 참된 기독교의 실제는 없고 다만 허울뿐인 기독교계 가운데서 여전히 말씀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참된 교회의 본질을 붙드는 자들에게 약속이 주어진다.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교회로 자칭하는 모든 자들을 내어 쫓으실 것이며, 또한 그가 사랑하신, 그분의 말씀을 지킨 자들은 자기 소유로 삼으실 것이다. 열린문이 그 앞에 있는데, 능히 닫을 사람이 없는 문이다. 그리스도의 칭찬, 그리스도의 인정으로 만족하고, 또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만으로 만족해한다. – 이것이 믿음의 시험이다.
인내가운데서 기다림.
이 땅에 쏟아 부어질 주님의 심판에 대한 약속. 그리스도는 자기 원수들이 자기의 발등상(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세상이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보려면, 그것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막는 자가 있어 막고 있지만, 장차 이 세상 신이 나타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십자가와 그리스도를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대한 권세를 가지실 때까지 우리의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소유하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심판은 공정하지 않지만(빌라도의 법정에서 그리스도는 의로운 분이셨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서 기다리시듯, 우리도 기다려야 한다. 서머나 교회처럼 박해나 순교는 없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가 인정해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고 인내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고 그 이름을 배반치 않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우리의 몫이다.
온 세상에 임하는 시험의 때 :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킨 자들은 그 시험의 때를 면함,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의 소망이다.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속한 자들, 곧 거기 속하여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 있다. 어떤 사람(유대인과 이방인중 교회가 아닌 남겨진 사람들)은 시련가운데서 승리하도록 남겨질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킨 사람은 그 시험을 면하게 된다. 온 세상에 임하는 시험이다. 시험을 면하는 사람들은 세상밖에 있다. 즉 그들은 세상가운데 살았지만 결코 세상에 속한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소유하게 그리스도의 때를 기다려왔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이 계신 곳, 하늘에 속해 있는 것이다. 세상이 두려운 시련의 때를 당하게 될 때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 휴거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자기 권세를 행사하시기전에 특별한 시기가 있다. 그들은 결국엔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며 또한 그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시련의 때를 겪을 때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주님은 자신의 재림을, 자신이 올 때 회개치 않은 자들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다루어질 것을 경고하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소망으로 제시하여 주신다. 주님은 속히 오실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연약하지만 영적으로 주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혹 누가 빼앗지 않도록 자신이 가진 것을 굳게 잡음으로써 면류관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앙망함 :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모든 것을 소유함.
이제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연합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하늘에 있는 일반적인 약속들.
그들은 땅에서는 아무런 분깃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체 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에서 신성한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합하고,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가 권능 가운데 오셔서 능력가운데서 만물을 밝히 드러내실 때, 그들 또한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와 동일한 위치를 얻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는 십자가와 수치의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하늘 도성에 있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됨 :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을 받는 것이다.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들. 적은 능력 밖에 없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기둥이 됨. 이기는 자는 하나님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복을 받는다. 아마도 제도권 교회의 연합과 질서 밖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기둥이며, 결코 다시 나가지 않을 것이다. 은혜를 조금도 받지 못했다고 여겨지던 자가 이제는 이 땅에선 거절을 당하셨지만 영광을 받으신 구주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거룩한 성에 속했다고 전혀 생각되지 않았던 자가 자기 위에 기록된 하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새로운 이름도 가지고 있다. 그 이름은 육신으로는 선지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세상(거짓 교회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에 대해 죽고 하늘 영광 속으로 부활하심으로써 얻은 이름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와 연합의 비밀이 놀랍게 나타나 있으며, 그리스도가 이기는 자들에게 하신 약속에 특징을 부여해주신다. 그리스도는 “내 하나님 성전”,“내 하나님의 이름”, “내 하나님의 성”, 그리고 “나의 새 이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내에 연합하는 자에게,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부여하신다. 이것은 특별한 축복이며 또한 우리를 위한 충만한 위로이다.
7. 라오디게아 교회
교회 신앙 고백의 마지막 형태, 소유한 체 하는 것에 대한 심판, 치유불가능한 배도, 개인들에게 주어지는 은혜
미지근함이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의 특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메스꺼운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교회를 입에서 토하여 내치실 것이다. 단순한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부족한 것이다. 최악의 질병. 조건적이고 확정적인 경고의 말. 돌이킬 수 없는 거절과 거부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대한 마음의 부족은 스스로 자원의 소유와 수행능력에 대한 과신에서 나온다. “나는 부자라”(계3:17) 그렇지만 실상 그들은 전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영혼의 부요함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 소유하고 있진 않지만, 스스로를 부요하다고 믿는 고백뿐인 교회의 모습이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현재 계신 모습과 하나님 앞에서 주실 수 있는 모습에 반하여 가난하고 벌거벗었고 가련하고 또한 그렇게 특별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 앞에서 있는 양 젠체하는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존속하는 한,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은혜로 다루시면서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양심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재촉하신다. 입에서 토하여 내치려하는 중에라도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연다면, 그리스도는 자신과 함께 있도록 허락하시며 왕국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도록 하신다.
주님의 재림과 다양한 교회와의 관계 : 교회들의 회개
주님의 오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세벨에 대한 심판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세벨은 실제적으로 바벨론이다. 이세벨은 그리스도가 오시기전에 심판받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입에서 토하여 내쳐지는 것이며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가치 없는 것은 내어쫓김을 당할 것이다. 일반적인 기독교계는 세상처럼 심판을 받는다. 두아디라와 빌라델피아 교회에서 주님의 오심은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주님의 재림의 측면이고, 두 교회만이 해당된다. 사데교회는 회개하지 않는다면(교회의 상태가) 세상의 상태까지 떨어질 것이며, 세상처럼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에 이르면, 교회는 그 특성상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거절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님의 오심이 언급되지 않는다. 비록 두아디라 교회가 역사상 한 라인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지만, 처음 세 개의 교회만이 회개의 대상으로 언급되고 있다. 두아디라교회에서 이세벨에게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회개하지 않았다. 장면은 끝나고 왕국에 대한 말씀으로 대치된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 네 개의 교회는 함께 존속하게 된다. 더 이상 전체 교회의 회개나 회복의 전망이 없다. 사데교회는 자신이 무엇을 받았는지 기억하고 굳게 불들고 또 회개해야 한다. 만일 일깨지 않으면 세상처럼 다툼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는 부르심이 약속과 함께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연관된 그리스도의 특징.
그리스도는 몸소 교회가 포기해버린 것을 택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아멘이시며, 모든 약속의 성취자이자 또한 증명자로서, 교회가 그렇지 못할 때에 하나님과 및 진리의 참된 증인이시자 또한 계시자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며, 만물의 머리이시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 즉 새로운 창조에 속한 영광이시며 증인이시다. 교회는 마땅히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새로운 창조의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 이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며, 새로운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창조의 첫 열매로서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이 창조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길이 있을 것들(고후3:11)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것에 대해 불충성스러운 증인이었다.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요한의 사역 : 휴거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일곱 교회에 대한 언급이 끝난후 하늘에 나타난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는 주님의 재림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약속된 것은 다만 주님이 속히 오신다는 것 뿐이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의 입에서 토하여 내친다는 경고를 받고 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 오시는 주님의 재림 또는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교회의 휴거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 사실은 우리가 살펴본 요한의 사역과 맞아 떨어진다.(요한이 말하는 주님의 모습은 교회들 또는 지상에 있는 교회 가운데서 심판을 행하시는 분의 모습이다. 여기서 심판은 그리스도의 신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외형적인 기독교계에 대한 것이다.)
요한은 이 땅에 주님의 나타나심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고 하늘의 약속들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14장과 17장에서는 예외적으로 언급을 한다. 계시록에는 언급 없다. 심지어 계시록 12장은 휴거가 그리스도이신 남자아이가 하나님앞과 보좌 앞으로 올라가는 모습과 같은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하늘에서 전쟁 전에 성도들의 휴거가 일어난다는 사실 외엔 성도의 휴거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발견하지 못한다. 하늘 전쟁이 시작되면서 후 삼년 반 기간으로 넘어가게 된다. 반면에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교회에 쓴 서신의 내용이 끝나고 난후(계시록 4장) 하늘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피에 대한 원수를 갚아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부어질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땅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비의 성경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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