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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2001년) | |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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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98년 2월 25일~2003년 2월 24일 |
전임: 김영삼(14대)
후임: 노무현(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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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24년 1월 6일(1924-1-6) |
출생지 | 전라남도 신안군 |
사망일 | 2009년 8월 18일 (83세) |
사망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종교 | 천주교 |
배우자 | 차용애, 이희호 |
자녀 |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 |
김대중(金大中, 약칭 DJ,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 전라남도 신안군 출생)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으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태어나 제5대 민의원과 제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영삼 등과 함께 오랫동안 군사정권에 항거한 야당 정치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불렸으며, 인권 향상과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호는 후광(後廣)이며, '인동초'(忍冬草)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일본식 이름은 '도요타 다이주(일본어:
1924년 전라남도 목포 앞바다에서 뱃길로 2시간 거리인 남서쪽 해상 약 57.6킬로미터 거리의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하의도에서 한두 척의 어선을 가진 농어민 김운식과 장노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당시 하의도는 인구 1만 이내의 섬이었다. 구한말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시집갈 때 이 섬 한덩어리를 일본에게 팔아넘겨 하의도 섬은 섬 전체가 동양척식회사의 소유가 되었고 주민들은 일시에 소작농으로 전락해 버렸다.[3] :76 아버지 김운식은 소작인들을 대표하여 일인들에게 항의나 진정을 내곤 하였다. 설산 장덕수가 잠시 피신하러 하의도로 내려왔다가 김운식과 가깝게 친교가 있었고 설산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한다.[3] :76 김대중은 "내가 태어난 이러한 토양이 민족과 같이 불의에 항거하는 힘을 주었다"고 추억하곤 하였다 [3] :77 증조부 김태현은 헌종 때 한성부좌윤을 지냈고, 조부 김제호는 오위장을 지냈다.[3] :78 천주교 신자가 되어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3] :86
김대중의 출생에 대해선 생부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혹이 있다. 월간조선 2005년 1월호에 보도된 손창식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10년간 김대중의 가계를 추적한 결과 김대중의 실제 성은 제갈씨이며 생부는 제갈성조라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손창식은 이 주장에 대해 김대중의 생모 장노도가 그녀의 부친 장지숙 호적에 재입적 된 시기가 김대중의 출생 전후로 이루어졌다는 점. 김대중의 부친 김운식과 모친 장노도가 혼인한 년도가 김대중이 30대 중반이던 1960년이라는 점. 김대중이 1971년 유세 도중 밝힌 자신의 띠와 호적에 등재된 생년상의 띠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4]
한편, 1988년 9월경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안기부의 대외비 문서에서도 김대중의 출생시기는 1923년이며, 그해 김운식에게 서자로 입적되어 1943년에 생년이 1925년으로 정정된 것으로 조사되어있다. 또한 1960년 6월 5일 김운식과 장노도의 혼인으로 서자에서 적자로 호적이 정리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김대중의 실제 아버지를 尹모씨로 증언하는 등 출생 혈통이 불분명하다고 명시되어 있다.[1]
이에 대해 김대중은 자신의 저서 《나의 삶 나의 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반박을 한 바 있다. 먼저 모친의 재가에 대해선 재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부친이 이를 인정했으면 성씨 문제는 구설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두번째로 호적 문제의 경우 그 당시는 혼인과 출생년도에 관련한 호적처리가 미흡하거나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세번째로 자신의 나이에 대해선 일제시대 징용을 피하기 위해 그의 부친인 김운식과 논의하여, 나이를 늦추었다고 주장했다.[5]
1970년, 당시 40대의 김대중은 20대의 요정 종업원과의 부적절한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고 이는 오랫동안 근거없는 소문으로 치부되어 왔다. 하지만 2005년 SBS 《뉴스추적》에서 진승현 게이트를 취재하면서 자신을 김대중의 숨겨진 딸이라 주장하는 사람과의 인터뷰가 공개되자 사생아 존재 여부가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SBS의 취재에 의하면 당시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이 모녀의 미국 출국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국가정보원을 동원, 진승현 게이트로 마련한 비자금으로 입막음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김대중의 사생아를 낳은 여인은 자살했다고 한다.[6] 이러한 SBS의 보도에 김대중 측에선 사실과 다르다는 반응을 보인바 있었으며, 김대중 평전을 준비중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도 사생아 존재 여부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7][8]
안기부 문서에 의하면 1936년 전라남도 목포로 이사를 했고, 중학교 진학을 위해 국민학교 4학년 때 하의도에서 목포북국민학교로 전학해 왔다.[3] :78 그뒤 목포제일보통학교를 거쳐 목포상업고등학교에 1등으로 합격하여 내내 급장을 지냈다. 이때의 죽마고우로 뒷날 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게 된다.[3] :78~79 목포상고 시절에는 작문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으며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한다. 그의 한 동창생은 한번은 일본인 교관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시국에 대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자 교관은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자 김대중만이 입을 열었다. 질문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유럽 정세에 관한 질문이었던 것인데 교관도 답변을 하지 못하자 어물어물하여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3] :79
이후 도요타 다이주(일본어: 豊田大中)로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1943년에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1]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만주 건국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다. 1943년 그는 서울로 올라와 시험을 치러 합격하였으나 징집될 연령이라서 입학을 포기하고 곧 일본인 상선회사에 취직, 경리담당 사원으로 근무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3] :79 일본인 사주가 물러나면서 관리위원으로 선임되어 경영진의 한사람이 되었다.[3] :79
해방 후 목포신문 사장과 해운 회사 사장을 지냈고, 김대중은 20세인 1945년 차용애와 결혼하였다. 슬하에 김홍일, 김홍업 형제를 두었으나 1959년 차용애와 사별하였다. 1962년 2년 연상인 이희호와 결혼하였다.
졸업 후 선박회사에서 해운업을 하던 그는 1945년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의 목포시 지부에 가입해 선전책에 종사했으며 목포청년동맹에도 가담하였다. 그해 10월 건국준비위원회와 목포청년동맹이 해체되자 이채현의 추천으로 남조선신민당에 입당하게 된다. 신민당과 동시에 민주청년동맹에도 가입해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는데, 1946년 목포시민 항쟁의 날 사건의 배후로 지목, 구속되어 한민당 목포시 부위원장인 장인 차보륜의 신원보증으로 사상 전향 서약서를 제출하고 훈계 방면되었다. 이후 보도연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해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1] 한국 전쟁 이후 다시 해운업에 손을 댔고, 해군 소령급의 신분으로 해상방위대 부단장, 목포일보사 인수, 노조관계 관여 등의 사회활동을 하였다.[3] :82 그뒤 목포일보사 사장 등을 역임하고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서울에 상경한 그는 잡지 《태양》을 발행하면서 웅변학원을 운영했고, 1955년 10월에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상계》에 노동문제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정계진출의 꿈을 키운다.[9]
그러던 중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장면과 인연을 맺은 그는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천주교 영세를 받는다. 이 후 강원도 인제에 출마해 연거푸 두 차례(4대, 5대)[10]의 낙선을 맛보았고, 조강지처인 차용애의 사망(음독자살)으로 힘겨운 정치 초년기를 보낸다. 1957년에는 민주당 중앙상임위원으로 지내고, 1960년에는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이 되었다. 이철승이 조병옥과 장면으로 양분된 민주당에서 장면을 찾아 신파의 소장 실력자로 데뷔하자 김대중도 장면을 찾아 민주당 신파로 정치적 인연을 쌓았다.[3] :86
1961년 5월 14일, 자유당 소속 현역의원의 공민권 박탈로 치러진 재선거에서 승리해 민의원으로 금배지를 달게 되지만 이틀 뒤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원 선서도 해보지 못한 채 첫 임기를 허무하게 마친다. 5.16 이후 이철승 등 일부가 정치정화법에 묶여있을 때 민주당 선전부장, 당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3] :86 이후 이희호를 만나 재혼했고, 1963년에 민주당 소속으로 고향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재선 국회의원이 된다.
1967년 2월에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민당 정무위원 겸 대변인으로 취임했다. 이후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1968년 당수 유진오로부터 원내총무 후보자로 지명을 받았으나 동료의원들의 인준을 받지 못해 김영삼에게 패배하기도 했다.[3] :88
1970년에 치러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김재광과 제휴해 김영삼을 40여표 차이로 꺾고 과반수선을 얻어 역전승, 대통령 후보자에 지명되었다. 1970년 1월 24일,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면서 만일 71년 선거에서 또다시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3] :89 1971년 4월 18일 서울 장충공원 유세에서 총통제 가능성을 다시 폈다.[3] 이 때문에 허위사실 유포 등 선거법 위반사범으로 입건도 되었다. 그러나 같은해 10월에 10월유신이 발생하자 "이처럼 되었는데도 내가 선동가냐"며 반문하였다.[3]
그러나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되기 두 달 전, 그는 24세의 여비서와 혼외정사를 가져 사생아를 가졌다고 알려진다. 이 사실은 당시 측근인 정일형 의원에 의해 은폐되었는데, 혼외 자식인 김○영씨는 태어나자마자 조부(김○태)의 호적에 손녀로 올랐다가 조부가 사망하자 외삼촌(김○호)의 호적에 등재되었다가 97년 대선을 며칠 앞두고 외삼촌이 사망한 뒤에는 조모 김○순의 손녀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11]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540만 표를 얻어 상대 후보였던 박정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김대중은 위기감을 느꼈다. 선거 얼마 뒤에 김대중은 교통사고를 당하여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고, 골반 부위를 다쳐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후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이듬해인 1972년 10월에 일본에 체류하던 중,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등을 결성하여 언론과 교포사회를 통해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진행하였다.[12]
1972년 일본 도쿄에서 유신 반대 첫 성명 발표,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발표하였다. 1972년 10월 19일 귀국 비행기표를 예약해놓고 10월 17일 오전에 일본인 후쿠다 다케오를 만나고 오후에 참의원 의장 고노 겐소를 접견했다.[3] :43 그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연설과 기자회견을 하고 12월 미국을 출발하여 이듬해인 1973년 1월 1일 하와이에 도착하였다.[3] :44 1973년 1월 3일 일본 도쿄에 도착하여 조윤형, 김상현의 구속 소식을 접하였다.[3] :44
1973년 8월 8일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면서 강제로 귀국 당한 그는 이후 자택에 연금되면서 정치활동이 금지당했다.
1974년 12월에 발족한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여하였고, [3] :35 같은해 12월 17일 연금상태에 처해졌다.[3] :35 이후 1976년 3월 1일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했다가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의 대법원 판결에서 징역 5년 및 자격정지 5년형이 확정 선고되었다가, 1978년 12월 27일에 형집행 정지로 가석방되어 가택에 연금되었다. 1979년 3월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등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공동의장으로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고, 10·26 사건이 일어나면서 긴급조치와 가택연금이 해제되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 발생 직후인 12월 14일 아침, 강원용은 김대중에게 대통령 후보를 김영삼에게 양보하고 4년 뒤 출마하길 요구했다.[13] 그러나 김대중은 강원용이 군은 통수권자에게 절대 복종하며, 장군들이 그 다음엔 내가 대통령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내게 충성하고 들어올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다.[14]
1980년 신군부시절,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세계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구명운동으로 이듬해인 1981년 1월 23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82년에 형집행이 정지되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15] 김대중이 무기 징역으로 감형받는 데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12월 11일 서울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1차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했다. 김대중의 형량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직후인 이듬해 2월 14일 2차 편지를 보내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16] 1983년에는 1월 31일에는 ‘뉴스위크’지 회견에서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을 했고, 미국에서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과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17]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다, 1985년 2월 8일에 당국의 반대와 암살 걱정을 무릅쓰고 귀국하여 공항에서 격리되어 가택에 연금되었다. 1985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1986년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15]
김대중은 1995년에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 14번으로 출마하였으나 13번까지만 당선되어 낙선하게 된다. 1997년 10월에는 자민련의 총재였던 김종필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1033만 표를 획득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2000년 6월 15일에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같은해 분단 이후 최초로 선편을 통한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시작되었다. 정주영 회장이 정부와 남북협상을 협조하기위해 현대아산을 설립하여 소떼 방북 등으로 대북 사업의 중심에 섰지만, 불법적인 외환 송금은 문제가 되기도 했다.[21] 1999년 5월에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고,[22] 2000년에는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간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를 두고 야당에서는 "노벨상 로비설"을 제기하며 김대중 노벨상 수상을 저지하기 위해 야당 의원들이 노르웨이를 방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위원회는 김대중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일생의 투쟁과 평화를 위한 노력의 공로로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노벨위원회의 군나르 베르게는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 “매우 무례하며, 위원회의 심사 절차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대중 측이 아닌 오히려 김대중의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으며, 한국 내 특정지역으로부터 노벨상 수상을 반대한다는 편지 수천 통이 전달되었다”고 했다. 동티모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조제 하무스 오르타는 로비설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23] 이후 김대중은 2003년 2월 24일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2004년 1월 29일, 재심을 청구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5월 10일 유럽 3개국(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에서 순방과 함께 OECD, 노벨위원회, WHO에서 연설을 했다.[15]
11월 14일, 그는 8박 9일 동안의 유럽 순방 일정을 마치고 낮 인천 공항을 통해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귀국했다. 유럽 방문 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11월 18일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열리는 클린턴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순방 일정에 따른 피로 누적으로 미국 방문계획을 취소하고 조기 귀국했다. 6일 스웨덴 스톡홀름을 방문한 데 이어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고, 로마에 본부를 둔 세계식량계획(WFP)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로마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서 "북핵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하고 핵문제에 있어서 이중잣대는 안된다는 점 등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모두 반영된 최종 선언문이 채택됐다"고 말했다.[24]
1983년부터 현재까지는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위원회, 국제고문희생자 구원위원회 고문과 미국 피츠버그 La Roche 대학교 이사로 있다.
자신이 지도자로 있었던 새천년민주당이 2004년을 기점으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하였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민주당은 김대중의 지지를 기대하였지만 오히려 그는 열린우리당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인정하였으며, 그를 지지하던 많은 세력은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으로 둥지를 옮긴다.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뀐 뒤에는,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지하였다.
2004년 3월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당하자 심각한 사태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위기국면 극복을 위한 노력을 주문하였다.[25]
2005년에는 김대중이 국정원을 끌여들여 자신의 사생활을 은폐하려하였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어 큰 파장이 일었는데 이 사건은 김대중의 숨겨진 딸이 있다는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국정원의 고위 간부들이 사생아 모녀에게 3억5000만원을 전달한 사건으로 이른바‘특수사업’이라 불렸으며 이 사실은 언론에 보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26][27]
2008년, 그가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목포를 방문하여 통합민주당의 공천에 대해서 발언하자 참여자치21과 광주 경실련, 목포YMCA 등 광주·전남지역 70여개 시민사회단체는 "DJ가 선거를 코앞에 두고 목포를 방문하고 통합민주당의 공천에 대해서 발언하는 것은 YS가 부산에 가서 한나라당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고 발언한 것과 차이가 없는 일"이라며 "이런 구도를 은근히 부추기면서 훈수정치를 하려는 DJ의 노욕에 대해서 시민사회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강력히 비판했으며 [28] 김대중의 최측근인 박지원과 한화갑, 그리고 아들인 김홍업의 호남지역 무소속 출마에 대해서도 '18대 광주·전남 총선에 대한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역대 어느 선거에서도 볼 수 없었던 무원칙과 무질서와 비민주적인 행태가 난무하는 최악의 총선이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2009년 2월에는 그의 이름을 딴 ‘김대중컨벤션센터’가 3억원 대의 출장연회 영업권에 대해 특정업체와 수의계약을 맺고 밀실경영으로 물의를 빚었으며 시민단체들은 김대중 컨벤션센터의 경영행태에 대해여 ‘밀실경영의 전형’이라며 지적했다. 이에 대해 행정안전부는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을 적용 해야 하느냐, 아니면 '지방공기업법'을 적용해야 하는지 유권해석을 검토하고 있다.[29]
2009년 6월 11일 저녁 7시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 특별강연자로 참석해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시작된 한반도 위기와 노 전 대통령 서거, 민주주의의 위기 등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독재자'에 비유하며 이명박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북핵 위기와 관련해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을 동시에 비판했다.[30]
2009년 7월 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31] 이명박 대통령,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과 박근혜, 박희태 한나라당 전·현직 대표,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민주당 정세균 대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 UN 사무총장 반기문, 마틴 유드 주한 영국 대사, 캐서린 스티븐슨 주한 미 대사, 청융화 중국 대사, 여성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등 각계의 인사들이 문병을 왔으며, '쾌유기원' 촛불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32][33][34]
초기엔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점차 악화되어 결국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1달여에 걸친 투병 끝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하였다.[35][36][37][38][39].
김대중 전대통령의 장례는 국장으로 정해졌으며, 영결식은 23일 여의도 국회광장에서 거행된다. 장례를 주관하는 장의위원장은 한승수 현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단독으로 맡을 전망이다. 이렇게 결정된 것은 서거 이튿날인 2009년 8월 19일 오후 8시에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것이며 그 기간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다른 6일장으로 결정되었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되었다. 당초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 용인의 가족묘 등이 거론되었는데, 유족들의 뜻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된 것이다[40].
노무현은 1994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서 김대중에 대해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력 장악 능력', '살림 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그는 김대중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발전을 거듭하며,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와 함께 김구 선생과 필적할만한 '지도자'로써 존경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41]
또 김대중은 군사 정권에 대항하며 납치당하기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신민당과 평민당 등의 야당의 지도자로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를 통해 민주화의 결실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42]
대통령직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의 경제개혁으로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했고,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사적대치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먼저 후보 단일화 실패와 정계 은퇴 번복에 대한 비판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높았으나,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과 갈등을 빚다가 야당 후보 단일화 실패로 김대중과 김영삼이 각기 출마해서 결과적으로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과 1992년의 정계 은퇴 약속을 어기고 1995년에 정계에 복귀한 것에 대해 비판이 있다. 또한 신민당 국회의원 시절 20대 여성과의 부적절한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가지고도 훗날 대통령으로써 국가정보원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생활을 은폐하려하였다는 사실이 불거져 도덕성에 있어서도 많은 논란이 상존하고 있다. [43][44]
또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호남에서 90% 이상의 득표를 한 반면, 영남에서 10% 대의 득표를 기록하거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 대해서도 이런 현상이 지속된 것과 관련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에 대해 호남인들의 저항적 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주장하는 의식도 있으나 84년 총선까지 호남 지역이 계속해서 친(親) 정부적인 투표율을 보였음을 볼때 그다지 신빙성있는 주장은 아니다.[45]
또한 그는 대선 과정에서 김영삼과 함께 이른바 ‘파벌정치’를 내세워 수시로 정당을 해체 또는 결성을 하여 한국 정치 문화를 퇴색시키고 지역주의를 심화시켰으며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를 겸임하면서 독재세력 청산에 소홀하였고 이렇듯 대부분 크게 해결되지 못한 채 차기 정부의 극복 과제로 남게 되었다. 또한 그가 퇴임 이후에도 정치현안에 대해 지나치게 개입하면서 호남 세력의 결집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훈수정치’와 ‘지역주의의 화신’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고향인 호남 지역에서도 ‘노욕’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46][47]
대북 정책에 대한 비판이 있다. 햇볕정책에 의해 이루언 대북 원조는 1998년 대포동 1호 미사일 실험,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발발로 인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다.[출처 필요]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서도 정상 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것으로 햇볕정책에 진정성과 투명성이 부족했다는 견해가 있다.[출처 필요]
1999년과 2002년 2번에 걸쳐 일어난 연평해전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도 비판이 되고 있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도중에 일어난 제2연평해전은 아군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했으며, 참수리급 고속정이 침몰하는 참사를 낳았음에도 이들의 영결식에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해군 합참의장 누구도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국가차원에서 첫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차용애에게서 2남, 이희호에게서 1남을 각각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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