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자조(自助)를 말할때가 아니라 공조(共助)를
이야기 할때!!
다시 읽어 보는
예수의 씨뿌리는 비유의 위력
이번 송파 세 모녀의 참극은 유독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이유는 모녀 3명의 옆에는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이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적힌 봉투가 있었고, 봉투 속에는 현금 70만원이 들어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는 사실때문인것 같다,
마지막 까지 예를 지킬려는 착한 사람들의 죽음에 사람들은 공감을 하며 같이 마음을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겨레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하루가 지나지 않아 "세금고지서에 미안하다는 글을 남기고 .. 30대 주부가 4살
아들과 동반 투신" 했다는 기사가 실려 우리를 다시금 안타깝게 하고 있다.
어떤 미술가는 자신의 페이스 북에 세 모녀에 대해 이런글을 남겼다.
“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세모녀의 집단자살을 우리는 목전에서 외면했구나.
참혹한 주검이지만 존엄한 죽음이었음을 기억한다.
세모녀는 밀린공과금 월세금 마련해두고 떠났고 우리는 밀린 염치마저 버리고 안 떠났구나.
세모녀의 이승 막다른 길 앞에 서서 사랑도 존엄도 모르는 부박한 국가,
누추한 우리를 본다. 이미 행복나라 복지국가는 시작도 못하고 죽었다.
세모녀의 막다른 길은 국가도 길이 아니었음을, 이 세 모녀의 죽음 앞에 우리는 같이 가는 길 아니었음을, 이 세 모녀
앞에 우리는 비정한 인간이었음을 고백하고 말았다.
세모녀의 막다른 길은 우리가 잃어버린 길 이었음을 세 모녀의 막다른 벽은 우리가 박차고 나갈 문이었음을.그녀들 앞에
엎드려 세 꽃송이 바친다. 세계만방에 인간 존엄성을 외쳤던 3.1 영령이 계신 곳 존엄한 영혼의 길로 가서 이제는 편히 쉬소서”. (김봉준
화백) .
우리는 이 세모녀의 자살 사건과 같이 어려운 이웃이 곤경에 빠지면 무심결에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서 그러한 불행을 당했다고 이야기 하기 쉽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러한 이야기가 신앙적 성서적
기반이 있는 이야기라고 착각을 하기 까지 한다,, 그런데 과연 이말이 성경에 나오는 말 일까?? 그런데 이 말은 성경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에서 젊은 이들이 가장 많이 보는 자기 계발서와
같은 책에서 애용되는 말 중에 하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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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사기극>, <인문학으로 자기 계발서 읽기>, <공부란 무엇인가>의
저자 이원석 연구원: 뉴스앤조이 자기 계발서 열풍에 똥침 놓는 '개독교' 연구자 기사
참조)) |
최근 한 기독 청년이 자기 계발서가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책을 썼다?
그에
의하면 자기 계발의 고전 상당수는 미국 청교도 목사들에 의해 집필됐다고 한다.
미국
개척 시대, 현세의 성공을 향한 열망에 자기 계발 패러다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후
우리나라 자기 계발서의 일차적 확산로는 교회였다.
노만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은 1952년에 쓰여 1955년 번역되고,
빈센트
필의 후계자 로버트 슐러의 <불가능은 없다>는 출간되었고 / 조용기 목사가 부흥 집회와
기도원
등을 통해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식으로 자기 계발 정신을 퍼뜨렸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설교는 미국식 번영 축복 영성과 신자유주의의 시장 영성에 물들어
1.
처음에는 처세술과 성공학의 설교에서 2. 예수성공 불신 실패라는 처세술과 성공학
3.
성공하는 자의 7가지 원리와 같은 자기 계발서와 같은 설교로 점차 변질 신자유주의라는
시장신의 대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것이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이제 이야기 해야 하는가?
1,
세모녀는 스스로 돕지 않아서 이들을 하늘도 돕지 않았는가?
2.
이 세모녀는 열심히 노력안하고 자기 계발을 하지 않아서 자살하게 되었는가?
3.
이렇게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많은 돌팔이 약장수들은,
문제의
사회적 차원을 거세하고, 많은 힐러, 멘토들은 더 잘할 수 있다고 다그치면서 개인적
문제로 줄여 준 다음에 개인의 능력을 부풀리고, 그 욕망을 '뽐뿌질'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류담론에 따르는 처세술, 심리학,
자기계발서, 성공학 등의 거짓말과 기만,위선은 그 자기개발론을 추종하는 대다수의 실패자 루저를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읽어 온 자기 계발서가 개독교로 불리는 한국교회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 교회가
이처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이러한 잘못된 자기 개발논리로 천박한 힐러 멘토 노릇을 하기에 여기서 개독교 소리를 듣는다고
보고
자기
계발서 열풍에 똥침 놓는 '개독교' 연구자로 <거대한 사기극>,<인문학으로 자기 계발서 읽기>, <공부란
무엇인가>과 같은 책을 내며 개독교 현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만을 챙기는
태도가 과연 성경적인가?
결론적으로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자기 계발서 현존질서가 경쟁에 뛰어들어 성공과 승리를 위해서
맹목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할 때 그들은 성공한 자만이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고 얘기하면서 나머지를 그에 따르고 추앙하는 군중이나 무리로만
만들고 있다는 것 이다.
지금 맹목적으로 세상에서 가진자 성공한자를 쫓는 사회적 루져들은 100발 백중 그 성공을 위한 경쟁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그들을 패배자들을 만들고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배자의식에 젖게 만든다는 것 이다.
지금
세상의 승자독식사회를 인정하여 경쟁에서 진 사람은 승자보다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묻는 세상의
처세술, 심리학, 자기계발서, 성공학 등의 거짓말과 기만, 위선에 대해 이제는 파기 선언을 하고 그곳에서 탈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3모녀의 집단 자살에 이어 "세금고지서에 미안하다는 글을 남기고 .. 30대 주부가 4살 아들과
동반 투신" 하는 이러한 참혹한 우리는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거대한 사기극의
저자는
결론적으로 그는 지금 우리 크리스챤은 자기 계발서로 자조(自助)를 말할때가 아니라 공조(共助)를
말할때라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자조(自助)만은 강조하는 자기 계발은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우리의 상식을 뒤업는 새로운 발상과 도전 이전에 이미 예수님의 비유의 전략에 잘 나타나 있다,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에수님이 비유를 다시 읽으면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당시
예수님의 시대에도 자기 계발과 처세와 성공에만 몰두해 있는 기득권 세력과 이러한 기존 세계관에 마비되어있는 당시 대중들에게 그것이 바로 거대한
사기극임을 폭로한 당시 시대의 일종의 비유요 일종의 시대를 향한 유쾌한 똥침 놓기와 같은 것이었음을 우리는 쉽게 깨달을수
있다.
그동안의 주류를 따라가는 사고를 전복 시키고 새로운 상상을 하게 하고 독자적으로 주체적인 길을 상상하게 하는것이 예수의
비유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예수가 가르친 비유들 속에서 “외부인들”(outsiders), 즉 탕자와 사마리아인, 세리,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이 결국에는
모두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반면에, “내부인들”(insiders) 즉 큰아들과 제사장과 레위인,
바리새인,
잔치에 초 대받은 사람들은 결국 그 나라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비유가 노리는 궁국적인 목표은 무엇인가?
1세기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노리는 궁국적인 목표은
무엇인가?
예수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적 약자 루져들이 성공한 자들의 자기 계발론을 뒤쫓는자가 되어 결국은 따라가지도 못하고 스스로
좌절하고 자학하는 것을 넘어그 것은 우리의 삶의 관계망과 배치를 다시 말해 시대의 판을 근본적으로 다시 짜게 하려는 것 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작은 겨자씨 비유 이야기 처럼 거시적인 사회변화의 원리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미시적인 영역의 변화 즉 관계망의 변화와 전복으로부터 시작 하신것 같다,
특별히 예수님의 작은 겨자씨 비유에서와 같이 시대의 작은자 소수자들을 대변하고 있다면 결국 이러한 시대의 작은자
소수자들이 기득권자들의 흉내를 내지 않고 자신이 자신의 욕망의 존엄함을 위해서 분연히 행동에 나설 때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 사회적 약자들이 기득권자 흉내내기를 멈추고 경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협동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들은 더 이상 루저의 삶을 멈추고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변화들이 곳곳에서 유쾌하게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다시말해 아이, 동물, 식물, 장애인, 노인, 여성, 이주민 등이 이러한 특이점으로서 등장하여 공동체적 관계망을
혁신시킨다는 새로운 생태계의 관점이 등장하는 것이다.
변화는 갑자기 소수자집단 속에서 예고 없이 출현하거나 사랑과 욕망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어보겠다는 결심을 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사람들이 똑딱거리는 지금 주류세상의 일상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삶을 찾아야겠다고 나설 때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미 프랑스의 일군의 탈근대 생태 학자들이 이시대에 대해 색다른 처방을 내놓기 시작하고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이미 부엌이라는 공간조차도 변화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생태 여성운동에서는 부엌에 정치가 있고 부엌에 나라가 있다고
하는것이다,
자! 이제 부엌은 물의 흐름, 불의 흐름, 음식의 흐름, 쓰레기의 흐름이 교차하는 오페라의 공간이 될수도 있고 우리는 그
오페라 공간 속에서 흐름에 감응하며 춤출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처럼 우리의 공동체의 삶의 흐름 ․ 관계망 ․ 상호작용이 새로운 생각과 관점과 그림으로 재배치되고 흐르고
상호작용하기 시작할 때 거기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지금 한국 사회에서 건강한 작은 교회가 소수라고 하여도 우리는 작은 교회와 작은 마을부터 새로운 관계망을 짜고
새로운 관계와 흐름과 배치를 만들기 시작하면 이것이 바로 나비 효과가 되어 한알의 밀알이 옥토에 떨어지면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을수
있기에 이제 3월 새봄을 맞이하면서 우선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올 한해 예수님이 옥토에 뿌리신 건강한 작은 한알의 씨앗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저작권자 ⓒ 예장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