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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엄(妙嚴) 스님
묘엄스님은 1945년 음력 5월5일 문경 대승사 윤필암에서 조계종 전 종정 성철큰스님을 계사로, 월혜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했다.
당시 성철스님은 “내는 법상(法床)에 안 올라가는 사람인데, 순호(청담)스님 딸이니까 내 딱 한번만 사미니계를 설하는 기라”며 묘할 묘(妙)자 장엄할 엄(嚴)자를 법명으로 내려주었다. 이후 묘엄스님의 하루하루는 출가자가 알아야 될 모든 것을 익히는 과정이자,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잿물내리는 법, 광목 물들이는 법은 물론이며 〈사미니율의〉 학습 등에 이르기까지, 청담·성철·자운·홍경스님 등 큰스님들에게 배웠다. 봉암사에서 “니가 첫 번째 식차마나니계 수계자다. 그라니 너 중 노릇 제대로 잘해야 한다”는 자운스님의 말을 들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최초’로 식차마나니계를 받았다. 청담·성철·자운스님 등이 1947년부터 “부처님 법대로만 살자”며 봉암사에서의 결사 당시 하루는 성철스님이 묘엄스님을 불러 놓고 화두를 내려주었다.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는고”였다. 화두를 내리자마자 성철스님은 느닷없이 묘엄스님의 멱살을 틀어쥐는 것 아닌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는고. 어서 대답을 해라.” 엉겹결에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고 대답했다. 성철스님은 묘엄스님의 멱살을 틀어쥔 채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등짝을 세 번이나 세차게 때렸다. “니 마음으로 돌아갔다고 그랬나?” “예, 스님.” “마 안되겄다. 묘엄이 니는 다른 화두를 해야겠다. 그래, 이걸 화두로 삼아라.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걸 화두로 삼으라. ‘비심비불비중생 시심마(非心非佛非衆生 是甚摩),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참구하란 말이다. 알아들었나.”
당시엔 황망중에 등짝을 맞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다 ‘조도법문(助道法門)’ 즉 깨달음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법문”이었다. 제자들에게 선기(禪機)를 싹트게 하고, 선근(禪根)을 심어주기 위한 기상천외한 방편이었다. 화두일념으로 정진하던 묘엄스님은 50년대 초 교학에 천착하기로 결심한다. “큰스님들께서는 ‘이 뭐꼬’ 화두를 참구하라고 하셨지만, 참선이 뭔지 화두가 뭔지 꽉 잡히지도 않고, 하늘에 떠 있는 뜬구름을 잡으라고 하는 것만 같다”며 “부처님 가르침이 뭔지 제대로 배우고 알아서 제대로 믿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의 추천서를 들고 범어사에 있던 운허스님을 찾아갔다. 범어사에서 동학사로 간 운허스님에게, 52년 11월말부터 53년 여름까지 〈서장〉 〈선요〉 〈절요〉 〈도서〉 등 사집(四集)을 배웠다. 53년 8월 동학사에서 부산 금수사로 옮긴 운허스님을 따라 묘엄스님은 다시 금수사로 이동했다. 그러나 한달만에 운허스님은 다시 통도사로 가게됐고, 묘엄스님도 통도사에서 〈능엄경〉을 배우기 시작했다. 54년 3월13일 운허스님은 또 진주 연화사로 갔다. 묘엄스님도 따라 연화사로 옮겨 〈기신론〉에 천착했다. 55년 11월 운허스님이 다시 해인사로 옮기자, 해인사에서 〈금강경〉 〈원각경〉을 배웠다. 해인사에 있던 운허스님을 떠나, 동학사 경봉스님에게 〈화엄경〉을 배운 묘엄스님은 경봉스님으로부터 마침내 56년 4월5일 전강(傳講)받는다. “참으로 감개 무량했습니다. 45년 3월 스무닷새 날. 철없는 나이 열네살에 삭발 득도한 이후 11년만에 비구니 강원 강사가 됐으니,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어요.”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성철스님의 이야기만 믿고 무작정 삭발출가했던 묘엄스님은, 청담·성철스님의 바람과 ‘훌륭한 법사중(法師僧)이 되겠다’는 본인의 원력대로 드디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후학들을 지도할 정식 강사가 됐다. 이것도 잠깐, 묘엄스님은 〈화엄경〉을 챙겨들고 통도사 운허스님 회상에 다시 들어갔다. 운허스님 문하에서 다시 한번 〈화엄경〉을 배우자, 막힘없는 상태가 됐다. 운허스님이 “아이구, 정말로 인제 되었다. 그만하면 묘엄이 니가 강사로서 가르칠 만하다. 니도 인자 강사야!”라고 말했다. “아닙니다. 스님. 그렇게 과찬의 말씀만 하시지 마시고 ….” “허허 내가 강사라면 강사인 게야! 내가 니한테 전강을 하는 거야. 묘엄이 너는 이제 강사다!” 그 때가 57년 12월이었다. 묘엄스님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과연 내가 자신있게 남을 이끌고 가르칠 수 있는가.”자문자답한 묘엄스님은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해 한층 더 자신을 갈무리했다. 묘엄스님은 마침내 1966년 3월15일 운문사에 비구니 강원을 열고, 학인들을 제접하기 시작했다. 문득 “참선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운문사 강사직을 내놓고, 죽림사·약사사에 머무르기도 했다. 결국 1971년 4월9일 경기도 수원시 광교산 기슭에 위치한, 약사전 한 채·칠성각 한 채·요사채 한 채 뿐인 봉녕사에 도착했다. 당시 봉녕사는 누추한 사찰이었다. ‘열악한 상황’에 굴복할 묘엄스님이 아니었다. 사격(寺格)을 새롭게 하는 한편, 봉녕사에 다시 강원을 열었다. “부처님 가르침과 인생관이 내 인생관이 되도록, 깊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편리함과 수월함만 추구해서는 일회용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출처 http://cafe.daum.net/wtraf/9b8r/1528
능엄백팔기도 [성철스님] 자 봐라,묘엄아, 니 인자 능엄주를 잘 외왔으니 내친 김에 능엄주 기도를 올리거라이. [묘엄스님] 능엄주 기도는 어떻게 올리는데요? [성철스님] 마 매일, 하루에 백여덟번씩 능엄주를 외와서 백팔능엄기도를 올리란 말이다! [묘엄스님] 하루에 백여덟번씩이나 능엄주를 외우라구요, 스님? [성철스님] 그래, 매일 백팔능엄기도를 올리면, 묘엄이 니는 마 만사형통인기라. [청담스님] 그래, 내 생각에도 그래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묘엄스님] 예, 알겠습니다, 스님! 다음날부터 묘엄스님은 그 길고 긴 능엄주를 매일 백여덟번씩 주력을 했다. 말이 하루에 능엄주 백여덟번이지, 그야말로 백여덟번을 채우자면 눈도 뜰 사이도, 숨 쉴틈도 없을 지경이었고, 밥을 먹으면서도 채소를 씻으면서도 자나깨나 능엄주뿐이었다. 처음에는 입밖으로 소리를 내어 주력을 했는 데, "마하카라야 마트르가나 나마스크르타야 파트 인드라야 파트 브라흐미니예......" 하고 주력을 하다가도 누가 부르면 "예" 대답만 하고 다시 또 "파트 루드라야 파트 비스나비예 파트 비스네비예 파트......" 하고 능엄주를 외웠다. [대중스님 1] 묘엄이 저 아가 뭐하는 짓이고? [대중스님 2] 아이구 스님. 큰스님이 시켜서 능엄주력을 하루에 백팔번씩 해야 한답니다. [대중스님 1] 능엄주력을 하루에 백팔번? [대중스님 2] 예에, 그라니 어디 숨쉴틈이나 제대로 있겠습니까? 그냥 내비리두이소. 정말 그랬다. 매일 능엄주를 백여덟번씩 외우자면 다른 스님과 인사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고, 누가 무슨 말을 물어도 대답할 틈이 없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어김없이 하루에 백여덟번씩 능엄주력을 계속하다보니, 나중에는 점점 이력이 붙어 이제는 입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아도 입술만 달싹달싹하면 능엄주가 되었고, 며칠 더 계속 해 나가니 이제는 입술을 달싹거리지도않고도 입속에서 저절로 능엄주가 되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20분도 더 넘게 덜려서야 능엄주를 한 번 외웠는 데, 외우는 시간도 점점 단축되어 나중에는 한 번 외우는 데 10분, 그 다음에는 7분, 또 그 다음에는 5분도 채 걸리지 않게 되었고, 또 그 다음에는 한 번 외우는 데 단 3분도 걸리지 않았다. 한 생각 일으키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던 큰 스님들의 말씀이 과연 옳았다는 것을, 묘엄스님은 능엄주력을 통해 실감할 수 있었다.
출처 http://cafe.daum.net/7811744
운허스님과 화엄경
윤필암(閏筆庵)에서 공부하던 묘엄스님은 공부의 갈증이 더해갔다. 성철 스님은 당대최고의 강백 운허스님께 당부의 편지를 써주었다. 동학사에서 운허스님을 모시고 첫 강를 들었다. 그리고 그날 부터 운허스님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 다니며 공부를 더해 갔다. 배불리 먹을 수도 원없이 잘 수 없었지만 운허스님에게 강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스님에게 그 이상의 행복은 없었다. "동학사로 가게 되었다. 내가 동학사 강사로 가게 되었어." "따라 가겠습니다." "밥을 따로 먹고 나무도 때고 해야되는데 " "봉암사에 있을 때 나무 때고해서 다 할 줄 압니다." "그럼 됐다." 가난도 불평 않았고 고생도 고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어둠조차도 밀어내지 않았다. 그만큼 간절하게 애태우며 들어선 배움의 길이었다. "보리때 보리 탁발, 가을에는 쌀 탁발을 해서 우리 사는 방에 웃목에다가 쌀자루를 갖다가 놓고 또 열심히 경을 읽습니다. 외워가지고 가야지 외우지 않으면 운허 스님이 책을 딱 덮어버리고 안 가르쳐 주시거든요. 그래서 밤을 꼴딱 세워서 외워가지고 그 이튿날 강을 받으러 또 가고, 이렇게 해도, 아 이래가지고 어떻게 사나? 이 생각을 한번도 안 했어요. " (웃으심)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http://www.btn.co.kr/program/prog_detail.asp?page=2&PID=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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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明星華님 고맙습니다,,,_()()()_
감사드립니다_()_()_()_
자료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