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American Thinker 2013-12-21 (번역) 크메르의 세계
[컬럼] 뗍웡 대승왕 : 베트남의 하수인 노릇한 캄보디아 불교의 수장
Cambodia Apes Vietnam in Its War on Reli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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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캄보디아 불교의 최고위 승려인 뗍 웡 대-승왕. 그는 1979년 베트남 점령 하의 캄보디아에서, 베트남 관리의 감독 하에 승단 고위직에 임명된 7인의 승려들 중 한명이다. 베트남 불교는 중국을 통해 전래된 북방 대승불교의 전통이고, 캄보디아는 남방 상좌부 불교(=소승불교) 전통이다. [크세] |
기고 : 마이클 벤지 (Michael Benge)
최근에 미국에 있는 캄보디아 불교 사찰 '왓 깐떠이아람'(Wat Kanteyaram: 공식명칭-'잭슨빌 동부연합 사원 재단'[Eastern United Temple Foundation of Jacksonville Inc.])에서 발생한 일을 지켜보면 "원숭이는 본대로만 한다"(monkey see, monkey do)는 격언이 떠오른다.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 거주하는 캄보디아계 미국인 불교도들은 11월29일부터 12월 1일 사이에 [캄보디아 불교 최고 지도자인] 뗍 웡(Tep Vong, 텝봉) 대승왕의 방미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뗍 웡 대승왕은 이 사찰에서 진행된 불교의 성스러운 정화의례인 '세이마 깜'(Seima Kam) 의식을 집전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곳의 캄보디아계 불교도 공동체는 뗍 웡 대승왕의 참석이 이 행사를 도리어 불경한 것으로 만들 것이란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그들은 뗍 웡 대승왕이 인권유린 기도를 했던 인물이므로, 그 자체로 뗍 웡 대승왕은 이런 성스런 행사를 집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캄보디아의 훈센(Hun Sen) 총리는 뗍 웡 대승왕에게 호사스런 칭호를 부여하여 캄보디아 불교 승려들의 수장으로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뗍 웡 대승왕이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도둑정치(communist kleptocracy) 체제에 충성을 한 보상이었다.
뗍 웡 대승왕을 이 행사에 초청한 것은 '왓 껀떠이아람'의 주지인 이엉 멩 끄리(Yieng Meng Kry) 스님이다. 이엉 멩 끄리 승려는 뗍 웡 승왕의 추종자이고 뗍 웡 승왕을 통해 이 사찰의 주지로 임명된 인물이다. 이엉 멩 끄리는 이 사찰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과 그곳에서 우연히 들은 소문들까지 캄보디아에 있는 뗍 웡 승왕에게 보고를 해왔다.
기존의 보고들에 따르면, 뗍 웡은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기에 "베트남계 크메르루주"(Vietnamese Khmer Rouge) 세력을 위한 정보 및 종교 담당 작전장교였다. '베트남계 크메르루주'는 하노이 당국에 충성하는 세력으로서, 크메르루주 학살 정권 당시 캄보디아의 동부구역(Eastern zone)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을 말한다.
크메르루주 정권기에 발생한 잔학행위들이 대부분 폴 포트(Pol Pot) 계파가 장악하고 있던 서부구역(Western zone)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베트남계 크메르루주가 장악하고 있던 동부구역에서도 상당한 잔학행위들이 발생했었다. 크메르루주의 테러적 통치기간 중, 캄보디아의 거의 모든 승려들이 살해당했고, 불교의 종교적 구조 자체가 파괴됐다.
1979년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그후 약 10년간 점령했다. 베트남 점령자들은 캄보디아에서 철군하기 직전 2명의 베트남인 "가짜"(faux) 불교 승려들로 하여금 [캄보디아 불교 계율과는] 다른 방식의 계율을 통해 뗍 웡에게 수계(=성직 임명)를 주도록 했다. 뗍 웡은 이후 캄보디아 불교의 수장이 됐다.
캄보디아 불교의 수장이 된 뗍 웡이 최초로 선언한 것은 "종교(=불교)는 당(즉, 공산정권)을 위해 봉사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캄보디아의 베트남계 공산 정권은 "그릇된 깃발을 내건" 불교도들과 그들이 말하는 "사찰들"이란 것을 예외로 두면서도, 불교를 법률적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뗍 웡이 보다 최근에 저지른 인권유린 행위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다.
- 2007년 6월 30일 당시 따께우(Takeo) 도에 위치한 '북-프놈 덴 사찰'(North Phnom-Denh temple)의 주지였던 띰 사콘(Tim Sakhorn) 스님에게 그릇된 혐의를 뒤집어 씌워 그의 체포를 명령하고, 이후 띰 사콘 스님을 외국(=베트남)으로 강제송환 시키도록 함으로써 불교 계율 및 서원을 어긴 점. 띰 사콘 스님은 베트남에서 박해를 피해 도망쳐온 크메르 끄롬(Khmer Krom: [역주] 베트남 남부의 소수 크메르족) 난민들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베트남은 이를 자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았다. 베트남의 요청이 있자, 뗍 웡은 띰 사콘 스님을 체탈도첩(=강제환속)시킨 후, 그의 신병을 베트남에 인계토록 했다. 띰 사콘 스님은 베트남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고, 반복적인 고문을 당하고 적절한 생계물품도 지급받지 못하다, 22개월간 수감생활을 후 해외로 도피했다.
- 에앙 속 토은(Eang Sok Thoeun) 스님의 살해([역주] 속 토은 스님은 당시 캄보디아 불교계에서 가장 활발한 반정부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서, 2007년 2월 27일 암살된 것으로 추정됨)에 공모하여, 캄보디아 내 모든 사찰에서 그의 장례식을 치르는 일을 금지시킨 일.
- 1997년에 발생한 스님 27명의 살해사건 및 그 이후 캄보디아 전역에서 발생한 승려들의 살인, 행방불명, 구타 사건들에 대처하지 않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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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빌의 캄보디아인 공동체는 이러한 일들이 불교의 계율에 위배된다고 보았으며, 그런 인물인 뗍 웡이 이곳의 사찰에 와서 축성식을 거행토록 용인할 수 없다고 보았다.
베트남 전쟁기간 중에는 "베트남이 가면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간다"라는 기치 하에, 라오스와 베트남에는 대규모의 베트남 군 병력이 주둔했다. 또한 두 나라에는 베트남인 "고문관"들이 배치되어 양국 자체의 군대들도 지휘했고, 양국의 정치 역시 통제했다. "많은 것이 변해도 본질은 그대로인 법"(The more things change, the more they remain the same.)이다.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은 2012년 7월에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의 베트남 출신 몽타냐르(Montagnard: [역주] 베트남 중부 고산지대의 소수민족) 개신교도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갈등을 유발시킨 바 있다. 당시 베트남 공산 정부의 공작원인 시우 낌(Siu Kim)이란 자가 기독교 연합 선교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Church: C&MA)의 '사우스 아틀란틱 총회'(South Atlantic district) 총회장의 환심을 샀다. 그러자 해당 총회장은 시우 낌을 노스 캐롤라이나 주도인 랄리(Raleigh)에 위치한 '제1 몽탸나르 연합교회'(First Montagnard Alliance Church: FMAC)의 목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C&MA는 이런 일을 해당 교회 장로들과 협의를 거치지 않은 채 진행했고, 결국 정관을 어긴 셈이 됐다. 시우 낌은 이 교회를 선전할동의 근거지로 삼아 몽타냐르 공동체 내의 기존 지도자들을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본 매체를 통해 2012년 7월 22일 공개한 기사에서 소개한 바 있다.
수이 낌은 설교에서 독설을 사용하면서 '몽타냐르 인권기구'(Montagnard Human Rights Organization: MHRO) 위원들을 언어적으로 공격해댔다. '몽타냐르 인권기구' 위원들은 대부분 [베트남 전쟁 중 미군을 위해 싸웠던] 전직 레지스탕스 전사들 출신이다. 수이 낌은 "MHRO 위원들을이악마를 위해 일한다"고 공격했다.
노스 캐롤라이나에 거주하는 몽타냐르 출신 난민들과 교회 신자들은 지난 2001년 베트남 중부 고산지대의 종교적 자유를 위하고 인권유린을 규탄하는 평화시위를 벌인 바 있다. 이들은 시우 낌이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서 악명높은 종교경찰 소속이었다는 점과, 쁠레이꾸(Pleiku, 플레이쿠)에 위치하면서 베트남 공산당이 통제하는 교회인 "포템킨"(Potemkin)의 목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베트남 정부의 규정에 따르면, 목사가 되려는 자는 신(=하느님)보다 먼저 국가(=공산당)에 서약을 해야만 한다.
재미 몽타냐르 구성원 중 일부는 수이 낌이 쁠레이꾸 지방에서 경찰 및 공무원들과 함께 가정교회들(House Churches: 즉, 신자들의 가정집)에 쳐들어가 불을 지르는 모습을 목격했고, 집단시위에 참가했던 몽타냐르 주민들 수색에 참가하는 모습도 보았다. 수이 낌은 또한 여러 해에 걸쳐 미국대사관에 잘못된 정보를 주어, 종교적으로 박해받은 몽타냐르인들의 통계수치를 최소화시키는 일도 했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몽타냐르인들은 결국 C&MA 소속인 FMAC 교회를 포기하고, '아낙꾸 치앙'(Anak Cu Chiang: '산속 아이들의 교회'[Children of the Mountains Church])이라는 별도의 독립적인 교회를 창립했다.
[베트남의 공산당 지도자였던] 호찌밍(Hồ Chí Minh 혹은 Ho Chi Minh, 胡志明, 호찌민: 1890~1969)이 현재 칭송받는 것처럼 베트남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모스크바 당국이 동남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을 창립하라는 명령과 함께 파견했던 '코민테른'(Comintern, 국제공산당)의 하수인이었다는 점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호찌밍이 창립했던 '인도차이나 공산당'(Indochina Communist Party: ICP)은 단순한 베트남계 공산당이 아니며, 그러한 동남아시아 공산주의 운동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호찌밍과 여타 베트남 공산당원들은 이러한 큰 그림 하에서 '크메르루주'를 조직했다. '크메르루주'는 훗날 2개의 계파로 분열했다. 그 중 한 계파는 학살을 자행한 폴 포트가 이끈 계파로서, 이들은 메콩 강(Mekong River) 이서 지방을 장악했다. 그리고 다른 한 계파는 하노이에 충성하는 "베트남계 크메르루주"로서, 이들은 동부구역을 장악했다. '베트남계 크메르루주'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베트남인들로 구성됐던 '비엣밍'(Viet Minh, 베트남 독립동맹, 비엣민) 출신자들과 당시에는 캄보디아 남부지방이었던 메콩 델타(Mekong Delta, 메콩 삼각주) 지역 출신의 크메르 끄롬인들로 구성된 혼성 집단이었다. 프랑스 식민당국은 1949년에 메콩 델타 지역을 베트남 영토로 할양했는데, 이 지역에는 베트남인, 크메르인, 크메르-베트남 혼혈인 등이 살고 있다.
'베트남계 크메르루주' 당원은 모두 하노이로 가서 의식화 과정 및 군사훈련을 받은 후, 캄보디아 동부지역 작전에 투입됐다. 베트남 전쟁기 및 크메르루주 정권기에 하노이 당국은 '베트남계 크메르루주' 3개 사단 병력을 유지하여 캄보디아 내 반공세력과 싸우도록 했다. 이들 부대들은 병참 보급과 병력 교체 등을 모두 베트남 군대로부터 받았다.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서부구역을 탈출한 수많은 캄보디아 난민들을 인터뷰한 저자는 프놈펜(Phnom Penh) 주민들이 베트남 인근의 동쪽으로 피난을 간 과정을 탐색했다. 난민들은 자신들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동부구역의 수많은 "킬링필드들"(killing fields)에서 잠을 잤다고 보고했다.
1989년 10월 30일,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는 "이의제기"(Taking Exception) 기사를 통해, 이들 난민 중 한명인 사렌 탓(Saren Thach)을 인터뷰했다. 그는 자신의 동생과 아내, 그리고 아들과 갓난아기 딸이 동부구역 군대에 의해 이들 킬링필드들 중 한곳에서 살해된 과정을 이야기했다. 이 군대는 '비엣밍 크메르루주'(Vietminh Khmer Rouge) 지휘관인 헹 삼린(Heng Samrin: [역주] 현재 캄보디아 국회의장)의 휘하 병력이었고, 그 예하 연대장은 현재의 캄보디아 총리인 훈센이었다. 훈센은 당시 캄보디아 북동부 지방인 껌뽕 짬(Kampong Cham) 도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가까스로 달아났던 사렌 탓의 처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73년 7월, 도청소재지인 껌뽕짬 시 탈환전투가 있을 때, 내가 속한 특수부대는 껌뽕짬 주둔구 사령부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곳은 3주 동안 훈센 휘하 부대에 포위되어 있던 곳이다. 우리 부대는 스님들을 포함하여 남성, 여성, 어린이, 노인 등 수백 구의 시신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껌뽕짬 시내 인근 마을들의 사람들이었는데, 먼저 고문을 당한 후 살해됐다. 일부는 뒷통수에 총격을 받고 처형됐고, 일부는 곡괭이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일부는 머리에 비닐 봉지를 뒤집어 쒸워 질식사했다." |
또한 <워싱턴 포스트>의 1975년 9월 10일자 보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날부터 그들 자신과 그들의 명령 하에 있던 병력은 자신들의 길 앞에 나타나는 이들은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병원 2곳에 들이닥쳤을 때, 헹 삼린과 훈센의 병력은 수류탄을 던져넣었고, 이후 중환자들의 목을 칼로 잘라놓았다." |
1981년, 헹 삼린은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ampuche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KPRP)의 서기장이 됐다. 하지만 1985년에 훈센이 총리가 된 후, 헹 삼린은 훈센의 '캄보디아 인민당'(CPP)에서 명예당의장이란 한직으로 밀려났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모든 도청소재지마다 ['캄푸치아 민족해방 통일전선'(KUFNS)으로 불린] '조국전선'(Fatherland Front) 협의회들을 두었으며,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으로 불렸던] 캄보디아의 모든 정부 부처들에 베트남인 고문관들을 두었다.
베트남은 캄보디아 사찰 내에서 신도 대중들과 승려들 사이의 소통을 담당하는 '아짜'(Achas)들의 교육도 제공했고, 뗍 웡이 파견하는 거짓 승려들이 캄보디아 내 사찰들 및 해외의 사찰들로 침투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기도 했다. 그러한 해외 사찰들 중 하나가 잭슨빌의 사찰이다. 해외에 있는 사찰들이 캄보디아 불교 계보를 잇기 위해서는, 해당 사찰의 승려들이 먼저 캄보디아 불교의 최고 승려로부터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불행하게도 그 최고 승려가 바로 현재의 뗍 웡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
[필자소개]
마이클 벤지는 외무 관리로서 베트남에서 11년을 보냈고, 현재는 동남아시아 정치를 연구하고 있다. 그는 이 지역 사람들의 인권 옹호, 종교 자유, 민주주의 증진에 매우 적극적이며, 이러한 주제들에 관해 광범위한 글들을 발표했다.
[역주] 마이클 벤지는 원래 베트남 전쟁 당시 포로로 붙잡히면서 베트남 생활을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베트남 내 소수민족 언어들도 다양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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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국의 조계종과 유명 사찰도
이 자를 공식 초청하여 극진히 환대한 바가 있습니다만...
조계종 스님들은 쪽팔린 걸 좀 아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