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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두 렙돈 2003-9-21
변 종 길 목사
“41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저희는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마가복음 12:41-44)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연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와서 헌금을 하는데 부자들이 와서 헌금을 많이 하였습니다. 요즘 돈으로 생각하면, 어떤 사람은 10만원, 20만원씩 넣고, 또 어떤 부자는 100만원, 200만원씩 넣었을 것입니다. 한 해 동안 농사지은 십일조와 감사헌금 등등,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그 동안 모아두었던 헌금을 한꺼번에 많이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렙돈’은 헬라 동전의 명칭으로 조그만 동전을 말합니다. 매우 작아서 동전 위의 글을 읽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가치는 128분의 1 데나리온으로서 오늘날 한 500원 정도쯤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라고 말합니다. ‘고드란트’란 로마 동전의 명칭으로 두 ‘렙돈’의 가치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41절에 보면, 예수님은 연보궤 곧 헌금함을 마주 보고 앉아서 사람들의 헌금하는 것을 보교 계셨다고 합니다. 누가 와서 얼마나 넣는지를 다 보고 계셨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을까? 사생활 침범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와 관습을 상황을 알아야만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의 방들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제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했다고 합니다. ‘여자의 뜰’에도 한 방이 있었는데, 이곳은 사람들이 헌금을 하는 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전의 바깥뜰에서 안뜰로 들어갈 때 이곳에서 헌금을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여기에 13개의 헌금함이 놓여 있었는데, 그 함의 입구는 나팔 모양처럼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헌금을 던지면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함은 당해년도의 성전세를 넣는 것이고, 둘째 함은 지난해의 성전세를 넣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셋째 함은 새 종류(조류)를 위한 헌금을 드리는 것이고, 넷째 함은 비둘기 제사를 위한 헌금을 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섯째 함은 번제의 나무를 위한 헌금을 드리는 것이고, 여섯째 함은 향료를 위한 헌금을 드리는 것이며, 일곱째 함은 금 그릇들을 위한 헌금을 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여섯 개는 자유롭게 드리는 헌금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열 세 번째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자유롭게 드리는 헌금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가난한 과부가 드린 헌금은 이 열 세 번째 헌금함에 넣은 것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헌금할 때에 제사장이 앉아서 기록을 했다고 합니다. 헌금하는 사람은 이 헌금은 무슨 목적으로 드리는 것인지, 액수가 얼마인지를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서 사람들이 얼마나 헌금하는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신적인 능력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헌금자의 말을 듣고서 그 금액이 그 목적을 위한 헌금으로 충분한가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적으면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으면 그 헌금을 나누어서 그 남는 액수는 첫 다섯 헌금함 중의 하나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적은 액수를 드리는 사람도 그 액수를 말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가난한 과부가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장 앞에서 “저는 두 렙돈을 드리겠습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500원 짜리 동전 두 개입니다. 그러자 제사장이 듣고서 핀잔을 주었을 것입니다. “아니 고작 두 렙돈이라고?” 그러자 주위 사람들도 모두 다 웃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과부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몸둘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시고 가만히 참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불러모아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43절) 이처럼 예수님은 이 과부를 옹호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저희는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44절)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즉 가난한고 결핍된 가운데서 자기의 소유를 다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리어 이 과부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까요?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I. 첫째로 하나님은 사람의 형편을 고려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액수를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형편을 고려하십니다. 부자가 많이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부자 10만원, 100만원을 내더라도, 그들에게는 아직 쓸 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많이 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아니 조금 내는 것도 어렵습니다.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살아가는 영세민들에게는 만원도 큰 돈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몇 천원도 큰 돈입니다. 그런데 이 가난한 과부는 정말 가난했습니다. 우선 옷이 허름하고 누더기라서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은 제대로 못 먹어서 거칠거칠하고 윤기가 없습니다. 남편이 죽고 나니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사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아마 자식들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정부보조금도 없었고 연금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전에 전남 순천 인근의 한 시골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주로 할머니들 몇 분 계시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이든 할머니들이 쑥이나 나물을 뜯어서 팔면 한 3,4천원을 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십일조를 떼서 300원, 400원을 헌금한다고 합니다. 이 과부도 이처럼 나물을 뜯어서 팔았든지, 아니면 이웃집에 가서 허드렛일을 하고 번 돈 두 렙돈(500원 짜리 두 개)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과부에게 있어서 두 렙돈은 자기의 생활비 전부였고 모든 소유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과부는 아마도 하루 하루 살아가는 하루살이 인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아십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지도 아십니다. 그래서 절대 액수가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드리느냐, 정성을 다해 드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내가 조금밖에 못 드린다고 죄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형편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리고 넉넉한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힘써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넉넉히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도 기쁘게 받으시고, 그것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돕고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II. 둘째로 하나님은 특히 가난한 자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관심은 이 가난한 과부에게 있습니다. 부자들ㅣ 많이 와서 많이 헌금한 것도 귀한 일입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에게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시고 위로와 칭찬을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부는 사회적으로 약자이고 힘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이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어렵게 살아갑니다. 이웃집 사람이 놀려도 어쩔 수 없고, 해롭게 해도 대항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하루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것이 힘들고 괴롭습니다. 자식들이라도 있으면 좀 낫지만, 자식이 없으면 정말 힘듭니다. 친척들도, 주위 사람들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국가도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회적 약자들, 힘없는 자들을 하나님은 특별히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과부의 부르짖는 기도를 속히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눅 18:8).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왜 갈릴리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셨을까요? 갈릴리 지역은 가난한 농부들과 어부들이 많이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는 억압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나라 같으면 강원도 골짜기 같은 곳입니다. 경상도나 전라도의 시골 마을과 같은 곳입니다.
물론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들도 가까이 하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부자들과 관리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물론 부자들을 배격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부자들도 환영합니다. 실제로 교회에는 부자들이 좀 있어야 운영이 잘 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부자들이 자기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했으며, 참석하는 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자들에게 자연스럽게 구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에서는 믿음 있는 부자들의 헌신이 교회 운영의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자기 스스로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교회가 특별히 관심을 안 가져도 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생활이 어렵고 힘든 게 많습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합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작은 집에 살면 무시를 당하고, 작은 차를 타고 다니면 무시를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부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나서서 관심을 가지고 도와야 합니다.
우리 천안서교회는 비교적 가난한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교회 주위에는 가난한 서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간혹 우리 교회가 앞으로 쌍용동이나 불당동 같은 부자 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훨씬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면 분명히 교회 성장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교회가 이렇게 가난한 동네에 있다는 것이 좋은 일이고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느냐 하는 것은 둘째 문제요,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주시 사명을 잘 수행하고 있는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그 결과로 우리 교회가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 바로 앞에는 천안서초등학교가 있어서 가난한 학생들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입니다. 지난 주 중에는 우리 교회가 지급하는 장학금 9, 10월분을 전달하러 전도사님이 학교에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새로 오신 교장 선생님이 앞으로도 계속 지원할거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네, 물론이지요. 우리 교회가 이 자리에 있는 한 계속해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지원할 것입니다. 네 명밖에 지원하지 못하는 것이 죄송스러울 따름이지요. 앞으로 힘닿는 대로 더 많이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주일학교에 주공 6단지에서 오는 아이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옷을 보면 허름하고 꽤재재한 것이 표가 납니다. 저는 이런 아이들을 볼 때 너무 기쁩니다. 이런 아이들이 아침에 일찍이 와서 떠들어도 괜찮아요. 예배만 방해되지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 주고 먹을 것을 주는 것을 우리는 기쁨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쌍용동이나 불당동에 가면 아마도 이런 아이들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이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태풍 매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총 117명이 죽고 13명이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130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산 피해액은 5조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민간 부분의 피해가 4조 7천억원, 공공 부분의 피해가 7천억원이라고 합니다. 부산과 경남 지역이 많은 피해를 보았는데, 특히 마산과 거제도 지역이 막심한 피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원도도 작년의 피해에 이어 또 다시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강원도의 어떤 사람은 내년에 ‘매미’가 보이기만 다 죽여버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년에 태어나는 매미는 불쌍하게도 제 명대로 다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이런 일을 보면서 저는 솔직히 짜증이 납니다. 태풍이 오면 피해가 날 줄을 뻔히 알면서 왜 대비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국민들은 그렇게 방송을 듣고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피하지 않고 뭐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고질적인 ‘안전불감증’이 문제입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또 잡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뭐했느냐는 것입니다. 태풍이 오면 방송만 할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의 사람들은 어디로 피하고 어떻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야 하는데, 공무원들이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가는 지역에는 한 두 시간 전에 싸이렌을 울리고, 대피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경제부총리는 제주도에서 골프나 치고, 행자부장관은 해임 결의된 상태에서 국회의원들을 비난하고 다니고, 국회의원들은 서로 싸우고 다투고 ... 그러니 이 나라가 뭐가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돕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고, 이런 나라 백성들 도와봐야 뭐 하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닙니다. 태풍 피해가 나면 꼭 가난한 농민들, 서민들이 제일 피해를 많이 봅니다. 정치가들이 잘못하고, 관리들이 잘못하고, 부자들이 저지른 죄값을 가난한 농민들, 가난한 서민들이 담당하는 꼴입니다. 그 중에는 어질고 착한 농민들과 산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럴 때 온 국민이 힘을 합쳐서 도와야 하겠고, 특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빠짐없이 나서서 도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당하는 고통을 나누어 지는 것이 되겠고, 또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 되겠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가난한 한 과부의 형편을 아시고 그를 위로하시고 칭찬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에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힘쓰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