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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새봄맞이 다니엘공부 4강
* 말씀 다니엘 4:1-37
* 요절 다니엘 4:37
느부갓네살 왕의 회심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큰 권세와 영광을 주셨는데, 그것은 그를 통해 온 세계 백성들을 보호하고 먹이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가르쳐주시고자 다니엘의 지혜와 총명을 통해서, 꿈을 통해서, 또 다니엘의 친구들을 불 속에서 건지심으로써, 여러모로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2장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은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고 고백합니다(2:47). 또 3장에서는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은 없다”고 선언하는 조서를 내립니다(3:29).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이 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온 세상과 인생들을 주관하지 못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에게 이를 깨우치고 또 깨우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깨우쳐 주시는데, 이번에는 짐승이 되는 훈련을 통해서라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두려움을 가지고 공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하시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라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1. 느부갓네살 왕의 꿈 (1-18)
4장 말씀은 느부갓네살 왕의 조서(詔書)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왕의 조서라기보다는 우리가 성경공부 하고 쓰는 소감이나 신앙 간증문 같습니다. 1절의 인사말에 이어 2,3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대 바벨론 제국의 황제가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34절을 보면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고 고백하고, 35절에서는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고 고백합니다. 조서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37)
느부갓네살 왕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다 심판 받을 그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변화되었습니까? 다시 2절로 돌아와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기적적인 일을 행하셨으며 그것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는데, 그 일을 모든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이적과 놀라운 일이 있어 그 교만하던 느부갓네살 왕이 회심하게 되었습니까?
먼저 4절을 봅시다.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그는 그 많은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고 대 바벨론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이제는 피비린내 가득한 전쟁터를 떠나 궁궐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뭇 나라들을 모두 정복한 바벨론 왕궁은 평강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영광에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는 한 무서운 꿈을 꿉니다. 10절을 보면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자라서 견고해지고 그 높이가 하늘에 닿았으며, 땅 끝에서도 그 나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나무의 잎사귀는 아름답고 열매는 풍성했으며, 들짐승들이 그 그늘에서 쉼을 얻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고, 만민이 그 나무에서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12).
그런데 13절을 보면 장면이 바뀌고 한 순찰자(a messenger)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순찰자는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명령합니다. 그 나무가 베어지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또 아무도 벨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나무를 베게 하시면 가지들은 꺾이고, 잎사귀들은 떨어지며, 열매들도 흩어져버리고, 그리고 들짐승과 새들과 사람들도 모두 떠나버립니다. 그 나무는 겨우 그루터기만 남은 채, 들판에서 짐승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고 짐승의 마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17). 사람에게 짐승의 마음이 들어가면 모습이나 행동도 짐승이 됩니다. 그는 짐승이 되어서 ‘일곱 때’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은 이 꿈을 꾸고 두려워하며 번민합니다. 그는 원래 두려워하거나 번민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도 또 그 무엇도 이 위대한 왕을 두렵게 하거나 번민하게 할 수 없었으며, 만사는 순조롭고 평강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꿈을 주심으로써, 그를 두려워하고 번민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시리라 믿고 하나님께 나가려 하는데, 하나님이 두려워하고 번민하게 하시다니,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평강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다윗 왕은 왕궁의 베란다를 거닐다 저 아래서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고, 그를 간음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을 전쟁에서 죽게 하도록 사주했습니다. 고대의 왕들에게 이런 일들은 흔했습니다. 왕은 무치(無恥)라, 왕이 그런 일로 두려워하거나 번민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번민했습니다. 밤마다 탄식하며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셨습니다(시 6:6). 종일 신음하고 뼈가 쇠할 만큼 번민했습니다(시 32:3). 그런데 그 두려움과 번민 끝에 그는 죄사함과 평강을 얻었습니다(시 32:5,6).
사도 바울은 율법의 신봉자였고 유대교의 수호자였습니다. 그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전혀 번민이나 갈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율법이 도리어 죄를 조장하거나 양심을 괴롭게 할지언정 결코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마음의 원하는 바와는 달리 늘 죄의 힘 아래로 사로잡혀 가는 자신을 보며 번민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녀내랴?”(롬 7:23,24). 결국 이 번민 끝에 그는 예수님을 구원자로서 만나게 됩니다(롬 7:25).
물론 우리가 쓸 데 없이 두려워하고 괜히 번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두려움과 번민을 주실 때 진지하게 두려워하고 치열하게 번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전 7:10)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에게도 꿈을 통해 두려움과 번민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지하게 두려워하거나 치열하게 번민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6,7절을 보면 그가 꿈을 꾸고 나서 바벨론의 점쟁이들을 불렀습니다. 전에 그들이 자신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느부갓네살 왕은 왜 다니엘을 찾지 않고 그들을 찾았을까요? 그것은 왕 자신이 그의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바벨론 문학에서는 왕을 흔히 나무로 비유하곤 했기 때문에 그 꿈이 자신이 앞으로 당할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꿈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폐위시킨다거나, 자기가 짐승이 된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부르면 분명히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듣기 좋은 해석만 해 주는 바벨론의 술사들과 점쟁이들을 불렀습니다. 그는 두려움을 잊으려 했고, 번민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오고 번민이 파고들수록 그는 자신의 성공에서 위로를 얻고자 했고, 자신의 영광에 만족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호된 하나님의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2. 하나님의 훈련 (19-37)
19절을 보면 왕의 꿈을 들은 다니엘도 한동안 놀라며 마음으로 번민합니다. 그 엄청난 왕에게도 그토록 처절한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 새삼 두려웠습니다. 동시에 그 엄청난 왕에게 그렇게 힘든 메시지를 전해야만 하는 자신의 입장이 곤혹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왕의 재촉으로 마지못해 다니엘은 꿈을 해석합니다. 22절을 봅시다.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여기까지 해석하는 데에는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이 짐승같이 되어 사람들에게서 쫓겨날 것을 말해야 했습니다. 들짐승들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뜯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그 비참한 모습으로 일곱 때를 지내야 할 것도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의 꿈에 계시된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26)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방향을 잡아 주었습니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27)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29절을 보면, 꿈을 꾼 후 열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왕은 바벨론 궁의 테라스를 거닐며 말합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30)
사실 흐뭇했을 것입니다. 그가 세운 공중정원(Hanging Gardens)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인도의 타지마할 등과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힙니다. 그는 또 수많은 신전을 지었으며, 100미터 짜리 기념탑들을 세웠습니다. 2,500년 전에 이런 건축물들을 세웠다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게다가 공공기관 건물의 지붕은 모두 금으로 덮었다 하고, 바벨론의 별명이 ‘황금의 도시’였다고 하니, 그 화려한 도시를 바라보는 왕은 자긍심을 가질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무서운 꿈을 주신 것은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17,25).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고, 다니엘도 꿈을 해석하면서 분명히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하나님이 아니라 ‘내 능력과 권세로’ 바벨론을 건설했다고 말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라 말합니다. 그의 생각은 그야말로 ‘of me, by me, for me’ 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의 메시지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처음 며칠 동안은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가고, 한 달 두 달이 가도 아무 일이 없자, 꿈같은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그저 개꿈이려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반드시, 그리고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31,32절을 봅시다. “이 큰 바벨론은 내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렸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응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쫓겨나서 들판에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머리털은 자라서 독수리 털같이 되고, 손톱은 길어서 새 발톱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소도 아니고, 독수리도 아니고, 새도 아니고, 그야말로 괴물이었습니다. 왕의 대신들은 괴물로 변한 그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어떤 신하는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대 바벨론 제국의 황제가 그런 몰골이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항상 두려움으로 바라보아야 했던 대왕이었는데, 이제는 남의 동정을 받아야 하는 불쌍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일이 너무 비참하고 상상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에 “과연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일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게 하기 위해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수광병(獸狂病; lycanthropy)이라는 정신병이 있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을 동물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상상하는 동물처럼 행동하고 그 동물 특유의 소리를 냅니다. 제일 많은 경우가 낭광병(狼狂病)이라 하여, 자기를 이리라 생각하고 밤이면 이리처럼 울부짖는 정신병입니다. 특히 19세기 영국에는 들에서 소처럼 사는 우광병(牛狂病; boanthropy) 환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 하나, 고대의 기록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어느 날 궁전을 거닐다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상당 기간 동안 보이지 않다가 죽기 2년 전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기록에는 왕이 어떤 신령한 사람에게 붙잡혀 갔다고 하고, 또 어떤 기록에는 이상한 괴질에 걸렸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나 가장 정확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느부갓네살 왕을 치셔서, 그에게서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버리고 짐승의 마음을 갖게 한 것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이 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무시 받을 분이 아니십니다. 그가 하나님을 무시하자 하나님은 그에게서 인간의 마음을 빼앗아 버리고 짐승의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짐승이 되었습니다.
이제 34절을 보면 여러 날이 지나고 ‘그 기한이’ 찼습니다. ‘그 기한’이란 23절과 32절을 보면 ‘일곱 때’라고 했는데, 정확하게 얼마 동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왕은 오래 동안 땅에 엎드려 풀을 뜯어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조금씩 무엇인가를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하늘을 보면서,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자기를 축(軸)으로 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이 자기의 뜻대로 인간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새 발톱 같은 손톱으로, 독수리 털 같은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황소 울음을 울며 회개했습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36절을 보면 왕이 하늘을 우러러 봄과 동시에 그에게 총명이 돌아왔습니다. 그의 마음은 변화되었고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또 그의 옛 영광을 다시 찾게 되었으며, 그의 신하들은 다시 그에게 조회하며 국사를 보고하고 지침을 받았습니다. 그의 지극한 위세는 오히려 전보다 더욱 높아졌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십니다. 그를 짐승으로 낮추어서라도 그의 권세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회개하는 자들은 반드시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에게는 강하시지만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약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는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결국 그를 높이시기 위해서 낮추셨습니다. 그가 낮아져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습니다. 낮추시는 것, 즉 ‘겸손 훈련’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회심시켜 사람답고 영광스럽게 살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구속역사에 사용했던 인물들은 예외 없이 ‘겸손훈련’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였으나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고 광야에서 양치기 훈련을 받았는데 무려 40년이나 훈련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때려눕힌 후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사울의 미움을 사서 그도 역시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한번은 다윗이 블레셋의 왕 아기스에게 의탁하러 갔다가 신하들의 모함을 받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위기를 모면하려 ‘미친 척’을 했습니다. 문짝 위에 글자를 긁적거리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렸습니다(삼상21:13). 다윗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그런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훈련이 끝난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높이셨습니다. 모세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200만명의 지도자요, 모세오경의 저자로 높이셨습니다.
우리는 높아지려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야 하고 좋은 학교를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탁월한 실력, 남다른 재능이 있어야 하고 물질이나 인맥이 있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높이는 기준은 단 한 가지, 바로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약4:6).
그렇다고 해서 낮아지는 것이 기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분 좋기는커녕 슬프고 비참합니다. 이번 주 임오창 형제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 속의 주인공 김미숙 선수는 핸드볼 국가대표 중 최고의 선수요 올림픽 2연패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남편의 사업실패로 빚쟁이들 독촉에 시달립니다. 그녀는 핸드폰 받기가 두렵고 사람 만나는게 두렵습니다. 그녀는 후배의 하숙집에 아들과 함께 얹혀살다가 과거 라이벌이었고 이제는 대표팀 감독이 된 친구의 제안으로 다시 올림픽 대표 팀에 합류합니다. 그녀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불한 돈을 갚기 위해 금메달을 따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불한 돈이 협회 돈이 아니라 감독이 된 친구의 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존심이 구겨져 말합니다. “야, 니가 정말 그렇게 돈이 많아? 내가 돈 갚으려고 이 핸드볼 다시 시작했는데, 이제는 정말 더럽고 치사하고 쪽팔려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
“더럽고 치사하고 쪽팔려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 - 우리도 이런 심정이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낮아지는 이유는 돈을 벌거나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겸손훈련을 받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더럽고 치사하고 쪽팔린 겸손훈련을 잘 받아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심판 날까지 교만한 채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교만하기 때문에, 수치 당하고, 체면 구기고, 낮아지지 않으면 회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느부갓네살 왕을 짐승으로 낮추셨지만, 그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높으심을 깨닫고 그의 다스리심을 받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 훈련을 시키실 때 이를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 꿈을 알아 맞추지 못한다고 해서 바벨론의 박사들을 다 죽이라고 불호령을 내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괴상한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절을 하지 않는다고 산 사람을 용광로에 던져 넣던 사람이었고, 꿈을 꾸고 번민하면서도 교만을 버리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어떻게 회심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영접하게 되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40여 년 전, 그러니까 UBF 운동이 처음 시작될 즈음 한국 백성들은 겸손훈련을 많이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한국 백성들이 느부갓네살 같습니다. 아시아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고 부유해졌습니다. 한류바람은 아시아를 넘어 중동까지 불고 있으며 먹고 살기 위해 한국에 깃들이는 외국인 노동자의 숫자가 100만 명에 달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버즈 두바이 빌딩을 비롯하여 500M가 넘는 빌딩들은 모두 한국 건설회사들이 세웠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사람들이 교만합니다. 대학생들 중에는 ‘잡초과(科)’가 사라지고 ‘황공주․황태자과(科)’들이 대부분입니다. 자존심 구겨지는 일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은 어린 아이조차 참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 키우기도 어렵고 제자양성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느부갓네살도 훈련하시는 분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영혼들도 여전히 다스리시고 훈련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변화시키기로 작정하시면 아무도 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짐승으로 낮춰서라도 회심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포기하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멸시하는, 또 하나의 교만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변화시키기로 작정하셨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포기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영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새 사람이 된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의로우시다’고 증거합니다(37).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이, 자칫 짐승이 되기 쉬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것 보다 훨씬 좋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이성과 양심의 총명이 돌아오며, 하나님의 높이심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