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그 사람을 만났다.
> 헤어진 지 꼭 10년 만이었다.
> 그동안 나는 한 번도 그 사람을 찾아가진 않았다.
>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
> 전북 이리.
> 우리 외갓집과 비슷한 시골이었고 마주치는 어른들마다
> 친근한 모습의 시골 사람들이었다.
> 읍내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꽤 긴 탓에 차라리
> 공기 좋은 시골길을 걷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 한 시간 남짓 걸었을까 그 사람이 얘기하던 강이 나왔다.
> 초라했다.
>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가장자리 둑엔 키 높이만큼의
> 풀들만이 무성했다. 퇴색되어진 채.
> 그 사람이 앉았던 곳은 찾을 수가 없었다.
> 속상하거나 힘들 땐 꼭 여길 찾는다고 했는데
> 그다지 시선을 붙잡을 만한 풍경 따윈 없어보였다.
> 다만 해 저문 노을을 안고 도는 얼마 남지 않은 강물만이
> 소리 없이 흐를 뿐이었다.
> 보기에도 초라하고 삭막하기까지 한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 강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 이제 십 여분 후면 그 사람 집이다.
> 오래전 그 사람과 지리산을 간 적이 있다.
> 전주에서 만나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다음날 남원으로 해서
> 지리산 뱀사골에 갔었다.
> 그때 자기의 고향이 전북 이리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 있다고 했다. 산 너머 저 만치를 가르키면서......
> 어렸을 적 얘기를 했던 건 그때였다.
> 유난히 키가 크고 야위었던 그 사람.
>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아버지랑 평생 살고 싶어 했단다.
> 그러면서 살던 동네며 뒤 산이며 내가 서 있는 이 강도
> 얘길 해 주었다.
>
> 10년 만에 그 사람을 찾아왔다.
> 해묵은 기억들을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금씩 더듬으며
> 그 사람에게로 갔다.
> 설레임보단 망설임이 앞섰고 반가움보단 미안함이 더 컸다.
> 왜 이제야 왔느냐고 나무라기라도 한다면 할 말이 없었다.
> 그래서 꽃을 샀다.
> 내 얼굴보다 백합을 먼저 보여줄 계획이었다.
> 찾아간다는 연락을 받은 그 사람 언니가 집 앞으로 나와
> 있었다. 사촌 언닌데 서울에서 두 번 정도 만난 적이 있었다.
> 여전히 목엔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있었고 엷은 미소를 띄우는
>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았다.
> “ (-.-)(_ _) ”
> “ 경아? 그대로구나, 하나도 안 변했어. ”
> “ ...... ”
> 난 시계를 들어 보이며 쓴 웃음으로 대답했다.
> “ 너무 반갑다. 그 동안 잘 지냈어. 연락이라도 좀 하지....”
> “ ...... ”
>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 더 이상 어떤 얘기도 할 수 없었다.
>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정지되어버렸다.
>
>
> HOF일이 끝날 무렵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 “ 경아야, 나랑 같이 지내는 언니 알지? ”
> “ 하모. ”
> “ 언니가 오늘 저녁 사준대. ”
> “ 누구? 누나 니만 사준다 카더나? ”
> “ ^^ ”
> “ 말을 해라, 말을. ”
> “ 경아랑 둘이지. ^^ ”
> “ 내 한 번 움직이는데 비싼거 알재,
> 디따 마신능그 사주라 캐라? ^^ ”
> “ ^^알았어요. ”
> 화곡동으로 갔다.
> 어느 레스토랑으로 기억된다.
> 토마토쥬스를 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을 찾는
> 멘트가 들였다.
> 그 사람에 비해 다소 외소한(?) 체형.
> 어깨위로 가지런히 내려온 머리.
> 정장차림에 사절지만 한 검은 가방을 든 모습이 언듯보기에도
> 캐리우먼 같았다. (당시에는 선생님 같았음. ㅋㅋㅋ)
> 어떤 얘길 나눴는지는 잘 기억나지가 않는다.
> 다만, 우리가 그 레스토랑을 나설 때 그 사람과 내 손목엔
> 똑 같은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 로이드. 브라운색상의 가죽끈이 달린 시계였다.
> “ 두 사람, 흔치 않은 인연이고 지금보다 더 힘든 시간이 많을 거야.
> 그럴 때마다 혼자라 생각지 말고 똑같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 이젠
>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고 말야. ”
> “ 한 사람 시계 빳데리가 먼저 가뿌모 우짜지예? 그때부터 혼자 졸라
> 고생하겠네예. “
> “ ^^ ^^ ”
>
> 다섯 시간이면 되는 거리를 10년이나 걸려서 왔다.
> 이제 곧 그 사람을 만난다.
> 그 눈, 그 입술, 그리고 그 사랑.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걸까 너무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 어스러지도록 안아 줄 거다. 그리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라
> 다짐 또 다짐을 하며 사촌누나의 뒤를 따랐다.
> 그런데,
> 살면서 그렇게 내 다리를 욕해본 적이 없을 거다.
> 얼마나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인데, 이제야 그 사람을 볼 수가 있는데
> 다리가 말을 듣질 않는다.
> 다리가,
> 질질 끌고서라도 가야했다. 그래야했다.
> 결국 앞서가는 사촌누나를 불렀다.
> “ 보이소 누나, 내 좀 댁꼬 가이소. ㅜ.ㅜ ”
> “ ....... ”
>
> 큰 키는 아주 작아졌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 포비처럼 묶고 다녔던 머리는 벌겋게 변해버렸다.
> 내가 드라이 해주고 묶어주며 코디해 주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 없다. 그냥 벌겋기만 하다. 고무줄 디따 예쁜건데......
> 쌍커플도 다 없어졌다.
> 자기거 하나 떼어서 남은 내 한 쪽도 해 줄거라 했는데 내 것은
> 고사하고 자기 것도 없다.
> 파김치를 가지런히 말아서 입에 넣어주던 긴 손가락도 없다.
> 날 안을 때 느껴지던 그 따스함도 수줍던 미소도 없다.
> 아무것도 없다.
> 그저 노을을 힘겹게 안고 가는 강물만 있었다.
> “ 영이, 무척이나 가기 싫었을거야. ”
> “ ...... ”
> “ 경아랑 꼭 함께 보고 싶다고 몇 번이고 얘길 했었거든.
> 첫 휴가 나오면 꼭 데리고 올거라고...... ”
> “ ...... ”
> “ 경아가 이제야 왔는데 이젠 자기가...... ”
>
> 버스 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 얼마나 왔을까 이미 밖은 어두워졌고 내 잠을 깨운 건 핸드폰에서
> 울린 메시지 알림음 때문이었다.
>
> 경아야 이제 그만 보내줘.
> 영이는 경아한테만큼은 공작
> 새이고 싶어 했지만 경아는
> 자기한테 그러지 않았음 했어.
> 경아야,
> 그러니까 이제 그만 보내줘.
> 그럴 수 있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