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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자비를 내리소서. 캄보디아에!
2010년 1월 26일부터 1월 30일까지 캄보디아 시엠립(Siam Reap) 지역에 여행을 다녀왔다. 태국과 가까운 캄보디아 북부 도시인 시엠립을 잠시 소개해보겠다. 앙코르 왕국 중심도시인 이곳의 인구는 약 85,000명 정도이고, 도시 이름에서 ‘Siam’은 태국을 의미하며 전체적으로는 ‘태국에 점령된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예전 대중가요 중에, “먼 남쪽 샴에 나라 월남에 달밤”이 생각난다. 그 샴이 태국이다.
장모님을 모시고 처형 부부와 우리 부부가 여행을 함께 하였다. 장모님 슬하에 7남매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일정이 맞지 않아서 가지 못 했다. 해외여행을 할 때에 아내와 내가 가장 먼저 신경을 쓴 것은 옷차림이다. 목적지의 날씨가 어떠냐에 따라서 옷차림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침 그곳은 한국의 초여름 날씨와 비슷하다고 한다. 여름옷을 가방에 준비한 다음에 인천국제공항까지는 겨울 파카의 내피를 떼어낸 등산복 상의와 엷은 긴 바지를 입고 속에는 짧은 반팔 티셔츠를 입었다. 위의 겉옷만 벗으면 여름 옷차림이다. 집에서 아침 8시에 광주로 출발하였다.
광주버스터미널에서 장모님과 처형 부부를 만나서 버스를 탔다. 오전 10시에 출발한 버스는 인천공항까지는 약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특히 버스를 타고 처음 건너는 인천대교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인천대교는 인천국제공항이 위치한 영종도와 인천경제자유구역인 송도 신도시를 연결한다. 2005년에 착공하여 2009년 10월 16일에 완공, 2009년 10월 19일 자정부터 차량 통행을 시작했으며, 총 길이는 21.38㎞에 교량이 18.35km다.
인천국제공항에서 18:30에 KE687기를 타고 시엠립으로 출발하였다. 목적지인 시엠립까지는 약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여행을 하는 기분은 언제나 즐겁다. 비행기를 타는 기분 또한 설렘 자체다. 오죽하면 사람의 기분을 띄울 때에 비행기를 태운다고 할까. 하하하!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마음으로 기내식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냈다. 작은 봉지 속의 땅콩이 아주 고소하다. 아내의 옆 자리에는 하얗고 갸름한 일본 할머니가 앉았다. 아주 조용하고 다소곳한 이미지다.
약간 수줍음을 타는 할머니는 출국신고서와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는 데에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손짓 발짓으로 작성하였으나 완성품은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여자 승무원이 지나가자 도움을 요청하여 마무리를 하였다. 기내의 만병통치약은 승무원이다. 살아오면서 외국어의 필요성을 가장 절실하게 느꼈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어렵지 않게 도울 수 있을 때의 기분은 마치 소화불량을 해소한 것과 거의 같지 않나? 그렇다면 우리는 소화불량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인 셈이다. 할머니께 미안했다.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5시간 30분 정도 지난 후인 22시 10분 - 캄보디아는 한국과 2시간 정도 시차가 난다. 도착 시간을 한국식으로 하면 24시 10분 - 경에 캄보디아 시엠립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위에 걸친 겉옷을 벗었다. 자연스럽게 상의는 여름 반팔 티셔츠 차림이다. 건기여서인지 습도가 낮은 밤이어서인지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기분이 삽상하다.
우리 일행은 이미 비행기 내에서 출입국카드와 세관신고서, 비자신청서를 기존 양식을 참조하여 기내에서 작성한 것을 손에 쥔 채 비행기에서 내렸다. 현지 공항직원에게 여권, 사진1장, 출입국카드, 비자신청서를 제출한 후에 공항 출구를 통과하였다. 짐을 찾으신 후 세관신고서를 제출하고 공항 밖으로 나간 다음에 피켓을 든 가이드를 만났다. 여권과 함께 비용으로 25달러를 냈다. 나중에 알고 보이 21달러, 23달러짜리도 있는데 금액에 따라서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 우리는 25달러를 내어서 여권을 숙소까지 배달해주었다.
공항 밖에서 여행 안내원을 만났다. 광주 사람이었다. S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국제통상학과를 졸업한 안00이라는 30대 남자다. 경력 6년 차로서 작달막한 키에 프로농구 양동근 선수를 닮은, 볼 살이 있는 둥근 얼굴이다. 캄보디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식견이 넓고 깊다. 말을 청산유수로 잘한다. 지나치게 달변이어도 사기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지금도 부모님은 광주에서 꽃 가게를 운영하는 중이란다.
Pacific Hotel과 수영장
안내원을 따라서 Pacific Hotel에서 여장을 풀었다. 안내원은, 가방을 날라주고 방을 봐주는 벨 보이에게 1달라 팁을 주고, 다음날 아침에 방을 나올 적에도 청소하는 사람을 위해 침대에다 1달러를 두고 나오라는 당부와 함께 호텔에서 떠났다. 첫날밤인데 형님의 코고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몹시 피곤하신 모양이다. 처형께서 숙면은 취하시고 사실까? 하하하! 아내 친구인 성당의 자매는 남편의 코곯이가 심해서 남편과 각방을 쓴다는 말도 들었다. 나도 몹시 피곤할 때나 술자리가 겹칠 때에 코를 고는지, 아내는 잠시도 못 참고, 잠을 못 자겠다며 일 년에 몇 번 정도는 한밤중에 나를 몹시 흔들어서 깨울 때가 있다. 아내는 자기 원칙이 엄청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선잠을 깨서, 여행 출발 전에 알아본 캄보디아의 고대사를 잠시 기억하면서 다시 한 번 잠을 청해 본다.
후우난 시대(부족국가시대) - AD 1세기~AD 550년경 > 쩐라 시대(통일왕권 형성기) - AD 550년경~802
> 앙코르 시대(크메르제국시기) - AD 802 ~ 1432
여기서 나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 바로 앙코르 시대이다. 앙코르 시대는 우리나라도 따진다면 통일신라 중기(802년 해인사 창건)로부터 조선 초기 세종 조에까지 이르는 장수 왕조이다. 전성기는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에 해당되고, 중국 왕조로는 당, 송, 원, 명에 걸친 시대이다.
얼마만큼 잤을까, 닭이 울고 개가 짓는다. 평화로운 한국의 아침을 맞는 기분이 들어서 창문을 열었다. 호텔 방의 창문을 연다. 차갑지 않은 살랑바람이 살갗을 애무한다. 키가 큰 야자나무 아래 호텔의 수영장 물이 파란 물감 빛으로 흔들리고 야트막한 담장 너머로 짙푸른 나무들과 자잘한 단독주택들이 보인다. 아주 소박하고 평화로운 한국의 시골마을과 같은 느낌이 든다. 으음, 상쾌한 기분, 좋은 예감이 드는 아침!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장모님의 입맛에는 양식이 맞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 우리 일행은 한국에서 반찬을 가져오지 않았다. 나는 해외여행에까지 한국 음식을 가져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크게 문제가 없다면 외국의 음식을 맛보는 것 또한 돈 주고 배우는 좋은 교육이 아니겠는가? 식당에 들어가서 나는 줄을 서지 않았다. 현황을 파악하듯이 어떤 음식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음식을 골라 먹기 위함이다.
열대 과일의 빛깔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파파이아, 라임, 드래곤푸르츠(용과), 파인애플, 리치, 망고 등이 먹음직스럽다. 스프 종류로는 닭 육수에 끓인 쌀죽이 눈에 들어왔다. 장모님은 닭을 싫어하신다며 미간을 찌푸리신다. 국수가 보인다. 열대지역의 여러 가지 향신료와 채소를 넣어서 먹는 맛도 제법이다. 옆에 있는 달걀 프라이드는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상당히 기다려 줄을 서야 했다. 작고 귀여운 달걀이다.
호텔에 있는 직원들은 영어 회화가 서툴렀다. 그러나 친절하고 소박하며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의 소유자들이다. 한국 관광객들이 많아서 문장이 아닌 몇 마디 낱말들을 그 사람들은 알고 있다. ‘조금만’,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등은 가끔 들을 수 있는 낱말이다. 호텔 1층 로비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들이다. 별로 낯설지 않는 캄보디아다.
호텔에서 뷔페식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본격적인 사원 관광을 시작하였다. 버스 안에서 안내원이 캄보디아의 인사를 두 가지 알려준다. ‘오쿤 쭈란(감사합니다)’와 ‘섭섭 하이(안녕하세요)를 배운 우리 일행은 미니버스 안에서 신기한 듯이 자꾸 되뇌면서 유적 군(群)으로 향하였다. 시엠립의 남동쪽에 위치한 3개의 사원-바콩, 룰레이, 프레야 코(신성한 소)로 이루어진 유적 군을 룰로오스 그룹이라 부른다. 이곳은 크메르 문명의 고대 중심지다. 이 유적군은 9세기 후반 앙코르 초기시대에 건설된 사원이다. 선왕들의 장례식을 행하던 곳이면서 영혼들이 쉬는 장례사원이라고 한다.
롤라이사원 전경
그 중에서 처음 방문한 곳은 Lolei (롤레이) 사원이다. 9세기말 야소 바르만 1세가 지은 힌두교 사원이다. 룰로오스 강물을 끌어다 최초의 인공저수지를 만들어 지은 최초의 수상사원이었으며 당시에는 배를 타고 사원으로 들어가던 곳인데 지금은 저수지가 육지로 변하여 흔적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이어서 바콩사원으로 향한다. 3개 사원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인드라바르만 1세의 묘라고 한다. 입구에는 7개의 머리를 가진 돌로 만들어진 나가(뱀의 신)가 양쪽으로 길게 다리 난간으로 드러누워 있다. 사암으로 된 사원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안내원이 소개를 하지만 예습을 하지 않은 것과 평소 동남아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탓에, 호기심이 많은 나의 귀에도 캄보디아의 역사는 어렵기만 하여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사원을 나서자 큰 나무 아래에서 앉아서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를 한다. 캄보디아 내전 때에 부상을 당한 장애인들이 7~8명 정도 모여서 아리랑을 연주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모금바구니에다 1달러씩 헌금한다. 모금한 액수를 지뢰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기도 한단다. 자신도 장애를 입은 상태인데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하니 내가 미안해진다. 그들은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아리랑을 연주한다. 그만큼 한국 관광객이 많다는 것일까? 장애인들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다고 생각하니 무척 미안한 마음이다.
룰로오스 유적 군 중, 마지막으로 쁘레야 코 사원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힌두교와 불교의 조화를 발견할 수 있다. 쁘레야 코 사원 바로 옆에는 소승불교의 사찰이 있다. 불상은 학창 시절에 배웠던 인도의 간다라 불상과 흡사하다. 정면을 향해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다. 사원에 바로 옆에 있는 초등학교가 우리 일행들에게는 사원보다 더 큰 관심의 대상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보다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과 밀접한 까닭이다. 초등학교는 아주 허술한 건물이다.
낡은 책상과 의자가 우리 교실처럼 정렬되어 있고, 교실 뒤편 벽의 낡은 벽에는 허술하지만 한국과 비슷하게 아이들의 그림이나 글이 붙어있었다. 작품이라고 붙여놓았는데 그 종이와 채색에서 가난한 냄새가 심하게 났다. 등불도 없는 듯했다. 그곳에서 우리 일행은 초등학생들을 만났다. 피부는 까무잡잡한 흙먼지 빛에다 맨발인 아이들. 우리와 쉽게 친해지는 아이들의 눈은 슬플 정도로 검고 맑다. 무엇인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작년 늦봄에 정 바오로 신부님께서 교우들의 성금을 모아서 캄보디아에 다녀오셨던 기억이 난다. 동정심이 아닌 인간애다. 가난하지만 순수한 아이들이 물질의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지 한편으로는 걱정도 하였다. 착하디착한 아이를 보면 거친 세상을 어떻게 살까 걱정을 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 걱정은 그 아이들에 반해 물질에 오염이 더 된 나의 괜한 걱정이었으면 좋겠다.
쁘레야 코 사원 부근의 초등학교 교실 내부와 어린이
룰로오스 유적군의 역사적 의미나 문화적 가치를 안내원이 제법 상세히 소개했지만 여전히 나의 귀에는 여전히 달콤하지 않다. 학창시절에 공부한 세계지리와 세계사는 서양 중심이었다. 현재의 삶 또한 서양 문화에 편중된 상태이다. 평소에도 동남아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게으른 나는 출발 전에 아무런 예습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캄보디아 역사와 관련된 안내원의 설명은 별로 귀에 매우 낯설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 모습은 어린 시절의 추억처럼 익숙하다.
시엠립 재래시장으로 간다. 상품을 진열해놓은 상태를 보니까, 5~6일만에 서는 우리나라의 시장보다 더 낙후된 상태였다. 하지만 낙후라는 말보다는 그것도 하나의 문화로 보는 것이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데에 나을지 모른다. 문화 자체만을 두고 선진국이니 후진국이니 하는 것은 그들의 약사나 환경 등을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날씨 탓인지 둥근 얼굴에 통통하게 생긴 아저씨는 웃통을 벗고 장신구를 팔고 있고 호객하는 장면은 거의 볼 수 없다. 생필품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식재료들은 우리 것보다 작고 때깔이 나아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삶이 아직은 외형에는 신경을 쓸 단계는 아닌지도 모른다.
점심시간이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이다. 내부에는 엷은 바람에 대나무가 조용히 몸을 흔들고 있다. 삼겹살에 상추를 싸 먹는다. 그곳에서는 삼겹살 구이는 바짝 구워서 기름기를 완전히 뺀 것이다. 상추를 씹는 맛이 참 좋다. 상추의 잎이 입 안에 살아있는 느낌이다. 상추 맛이 참 좋다. 그곳의 토질은 한국처럼 황토여서 채소가 아주 잘 자랄 뿐만 아니라 상태도 아주 좋다고 한다. 실제로 먹어보니 상추가 한국의 시골 밭에서 직접 채취하여 먹은 것처럼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참 싱싱하다. 식사 후에는 상황수라고 해서 마신다. 캄보디아의 특산품 중에 하나가 상황버섯이라고 한다. 그 버섯을 우려낸 물이 상황수다. 사람들은 빈병에 담아서 여행 중에 마시기도 한다. 사람들이 물병을 비운 다음에 상황수를 채우기 시작한다.
오후에는 반테이 스레이 사원을 간다. 여성의 성채라는 뜻을 담고 있는 사원이다. 이 사원 벽의 아름다운 여신상을 밀반출하려고 한 프랑스의 소설가인 앙드레 말로는 프놈펜에서 감옥에 갇히기도 한 사연의 현장이다. 반테이 스레이 사원은 앙코르 시대 초기의 최대 걸작이라고 한다. ‘크메르 예술의 보석’이라고 부를 정도로 사원은 벽돌을 최소하여 사용하였고 전체가 사암으로 덮여있는데 벽의 조각은 한 치의 바늘구멍도 남김없이 장식된 매우 섬세한 기교를 부렸다. 조각 솜씨가 아주 섬세하고 화려하다. 손을 대면 금방 조각의 한 잎이 떨어질 것 같다. 바늘이나 칼끝으로 새긴 듯이 오밀조밀하여 어지러울 정도다.
앙드레 말로가 탐낸 반테이 스레이 사원의 압살라 부조
이어서 오후 5시가 가까운 시간에 프놈바켕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해자를 낀 앙코르와트 사원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프놈바켕은 67m 높이의 언덕 위에 있는 사원으로 앙코르 지역 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앙코르 주변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꼭대기의 서남쪽 끝에서 보면 앙코르 와트의 5개 탑이 다 보이고, 톤레이삽 호수도 보인단다. 많은 관광객들이 아름다운 일몰을 보려고 몰려들어서 최근에는 가장 위험한 앙코르와트 유적이라고 한다. 프놈바켕 계단에는 이 날도 일몰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앉거나 서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랑 처형이랑 셋이서 올랐다. 계단의 폭은 발바닥의 절반 정도만 걸칠 정도로 좁아서 꼭대기에 오르는 데에 조금은 불편했다. 역시나 앙코르와트 탑과 톤레이삽 호수가 아련하게 보였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색감의 일몰 풍경이었다. 밀레의 ‘저녁종’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정서를 느끼게 한 프놈바켕의 일몰. 보는 순간, 마음이 낮게 가라앉으면서 아주 평화로워졌다. 어슴푸레한 지평선 위로 붉고 둥근 하루가 잠긴다. 무욕이다. 마음의 정화상태!
프놈바켕에서 본 일몰
인드라바르만1세는 현 룰루오스 지역 하리하할라야에 수도를 정했다(씨엠립 동남쪽 13㎞). 그의 아들 야소바르만 1세(889-910치세)는 룰루오스 지역에서 현재의 앙코르 지역으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세운 첫 번째 사원이 프노바켕으로 앙코르 유적 가운데 최초로 층으로 쌓인 유적이기도 하다. 프놈바켕에 신 수도의 국가신전을 지었을 때는 앙코르 와트도 앙코르 톰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녁식사는 톤네삽 식당(Tonlesap Restaurant)에서 압살라 디너로 해결하였다. 뷔페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압살라 춤을 감상하는 순서다. 저녁 식단에는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는 연잎 쌈밥이 있었고 과일 화채와 배추김치 등 아주 다양했다. 뷔페식당의 음식 맛은 상당히 좋았다. 압살라라는 말은 천사라는 뜻으로 압살라 춤은 춤추는 여신쯤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머리에는 금장식이 된 긴 탑 모양의 모자를 썼고 손가락 모양을 유난히 강조하는 듯했다.
압살라는 앙코르와트 벽의 부조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압살라 춤을 보는 순간, 태국의 전통춤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춤을 두고 태국과 캄보디아가 서로 자기 민족의 전통 춤이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태국의 문화를 잘 모르지만 앙코르와트 사원의 부조만을 근거로 한다면 캄보디아 전통춤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에게 지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런 역사적인 관계 때문에 압살라 춤을 서로 자기 민족의 전통 춤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캄보디아는 서기 802년 앙코르 왕국이 세워진 후 크메르 민족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동남아의 최고 왕국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1431년 태국의 침략으로 쇠퇴하면서부터 태국, 베트남 등 주변 국가들의 침략으로 시달렸고, 19세기부터는 프랑스 식민치하에 들어갔다. 사실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가 예전에 캄보디아의 영토였다고 한다.
숙소로 돌아왔다. Pacific Hotel은 우리가 캄보디아 여행을 하는 동안 변동 없이 사용할 숙소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편안하게 숙식을 해결하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는 곳이다. 방에 들어오자 손윗동서인 형님이 땅콩과 함께 납작한 소주병을 가방에서 내어놓으신다. 둘이서 한 병을 비웠다. 타국 숙소에서 마시는 소주 맛이 깔끔했다. 기분이 좋아서 처형과 아내에게 연락하여 호텔 뒤뜰로 나갔다. 덥지 않은 밤이지만 수영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바에서 맥주 3병과 과일 한 접시를 주문했다. 이어서 형님은 숙소에서 소주 한 병을 가지고 오셨다. 바에서는 캔 맥주 하나에 3달러, 과일 한 접시에 12달러로 팔고 있었다. 처형은 양주를 조금 마시는 모양인데 아내는 술과는 담을 쌓고 산다. 술과 친하지 않는 여인들이다.
다음 날 의 여정은 캄보디아 여행의 꽃인 앙코르 유적지 방문이다. 오전에는 앙코르와트사원을 구경하고, 오후에는 툭툭이(뒤쪽에 2인승 수레를 달고 있는 오토바이)를 타고 바이욘사원, 바프온사원을 찾아간다.
앙코르 유적지 - 앙코르 와트' '앙코르 톰'그리고 '타프롬사원' 등 100여 개의 사원 군(群) - 는 1860년에 프랑스의 박물학자 앙리 무어가 표본 채집하러 캄보디아의 깊숙한 정글을 헤매다가 발견한 석탑 사원 군이다. 캄보디아인들은 밀림 속에 석조사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번 들어가기만 해도 신의 저주로 곧 죽게 된다는 저주의 땅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앙리 무어는 신기하게도 다음 해에 열병으로 죽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본 앙코르유적지는 연간 100만이 넘는 관광객을 불러오게 되었다. 이 정도라면 앙리 무어는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준 사람이 아닌가.
앙코르와트 뒤편의 필자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앙코르 와트(‘와트’란 태국 말인데, 절 또는 사원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 방대한 앙코르 와트에 대한 사전 지식을 알고 가지 않으면 사원의 이곳저곳을 입만 벌리고 다니다가 말게 된다. 사원 왼쪽 연못에서 우리는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연못에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백련이 흐린 물 속에 조용히 피어있다. 중앙입구에서 사원 건물 내부의 입구까지 355m 도보를 지나야 하며 거기서 중앙 탑까지는 3중의 회랑을 거쳐야 한다.
1평방km 위에 사암으로 건설된 사원의 둘레에는 인공호수인 해자(1500m)가 삥 둘러있고 중앙입구에는 나가 석상이 있으며 3중의 회랑은 761m나 된다. 사원에는 당시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목욕제기를 하기 위한 큰 목욕탕이 여러 개 있다. 이어서 중앙 탑(62m)을 오르기 위해 줄을 지어서 표찰을 받은 다음에 높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도올 김용옥은 캄보디아 기행에서 앙코르 와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중앙 탑에서 남쪽 제1회랑으로 가극 복도에 새겨져 있는 우아한 압살라들의 부조는 앙코르 와트의 모든 예술품 중에서 가장 찬탄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압살라 무희 조각의 반대편인 북쪽 회랑 프론트에는 절규하는 하누만 부대의 원숭이들의 모습이 있다. (중략)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 제국이 멸망 후에 상좌부 불교 사원으로 사용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것은 1632년의 명문에 처음 등장한다고 하며, 정확한 뜻은 ‘제도(帝都)의 탑’이라고 한단다. 앙코르 와트를 지은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의 시대인데 비슈누신에게 봉헌된 제식의 장소란다. 그의 친구인 디바까라빤디타가 앙코르 완트가 설계자라고 추정한단다. 앙코르 와트의 가장 중요한 특색 중의 하나는 전체 건물이 서향으로 지어졌으며 서향은 차가움이고 금(金)이며 가을(秋)이며 죽음이며 끝이며 어둠이라고 한다.”(이하 생략)
구경을 마치고 앙코르 와트 뒷문으로 나왔다. 앙코르 와트의 윤곽이 제대로 보이는 곳에서 사진 촬영을 하였다. 밖으로 나오는 길에는 원숭이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그 옆에는 원숭이 먹이인 몽키 바나나를 파는 소녀도 있었다. 일행 중에서는 목이 마르다며 바나나를 사서 먹으려 했으나 나중에 원숭이 먹이라는 것을 알고 실소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목이 마른 것은 어떻게 하랴. 무섭다며 엄마 등에 업힌 지선이를, 원숭이 두 마리가 끝까지 따라왔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다. 지선이가 업힌 채 바나나 한 개를 품에 안고 있었던 것이다. 영리한 동물인지, 본능에 충실한 동물인지?
여기서 잠시 여행을 함께 하는 일행을 소개하겠다. 먼저 충남 보령에서 온 초등생 여자 어린이와 그 아이의 부모 등 3명 - 아버지는 충청도 방언을 사용하는 순박한 사람이었으며 아이의 엄마는 제법 씩씩하고 명랑한 여인이었다. 또 한 사람은 원래는 군산 사람인데 중국 윈난 성에서 살다가 상황수를 사려고 잠시 캄보디아에 온 41살짜리 총각 배씨 - 카메라와 프린터까지 가지고 다니는 현지 아이들이나 여행객에게 사진을 찍어서 프린터로 뽑아주는 활발한 자유인이다. 여기에 우리 5명을 포함한 것이 일정을 함께 소화하는 사람들이다.특히 배씨는 한국을 떠난 지가 오래인지 천성인지 장모님께 훌륭한 말 동무였으고 자신의 어머니 생각이 난다면서 매우 정겹고 공손하게 장모님과 일정을 함께 하였다.
여행을 함께 하면서 우리는 쉽고 편한 사이가 되었다. 특히 배씨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어느 새 큰형님 둘째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지선이 아버지는 한국을 떠난 지 오래인 배씨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과 고추장, 참치 캔 등을 주었다. 내가 봐도 향수를 덜어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이다. 배씨는 여행 내내 일행들에게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직접 뽑아주기도 하였다. 현지 아이들에게도 쉽게 다가가서 사진을 찍어주면서 친해지고 상대방의 미소 속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자유인이다. 아이들이 꿈같은 자기 얼굴을 보면서 신기해하며 아주 좋아했다. 그의 사진 기술이나 구도가 대단하였다. 나온 사진마다 예술성이 엿보였다.
점심식사는 숙소인 호텔로 돌아와서 해결했다. 점심은 생각보다 미약했다. 여기의 풍습이 그런지는 몰라도 아주 간편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위장의 평화를 위한 식단이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오후에는 툭툭이를 타고 앙코르 톰(Angkor Thom)으로 갔다. 앙코르(도시) 톰(거대한)은 거대한 도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번에 이용한 관광회사 홈페이지의 여정을 보면 앙코르 톰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앙코르와트의 북쪽에는 `커다란 도시`라는 뜻을 가진 앙코르 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과거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사는 대도시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앙코르 톰 내부로 들어가는 문은 모두 5개로 앙코르 톰의 사방에는 출입문이 하나씩 있으며 동쪽에만 승리의 문과 죽은 자의 문 두 개가 있습니다.
먼저 타프롬사원에 들렀다. 시엠립 공항에서 15분 거리에 있다. 여행사 홈페이지에는 타프롬사원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2세기에 왕의 조상을 모시기 위해 브라마의 조상이라는 이름의 불교사원으로 정글에 오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는 곳이다. 자야바르만 7세 때 건립되었으며, 그의 모친 거처를 위해 건립하였고 당시에는 3천 명에 가까운 승려들이 살던 대사원이었으나 그 후에 방치되었다.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신비로운 맛을 풍기는 곳으로 꼭 들려야 하는 곳으로 꼽힌다. 어떤 안내서는 이곳을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미지의 공간으로 소개하기도 하며, 영화 "툼 레이더"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타프롬사원의 이행나무 뿌리
타프롬사원을 들어가는 순간, 경악했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였다. 날씨가 흐린 날이나, 혼자서 여기에 온다면 굉장히 무서울 것 같았다. 주변 가까이에 있는 수목들이 사원의 벽과 기둥을 큰 구렁이처럼 휘감고 있다. 800여 년 전에 심었다는 스펑나무와 이행나무가 중심인지 사원이 중심인지 모를 정도로 얽혀있다. 이행나무는 곧게 자라서 재목으로 활용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스펑나무는 아무 쓸모없는 나무로 사원을 망가뜨리고 있다. 자기 뿌리를 꿰뚫고 자라는 스펑나무 뿌리는 사원의 벽과 기둥뿐만 아니라 육중한 사원의 구조물을 들고 일어난 상태로, 마치 지옥의 사원을 연상케 해주고 있다. 그 장면은 자연의 신비감보다는 섬뜩한 파괴력과 인간의 나약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를 들이댔지만 나는 오히려 혐오감을 느꼈다.
툭툭이를 타고 앙코르 톰 남문을 통해 숲이 무성한 길을 따라 들어왔다. 흔적만 남아있는 왕궁 터에 이르렀다. 코끼리 테라스와 문둥왕 테라스가 있다고 설명을 한 안내원이 왕궁 터에 있는 가게에서 코코넛을 사주었다. 야자라고 하는 것이다. 큰 열매에 구멍을 뚫어서 물을 마시는데 마치 이온음료 같다. 장모님은 비위가 상하다면 드시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화학조미료(미원)의 맛과 비슷하여 그럴 만도 했다.
가까이에 있는 뱀 사원을 들렀다. 사원의 모습은 거의 비슷한 구조이다. 하늘을 향하여 사다리꼴 모양의 구조이고 윗부분 중앙에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형국이다. 앙코르 톰 중에서 가장 웅대하고 인상적인 사원은 중앙에 우뚝한 바이욘사원이다. 바이욘사원은 관세음 보살상만으로 이루어진 사원이다. 도올 김용옥은 바이욘사원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지름 25m,높이 45m인 중앙 탑을 중심으로 49개의 첨탑(尖塔)이 솟아 있고 그 첨탑마다 미소짓는 관세음보살의 얼굴을 조각해 놓았다(모두 172개). 이것을 ‘크메르의 미소'라 하며 캄보디아 화폐 500리엘(Riel)에 그려 넣었다(캄보디아의 국기에는 앙코르 와트가 그려져 있다).”
바이욘사원의 관세음보살상(크메르의 미소) 상층부
지금까지 구경한 사원은 대부분 캄보디아 토착 신앙과 인도에서 들어온 힌두교 사상이 결합된 것이었는데 바이욘사원에서는 다시 불교의 신앙이 힌두교 다음으로 캄보디아에 유입된 것을 알 수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소승불교의 불상과는 전혀 다른 인자한 모습이다. 넉넉한 이미지가 마치 우리나라의 보살상과 흡사하다. 이 불상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백제의 미소라고 일컫는 서산마애불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저녁은 평양냉면이라는 상호가 붙은 북한식 식당으로 갔다. 음식 맛이 아주 깔끔하고 맛깔스러워서 여운까지 좋다. 상에는 돼지갈비와 삼겹살이 있고 숙주나물과 김치도 보인다. 후식으로 약간의 냉면이 올라왔다. 나의 시선을 끈 것은 북한 음식인 꿀떡이다. 속에 꿀(설탕?)을 넣은 손바닥 절반 정도 크기의 직사각형 떡을 기름에 바삭하게 튀겼는데 부드럽고 달콤하여 더 먹고 싶은 나머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한 상에 4조각 나왔는데 다른 사람은 끝날 무렵까지 먹지 않아서 떡 접시를 내가 다 비웠다.
식사 중 형님은 40달러짜리 백두산 들쭉술을 시켜서 남자들끼리 나누어 먹었다. 아마 40도는 넘을 것 같이 독하면서도 뒤끝은 깨끗했다. 급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북한 미녀들의 공연이 식사 중에 펼쳐진다. ‘반갑습니다’, ‘휘파람’ 등 북한 노래를 춤과 함께 구성지게 불렀다. 식당에는 한국 사람들이 만원을 이루었다. 모두들 관람 태도는 차분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아서 좋았다. 맛이나 공연이나 깔끔했다.
식사 후에 야시장으로 갔다. 물에 발을 담그고 작은 열대어들이 피부를 물어서 무좀이나 피부병을 치료한다는 닥터 피시가 있고 장신구와 실크를 파는 가게, 열대과일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서양 관광객들도 상당히 많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야시장에서는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여행 중에 캄보디아의 풍물을 많이 보았기 때문인지 특별하지 않았다. 약한 조명도와 가설무대 같은 구조물도 한몫했다.
숙소로 돌아간 다음, 남자들끼리 식사했던 곳으로 다시 와서 술 한 잔씩 마시기로 하였다. 과정에서 우리 두 남자와 두 여자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 이 술자리는 안내원의 술책이 있는 것 같다는 두 여인의 생각 때문이었다. 이 문제로 우리들은 많은 생각을 했다. 안내원도 영업직인 까닭에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은 만약에 상술에도 우리가 대비할 자신이 있다며 주연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형님에게 나의 생각을 말한 다음에 야시장 구경 후에 남자들을 모은 다음에 그들에게 주연 참석 여부를 물은 다음에 주연에 드는 비용을 대강 알아야 우리가 화주인 두 여인에게 돈을 요구할 수 있다며 안내원에게 예상 비용을 물었다. 남자 4명이서 25달러씩이면 된다는 답변을 듣고 처형과 아내에게 말을 하여 결국에는 비용을 얻어낼 수 있었다.
숙소 앞에서 안내원의 차를 타고 평양냉면식당으로 갔다. 안내원은 평양 아가씨들에게 반말을 할 정도로 아주 친근한 사이로 보였다. 안내원은 그동안 관광객을 이곳으로 자주 유치한 모양이다. 각각 30달러를 안내원에게 모아서 주고 계산을 일임했다. 술상을 받고 아가씨를 물린 다음에 안내원이 상황버섯에 대한 말을 꺼낸다. 안내원의 마음속에는 상황버섯을 파는 것이 큰 목표인 듯하다. 배씨는 이것을 사러 중국에서 왔다면서 1kg를 사겠다고 하고 지선이 아빠도 그 정도는 사겠다고 하였으며 우리 두 사람에게는 각각 500g을 말하였다. 술기운 때문인지 나에게 직접 500g을 요구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날 상황버섯 가게에서 일어난 상황을 보니 안내원은 나와 형님에게 500g씩 몫을 정한 듯 말했다.
안내원은 자기 마음속에 담은 말을 다했다는 판단인지, 아가씨를 부르고 식탁이 있는 술자리에서 공연을 하게 한다. 술은 백두산 장뇌삼주와 들쭉술을 마셨다. 장뇌삼주는 120달러였고 나머지는 60달러였다. 아가씨들은 아주 친절하고 말투나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간결하고 세련되었다. 악기를 직접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배씨가 두 아가씨에게 각각 5달러를 팁으로 준다. 아가씨들은 팁을 동료들에게 숨기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팁을 개인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설마 팁까지 외화벌이에 포함할까?
낮에 먹은 꿀떡이 참 맛있었다고 말하자, 주변 사람들이 그러냐면서 아가씨에게 부탁을 하였다. 꿀떡을 내오자 보통의 남자들처럼 맛을 평가하면서 하나씩 즐겁게 먹었다. 노래 실력이나 연주 실력이 참 좋았다. 그들은 3년 간 이곳에 나와서 봉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 있는 것보다는 평양에 있는 것이 편하다고 하였다. 아가씨들의 공연을 충분히 감상한 다음에 남자 5명은 캄보디아에 왔는데 각각 노래 한 곡씩을 노래방 기계에 곡을 입력하였다. 모두 신나게 불렀다. 배씨가 기타를 치면서 7080 노래(젊은 연인들)를 하자 내가 화음을 아주 낮게 넣었다. 노래가 끝나자 한 아가씨가 나에게 왔다. 작곡을 했냐면서 자기 아버지가 작곡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4번째로 내 차례가 오자 신나는 것을 부르고 싶었으나 사람들이 분위기 있는 것을 불러서 나도 조용필의 ‘들꽃’을 불렀다.
마지막 아침이다. 여전히 뷔페식 아침 식사다. 입이 짧은 장모님은 김밥과 배추김치 위주로 식사를 하셨다. 1300여점의 국보급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앙코르 국립박물관에 갔다. 지금까지 여러 사원에서 봐왔던 것을 모아놓은 듯했다. 그런 까닭에 미안하지만 특별하지 않았다. 이어서 캄보디아 정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실크 공장에 갔다.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서 본 양잠의 과정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뽕나무 밭이며 누에 키우기, 명주실을 뽑기, 비단 짜기의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에는 실크로 만든 물건의 판매장까지 둘러봤다. 우리나라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이 그곳에 있는 것 같았다.
다음 목적지는 캄보디아 최대의 인공호수인 바라이 호수다. 크메르 왕국의 통치기간에 바라이라 불리는 약 1000㎢ 크기의 인공저수지를 기반으로 한 관계 시스템으로 각종 용수를 이곳에서 제공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바라이호수는 이것들 중 가장 큰 규모로 1050년에 건설되었으며, 8km X2.2km 크기의 저수지는 최대저수량이 40만m3에 이른다고 한다. 호수 옆에는 개구리와 닭 등을 꼬챙이에 끼어서 구운 요리와 열대과일을 하는 가게가 널려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시골에서는 야뇨증에 걸린 아이에게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였다. 바삭 구운 개구리를 맛있게 먹었던 아이들이 막대기를 들고 들판을 휘젓던 기억난다.
캄보디아 아이들의 입에서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은 ‘1달러’이다. 이번 여행을 할 때마다, 따라붙는 아이들은 다르지만 아이들의 입에는 ‘1달러’라는 말이 늘 붙어있다.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차에서 내리는 여행자에게 ‘1달라’라는 말을 건넨다. "오빠, 멋져."라는 말로 시작된 아이들의 말은, 여행자가 사지 않으면 “할아버지 뚱뚱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안내원이 열대과일을 사주었다. 망고와 파파이아와 파인애플, 라임 등을 썰어서 가져왔다. 망고가 가장 맛이 좋다. 수분도 많고 당도도 높아서 먹을 만했다. 일반적으로 열대 과일은 한국의 과일에 비해서 당도나 향기가 약하다. 날씨의 변화가 크지 않아서일까?
점심은 캄보디아의 음식이 수키다. 샤브샤브와 비슷한 음식으로 특유의 옅은 향신료 냄새가 났다. 나는 먹을 만했다. 이어서 보석 관광을 하였다. 그곳의 가게는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아내와 장모님이 반지를 장만하셨다. 장모님은 자식들의 공동 경비로 사셨다. 오늘도 장모님은 둘째 사위인 내가 경주로 신혼여행 다녀올 적에 사드렸던 옥반지를 들먹이신다. 지금도 가지고 계시는데 옥은 그래도 있지만 옥을 받치고 있는 고리가 낡은 모양이다. 여행지에서 물건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도 반지를 하나 샀다. 가격이 국내에 비해서 60~70% 정도 되기 때문에 모처럼 산 것이다.
이어서 와트마이로 향했다. 가는 길에 여러 가지 자동차를 관심 있게 살폈다. 도요다 자동차가 특히 많이 굴러다닌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일본 자동차는 무관세로 캄보디아에 들어와서 값이 싸기 때문이란다. 버스는 기아와 현대자동차 것도 자주 보이고 가끔 낡은 티코도 보인다. 버스 안에서 안내원이 갑자기 캄보디아에 와서 안경 낀 사람들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공산당인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은 후에 종교인, 지식인, 부자들을 사정없이 죽였다고 한다. 그래서 캄보디아에서는 요즘도 안경 낀 사람이나 비만인 사람이 별로 없다고 안내원을 말하였다.
도올 김용옥의 글에 읽어보면 캄보디아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이 시아노크를 몰아내고 론놀 정권을 세운 이유는 호지명 루트를 무차별 폭격하기 위해서였다. 1969년-1973년의 4년 동안 53만 129톤의 네이팜탄, 에전트 오렌지(고엽제), 클러스터 밤(인명살상)을 공습경고도 한 번 내린 적이 없이 퍼부었다고 한다. 론놀 정권이 무너지고 1975년 미군이 철수 후에 지하 조직화 된 좌익 독립운동 단체인 크메르 루즈가 공산 혁명을 일으켰다.
와트마이의 해골탑(유리창으로 해골이 보임)
크메르 루즈는, 그 후 이상적인 “농촌 공산사회” 건설이라는 구호 아래 온 나라를 인골로 뒤덮었던 킬링 필드라는 대참극을 빚게 했다. 도시는 인적 물적으로 파괴되고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처형되거나 농촌으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사회기반 시설은 와해되었다. 크메르 루즈가, 수탈과 침략으로 신음했던 캄보디아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서 캄보디아는 회생하기 어려운 후진국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때 캄보디아 인구 700만 명 중에서 200만 명을 무참히 처형했다고 한다.
킬링 필드(Killing Field)! 이 말은, 롤랑 조페라는 영국 런던 출신의 감독이 1984년에 만든 영화의 제목이다. 현장에서 목격한 킬링 필드의 증거! 탑이 하나 보이고 그 탑의 유리창으로 쓰레기무덤처럼 쌓인 해골더미가 보인다. 정말 무섭다. 이럴 때에 기가 막힌다고 해야 하나! 우리 인간이 결국에는 해골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허무한데, 죄 없는 산목숨을 해골로 만들었다니, 말문이 막힌다. 아우슈비츠의 재연인가. 우리 사람들의 마음속에 저렇게 잔인한 속성이 숨어있다고 생각하니 오싹하다. 주위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저렇게 착하게 생긴 사람들이 극악무도한 일을 벌일 수도 있을까? 만약에 와트마이에다 정리하지 않은 채, 인골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면 얼마나 참혹한 장면일까!
오늘은 여정의 마지막 날이다. 무엇을 사라고 그러는지 버스가 가게 앞에 별나게 자주 멈춘다. 상황버섯을 파는 집이다. 캄보디아의 시엠립 공항을 들어올 때에 공항 안에서 한국 글씨로 ‘상황버섯’을 홍보하는 글을 몇 번 봤다. 안내원의 상업성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다. 안내원과 주인은 아주 잘 아는 사이다. 한국인 주인 말이, 안내원의 어머니도 이 가게에서 구입한 상황버섯을 먹고 효험을 봐서 지금도 음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이 떨어진다. 친절했던 안내원의 모습 뒤로 음흉한 미소가 떠오른다. 사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심하다.
주인이 한참 소개한 다음에 가격을 설명하였다. 안내원이 구입량과 가격을 조정해본다면서 주인에게 나가라고 했다. 대천 지선이네가 1.5(2?)kg을 사고, 중국에서 온 청년이 1kg 정도 흥정한다. 안내원이 우리 두 가족에게 몇 kg를 사라며 마치 흥정하듯이 중량을 정한다. 우리 집은 있다면서 사지 않자, 형님도 사려는 의사를 접었다. 얼핏 보니 안내원이 조바심이 난 표정이다. 어떻게든 조금도 팔아보려고 상황버섯을 조각으로 나누어서 팔려고 흥정을 붙이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결국 두 집만 샀다.
몇 년 전에 북한산 상황버섯이 우리 집에 들어왔다. 단단한 나무인데 그 사이에 애벌레가 있어서 손도끼로 찍다가 아내가 일부는 버리고 혹시 모른다며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어둔 적이 있다. 아내가 그 경험을 되돌리면서 벌레 나온 상황버섯이 어떠냐고 묻자, 주인은 좋은 것이라고 했다. 150년 산, 200년 산 상황버섯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다. 지뢰가 많은 캄보디아 국경 지방에 상황버섯이 많이 나기 때문에 효능 좋은 자연산이라며 주인은 끝까지 홍보에 열을 올렸다. 뒤끝이 좋지 않았다.
이어서 톤레 삽(Tonle Sap) 수상촌 으로 향했다. 톤레삽은 동양 최대의 호수로서 캄보디아 면적의 15%를 차지한다. 건기인 10월부터 3월까지는 상류의 물이 메콩강으로 흐르지만 우기에는 메콩강 물이 역류하여 이곳으로 흘러든다. 캄보디아의 농업용수와 수산업 등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멀리 가물거리는 톤레삽의 수평선이 바다를 연상케 하고,유명한 수상촌에는 학교·교회·구멍가게 그리고 꽃가게 등이 있다고 한다.
톤레삽호수의 수상 가옥(양호한 상태의 것을 골라서 찍음)
유람선을 타고 톤래삽 호수로 가는 물가 언덕에서 한국어로 된 펼침막을 얼핏 볼 수 있었다. ‘다일 공동체~’, ‘대구oo교회~’ 등의 이름이 보였다. ‘밥 퍼주는 목사’로 알려진 최일도 목사가 중심이 된 다일공동체는 그곳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급식, 무료치료, 무료컴퓨터교육을 실시하고 있단다. 참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마음이 좀 놓인다. 선상 가옥 앞에 물을 정화하는 식물인 부레옥잠도 보이고 메리골드도 보이며 가끔 개와 닭도 보인다. 가축을 기르는 것은 에너지원으로 쓰려고 한 것인지, 어려운 상황을 가족적인 분위기로 극복하려는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해 봤다.
이 호수 선상가옥에 사는 사람들은 땅도 돈도 없는 베트남 난민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전쟁을 피해서 넘어왔지만, 전쟁이 끝난 다음 베트남에 돌아갈 수 없었다. 베트남 정부는 난민들을, 조국을 버린 배신자로 낙인찍으며 입국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정부도 이들에게 새로운 국적을 부여하지 않아서 그들은 모두 무국적자로 살아간다. 캄보디아 당국은, 땅도 돈도 없는 난민들에게 톤래삽 호수 안에서 살아가는 것만 허용했다.
얼마쯤 가자 쪽배를 타고 오던 아이가 유람선으로 올라탄다. 캔 맥주와 음료수를 들고 파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배에 스며든 물을 퍼내면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때에는 볼 수 없었지만 뱀을 들고 다니면서 캔을 팔러 다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어느 날 여자 아이가 뱀을 들고 팔러 다녔는데 장사가 잘되자 그것이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뱀인데 그날에는 볼 수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휴우~! 잠시 후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SOORI'라는 이름의 수상 휴게소에 닿았다. 한국 사람이 그곳 사람들을 고용하여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익금은 그 지역의 개발 사업에 보탠다고 한다.
톤레삽호수 선상 휴게소위의 필자
마지막 코스로 캄보디아를 떠나는 날 한국식 저녁밥을 먹고 전신마사지를 하러 갔다. 둘째 날 밤에 발마사지를 했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만족이었다. 발뿐만 아니라 어깨까지 안마를 해주어서 첫날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번에도 전신 마사지 대신 발 마사지를 원했다. 전신 마사지라는 말에 나부터 조금은 퇴폐적이라는 생각을 한 까닭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계획 된 일이라, 초등학교 여자 아이와 장모님만 아주 가볍게 하기로 하고 모두 마사지실로 들어갔다. 발마사지는 1시간이었는데 전신 마사지는 2시간으로 요금도 두 배이고 팁도 2달러로 두 배다.
재작년에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에도 전신 마사지를 했는데 나의 성미상 내키지 않았다. 선입관일 수 있지만, 나에게 마사지라는 명사는 퇴폐업소다라는 등식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어서다. 하지만 단체 행동인데 어쩌랴? 그래서 그때나 이번이나 전신 만사지 중에 일부러 장난기를 발동시켰다. 과민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특별히 아픈 데가 없어서인지 안마를 하는 부위가 시원하기보다는 아팠다. 또한 허벅다리 안쪽까지 안마를 하는 것이 영 어색하였다. 일부러 과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주위 사람들을 웃겼다. 어쩌면 내가 세련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함께 한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1시간이 좀 넘었을까, 배씨가 어느 부위 마사지를 받다가 다 되었다면서 나갔다.
밤 11시 3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안내원은 공항 입구까지만 동행하는 것으로 임무를 모두 마쳤다. 일행은 큰 박수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공항 내에서부터는 안내원이 없다. 잠시 당황했다. 순서는 먼저 좌석을 예약한 다음에 화물을 부친 후, 공항 세를 내고 탑승구를 향해서 들어가는 것인데 잠시 순서를 놓친 것이다. 이어서 우리는 공항 휴게실 매점에서 마시는 물을 사는 과정 중에 ‘water'와 'mineral water'의 차이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하하!
공항 휴게소에서 형님이 한국에서 가져간 호두과자를 다시 꺼내어 주셨다. 3개를 받아서 먹으려는데 캄보디아에 올 때에 기내에서 만났던 일본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우리는 서로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일본 할머니도 같은 일행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일본 여행객들도 몹시 즐거운 듯이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코리안 라이스 케이크 호두과자’라고 말하면서 호두과자를 한 개 드렸다. 그러나 캄보디아에 올 때처럼 일본 할머니는 나의 짧은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셨다. 내가 하나를 먹어 보이면서 드리자 옆에 있던 일본 사람들도 환하게 웃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색다른 문화를 경험하는 것도 크지만 낯선 사람에게서 평화로운 인간애를 느끼는 것 또한 엄청나게 크다. 10년 전 여름이다. 비오는 부석사에서 우산을 주던 백발의 신사가 여행의 행복감을 준 첫 번째 인물이라면, 이번 일본 할머니는 두 번째쯤 될까. 일본어의 기본도 모르는 내가 참 아쉬웠다. 킬링 필드를 참극을 만든 것도 인간이고, 여행 중 만난 일본인 할머니도 인간인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대형 살인도 나에게 교훈이고, 아름다운 사람도 나에게 교훈이란 말인가? 인간의 양면성을 보니 혼란스럽기도 한 반면에, 현실로 돌아오면 사소한 이해타산 때문에 살인을 하는 일까지 확인할 수 있으니 마음이 불편하다.
톤레삽 호수 위의 조각배
시엠립 공항의 화장실에 가서 많은 여행객들이 옷을 갈아입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의 옷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앉아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참 보기 좋았다. 대부분 곱게 나이를 드셨다. 욕심이라는 흐린 빛깔이 여과된 그런 얼굴들오 노부부들이 나란히 앉아서 쉬고 있다. 참으로 깔끔하고 평화로워서 보기 좋았다. 2년 전에 일본에 간 적이 있다. 고속도로 요금소에 호호백발 노인이 요금을 받고 있었다. 마음이 얼마나 느긋해지고 평화로웠는지! 성격이나 외모가 다른 사람이 만나서 저렇게 곱게 나이를 먹기까지 많은 다툼과 양보와 조율이 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다투는 우리 부부도 저렇게 곱게 나이를 먹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상대방의 의견도 너그럽게 수용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캄보디아는 아쉬움이 많은 나라였다. 캄보디아를 잘 모르는 나의 인상만으로 본다면 캄보디아는 인도의 힌두교 문화에 너무 깊이 파여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마치 타프롬 사원에서 본 스펑나무가 사원의 건물 자체를 얽어매서 폐허로 만든 것처럼 말이다. 또한 캄보디아는 프랑스와 미국, 타이와 베트남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허우적대는 생명줄을 놓은 이무기 같지는 않은가? 소생의 의지마저 잃은 상태에서 가까스로 수액 주사를 맞고 겨우 회생의 빛을 것은 띤 이행나무는 같지는 않은가? 못된 권력자들의 개인적인 이익이나 주의에 의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당했을 고행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미로 같다.
인천공항에서 내려 8시 40분 발 목포행 우등고속버스를 탔다. 인천공항에서 목포 직통은 하루에 오전 오후 각각 한 차례밖에 없다. 시간을 맞추지 못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광주행 버스를 타면 되니까. 다시 돌아보면, 캄보디아는 나에게 참 좋은 나라였다. 편안한 여행이었고 음식도 먹을 만했으며 나의 어린 시절도 부분적으로 찾아낼 수 있었다. 정국만 안정되고 치안만 좀 더 안전해진다면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고 소박하게 만드는 나라가 캄보디아일 것이다. 또한 캄보디아는 처음으로 처형 부부와 긴 시간을 평화롭게 함께 해서 정말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캄보디아 여행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아직 표정을 관리할 줄 모르는 아이 같은 나라인 캄보디아. 아프면 아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표정을 짓는 캄보디아. 오딧빛 눈동자가 유난히도 인상적인 캄보디아 사람들. 이 글을 쓰면서도 하느님의 자비가 캄보디아와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가득 내리기를 기도한다.
끝으로 여행을 함께 한 대천의 3분과 배씨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배씨가 한국을 떠난 지 오래 되었다면서 장모님을 친부모처럼 정성껏 모셨다. 아울러 대천의 3분은 여행을 소박하고 평화롭게 하는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고맙다. 대천의 아저씨와 나는 전화번호를 주고 받고 헤어졌다. 언제 통화음이 울릴지.
첫댓글 자윤 선생님! 오랜만에 인사올립니다. 그러고 보니 새해 첫인사이군요. 건강하시고 평화로우시지요? 사진 기초적인 기술과 이론도 모르기 때문에 느낌으로만 찍은 것을 글 속에 넣었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목포에서~!
좋은 곳에 다녀오셨군요. 저도 가고 싶은 곳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