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가을이 시작되는 길목에서, 대형 태풍 하나가 요란스럽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습니다. 이제 붉고 노란 단풍이 산을 기어 내려오면서,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무더운 여름을 보내면서, 제대로 된 태풍 한 번 맞이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여름이 끝이라니, 좀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가,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죄받을 일이지 싶어 얼른 마음을 단속합니다.
어제는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바람 몰아치는 태풍 현장에 나가 있었습니다. 초속 30m가 넘는 바람. 그 바람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이 드는데, 성난 파도는 곳곳에서 으르렁대고 있었습니다.
그 생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사무실로 들어오니, 이번에는 사무실 일대가 정전이었습니다. 3층 건물 어딘가에 누전이 된 것 같고. 그래서 어제는 부득이 메일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
어제 아침, 오동도 방파제로 나갔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이 근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태풍이 오는 날은 오동도 입구에서 자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거대한 파도가 오동도 방파제를 줄지어 넘어가는 장관을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습니다.
어제는 생생한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습니다.
그 현장에 조금 더 가까이 가다가 등 뒤에서 커다란 파도가 우리를 덮치는 줄을 몰랐습니다. 자칫 바다에 빠져 죽을 뻔 했습니다. 기자는 이러한 스릴 속에서 한 컷을 건지고, 그 한 컷으로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
소호동으로 향했습니다. 소호동 일대는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부두에 정박해 놓았던 요트들은 거친 파도에 떠밀려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요트는 벌써 좌초되어, 쿵쿵, 방파제에 제머리를 찧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깨지고 부서진 요트들을 보면서, 이 모습이 해양레저수도를 외치고 있는 여수의 속살이 아닌가 싶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해양의 시대라면서, 제대로 된 요트 정박시설 하나 없는 우리의 현실이 바로 이 모습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만성리 해수욕장과 오천동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거대한 파도를 보았습니다. 파도가 자갈밭을 지나갈 때는 “자르르 자르르...”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는 마치 탱크 지나가는 소리 같았습니다.
어머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의 적당한 파도는 피하려 하지 말고, 기꺼이 넘어 보라고. 파도를 안 죽을 만큼만 넘게 되면, 나중에 그 경험이 얼마나 큰 재산인지 모른다고. 성난 이 파도를 보면서 갑자기 어머님 생각이 났습니다.
인생이란 끝없는 문제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쉼 없이 밀려오는 문제의 실타래를 평생 동안 풀어가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파도 하나가 지나고 나면 또 하나의 파도가 밀려오듯, 하나의 문제를 풀고 나면 또 하나의 문제가 다가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렇게 문제를 만나고, 해결하고, 다시 문제를 만나고, 해결하는 과정을 되풀이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아서 그 고민이 깊고, 돈이 없는 사람은 없어서 고민이 깊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높아서 고민이 많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낮다고 고민입니다.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 때문에 고민이고, 자식이 없는 사람은 없는 자식 때문에 고민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인생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주어지는 문제를 불행이라고 비관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문제는 지나가는 과정이고, 우리에게 영원히 고착되는 문제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제 우리를 할퀴고 간 태풍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청명하게 맑은 날입니다. 그런데 끝났나 싶었던 태풍이 또 올라온다고 합니다. 쉼 없이 밀려오는 우리의 고민처럼 말입니다. 그 모습이 우리의 인생과 꼭 닮았습니다.
|
그러면서 계절은 바뀔 것입니다. 이렇게 계절이 변하고 시간이 흐르는 일이 도무지 꿈만 같습니다. 잠깐 정신을 놓았다가 다시 차리고 보면, 시간은 커다란 앨범이 되어, 한 페이지씩 그냥 휙휙 넘어가 버리는 것 같습니다.
아~ 이런 날은 열일 젖혀 놓고 술 한 주전자 따끈하게 데워, 풍경 좋은 창가에서 낮술이나 한잔 했으면 좋겠습니다. 미친놈, 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마시다 취기가 오르면 벽에 기대어 졸아도 좋고.
누군가 천둥산 박달재를 흥얼거려주면 그것도 좋고, 같이 입을 맞춰 욕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더더욱 좋고. 그렇게 마음 맞는 친구 둘만 있으면 좋겠다 싶다가, 옛 친구들 면면을 떠올리고 나니 마음이 썰렁해집니다.
나이든 척, 근엄한 척, 어른인 척, 하며 사는 나, 그리고 내 친구들. 파릇파릇 풋내 나고 싱싱하던 시절 다 보내버리고, 이제는 주름진 이마에 머리가 적당히 벗겨져, 어느새 중년이 되어 버린 내 친구들. 이제는 그들이 내 거울이 되었습니다.
인생이 좀 허망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술이 아니라도 좋으니 이런 날은 그냥 풍경 좋은 창가에서, 맑은 차 한 잔과 함께 그냥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태풍이 지나간 날 아침, 출근길의 내 머리를 스쳐간 생각들입니다.
고운 하루 되십시오. 사랑합니다.
동부매일 대표 박 완 규 올림
|
사진 찍느라 고생한 김광중 사진기자의 모습입니다. 비에 젖은 모습이 아니라 집채만 한 파도에 젖은 모습입니다. 미남은 젖어도 이렇게 잘 생겼습니다.ㅋㅋ 저도 저렇게 쫄딱 젖었고요...ㅎㅎ
|
첫댓글 14호태풍 덴빈으로 바람이분다.옥상 텃밭도 끝장을 봐버렸다.남은게없슴, 태풍이 오면 농,어민이 가장 큰 피해를
봐서 가슴이아프다, 작물에만 바람을 막을수있는 장비가 있으면 얼마나좋을까, 이번에는 큰 피해가 없었으면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본다
가슴 아프다니 슬프오.
해적의 가슴 텃밭은 멀쩡하니 위안 삼으소소...
광란의 몸부림을 보면서 그 옛날 배웠던 최남선의"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떠오른다.기억도 가물거리는데..처...ㄹ 썩, 처...ㄹ 썩,쏴...아.때린다 부순다 무너뜨린다.태산같은높은뫼,집채같은바윗돌, 뭐 그런내용의신체시-개화기때의 서구열강의문물을 받아들이고,문명개화실현을 바랬던시... 요즘 사회에 일어나고있는 일련의 사건사고를 접할때마다,암울한 Distopia를 떠올려본다. 볼라벤이 쓸어야할것은 황금색 밀밭도 아니요, 따주기만을바라는 능금도 아니요,돌틈에 쳐박혀 숨어있는 물고기도 정녕아니다, 이 사회에 암처럼존재하는 인간경시 의 정신병이다, 살면서 누구나 태풍을 만난다,그 블랙홀에서 나올수 있는 노 는 당신손에있다
때때로 애들과 세상사에 힘들어 나 자신을 놓고 싶을때, 우리 7 남매를 키워주신 부모님 가슴속엔 얼마나 큰 너울이 일었을지 가히 짐작하기가 송구스럽다.폭풍우가 몰아치는 그 애닯았던 순간들을...내가 자식을 키우다보니 그 파도의 몸부림을 이제사 알겠다.자식의 부모로 살다보니, 태풍도 비 바람도 뜨거운 태양도.살갗을 에이는 겨울바람도 ,그 매서운 자연앞에 당당히 맞서지더라.날개죽지아래의 따스했던 기억은 사랑이었다. 현실과 타협해야하는 아픈시간이 오더라도 슬기롭고 당당하게 맞서거라,, 내 아들아!!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
박완규 대표님, 그리고 김광중 기자님 너무 멋지십니다. 목숨을걸고 사진을찍고, 이렇게 맛난글도 써 주시고 문단에 등단도 못한 몹쓸 작가가 소나기를 맞은듯 시원함에 행복해집니다. 아참 또 이렇게 좋은 기사를 주시는 여명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채울수 없는 허전함으로 늘 배가고픈 --이카루소- 올림
Icarus 님께선 가슴 따뜻한 작가 그 이상입니다.
필력이 대단 하십니다.
님의 댓글에 저도 한표를 조심스레 드립니다 늘 이카루스님의 기대되는 글 입니다요^^
현장사진을 보면서 더욱 실감이 가는 좋은 자료게시물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9월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