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헛 꽃
추 필 숙
아침 안개가 거의 걷힐 무렵 읍내에 단 하나뿐인 식장엔 벌써부터 말소리며 발소리가 알맞게 뒤섞이고 있었다. 붉게 익기도 전에 다 따버린 대추 속에서,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던 몇 알의 대추들이 이제 천천히 안개 속에서 제 살을 익히고 있을 터이다. 지난 7년 간 안개 같은 나날 속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아니었던가. 나와 남편이 여기 이 자리에서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라는 주례사를 들으며 서 있었던, 바로 그 자리, 그 후로도 수많은 신랑신부가 서 있었을 그 자리에 그와 동서도 서게 된 것이다. 그가 노래 부르며 살고 싶다고 떠난 지 거의 5년 만에 전화를 걸어왔었다.
“형수, 결혼할까 해요. 날짜 좀 잡아주세요.”
“어머니께 직접…….”
“아니, 상견례고 함이고 다 생략하고 그냥 식만 올릴 수 있게 해 줘요.”
영빈예식장 3층 다복실 입구에 커다란 아치형 백합꽃다발이 동대문처럼 세워지고 그 아래를 모르는 사람들이 카메라며 마이크 줄을 감아 들고 들락거리고 있었다. 신랑 신부가 한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조금의 미안함도 없이 지나다니는 사람들.
수직실크 턱시도를 입은 그는 첫무대에 선 신인가수처럼 창백해 보였다. 다만 옷깃에 꽂힌 딱 한 송이 부토니아만이 그가 새 신랑임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노래 한 곡을 부르는 동안 인생과 예술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해서 3분 예술이라고 하는 가수의 삶처럼 그가 주인공인 결혼식 또한 짧은 시간 안에 그가 세상을 향해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행위예술에 지나지 않았다.
긴장한 그와 반대로 서른 다섯의 동서는 반쯤 들어올려진 베일 속에서 믿을 수 없이 담담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신부 대기실에서 그야말로 대기를 하고 있었다. 어깨가 드러나면서 가슴 선에 물결처럼 주름을 살린 드레스는, 드레이프 네크라인이 눈가의 미세한 주름과 잘 어울렸다. 스커트는 여러 겹의 망사로 볼륨을 최대한 높였으며 허리가 쏙 들어가게 보였지만 빌려 입은 드레스답게 무거워 보였다. 부케 아래에 숨겨진 팔꿈치까지 올라온 장갑만이, 곧 세상의 바깥 어디쯤으로 돌진하는 전투병처럼 그녀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첫 대면에서 동갑인 나에게 형님이라는 말을 할 줄 알고, 그에게도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과 긴 치마가 잘 어울리고 말투며 웃음소리가 전체적으로 차분한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만 터부나 금기에 익숙해 보이던 몸짓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그 큰 거울 앞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축하해, 동서.”
나는 잠깐 눈만 맞추고 자리를 피해 버렸다. 축하라니, 결혼하는 것이 과연 축하 받을 일인가, 축하하려고 온 수많은 하객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위선의 가면을 덮어쓰고 웃고 있었다. 그 축하에 고마움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고마워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나는 차마 더 이상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다.
갓 환갑을 넘긴 노인이 그나마 다서 해 가까이 집 나간 그를 용서한 것은 맏며느리보다 더 맏며느리다운 모습의 동서를 데리고 나타난 까닭이었다.
“아이구,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갑따.”
눈물을 훔치며 그녀를 훔쳐보던 노인은 그제서야 발뻗고 잠잘 수 있겠다고 했다. 그렇게 며느리감을 데리고 나타난 게 바로 보름 전의 일이었다.
딸 시집보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게 훤히 보였다. 노인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애써 감추지도 않았다. 벌써 눈물 찍어내는 안사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홀가분하고 당당해 보였다.
대추 수확이 끝날 때까지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던 나를 보자 노인은 노여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주름 많은 입가를 오물거렸다. 남들 앞에서는 한없이 며느리 자랑을 하면서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늘 입술을 실룩거리며 말 한마디 붙이지 않는 노인은 그때까지도 내가 자기 아들을 잡아먹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짧은 파마머리의 유난스런 곱슬거림을 보면서 첫 만남 때의 그 깐깐하고 독한 구석을 다시 보는 것 같아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옥색 한복의 바스랑거리는 소리가 나고 고무신을 끌다시피 엉거주춤 다가오는 치마소리 끝에,
“야가 우리 큰 젊으이구마.” 하고 인사를 시킨다.
“안녕하세요?”
“이 놈이 우리 맏손주제.”
나는 얼른 아이의 머리를 손으로 눌러 억지로 인사를 시킨다.
“…….”
얼떨결에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강제로 고개까지 숙이고 나니 기분이 언짢은지 아이가 놀란 표정으로 내 허리춤에 얼굴을 묻는다.
“쯧쯧쯔, 사내자슥이 그리 숫기가 없어 가지고, 누굴 닮았는지 하는 짓 하고는.”
노인의 혀 차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한번쯤은 결혼을 해 본 소위 어르신들은 모두 한결같이 좋은 날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이들만이 울고 까불고 싸우며 뛰어다닌다.
그때 노인이 집안의 누군가와 주고받던 말꼬리가 내게 전해진다.
“……젊은것이, 저 불쌍한 것이……, 억울한 것이.”
노인이 억울할 것이라는 그것이 나인지 노인 자신인지 아니면 아이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어쩌면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억울한 것은 아닌지, 이 생각 저 생각에 나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상 뒤로 열 두 폭 봉황 병풍이 여전히 놓여 져 있었다. 붉은 바탕이 조명 빛에 엷어 보이기는 했지만 황금색 봉황 한 쌍이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수 속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각각 여섯 폭의 공단 천위에 손자수로 새겨졌을 저 봉황이 긴 꼬리를 박차고 x자로 서로의 어깨를 스치고 날아오를 듯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탈색되지 않는다는 고급무늬비단의 태는 고급 죽절을 사용한 듯 고급스러워 보였다.
“혼례란 남녀가 하나로 합쳐 위로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아래로는 자손을 후세에 남겨 조상의 대를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치르는 혼인의 예(禮)입니다. 그래서 혼인을 일러 ‘일륜 도덕의 시원(始源)이며 만복(灣福)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서로 함께 할 것을 부탁하며 주례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7년 전 형의 사고 이후 그는 한 가정이 아니라 한 집안의 대소사에 짓눌려 고개 한 번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자신의 고통에 갇혀서 그저 혼자 있고 싶을 뿐이었다. 벽이라도 붙잡고 분풀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심정을 숨기고 날마다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리는 마음을 다잡기에도 바쁜 나날이었다.
제삿날 음복하는 술조차 제대로 한 잔을 다 마셔본 적이 없는 형과는 달리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서 이미 조금씩 술을 마시기 시작한 터였다. 사춘기를 넘기면서 그의 주량도 한 획을 그을 만큼 늘어났다. 형의 사고가 있던 날도 그는 술을 마셨다. 그 날 읍내의 조그만 돼지막창집에서 그는 미련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비극에서 조연이란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비극의 주인공을 떠넘길 다른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서로 공범이 되기로 암묵의 약속을 했던 것이다. 주인공으로 그는 알맞은 여자를 데리고 온 것 같았다. 결혼을 함으로서 더 이상 제사며 종손의 대리인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과 동서는 열심히 제사를 받들고 가문을 위하여 가풍을 전수할 것이다. 남편이 서 있던 자리에 그가 서 있었다. 스물여덟의 남편이 이제 서른다섯의 그가 되어 똑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남편과 그는 13초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다. 해마다 농사지은 첫 과일은 형인 남편에게 바쳐졌다. 남편의 이름은 대수다. 큰 대, 빛날 수. 날 때부터 크게 빛나고 있었다는 의미일까. 그는 클 태, 빛날 수. 앞으로 언젠가 크게 빛나고야 말 태수다. 노인은 발갛게 달아오른 대추를 한 움큼 따다가 정성스레 씻어서 마른 행주로 물기를 닦았다고 한다. 남편의 삶은 대추 삶은 물처럼 달착지근하리라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던 시절이다. 대추는 한 나무에 열매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생기고 꽃 하나가 피면 반드시 열매 하나가 열리고 나서 꽃이 떨어진다.
“암, 대추꽃은 절대로 헛꽃을 안 피우지.”
“너그들도 헛꽃 안 피울라면 열심히 살어야제.”
헛꽃은 절대로 없다. 그것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자식을 낳고서 죽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제상에 대추를 첫 번째 자리에 놓는 것이다. 대추꽃은 유세하는 가문처럼 아버님을 든든하게 했다. 이처럼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특권이 모두 남편을 중심으로 모아졌다. 모든 것이 편애로 이어졌다. 노인이 유난히 간장이며 된장 담그기에 집착하는 것처럼. 장맛 변하면 집안이 망하는 법. 무슨 일이 있어도 장손과 장맛은 지켜야 하기에.
이렇게 잘 익은 첫 대추를 먹으면서 남편은 늘 뒤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누나들과 동생인 그의 시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학교에 갈 때도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도, 방에서 방으로 교실에서 복도로 운동장에서 문방구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한 번씩 뒤돌아보곤 했다. 그 곳이 어디이든지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뒤돌아보고는 했다. 그런 버릇은 공무원이 되어서도 바뀌지 않았다. 판검사를 시키고 싶은 부모님의 희망이 좌절되고 나와의 결혼을 서둘렀을 때도 그는 어딘가를 향해 항상 뒤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나무에서 갓 털어 낸 대추를 마당 가득 널어놓고 그 탱글탱글한 살이 마르도록 기다리면서 혼수니 예단이니 하는 말들이 오갈 때조차.
반면 그는 그 즈음 자살시도 끝에 획득한 음악가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노인의 표현을 빌자면,
“밤 귀신이 붙어서 그라제, 저녁 어스름만 되면 정신을 몬차리고, 그노무 딴따라가 될라 카는 기라.”
“자슥 이기는 부모 봤나. 죽겠다 카는데 우짜겄노. 일단 살리놓고 봐야제.”
‘꽃미남’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얼굴값을 한다고도 했다. 그는 폼 나는 노래로 인생의 승부를 걸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동 대항 노래자랑에서 단 한번 장려상을 받았을 뿐, 아무런 대회에도 참가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를 가수로 인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집나가기 직전엔 면소재지 농협에서 주부들을 상대로 노래 교실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대추를 수매해 가던 농협 조합장이 그에게 인사를 받곤 하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노래는 하루 중 그늘진 저녁식사 후의 시간이 가장 힘있고 목소리에도 부담이 없다. 하지만 오전부터 노래 교실에 나가 노래를 불렀거나, 전날 술이라도 한 잔 한 경우라면 목은 이미 지쳐있을 법도 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서른 넘은 그가 매일 노래교실을 마무리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미련한 사랑’이란다.
“……지금 함께 있-다는 것마-저 잊은 채-헤어날 수 없는-미련한 사랑에-아 조금씩 빠져 가고 있어-이렇게-에…….”
자동차 운전을 하듯이 노래를 시작할 때는 목소리를 편안하게 출발하여 절정에서 시원하게 클러치를 밟듯이 하고 마무리 역시 엔진 바닥의 기름을 말끔히 태워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개운하고 미련 없이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한번이라도 해 보았는지 어쨌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유부녀 유부남의 사랑을 노래했다는 그 노래의 가사를 들으면서 나는 내게도 저런 사랑이 있었던가 그만 아득해지곤 했다.
늘 형의 그림자로 살아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해가 서쪽에서 뜨는 바람에 난데없이 전면에 내세워진 연약한 음지식물처럼 보이던 그는 그늘에서 형에 대한 질투심을 숨기고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들을 원망하고 있었다. 형의 자전거를 뒤쫓아 뛰어가면서 한 번만 타게 해 달라고 비굴하리 만치 따라다녔지만 그는 항상 걷거나 뛰어다녀야 했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동기동창이다. 남편은 평균보다 키가 컸고 늘 내 뒤에 앉았다. 그래서 교실 안에서는 별로 가까이 지낸 적은 없었지만 그와 쌍둥이라는 이유로 방과 후엔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학교가 파하면 여보 당신 하면서 소꿉놀이를 하다가 지치면 마주 잡은 손을 높이 치켜들고 동동 동대문이 열렸다 남남 남대문이 열렸다 그렇게 문을 열고 닫고 하다가 해가 지면 밥 먹으라는 엄마들의 잔소리를 들으며 헤어지곤 했다.
노인은 남편이 그 시절 새벽 일찍 일어나 대추밭까지 뛰어갔다 오곤 했다고 내게 자랑을 하였다. 먼동이 틀 무렵의 찬 공기가 이마를 가린 앞머리에 닿을 때의 그 서늘함이 그가 달리는 이유였다. 운동회 때는 달리기 선수로 나서기도 했다. 골목마다 그가 일으킨 흙먼지가 제풀에 가라앉을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동네에서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한동안 아무도 그의 속력을 따라잡지 못했던 것처럼 그의 마음은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어했다. 내리막길에서도 경보기를 울리지 않았고 반사경은 흙탕물이 튄 채로 그대로 두었다. 바퀴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은 그 자신의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늘 바퀴보다 한 박자 늦게 마음이 따라가도록 잘 훈련되어진 터였다. 무엇에서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는지, 왜 그토록 속도에 집착했는지는 사춘기의 남편에게 타이어 톱니처럼 아슬아슬하게 땅을 딛고 서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늘 위험으로부터 격리되듯 살아온 그에게 자전거는 오래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그는 자전거를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왼쪽에 다소곳이 서서 자전거를 밀 듯이 끌고 가는 날이 많아지고 그나마 궂은 날이나 늦은 시간에는 자전거 끄는 것조차 금지되곤 했다. 핸들바를 꼭 쥔 두 손만큼이나 비장하던 마지막 교복세대답게 자전거는 그 검은 교복과 함께 진초록의 코브라키로 단단히 잠금장치를 당하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남편을 쫓아오던 집안이니 가문이니 하는 것들에게 비록 쫓겨오긴 했지만 한 순간 뒤돌아보면 그것이 그를 지금까지 키운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면에 그는 나와 키가 비슷했고 짝꿍이 된 적도 있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가끔 눈앞이 캄캄하다 다시 환해진다면서, 그 흰빛 속에 스며들 듯 쓰러지곤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찬 공이 골대까지 날아가지 못하고 운동장 한 켠에 떨어질 때나 그가 접은 비행기가 담을 넘기지 못할 때가 많았던 만큼 그는 늘 나무꼭대기가 궁금했고 하늘 끝이 있다고 믿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렇게 날려 보내고자 했던 비행기가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왜 직접 찾아가서 전해 주지는 못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가끔 저녁 어스름에 느닷없이 그의 노래 소리가 우리 집 담을 넘어올 때가 있었다. 아이 답지 않게 심각한 목소리로 내가 자주 부르던 노래를 그가 부르곤 했다. 지구에는 소리를 가진 많은 것들이 있지만 동물이나 사물이나, 생명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그 중에서 인간의 목소리만큼 좋은 소리는 없을 것이다. 생물의 소리는 그 종류만큼이나 다양하지만, 역시 악기 중에 으뜸이 인간의 목소리라는 것에는 아무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의 목소리도 각기 다르고 정말 천차만별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과를 통째로 베어 물 듯 크게 벌린 입에서 부드럽게 성대를 울리고 내 귀까지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다음날이면 나는 꼭 어제 그 노래에 대해 아는 체를 해주고 싶어 밤잠을 설쳐야만 했다.
그러다 대추나무 돌림병이 돌고 대추파동을 겪었던 그 다음 해 였던가 우리 가족은 농사를 포기하고 읍내로 이사를 나왔다. 살던 고향마을에서 멀리 달아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오거리가 있는 시내로 이사를 나오면서 아버지는 참 시원섭섭하다고 하시면서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그야말로 구멍가게에서 밤새 막걸리를 마셨다고 했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똑같은 모양과 색깔의 새 지붕을 올리던 새마을 운동이 마무리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초저녁 하늘 위로 대추씨만한 별이 몇 개 뜨고, 그 별까지 이어질듯 피어난 벚꽃이 길 가장자리를 환하게 빛내고 있었다. 제사 전날이었다. 중상병원 앞 커브를 도는 순간 차는 봄 보리밭으로 날아드는 개미꽃등에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고 했다. 새벽 댓바람에 오래된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탱탱하게 넣고,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로 깨끗이 닦아 놓고는 이번 주말에는 꼭 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야겠다고 말한 날 저녁이었다. 무거운 삶으로부터 달아나야겠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시간들이 순식간에 모여서 그에게 덤벼들었으리라. 허공 속에서 잠시 헛돌다 마는 바퀴처럼 그가 이제껏 굴리고 온 것들이 거짓말처럼 멈춰서 있었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불렀을 이름이 누구인지, 지나온 생의 어떤 한 자락이 그를 마지막 가는 길에 웃게 만들었는지, 앞 범퍼를 보리밭 둔덕에 처박은 프린스 승용차 위로 어린 벚나무 한 그루 이유도 모른 채 덮여 있었다. 그 속에서 그는 꽃잎처럼 가벼워 보였다. 남편이 면사무소를 거쳐 시청으로 출근하기 전날 새 프린스를 모셔놓고 고사를 지냈었다. 흰 실을 목에 감은 명태를 트렁크 천장에 걸어놓고 막걸리도 한 잔 마셨던가. 남편이 태어났을 때도 동네에는 막걸리가 한 순배 돌았으리라.
“죽은 사람 이름은 한 대수, 나이는 35세, 직업은 경산시청 공무원, 결혼 한 지 1년이 채 안됐답니다.”
“근데 이상한 것은 음주 측정에서 알콜 검출이 전혀 안됐는데 차 속에 술 냄새가 많이 납니다.”
“사고 직전에 술 취한 누군가가 옆자리에 타고 있었는지 조사해 봐야겠군.”
“초저녁에 술도 안 마신 사람이, 걸어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는 국도에서 저 혼자 사고를 내고 죽었다는 게 영 이상하죠.”
“모르지, 앞에서 추월하던 차가 있었는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바람도 모른 척 비켜갈 뿐인 사고 현장에서 나는 먼 옛날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들이 일어난 것처럼 그저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이 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리수염이 한없이 노여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온몸이 따갑다. 남편은 이제 제사상의 반대편에 앉아 나와 아이를 만나게 될 것이다. 향, 초에 불을 붙여야만 그 촛불처럼 어룽어룽 내 가슴을 파고들 것이다. 사고 차량은 사고 직전에 차를 오른쪽으로 몰았다고 했다. 그것은 옆자리의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으리라. 혼자 탔었다면 아마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으리라. 그가 목숨을 걸고 살리고자 했던 사람에게 그는 제삿밥이나 얻어먹을 수 있을까. 술을 마시지 않는 남편의 차 속에서 독한 술 냄새가 났다고 했다. 사람들은 휘발유 냄새라고도 하고 피 냄새라고도 하고 비릿한 벚꽃냄새라고도 했다.
노인은 한해에 새집 짓고 아들 장가까지 보낸 게 탈이었다고 했다. 그것은 집안의 중대사를 한 해에 두 번 치르면 반드시 나쁜 일이 생긴다는 말을 거역한데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내놓고 드러낸 이유일 뿐 속으로는 모든 것이 내 탓이었다. 사람 하나 잘못 들어와서 송장 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남편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소꿉놀이 할 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결혼했다. 남편은 수없이 비행기를 접어 내게 날려 보냈다. 내게 날아온 그 비행기들이 꽃잎처럼 내 가슴에 하나 둘 쌓였다. 나는 그 꽃잎들이 영원히 시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을 믿었다. 한 잎의 의심도 없이. 어쩌면 그가 누리는 햇과일이나 새 자전거가 좋아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종이비행기를 타고 내게로 와서 내 것이 될 줄 알았다. 그것은 단지 입질을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미끼일 뿐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한 해를 못 채우고 사고가 났을 때 나는 궁합을 보러 갔던 점집이 생각났다. 뾰족한 잎이 몇 달린 깡마른 대나무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안 되겠어. 도저히 안되겠어. 하나는 죽어.”
“그만 두던지, 빌던지, 어떡할 거야.”
“그만 둘 수는 없어요. 그리고, 굿도 안 되요.”
의심의 눈초리로 딱 잘라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친정 엄마는 나 몰래 기어이 굿을 했다고 했던가. 사고가 났을 때 내 뱃속의 아이는 7개월이었다.
아들은 자라서 뭐가 되고 싶으냐는 유치원 선생님의 말씀에 제사지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을 잘해야 한다고 매일 선생님께 큰절을 한다는 얘기와 함께. 요즘 세상에 인사 잘하는 아이도 드문 것이 사실인데 절하는 아이라니, 노랑반 담임선생님은 내 아이가 생각이 깊고 참 어른스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내 목 뒷덜미를 타고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상담을 끝내고 유치원 마당을 가로지르며 걸어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운 마음 때문에 휘청거렸다.
노인은 내 아이가 성인이 되면 집안 제사를 모두 떠맡는다는 조건으로 대추밭 하나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아들 앞세웠다고 자책하시던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노인은 내게 흥정을 걸어왔다.
“내일 도장 갖고 읍내로 좀 나오니라.”
“왜 그러시는지.”
“니사 언제라도 팔짜를 고칠라꼬 맘만 무믄사 내사 할 수 없제. 하지만 애는 안덴다. 지금이사 애가 어링께 니가 키우는기 당연하제만 젊은기 언제까지 그카고 혼자 살끼고. 새서방 얻으믄사 그때는 애를 내 한테 맡기야 되는기라. 알겄나.”
“애는 엄마가 키우는기 당연지산데, 엄마인 제가 재혼을 하건 말건 그건.”
나는 더 이상 말대답 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낼 내가 니한테 뭐 좀 줄 거이 있어서 안 그라나, 알겄나.”
헛꽃을 피우는 법이 없다고 대추나무를 애지중지 여기시더니, 그 중에 한 마지기를 기꺼이 아이를 위해 내 놓겠다고 인심을 쓰시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선뜻 받아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 중심이 서지 않았다. 여자 혼자 아이 키우면서 돈 들 일이 얼마나 많을 텐데 모르는 척 받아서 아이 키우는데 한 밑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동시에 이것이 아이의 일생을 옭아매는 밧줄이 되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오락가락 하는 중에 읍내로 나갔다.
2차선 도로변 여기 저기서 차선을 넓히느라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틈을 비집고 신호등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길 앞쪽의 상점들은 흙먼지를 덮어쓰고 흑백 사진 속의 6․25때 모습과 흡사한 모습으로 간신히 서 있었다. 파헤쳐지고 뒤집혀져 조금씩 쌓여 가는 흙무더기는 의외로 보드라운 황인종의 살빛 같았다. 그러다 문득 저 속에도 어떤 이의 조상이 누워 겨우 흙이 되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내가 건너온 횡단보도에 노인이 서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사 마 이제 늙어서 농사짓기도 힘든기라. 그라고 죽자 사자 농사지어 봤자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옛날에사 여자는 한번 시집오면 끝이지만서도 지금에사 시상이 많이 바낀기라. 그래서 내가 오늘 니를 좀 보자꼬 안했나. 도장은 갖고 왔제.”
“저, 여기.”
“애 앞으로 밭 하나 띠줄낀께, 니가 팔자를 안 고치고 지금처럼만 살아 준다면야 나도 고맙제.”
“…….”
“글치만 이거 받고 나면 니도 내가 한 말대로 해야 된데이. 약속은 꼭 지킬 거라고 믿는데이. 이거는 니하고 내하고 문제가 아니고, 애하고 내하고 문젠기라. 내말 알겄나.”
노인과 나는 당사자인 아이를 빼고 아이의 인생을 담보로 도장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노인은, 처음 시집왔을 때 자신의 시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말씀을 내게 해 주었다.
“살아 계신 조상은 극진히 받들면서, 그 조상이 돌아가셨다고 잊어 버려 박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암 아니고 말고.”
요즘에는 살아 있는 조상도 제대로 잘 섬기는 사람이 드문 걸 생각하면 잠시 머릿속이 까마득해지는 것 같았다. 진실로 자기존재를 고맙게 여기는 사람은 돌아가신 조상 섬기기를 살아 계신 조상 모시듯 한다고 했던가. 내 아이가 진실로 자기존재를 고맙게 여기기를 바라는 마음과, 돌아가신 조상 섬기기를 살아 계신 조상 모시듯 해야 한다는 것이 그 아이에게 결코 덜어 줄 수 없는 짐이 될까봐 나는 계속 속이 메스껍고 거북살스러웠다.
어쨌든 나는 결코 내 자식에게 종손으로서의 짐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대추 한 알만큼의 짐도 지우지 않으리라. 그것은 오로지 남편이 살아있을 때 그 집안의 문제였지 남편이 없는 지금 나와 내 아이에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아이에게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해 주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생각이었다.
그 때 문득 양가 부모 상견례 때의 일이 생각났었다. 한때 이웃집 아주머니였던 노인은 내 안경과 고졸 학력을 트집 잡았다. 게다가 긴 손톱에 바른 짙은 벽돌색의 메니큐어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맏며느리로서의 내 능력에 대한 의심과 욕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다라이 번쩍번쩍 드는, 일 잘하는 며느리 볼라 켔디만 그것도 욕심이라꼬 내 맘대로 안되는 걸 우짜겠노?”
“…….”
“저들끼리 좋다는데 내가 말린다고 말을 들을 것도 아니고, 내 복이 이것뿐인걸 탓해야지 누굴 탓 하겠노?”
친정엄마는 절대로 장남이거나 장손은 안 된다고 내게 입이 닳도록 못을 박았었다. 그런데 종손이라니.
“갑자기 동창회 간다고 나서더니. 결국 일이 이렇게 되려고...”
엄마는 한겨울 살얼음이 낀 양동이에 생선을 씻어 칼로 비늘을 긁어냈다. 엄마의 손과 칼과 돌덩이 같은 생선이 서로 화음이 맞지 않아 투닥 투닥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말려도 안 되니.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더니, 다 내 탓인갑따. 내가 조상님 모시는데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갑따.”
내장을 송두리째 꺼집어 내려고 아가미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면서도 딸을 맏며느리로 시집보낼 수는 없는데, 어쩌면 좋으냐고 쉽게 빠지지 않는 손에 안간힘을 쓰셨다. 결국 눈물로 제상을 차리고야 말았다면서, 제상을 다 치울 때까지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면서.
내일 밤이 동서가 들어오고 첫 제삿날이다. 자정에 시작하는 아버님 기제사이다. 나는 이민서류를 정리하며 남편과의 인연도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는다. 아이와 단 둘이, 아니 셋이다. 모든 것을 동서에게 맡기고 호주로 떠날 것이다. 조금은 슬픈 생각이 든 듯도 하다. 피곤이 조금씩 졸음을 몰아세우며 내게 달려든다. 깜빡 고개를 끄덕인 것도 같다. 벨이 길게 울리고 있다. 누굴까. 현관문을 여는 순간,
“형님, 우리 목욕 가요.”
하며, 벌써 입덧을 한다던 동서가 들어선다.
“빨리 속옷 챙겨서 나오세요. 샴푸랑 수건이랑 제가 다 들고 왔어요.”
얼른 서류를 소파 밑에 묻고 따라 나선다.
내 등에 비누칠을 하던 동서의 손이 몇 번 미끄러지고 샤워기의 물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가 싶더니, 웨엑 헛구역질을 한다. 한 손으로 입을 털어 막고 한참을 다른 손으로 눈물을 찍어내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의 짐을 덜어 주고 싶었어요. 그의 음악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어요.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몸이라도 섞으며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했죠. 끝내 떠나더라도 아이 하나 얻어낸다면, 하는 심정이었어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믿었어요. 지금도 믿어요.”
동서는 그를 향한 절망적인 애정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한번도 사랑을 받아 본적도 해 본 적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 시작되었다. 어찌 보면 그의 시선은 늘 자신의 내부로만 열려 있었고, 매 순간 철이 들고 늙어가고 죽어 가는 것을 응시하느라 상대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탕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안경을 끼지 않아 흐릿한 내 눈에도 그녀의 눈이 참 맑다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 없이 서로 눈빛만 주고받으면서도 우리는 세상이 참 뜨겁거나 차다는 생각보다는 한 사람의 마음속이 얼마나 뜨겁고 차가워질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갑자기 온몸이 가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신 거울 속에 비친 흐린 내 눈이 더욱 흐려져 있는 걸 보면서 머리를 감았다. 내 속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욕망들을 이 비눗물에 씻어낼 수만 있다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대신 살아주려고 했던, 그리고 내가 맡았던 역할들이 물거품처럼 가볍게 씻어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목욕탕에서 나오니 며칠째 앓는 소리를 내던 꽃샘추위도 알아서 물러나고 햇살이 제법 두껍게 몰려온다. 동서가 덜 마른 머리카락을 흔들며 내 손을 잡는다.
“형님, 낼 아침에 장 보러 같이 가요.”
“응, 내일은, 내일이면.”
잠이 깨지 않는다. 몽롱하다. 꿈속의 귀신들이 내 목과 발목에 엉겨 붙는 것 같다. 밤새 수많은 조상들에게 일일이 술을 쳐 올리고 재배를 올리다가 끝도 없이 절 받으려고 줄 서 있는 귀신들의 웃음소리에 소름이 돋아 깨어나곤 했다.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다시 꿈속이다. 아이가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있다. 할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예서(禮書)에 의하면 ‘제왕(帝王)은 하늘을 제사 지내고 제후(諸侯)는 산천을 제사 지내며, 사대부(士大夫)는 조상을 제사 지낸다.’ 이것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에게는 천지(天地)가 절대자이고, 한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에게는 산천(山川)이 절대자이며, 그렇지 않은 사인(私人)에게 있어서의 절대자는 조상(祖上)이라는 데에 연유한다. 인간이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까닭은 효(孝)를 계속하기 위함이며, 효란 자기존재에 대한 보답이다. 그래서 제의례를 근본에 보답하는 의례라는 뜻으로 보본의식(報本儀式) 이라 한다. 그 책은 아이의 죽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수많은 이름이 적힌 족보 책이었다.
오늘밤이면 제상 앞에는 노인과 동서만 남게 될 것이다. 나와 아이와 그는 이미 이 나라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자꾸만 흔들린다. 아이는 무언가 눈치 챈 듯 밤새 신열에 들떠 할머니를 찾았다. 아침 일찍 걸려온 동서의 전화목소리도 내 발목을 잡는다.
“형님, 일어나셨어요. 시장 입구에 있는 신발 가게 앞에서 만나요.”
“저기, 나쁜 꿈을 꾸어서 그런지, 몸이 좀 불편해서.”
“어머, 그래요. 그럼 좀 쉬세요.”
동서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지금쯤이면 동서는 웬 만큼 장을 보았을 터이다. 상 차릴 준비가 끝날 무렵 반야심경이 새겨진 여섯 폭 병풍이 펼쳐질 테고. 추사체원본을 복제했다는 영인본의 제사전용 병풍, 그 앞으로 제상과 향상이 놓이고 주전자를 얹는 주가가 차례로 놓일 것이다. 제주가 없는 제상 앞에서 노인과 동서가 서로 눈길을 피하며 앉아있을 것이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냉동고에 얼려둔 말린 대추를 꺼내 칫솔로 문지른다. 대추를 푹 끓여 걸쭉하게 되면 체에 밭쳐서 걸러내라고 했던가. 물에 담가 둔 쌀을 갈아서 녹말을 가라앉히고 윗물을 떠서 대추 거른 것에 함께 섞어 끓이다가, 쌀 녹말을 넣어 다시 푹 끓여서 죽이 다 될 때 계핏가루를 조금 넣고, 먹을 때 설탕이나 꿀을 타라고 했던가. 노인이 내가 입덧을 시작했을 때 끓여 주던 대추죽, 천천히 한 입 맛을 본다. 고부간에 그 마음이 전해지려면 저 죽처럼 정성과 시간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하기사 어찌 고부간에만 그럴 것인가. 인간사 사이사이마다 정성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채워지는 것은 아마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황사 사이로 부옇게 꽃이 핀다. 재래시장 상점 앞에 눈치껏 쪼그리고 앉은 할머니들도 용케 풀포기를 피해 전을 펼쳐 놓는다. 제수 용품점을 찾다가, 마침 주인인 듯한 노파가 굵은 소금을 확 뿌리고 돌아서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아침나절부터 뭔 일이랴. 재수 없게끔.”
젊은 새댁이 제상에 쓸 향, 초 한 통 사면서 값을 깎아달라고 흥정을 하더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물건 살 때 한 푼 두 푼 깎는 맛에 재래시장에 들른다지만 옛날부터 제상에 쓸 음식들은 값을 깎거나 흥정을 붙이지 않고 제일 좋은 것으로 사야한다는 것이다. 제수 용품에 대해서조차 흥정하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던 것을 보면, 감히 자손 중에 누가 제사를 지내느냐에 따라 밭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면 조상들은 과연 뭐라고 하실까. 동서는 내가 장에 나와 준 것을 고맙게 여긴다고 했다. 거기다 죽까지 끓여 온 걸 알고 아이처럼 내 팔에 매달렸다. 지난 번 제사까지만 해도 내가 했던 일이다. 당연히,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을, 오늘은 동서가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안심하고 이 일에서 발을 빼도 되는 걸까. 정육점과 어물전을 돌아 나물도 빠짐없이 담았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고기 한 근 생선 한 마리 할 것 없이 동서에게 친절하게 설명하게 된다. 탕에 들어갈 것과 적으로 구울 것을 구분하고 노인의 취향과 비법에 대해서도 아는데 까지는 다 알려주어야 내가 더 홀가분해질 거 같아서 나는 전에 없이 많은 말을 한다. 과일 전 앞에 수북히 쌓인 딸기와 바나나, 맨 마지막 줄에 감은 겨우 구색을 맞춰 몇 개밖에 없다. 작년엔 감이 풍년이었다는데. 일손이 없어 따지도 않고 그냥 둔 나무들이 많다고 뉴스에도 나왔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천지의 이치이다. 그러나 감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감 씨앗은 심은 데서 감나무가 나지 않고 대신 고욤나무가 나는 것이다. 기존의 감나무 가지를 잘라 이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야 그 다음 해부터 감이 열린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다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고 배워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제사에서 감을 쓴다는 것이다.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데는 생가지를 칼로 째서 접붙일 때처럼 아픔이 따른다. 그 아픔을 겪으며 선인의 예지를 이어 받을 때 비로소 하나의 인격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추는 작년에 농사지은 걸로 이미 잘 말려서 노인이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다만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고 탱글탱글 윤이 나지는 않겠지만 길게 시간을 새겨 넣은 듯 주름을 적당히 잡아 노인의 손금처럼 편안한 낯색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난전을 피해 큰길로 나오자 어느 상가에선가 ‘미련한 사랑’을 애달프게 노래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끊어질 듯, 정말 땅이라도 파고 함께 묻힐 듯 애절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형님, 이 노래 알아요?”
포크레인 한 대가 한 삽 가득 흙을 담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못 들은 척 흙에만 눈길을 준 채 언제쯤이면 그 곳에서 인골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형님, 이 노래요?”
내가 늘 중얼거리고 다니는 이 노래를 동서가 모를 리가 없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다-고 말하지 마-치 언제라도 나를 떠나 버릴 수-있을 것처럼…….”
스무 채 남짓한 동네는 하루에 두 번 서는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찾아 들어가야 된다. 시골 마을 어디에나 한 그루쯤 있음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 없는 마을, 버스가 서지 않는다면 입구라고 할 것도 없어, 양옆으로 대추밭이 펼쳐진 밭둑이라고 여길 뿐이다. 다만 몇 해 전 장마에 벼락 맞은 대추나무 몇 그루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을 뿐, 정말 그 뿐이었다. 위로 한 정거장 더 올라가면 공원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장미 공원, 오른쪽에는 백합공원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평소에는 늘 이차선 도로가 넓다고 생각되다가 명절을 앞두고 성묘객이 모여 들 때는 그야말로 차들이 움직이는 무덤처럼 보일 정도로 길이 하나의 긴 공원묘지라도 된 듯하다.
대추밭을 뚫고 걸어 들어가야 동네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이십 여분을 대추나무 사이를 줄맞춰 걷다보니 노인의 집이 보인다. 새마을 운동 때 올린 똑같은 주황색 지붕을 걷어내고 내가 결혼하던 해에 새로 머릿돌을 얹은 그 집이 지금은 노인네 혼자 머물기에 가당찮게 넓어 보인다. 흔히 시골집이라면 마루가 있고 넓은 마당이 있는 단층주택을 떠올릴 것이지만, 그 때만 해도 일층은 어른들이 살고 이층, 삼층은 두 아들네 살림집으로 쓴다면서 방을 여러 개 들였었다.
시장에서 사다 건 꽃무늬 커튼이 담장 밖에까지 비치도록 걸고 안방에는 찍은 지 십 년도 넘은 가족사진 속의 가족들이 어색하게 입 꼬리를 올리고 낯선 방안을 탐색하고 있었다. 마루라고 하기보다는 방과 방으로 연결된 복도라고 해야 할 큰 방 방문 옆에 종소리도 나지 않는 오래된 괘종시계를 턱없이 권위적으로 세워 놓고 다들 좋아했었다. 듬직하고 든든한 것은 시계뿐만이 아니었다. 재물이 따른다는 빨간색 페인트로 칠한 대문에는 안에서 보아서 오른쪽 문에다 작은 쪽문을 만들어 평소에는 그 문으로 드나들었다. 노인도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 설 수 있는 문, 가끔 경운기를 탄 아버님이 개선장군처럼 그 큰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들어 설 때를 빼고는,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낮추어야 들어설 수 있다는 걸 그 문을 통해서 배운다.
대문 왼쪽으로는 잡종 개인 누렁이 집이 있고 오른쪽으로 라일락 나무를 캐내고 심은 밤나무가 있다. 대추밭 울타리에 몇 그루 심어놓은 밤나무가 내 어깨를 넘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나무를 캐어와 옮겨 심은 것이다. 다른 나무들은 씨앗이 땅 속에서 썩어야 자라지만 밤나무는 땅 속의 씨밤이 생밤인 채로 뿌리에 달려 있다가 나무가 자라서 씨앗을 맺어야만 씨밤이 썩는다. 신주를 밤나무로 깎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나마 넓지 않던 마당은 최근에 새 길 내는데 다 내어주고 겨우 경운기 한 대 주차할 정도밖에 없는 것이 이제 와서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까지 든다.
조용히 식기를 꺼내 닦는다. 내가 시집오기 전엔 놋쇠로 만든 유기를 사용했다는데 지금은 붉은 갈색의 목기를 장만해서 쓰고 있다. 귀신은 붉은 색을 싫어한다는데... 그러나 나는 물푸레나무인지 오리목인지 분간이 안 되는 것과 옻칠을 했는데도 무광택이라는 것이 조금 찜찜할 뿐 그냥 마른 행주로 한번 닦으면 되는 그 간편함이 마음에 든다.
오늘따라 동서는 말이 많다. 제수 장만하면서 입으로 하느냐며 노인에게 몇 번이나 핀잔을 들었지만 동서는 자꾸만 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그럴 때마다 혼자 실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고는 내게도 동의를 구하곤 한다. 그러다 아이를 데리고 2층이며 3층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여기가 네 방이었다면 여기는 자신의 방이 되려고 있는 거라고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2층은 아이가 태어나기 두 달 전에 비워진 채 아직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렇다면 3층은 어떤가. 아직 한 번도 주인이 들지 않은 처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노인은 그 복잡한 집에서 잘 살고 있다. 그 많은 고인이 된 조상들과 함께.
밥솥 뚜껑을 미리 열어보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밥 다 됐으니 주걱으로 미리 저을 생각일랑 말라고... 이것이야말로 제사가 여자의 삶에 던져주는 진정한 화두라고...
상차림까지 끝내고도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도 열두시까지는 기다릴 것이다. 조상이 도운다면, 정말 건장한 혈통을 잇기 위해 춘설이라도 내려서 악천후에 공항이 마비라도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비행기는 이미 이륙했을 것이다. 핸드폰에 뜬 메시지처럼, 남의 일처럼. 어쩌면 조상이 기다리는 사람은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아이가 옆에서 절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봄, 떠나기에 좋은 계절이다. 그가 처음 집을 떠났을 때도 봄이었다. 남편의 사고가 있던 봄부터 두 해를 더 견디고 기어이 그는 노래 공부한다는 핑계로 소식을 끊어버렸다. 황사처럼 더 이상 거북스러울 것도 없는 노인과 나는 여섯 살 종손을 앞세우고 제사를 지낸다. 동서가 화장실로 달려간다. 웩 웨 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