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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 투 난민캠프 : 최대 규모의 캄보디아 난민촌
Site Two Refugee Camp
'사이트 투 난민캠프'(Site Two Refugee Camp: Site II 혹은 Site 2) 캄보디아 내전 기간 중에 태국-캄보디아 국경에 수년 동안 위치했던 난민촌으로,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의 난민캠프였다. 이 난민촌은 '1984~1985년 베트남 군대의 건기 공세'의 와중인 1985년 1월에 설치됐다. 당시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있던 베트남 군대는 태국 국경 지역의 여러 반군들에 대한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주1)
(주1) Robinson C., Terms of refuge: The Indochinese Exodus and the International Response (London, New York: Zed Books), 미국 내 독점 배급은 St. Martin's Press, 1998), p.92. |
1. 캠프의 건설
1985년 초, 태국 정부는 '유엔 국경구호기구'(United Nations Border Relief Operation: UNBRO) 및 여타 유엔 기구들과 공조하여, 군사적 활동으로 인해 파괴된 여러 난민촌들의 인구를 단일한 난민촌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각종 구호 기관들이 통합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주2)
이렇게 하여 건설된 '사이트 투 난민캠프'는 태국 사깨오(Sa Kaeo) 도, 아란냐쁘라텟(Aranyaprathet, 알란) 군에서 북동쪽으로 약 70 km 떨어진 따프라야(Ta Phraya) 군에 위치했고, 캄보디아 국경으로부터는 4 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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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사이트 투 난민캠프'의 위치. 분홍색 원으로 표시된 부분이다. 빨간색 점으로 표시된 곳은 캄보디아의 뽀이뻿과 접하고 있는 태국의 아란냐쁘라텟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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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따프라야 군 내에서 '사이트 투 난민캠프'의 위치. 우측 상단의 원 안에 있는 짙은 검은색 블록들이 사이트 투 난민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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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이트 투 난민캠프' 내의 구역 배치도. |
2. 난민촌의 인구
'사이트 투 난민캠프'의 면적은 7.5 ㎢ 정도이고, 다음과 같은 이전에 존재하던 여러 난민캠프들의 인구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참고☞ '1979~1984년 사이의 태국 국경지대 반군기지들의 위치')
- 넝사멧 난민캠프 (Nong Samet) : 후에 '007' 및 '리티센'(Rithysen)으로 불리기도 함.
- 방뿌 난민캠프 (Bang Poo 혹은 Bang Phu: 사이트 세븐[Site 7]으로도 불림)
- 넝찬 난민캠프 (Nong Chan)
- 남유은 난민캠프 (Nam Yeun) : 라오스 인근의 태국-캄보디아 동부 국경 근처.(주3)
- 산로 난민캠프 (Sanro) : 산로 창안(Sanro Changan)으로도 불림.
- 오복 난민캠프 (O'Bok)
- 반상애 난민캠프 (Ban Sangae) : 엄삘(Ampil)로도 불림.
- 당렉 난민캠프 (Dang Rek) : 동락(Dong Ruk)으로도 불림.(주1)(주4)
이들 난민촌 모두가 1984년 11월부터 1985년 3월 사이의 전투로 인해 옮겨야만 할 처지가 되었다. 이 난민촌들은 전직 총리였던 손 산(Son Sann)이 이끈 반공 공화파 반군인 '크메르 민족해방전선'(KPNLF 혹은 KPNLAF)의 배후기지로 사용되고 있었다.(주5) 하지만 '사이트 투 난민캠프'는 민간인을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KPNLF은 다른 장소에 기지를 마련했다.(주6)
'사이트 투'의 구역들 중 하나는 베트남 난민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1988년 1월 현재, 태국 정부는 베트남을 탈출한 보트 피플들을 이곳으로 보내고 있었다.(주7)(주8)
1989~1991년 사이에 '사이트 투'의 인구는 145,000명에서 198,00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주9)
(주3) Lynch, James F., "Border Khmer: A Demographic Study of the Residents of Site II, Site B,and Site 8", The Ford Foundation, 1989.
(주4) French 1994, 앞의 논문, p.88.
(주5) Normand, Roger, "Inside Site 2", Journal of Refugee Studies, 1990 Vol.3-2, pp.156-162, p.158.
(주6) Reynell J. Political Pawns: Refugees on the Thai-Kampuchean Border. Oxford: Refugee Studies Programme, 1989.
(주7) Robinson, 앞의 책, p.96.
(주8) "Vietnamese Refugee Camps at Thailand-Cambodia border".
(주9) Lynch, James F., "Site II Demographic Survey". |
3. 캠프의 서비스
'사이트 투'는 원래 난민촌 운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의료와 보건, 위생, 건설, 기술 훈련 등 가장 기본적인 서비스만 제공하도록 기획되었다. 이러한 원칙은 태국 정부가 '인간화 억제'(humane deterrence)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이 정책은 난민촌이 영구적인 인간의 정착지로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난민들에게 캄보디아 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지원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주10)
'사이트 투 난민캠프'에서 주요한 활동을 펼친 기구들은 다음과 같다.(주11)
- 미국 난민위원회 (American Refugee Committee: ARC)
- 태국 가톨릭 난민구호기구 (Catholic Office for Emergency Relief and Refugees: COERR)
- 관심과 기독교 봉사활동 (Concern, Christian Outreach: COR)
- 핸디캡 인터네셔날 (Handicap International: 국제 장애인 기구)
- 국제 구조위원회 (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 IRC)
- 가톨릭 구제회 (Catholic Relief Services: CRS)
- 일본 국제자원봉사자센터 (Japan International Volunteer Center: JVC)
- 몰타 기사단 구호회 (Malteser-Hilfsdienst Auslandsdienst: MHD)
- 국경없는 의사회 (MSF)
- 오퍼레이션 핸디캡 인터네셔날 (Operation Handicap International: OHI)
- 일본 조동종 구호위원회 (Japan Sotoshu [曹洞宗] Relief Committee: JSRC)
- 예수전도단 (YWAM)
UNBRO는 이들 기구들 전체의 조율을 담당했고, 식량과 물의 분배에 관해서는 직접적인 책임을 당당했다.(주11)
3.1. 식량 및 물
'사이트 투'에서는 1인당 매주 기본적인 양의 쌀, 생선 통조림이나 건어물, 달걀 1개, 야채 1개가 배급됐다. 또한 매달 1번씩 콩, 기름, 소금, 밀가루가 배급됐다.(주12) 1990년 기준으로 매주 및 매달 배급됐던 생필품의 정확한 양은 다음과 같다.
- 쌀 : 매주 3.4 kg
- 계란 : 매주 100 g
- 야채 : 매주 500 g
- 생선류 : 매주 210 g
- 마른 콩 : 매주 500 g
- 기름 : 매달 700 g
- 소금 : 매달 280 g
- 밀가루 : 매달 700 g (주13)
'사이트 투'에서 물은 특히나 어려운 문제였다. UNBRO는 캠프에서 약 12 km 떨어진 반 와따나(Ban Wattana)에 대형 저수지 하나를 건설했다. 캠프에서 사용된 물의 대부분은 이 저수지에서 트럭을 이용하여 실어 날랐지만, 건기에는 이것만으로는 물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UNBRO는 1990년 말에 캠프 내에 여러 곳의 깊은 관정들을 뚫었고, 결국 이 우물 물이 캠프 내 물 수요의 많은 부분을 대체했다.(주14)
3.2. 의료 및 보건
캠프 내에는 벽돌로 짓고 볏짚을 덮은 5층 건물 병원 1곳과 외래환자 전용 진료소 8곳이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곳에는 크메르인 의사와 간호사들은 물론이고 각종 국제 구호기구에서 파견된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근무했다.
이곳에는 외과수술을 할 수 있는 시설은 없었다. KPNLAF 반군 가족들의 경우, 캠프의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던 '치양 다오이 야전병원'(Chiang Daoy Military Hospital)에서 의료 서비스나 외과수술을 받을 수 있긴 했지만,(주15) 캠프 내에서 외과적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카오 이당(Khao-I-Dang) 난민캠프에 위치해 있던 '국제적십자사'(ICRC) 운영 병원으로 후송됐다.(주16)
(주15) French 1994, 앞의 논문, p.75.
(주16) Soffer, Allen and Wilde, Henry, "Medicine in Cambodian Refugee Camps", Annals of Internal Medicine, 1986, Vol.105, pp.618-621, p.619. |
3.3. 교 육
태국 정부가 '인간화 억제' 정책을 고수하면서 캄보디아 내의 난민들이 몰려올 수도 있는 프로그램이나 서비스들을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트 투'의 교육 부문의 진전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1988년, UNBRO는 태국 정부의 동의를 얻어 새롭고도 주요한 교육 지원 프르그램들을 신설했다. 이 프로그램은 초등 교육에 초점을 맞추면서, 교육과정의 개발과 교과서 인쇄, 교사 훈련, 교사 훈련 교관의 교육, 교실 건설과 교보재 마련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1989년경에 이르면, 초등학교 5곳, 중학교(=꼴레쥬 collège) 3곳, 고등학교(=리셰 lycée) 3곳이 운영되었고, 7천명 정도의 학생들이 등록했다. 또한 성인 문맹자들에게 글과 직업훈련을 제공하는 시설에도 1만명 정도가 등록하고 있었다. 초등학교들에는 크메르인 교원 1,300명 정도가 참여했고, 중등학교들에는 300명 정도의 교원이 있었다. 이 교원들은 모두 캠프 내에서 채용했다.(주17)
3.4. 치 안
'사이트 투' 내에서는 크메르인 경찰들이 전통적인 경찰 기능을 수행했다. 1987년까지는 태국 군 공수 수색대인 '타한 프란'(Thahan Phran, 타한 판) 예하 '태스크포스 80'(Task Force 80)이 '사이트 투' 난민촌의 치안을 담당했다. 하지만 이 부대는 너무 지나친 인권유린 행위들을 저질렀다.(주18)(주19)(주20) 결국 이 부대는 1988년 4월에 활동을 중단당했고,(주21) 이후 DPPU(Displaced Persons Protection Unit: 난민 보호단)가 이들을 대체했다. 1987년에 창설된 DPPU는 특별 훈련을 받은 경찰 병력으로서, 태국-캄보디아 국경 지역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했다. 이들은 캠프 외곽을 경계하면서, 산적들이 캠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주22)
(주18) Abrams F, Orentlicher D, Heder SR. Kampuchea: After the Worst: A Report on Current Violations of Human Rights (New York: Lawyers Committee for Human Rights, 1985).
(주19) Lawyers Committee for Human Rights (U.S.), Seeking Shelter: Cambodians in Thailand: A Report on Human Rights (New York: Lawyers Committee for Human Rights, 1987).
(주20) Al Santoli, Eisenstein LJ, Rubenstein R, Helton AC, Refuge Denied: Problems in the Protection of Vietnamese and Cambodians in Thailand and the Admission of Indochinese Refugees into the United States (New York: Lawyers Committee for Human Rights, 1989).
(주21) New York Times, "Thailand to Phase Out Unit Accused of Abusing Refugees", 1988-4-7.
(주22) French 1994, 앞의 논문, p.104. |
4. 캠프의 폐쇄
'사이트 투 난민캠프'는 1993년 중반에 폐쇄됐고, 거주 난민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캄보디아로 돌아갔다.(주23)
(주23) Grant M, Grant T, Fortune G, Horgan B., Bamboo & Barbed Wire: Eight Years as a Volunteer in a Refugee Camp (Mandurah, W.A.: DB Pub.,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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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남아시아에서 태국이 미얀마(버마),캄보디아,베트남
난민들에게는 산소같은 역활을 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