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도전하는 자의 것이며 도전해서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정리하는 것이 또한 도전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또 다른 도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에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하건 나는 지금껏 그렇게 도전을 꿈꾸며 살아왔다.
세상은 그렇게 내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도전을 받아 줄 어느 것 하나도 내 편이 되어주지는 않았다. 나는 개척해야 했고 또한 개척해서 내 것이 되었을 때만이 내가 풀어나갈 수 있는 나의 미래가 되곤 하였다.
스무 살 때 책 외판을 할 때도 그랬다. 연고판매는 곧 내 의지의 나약함만 심어줌을 알기에 누구 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어느 날 과학 전집을 누나에게 팔았다가 책을 전혀 보지 않는다는 말을 훗날 들었을 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그 후로 내가 무슨 장사를 하건 친척들에게 먼저 손 내밀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팔 남매나 되지만 모두 살아가는 삶들이 그만그만하다. 어느 형제라도 특출나게 사업을 잘한다면 나머지 형제들도 모두 그 일을 했을 테지만 우리 팔 남매는 그런 복이 없었다.
내가 뻥튀기를 시작한 이유도 먼 미래를 본다면 나는 나 혼자만을 위한 사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잘 되면 우리 형제들도 하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모험했다가 내가 무너진다면 나만 손해를 보면 되는 것이다. 모험을 해 볼 용기조차 사라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가장 빨리 사업을 접은 것은 '네비게이션 방판'사업이었다. 시작한 지 3일 만에 그만두었으니 변덕도 그런 변덕은 없을 것이다. 가장 오래 했던 직업은 그래도‘건전지 판매업'이었던 듯싶다. 약 5년을 했다가 1년 정도 다른 사업을 하고 그 사업이 여의치 않아 다시 5년을 더 했으니 말이다. “잘하고 계시는 쌀 사업을 왜 접으려고 하십니까? 그냥 하세요!” 거래처 사장님의 말씀에도 나의 마음은 이미 뻥튀기 사업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뻥튀기 장사를 한다고 했더니 모두 뜬금없이 무슨 뻥튀기냐면서 웃으신다. 그래도 우리 형제들은 항상 나를 믿어주었다. “그래 덕길이 네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잘할 거야! 한번 열심히 해 보렴!” 둘째 형님과 셋째 형님의 한결같은 말씀이셨다.
내가 뻥튀기 사업에 손을 댄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따라서 수없이 튀밥 기계를 돌렸다. 그 무겁고 무섭게 보이는 기계를 아버지께서는 불끈 들어‘펑'하는 폭탄 소리를 내며 튀밥을 튀기는 거였다. ‘나도 저걸 직접 내 손으로 튀겨보고 싶은데…….’ 생각은 했지만 결국 39살이 될 때까지 그 기계를 직접 튀겨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 뻥튀기 아저씨께서 오셨다. 명절 때 시골에서 가져온 옥수수를 튀기러 아저씨에게 간 순간부터 이미 운명의 끈은 뻥튀기 사업으로 기울고 있었나 보다. 나이가 지긋하게 보이시는 아저씨는 그동안의 뻥튀기에 대한 전반적인 나의 소견을 말씀드리자 흔쾌히 지금의 뻥튀기 사업에 대한 식견을 가감 없이 들려주셨다. 그분의 말씀에는 진솔함이 배어 있었다 단순히 사기를 치기 위한 뻥튀기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뻥튀기 일을 해야 하겠다는 의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시작 하기 전에는 걱정부터 생기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다. 손대본 적이 없는 일을 섣불리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단, 한 가지는 강냉이 한 방을 튀기는 데 그 순간 물건을 사간 손님이 10여 명은 되었다는 것이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만큼은 믿어도 되기에 더는 말이 필요 없었다. 나는 집에 들어가서 아내와 머리를 짜내기에 골몰하였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쌀 사업보다는 낫다는 결론이었다.
뻥튀기 사업을 하겠다는 결론이 서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단은 하고 있던 사업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1톤 냉동 탑차를 가지고는 할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일차적으로 차와 가지고 있던 거래처 그리고 전화번호까지 넘겼다. 문제는 뻥튀기 기계를 어떤 종류로 하느냐가 문제였다. 뻥튀기 기계의 종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강냉이를 튀기는 기계였고 또 하나는 접시형 뻥튀기를 튀기는 거였다. 강냉이 튀기는 기계보다 접시형 뻥튀기를 튀기는 기계가 두 배나 비싸다. 도저히 결론을 내릴 수 없어 일단 두 가지를 하루씩 수습을 받기로 하였다.
강냉이 튀기는 기계를 난생 처음 내 손으로 튀겨보았다. ‘뻥~~~~'소리와 함께 잔뜩 움츠려있던 강냉이들이 일제히 세상 밖으로 솟구쳐 나왔다. 하얗게 튀겨진 강냉이들이 잔뜩 부풀어있었다. 39년 만에 튀겨보는 손맛이 막상 해 보니 별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일일이 온도계를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면 물건을 사러 오시는 손님에게 소홀히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잠시라도 짬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접시형 뻥튀기 수습은 알뜰시장으로 나갔다. 쉴 새 없이 뻥뻥거리며 뻥튀기가 만들어져 나오고 사람들은 저마다 뻥튀기를 사러 몰려들었다. 일주일은 따라다녀야 한다는 그 분의 말씀을 뿌리치고 나는 내일부터 당장 하겠다며 시장을 나왔다.
사업 1일 차. 마침내 모든 재료를 준비한 다음 이튿날 일찍 회사에 나가 오늘 팔 물건을 받았다. “김 사장님! 어디로 가실 것인지 장소는 정하셨어요?” 나는 대략 생각은 했지만 어디가 좋을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니요. 아직 딱히 정한 곳이 없습니다. 어디 좋은 곳 있나요?”
장사를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노점에서 창업하는 방법, 알뜰시장을 따라다니는 방법, 아파트에 단독으로 들어가 장사를 하는 방법이 있다. 그 역시 나는 어떤 방법이 나에게 맞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하는 노점상단속, 주차단속, 자기의 상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협박하는 노점상연합회의 횡포와도 맞서 싸워야한다. 그걸 피해서 하려면 알뜰장이나 아파트에 돈을 주고 들어가 장사를 하는 방법밖에 없다. 나는 모든 것을 다 해 보기로 작정하였다.
첫날은 큰 쇼핑센터 앞에서 시작했다. 정오부터 노점을 시작했다. 3시쯤 되니 단속원이 몰려들어 다짜고짜 사진을 찍고 주차위반 딱지를 떼였다. 그리고 물건을 반 정도는 이미 압수를 한 상태였다. “아저씨! 배짱이 좋으시네. 치우라고 하면 얼른 치워야지 태평하게 장사를 하느냔 말이오? 이거 다 압수해갑니다?” 다섯 명이 몰려와 물건을 빼앗아 갈 태세였다. 물건을 압수당하면 구청으로 찾아가 벌금 50만 원인가를 주고 찾아와야 한다고 한다. 사태를 직감한 나는 서둘러 물건을 치우기 시작하였다. 물건을 거의 치우자 그때야 단속하던 차는 떠났다. 의욕을 잃은 나는 집에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오후 다섯 시가 막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움을 얻으려고 회사 사장님한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단속에 걸려 철수했습니다.” “5시 이후에는 단속이 없을 겁니다. 다시 가서 해 보세요!” “저기 사장님 혹시 노점상 경험은 있으십니까?” 회사 사장이면서 필드에서는 한 번도 뛰어보지 않은 사람도 있기에 나는 그걸 물었던 것이다.
“하하 저도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노점상 십 년 이상 한 사람인걸요. 걱정하지 말고 하세요! 하하하” 사장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은 나는 다시 차를 몰고 그 자리에 가서 다시 장사를 하였다. 밤 열한 시까지 장사를 하고 물건을 정리해서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조금 넘었다. 첫날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대박이었다.
사업 2일 차. 오늘은 어제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알뜰 장을 따라가기로 했다. 병점으로 갔더니 조그만 장이 섰다. 약 200세대 정도 된다고 한다. 나는 인사를 건네고 시장 팀장에게 자리를 부여받아 장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온종일 있어도 손님 한 명 없었다. 참혹했다. 하루 매출이 6만 원 이라니……. 알뜰시장만 따라다니면 장사는 잘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사용료 15,000원 을 주고 나니 손에 쥐어진 돈은 바닥이다. ‘장사는 역시 노점이 최고야!’ 라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오는 길 내내 무거워진 어깨는 어쩔 수가 없었다.
사업 3일 차 오늘은 아파트에 단독으로 들어가서 장사를 해 보기로 했다. 몇 군데 찾아갔더니 단독 장을 받지 않는다며 퇴짜를 놓았다. 600세대 정도 되는 아파트에서 겨우 허락을 받아 장사를 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옆에 군밤장수 아저씨가 오실 거라고 한다. 군밤 장수가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물었다. “아저씨! 누가 여기서 장사를 하라고 했습니까?” “부녀회장님께서 하라고 그러셨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항상 목요일이면 제가 오는 줄 알면서 들어오면 어떡해요? 단독 장은 말 그대로 혼자 해야만 인건비라도 건지지 두 사람이 들어오면 나눠 먹기가 된단 말입니다.” “아이고 몰랐습니다. 오늘 하루만 합시다. 다음에는 날짜 피해서 올게요!” 나는 그분한테 많은 시장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천막을 치지 않고 장사를 했더니 더욱 매출이 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날 매출은 쌀 사업할 때랑 비슷한 매출이었다.
사업 4일 차 오늘은 단독 장도 별 성과가 없어서 단속이 뜸한 광주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쌍령리에 갔더니 아파트는 많은데 너무 썰렁했다. 다시 태전동으로 가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마침 주차된 차가 빠지기에 얼른 자리를 폈다. 상가건물 앞에 자리를 폈더니 경비가 내려와서 건너편에서 하라며 못하게 하신다. 겨우겨우 설득을 해서 결국 밤 11시까지 장사를 했다. 매출은 어제와 비슷했다. 다음에는 낮부터 와서 한다면 평균 매출은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업 5일 차 오늘은 산행을 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장사를 해 보기로 하고 남한산성 근처에다 자리를 폈다. 여기도 어김없이 텃세는 있었다. 가게 앞 등산복 가게에서 장사를 못하게 한다. 하루만 하자며 겨우 설득을 했는데도 찜찜해서 뻥튀기 한 봉지를 드시라며 드렸더니 그제야 웃음을 지으신다. 좀 팔리는가 싶었는데 밤이 되자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끊기니 거리는 이내 쥐죽은듯 고요했다. 할 수 없이 철수해서 집에서 가까운 보정 역 근처에 자리를 폈는데 3천 원짜리 강냉이 한 봉지를 판 것이 전부였다. 할 수 없이 날은 춥고 배도 고파서 철수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살을 뚫고 엄습하는 추위와 싸워 이겨야 한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또 다른 이익을 허락지 않는 세상인심의 냉엄함과도 맞서 이겨야 한다. 나는 또 오늘은 오늘의 일을 하러 나갈 것이다.
허락하지 않아도 널린 게 사람 사는 곳인데 어디인들 내 한 몸 가서 장사 할 곳이 없을까? 종일 서서 일하는 것도 단련이 되어버렸다. 추위도 한풀 꺾였다. 1주일의 시간을 지나면서 나름대로 기술도 많이 쌓이게 되었다.
비록, 글을 쓸 시간도 책을 읽을 시간도 부족하지만, 비록, 친구들을 만나 술자리를 같이할 수 있는 시간도 없지만, 비록, 가족들과 따스한 저녁도 같이 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경험은 또 다른 글쓰기의 밑그림이 될 줄로 믿기에 나는 또 웃음을 가득 머금고 현장에 나갈 것이다.
첫댓글 정말 험난한 하루하루군요
나도 시작해볼까 생각중인데요
벌써 걱정이 앞섶니다
ㅣ 년만 꼭 버텨보라는 어느 사장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열심히 살아 온 삶들은 언젠가는 보답을 받는다는군요^&^
제 마음으로 읽었답니다
제가 광주에 사는데 도움 받을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