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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는 ‘크레모나 악기제작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 첫째로 안드레아 아마티의 중요한 대표작과 함께 크레모나 시에 중점을 두어 악기 제작 중심지에 대해 언급하고 악기들이 배달되었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윤곽을 그려보았다.
바이올린 제작의 역사는 16세기 초 크레모나의 안드레아 아마티에서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조금 거슬러 올라가 유사한 영향을 간단히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바이올린 제작자는 루트 제작자에서 발전되었고, 15세기 이러한 제작의 중심지는 남부 독일의 퓌센 지방이었다.
이 지방의 장인 길드는 높은 수준의 제작을 장려했으나, 1515~1545년 사이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으로 인해 제작자들이 이탈리아로 대거 망명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아마티 왕조의 설립까지 바이올린 제작에 관한 직접적인 관련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비올 제작자와 그들이 아칭·브릿지·윤곽선을 어떻게 발전시켰는가에 대한 부분적인 자료인데, 이것도 신빙성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다. 또한 초기의 그림·조각과 같은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전형적인 르네상스의 현악기를 묘사하고 있지만 어떤 바이올린도 16세기초보다 이른 시기의 작품에는 등장하고 있지는 않다.
안드레아 아마티에 관한 기록
젊은 안드레아 아마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기록(1529년으로 기록되어 있음)은 악기 제작자인 지오반니 레오나르도 다 마르티넨고(Giovanni Leonardo da Martinengo)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까를로 보네티(Carlo Bonetti)에 의해 발견된 이 기록은 마르티넨고가 가문의 문장을 가질 수 있는 15세에서 50세까지의 세대주는 신고를 하도록 요구해 작성된 것으로, 여기에 성은 나와있지 않지만 안드레아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게다가 이 안드레아라는 자는 마르티넨고의 견습생이었다고 추정된다. 이 기록은 십대의 아마티와 딱 들어맞는다.
크레모나는 안드레아 아마티가 그의 공방을 설립했을 무렵에 이미 무역 도시로서 자리가 잡힌 곳이었다. 그는 정치적인 통제에 있어서 격변기를 살았고 그때마다 물건의 압류나 무거운 과세 또는 시민의 비용으로 지불되는 배상금이 뒤따랐다. 전쟁과 경제공황 그리고 흑사병은 그의 초기 경력을 얼룩지게 했고, 1535년에야 비로소 이 도시의 길고 긴 문제들이 한 세기 반 동안 지속된 스페인 점령과 함께 끝났다. 비교적 안정적인 점령기 시대에 크레모나의 바이올린 제작은 최정상에 이르렀고 그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드레아 아마티의 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략 1505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는 1577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연대는 1985년 돈 안드레아 포질리아(Don Andrea Foglia) 교수에 의해 최근 확립된 것이다.
그는 오래된 공작 가문의 후손으로서 원래는 레벡(역:중세의 3현 악기)과 비욜을 제작했다. 1553년에 사망한 그의 아버지 고타르도(Gotardo) 역시 악기 제작자였다. 또한 안드레아는 빠르면 1546년부터 단기간 동안 큰 성공을 거두었고, 독립적인 장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이미 세상에 확립된 제작기술을 남겼다. 그의 사업은 1576년의 기록에 ‘음악 악기 제작’(da far instrumenti de sonar)으로 언급되어 있다.
아마티 왕조는 다음 세기의 대부분 동안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안드레아의 두 아들과 제자들-아마티 형제, 즉 안토니오(Antonio, 약 1540-1607)와 지롤라모(Girolamo, 약 1550-1630)로 알려져 있음-에 의해 이어졌으며, 매우 중요한 인물인 지롤라모의 아들 니꼴로(Nicolo, 1596-1684)에 의해 그 정상에 이른다.
새로운 음색의 악기 "바이올린"을 확립시킴
튜닝과 피치를 제외하고 말하자면, 바이올린은 비올, 레벡 그리고 류트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연주하고자 하는 음악의 종류와 관련한 음악가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에는 소프라노 목소리와 관련된 현악기에 대한 요구가 증가했다. 비올은 여전히 명성이 높았으나, 실력있는 연주자들이 이 새로운 악기가 낼 수 있는 새롭고 화려한 음색에 맞추어 향상된 솜씨를 보여줌에 따라 점차로 바이올린이 이를 능가했다.
작곡가들도 이러한 도전에 발맞추었다.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이었을 법한 16세기초의 아방가르드 운동과 유사한 거장의 시대가 탄생했다. 유럽의 궁정, 특히 프랑스에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축제와 캐서린 드 메디치에 의해 조직된 야외극이 진행되었다. 찰스 9세의 어머니인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으로서 많은 배우와 음악가들을 이탈리아에서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아마티는 찰스 9세의 궁정에서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고, 1560년과 1599년 사이에 여러 작품을 위임받았다. 찰스 9세는 그의 연주자 중 한 사람을 이탈리아로 보내 베르사이유에 있는 오케스트라를 위해 일할 다른 연주자들과 악기들을 찾도록 했다. 1560년대 중반, 그 오케스트라에는 아마티에 의한 24대의 바이올린, 6대의 비올라 그리고 8대의 첼로가 있었으며 모두가 훌륭하게 제작된 것이었다. 악기들의 뒷판에는 프랑스의 문장과 모토인 ‘Pietato et Justitia’로 장식되어져 있는데 이것은 루벤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몇몇 악기들은 보석이 박혀 있기도 했다. 이 악기들은 18세기의 혁명 시기까지 남아 있었다.
제작자의 관점으로 볼 때, 이 새로운 소프라노 음색는 더 높은 음색과 더 강한 현의 압력을 견딜 수 있는 상자를 만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 결과 제작 방식은 더욱 과학적으로 바뀌었다. 16세기까지 연주자들에게 있어서 류트나 레벡과 같이 단순한 악기는 자신의 것을 스스로 제작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바이올린은 이처럼 초기의 현악기에서 발전했지만 그 지속적인 형태와 음을 갖추게 한 사람은 바로 안드레아 아마티였다. 그는 매우 분명하고 의도적으로 둥근 곡선과 정확한 코너를 디자인함으로써 이것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사실이 이전의 부정확한 외곽선과 다양한 크기를 지닌 비올라와는 달리 "바이올린"이라는 것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안드레아 아마티는 4개의 다른 크기를 가진 것으로 새로운 악기군을 규정했다. 첼로 또는 베이스(주: 첼로는 크기에 있어서 다양하고 오늘날의 그것에 비해 더 크다),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비올라, 그리고 크고 작은 크기의 바이올린이 그것이다.
크레모나의 전문 류트 제작자 아래에서 보낸 그의 초창기 도제과정은 그에게 정확한 제작기술을 연마하는데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더욱 더 발전시킨 것은 그의 능력, 의지, 그리고 비전이었다. 그 결과 섬세하고도 흐르는 듯한 윤곽선과 현재 아마티의 이름과 동일시되는 우아한 아칭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아마티는 크레모나와 그곳의 바이올린 제작자들이 악기 제작의 역사적인 시대를 확립하는데 길을 열어주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의 악기들은 진정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올린이라고 하는 악기가 가진 모든 면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악기를 오늘날과 같은 개념의 새로운 ‘상품’으로서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했고, 루제리(Ruggeri)·과르네리(Guarneri), 그리고 마침내 스트라디바리(Stradivari)와 같은 제자들을 양성하는 학교를 발전시켰다.
아마티에 의해서 발전된 고도의 정교함은 악기 제작자를 단순히 능숙한 장인의 위치에서 예술가로 끌어올렸다. 그는 그의 악기에 대해 상당히 많은 돈을 요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살았던 곳의 기록과 그의 자손에게 남긴 유산에서도 알 수 있다.
바이올린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두 개의 학파가 바이올린의 근본적인 원칙을 확립했다. 가스파로 다 살로(Gasparo da Salo)와 지오반니 파올로 마지니(Giovanni Paolo Maggini)가 이끄는 브레시아 학파와 안드레아 아마티가 지배적이었던 크레모나 학파가 그것이다.
이 두 학파에서 제작한 악기들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브레시아 학파의 바이올린은 비올과 닮은 풀 아칭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보통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보다 적어도 1cm 정도 큰 비올라와 같은 악기에 근거를 둔 것 같다. 아마티 바이올린은 소리와 외관이 더 섬세하고 세련되었다. 깊고 긴 플루팅이 더 좁은 아칭을 만들어내었고 이것이 내는 더 달콤한 소리는 당대 청중들에 의해 최고로 평가받았다.
아마티 디자인은 후대 그의 가문을 포함하여 여러 제작자들에 의해 모방되었고 전 유럽을 통해 그러한 악기들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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