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국천왕 이전의 고구려(2세기 초~중)
1) 제2의 건국, 93년을 집권했다는 태조왕(6대) ;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향권을 양자강 이남, 동으로는 동옥저을 장악 한반도 동북부까지 영토를 확대.
2) 폭군 정치 차대왕(7대)
3) 반정으로 즉위한 신대왕(8대) 화합정책과 조정의 행정체제를 개편하다.
- 2대를 거쳐 동한의 세력 확대로 황하 이남 땅을 거의 상실.
2. 9대 고국천왕 시대(재위 179~197년, 17년) : 국(國)양(壤)왕
1) 형을 제치고 왕이 된 문무겸비, 관용, 예리, 결단력 모두 갖춘 한마디로 준비된 왕.
2) 외척 세력에 눌려있던 왕권을 한나라군 격퇴로 돌파구를 찾다.
3) 외척 숙청과 왕권회복. - 외척들의 반란(좌가려의 난,190), 형 발기의 역모사건(196)을 해결하고 강력한 왕권 체제의 시동을 걸다.
4) 정계 개편을 시도하다. - 나부체제를 방향부로, 중앙 집권책을 추진, 을파소를 국상으로.
5) 백성의 안위와 국방에 전력을 쏟았던 고국천왕 후사를 남기지 않고 세상 을 떠나다.
3. 명재상 을파소와 개혁정치 그리고 진대법
한낱 농부에 지나지 않은 을파소가 중외대부 벼슬을 제수한 왕에게 “ 우둔하기 짝이 없는 소신은 감히 명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마마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뽑아 더욱 높은 관직을 주시고 정사를 맡겨보소서, 그러면 마마께서 염원하시는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라고 말하니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고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친족까지 징벌하겠다.”는 엄명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앞세워 과감한 개혁 정치로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고, 국사 처리에 상벌 규정을 명확히 하였다. 194년에 매년 3~7월에 백성의 호구의 크기에 따라 차등 있게 정부의 곡식을 빌려주고 10월에 갚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4. 고국천왕의 동생이면서 동천왕의 아버지 산상왕(10대)
1) 취수혼으로 왕이 되다.
2) 민심을 황도성 천도로 안정시킴. 서남진의 교두보 마련
3) 형이 마련한 강력한 왕권으로 왕위의 부자상속을 이룸.
3) 중국은 ‘위, 촉, 오’ 의 삼국시대가 된다.
5. 11대 동천왕(209년 ~ 248년: 재위 21년)
1) 2대에 걸쳐 왕후였던 우씨의 박해 속에서도 잘 자란 착한 태자 드디어 왕이 되다.
2) 조정을 안정시켜 서진정책을 추진. 현도 수복과 태조시대 영토를 대부분 회복.
3) 신라 세력이 북상 중 - 245년 신라 북쪽 공략 퇴각시킴.
4) 삼국 초기에는 가까운 위와 화친, 오와 적대. 그러나 고구려의 서진정책과 위의 위기감이 246년 드디어 폭발하다.
5) 두 번의 대승과 한 번의 패배, 환도성이 불에 타고, 도읍을 평양으로 정한다.
6) 기나긴 전쟁으로 248년 40세의 나이로 죽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성들이 왕의 은덕을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신 중에는 자살하여 순장되기를 바라는 자가 많았으나, 새로 등극한 왕이 예가 아니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일에 왕릉에 와서 자결한 자가 아주ㅡ 많았다. 백성들이 섶을 베어 그 시체를 덮어주었다. 그 때문에 그 곳을 시(柴)원(原)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6. 맺음말
과감한 개혁으로 왕권을 강화와 백성의 민심을 함께 얻어 두마리 토끼를 다잡은 2관왕을 이룬 고국천왕과 그것을 발판으로 한 서진정책으로 영토 회복을 한 동천왕. 고국천왕 - ‘삼국사기’에서 외모와 풍채, 사람됨에 칭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닌 듯. 동천왕 - 얼마나 왕이 정치를 잘하고 존경스러웠으면 함께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