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찍이 '단군조선'과 '발해'를 재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단재 신채호 선생도 '흠정만주원류고'를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재정립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단재는 '조선상고사'를 통해 우리 민족을 서술하면서 이 책을 직접 언급했다. 즉, '조선(朝鮮)'의 어원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며 "'만주원류고'에 조선의 원래 발음은 쥬신이고 그 뜻은 주신(珠申)의 소속 관경(管境)인데 관경의 뜻은 우리 배달민족이 살고 있는 온 누리"라고 밝혀 주신에서 숙신과 조선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여진의 역사가 아닌 미처 예상치 못했던 우리의 역사가 줄줄이 흘러나온다. 부여(夫餘)와 삼한(三韓)의 역사는 물론 만주에 대한 연고권이 없을 것 같던 백제와 신라까지도 책의 주요 대목을 꿰차고 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워 약 200여년 존속한 것으로 알려진 발해(渤海)는 아예 여진족의 자랑스러운 선조로 당당히 책에 이름을 올렸다. 책의 중간쯤에 등장하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金)나라의 뿌리를 밝힌 대목은 꽤 충격적이다.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합부(合富)인데 처음 고려로부터 왔다" (부족7 완안(完顔)편 金史)
"삼가 생각건대, 금나라의 시조는 원래 신라로부터 왔고, 완안씨(完顔氏)라고 하였으며, 다스리는 부를 완안부라고 하였다. 신라의 왕은 김씨 성인즉 금나라는 신라의 먼 친척이다" (부족7 완안편 원서(元書))
이렇게 청나라의 문화적 역량이 집결됐으면서 동이족의 뿌리를 밝히는 역사서가 오랜 기간 국내 사학계에서 외면 받았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1993년 단 한차례 원문이 발간됐을 뿐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한글 번역을 시도한 적이 없다.
미스터리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원류라 알려진 숙신과 부여 읍루 물길이 다 포함됐음에도 '고구려'가 서술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반도에 머물고 있던 우리 역사의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신라가 삼국을 제패하고 나당전쟁 승리후
길림성까지 진출했다는 만류원류고의 내용은 흥미롭다.
(길림성을 제1수도 경주를 제2수도)
숙신(고조선) => 읍루 물길 => 말갈(고구려) => 여진 => 금 =>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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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 《만주원류고》는 어떤 책인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청나라 6대 황제 고종(高宗) 홍력(弘歷)의 명으로 만들어진 책이름으로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다. 정식 명칭은 《흠정만주원류(欽定滿洲源流考)》였다. 원문 글자 수는 약 32만 자이다. 필자가 저본으로 삼았던 홍익재 영인본도 694쪽에 달하는 거질이다.
전제군주시대에 군주가 행한 일에 대한 경칭으로 흠(欽)자를 붙여준다. 예컨대 흠명(欽命) · 흠사(欽賜) · 흠정(欽定) 등이 이런 예이다.
여기의 흠정(欽定)이란 군주를 통해서 스스로 결정했다는 뜻으로 주로 저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후술하는 건륭제의 유지(諭旨)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초고가 일단 만들어지면 잘 되었는지 볼테니 자신에게 결재를 올리되 그 때 살펴서 고칠 것이라는 것이라는 당부 말씀도 잊지 않았다.
2. 이 책을 만들도록 명한 청나라 황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청나라 5대 황제 건륭의 연호는 고종이다. 재위는 1736~1795년까지이다.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요, 이름은 홍력(弘歷)으로서 청태조 누르하치의 5세손이다.
이 분은 강희 50년(1711년) 음력으로 8월 13일(양력 9월 25일) 옹친왕부(雍親王府: 현 북경 옹화궁) 안에서 청 세종 헌황제(憲皇帝) 윤진(胤禛)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옹정 원년(1723년) 8월 세종은 건청궁으로 가서 아무도 모르게 상(上)의 이름(건륭제를 가리킴)을 써서 세조께서 새로 쓴 '정대광명(正大光明)'이란 편액 위에 봉함을 해서 감추어 두었다. 옹정11년(1733년) 화석보친왕(和碩寶親王)으로 봉해졌다. 그래서 황태자의 자리는 이미 내정이 되었고 옹정 13년(1735년) 8월 옹정제 사후, 장친왕(庄親王) 윤록(允祿)이 옹정 원년에 황태자로 세웠던 밀봉을 꺼내어 조서내용을 발표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연호는 건륭(乾隆)이다.
명 · 청 시대에는 다른 조대와는 달리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일대일호(一代一號)의 원칙이라고 하여 조대마다 연호가 하나였으므로 명 · 청의 황제들에게는 죽은 뒤에 붙여 주는 묘호(廟號)보다는 생전의 연호에 제(帝)를 붙여주는 식으로 건륭제(乾隆帝)로 일컫는 데 익숙하였다. 따라서 어떤 기록에서는 건륭황제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앞으로는 건륭제로 일관되게 일컬을 것이다.
즉위 후 준갈(準噶兒) 지역의 할거 세력을 분쇄하고, 크고 작은 화탁(和卓: 페르시아어 Khwaja의 역어로서 모슬린이 이슬람교 창립자 모하마드 후예와 교학자 등에 대한 존칭)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신강(新疆)에 행정관리기구를 설치하고. 군대를 상주시켜 이민 · 둔전을 경영케 하였으며, 역참을 건립하고, 수리사업을 일으켰다. 편찬사업에도 주력하였고 특히 10여년에 걸친 《사고전서(四庫全書》편찬 사업이 돋보였다.
중기에 우민중(于敏仲)을 등용하여 독직의 기풍이 점점 기세를 부렸고, 만년에 화신(和珅)을 너무 믿고 신뢰하여 그에게 의지했는데 이치(吏治: 관원들의 작풍과 태도)가 더욱 파괴되고 벼슬아치들의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대형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자 극형으로 다스려도 그치지 않았다.
가경(嘉慶) 원년(1796년) 정월에 내선하여 황위를 물려준다는 전례를 거행하고 황태자 옹염(顒琰)에게 자리를 잇게 하매 연호는 가경(嘉慶)이다. 홍력을 높혀 태상황제(太上皇帝)로 삼고, 3년여의 훈정(訓政: 유훈통치) 기간 동안 "군국(軍國: 군지휘권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관한 주요한 업무는 여전히 그에게 보고를 하게 해서 병훈재결(秉訓裁決) 방식을 취하고 큰 일은 칙지(勅旨)를 내렸다. 연호는 비록 바뀌었더라도 궁중에서 헌서(憲書: 역서를 말한다. 건륭제의 이름인 홍력의 역자를 피해 헌서로 고쳤다.) 등에는 여전히 건륭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가경 4년(1799년) 정월 초 3일(1799년 2월 7일) 병으로 돌아가셨으니 묘호는 고종(高宗)이요, 시호는 순황제(純皇帝)다. 향년 88세. 건륭은 장장 60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었고, 더욱이 태상황제라는 이름으로 3년 동안 훈정(訓政)을 하면서 실제로 정무를 오랫 동안 주관한 것은 중국 봉건 역사상 수백명에 이르는 제왕 중에서 예가 극히 드물게 보이는 분으로 사가들이 건륭성세(乾隆盛勢)가 그의 통치하에 최고봉에 달했다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호(號)를 장춘거사(長春居士) · 신천주인(信天主人) · 고희천자(古稀天子) ·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하였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에다 부지런함을 지녀, 훌륭한 스승 밑에서 착실한 학문 수업은 물론 제왕학(帝王學)을 배웠고, 만주말과 기사(騎射)에 정통함은 물론 만 · 한 · 몽 · 서장어 · 위글어 등 외국어에도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가(儒家)의 경전에 정통하였다. 불교(佛敎), 《도장(道藏: 도교 경전의 집대성)》 등을 숙지하고 있었고, 특히 시문 · 서화 · 음악 등에 뛰어났으며, 희곡 · 음악 등 감상, 도자기 감식, 옥 · 상아조각 등 감별, 건축예술에 대한 열중 등 다방면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로 다재다능한 만능 천재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성경부(盛京賦)》라는 시 한 편은 그냥 한문으로만 쓴 것이 아니라, 만주문자까지 곁들인데다 아무렇게나 쓴 것이 아니라 운율에 맞게 무려 5천여 자에 달하는 대작이었다. 그는 《성경부》를 비롯해서 그가 생전에 썼던 시가 물경 43,500여 수에 달하는 다작 시인을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영토가 큰 공전의 대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이 작품에 대한 가치는 프랑스 전도사 출신으로서 건륭제와 가까웠던 아미오(阿米奧, Amiot,Jean Joseph Marie)(1718~93)라는 신부가 불어로 번역, 1770년 프랑스의 파리에서 당대의 내로라 하는 문인들에게 계몽주의 문학가인 볼테르가 낭독을 하여 '18세기 동서방문화교류의 낭만 편장이라는 극찬을 받았던 유명한 시이다.(인육려 등, 《건륭황제의 성경부와 18세기동서문화교류》, 만족역사와 문화, 178~184쪽 참조)
3. 이 책은 어떤 절차를 거쳐서 만들어졌는가.
이 책은 청나라 고종 홍력(弘歷)이 건륭 42년(1777년) 내각(內閣)에 지시를 해서 책을 만들어 보라고 하고, 내각에서 일단 하명사항에 대해 자체 판단에 따른 편찬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범례(凡例) 7조를 작성, 건륭제의 최종 재가를 얻어 편찬에 착수 그 다음해인 건륭 43년(1778년)에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그 구체적 과정을 아래와 같이 상술한다.
내각(內閣)이란 오늘날 행정법상으로는 국무위원으로 조직되어 국가 행정을 담당하는 행정중심기관이란 뜻이 있고, 의원내각제를 시행하는 정체에서는 캐비넷으로 대변되는 국가 정치의 최고의 기관이란 뜻도 있는데 그런 뜻은 아니고 실제로 내각(內閣)이란 말이 이미 중국 명 · 청 시대부터 쓰여진 말로서 황제를 보좌해서 국정을 처리하는 중추기관이라 할 수 있다.
명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은 역대 재상들의 권한이 너무 막강하여 황제의 통치에 대해 아주 쉽게 일정한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을 감안해서 재상 한 사람을 두는 제도를 절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엄명을 내리면서 중서성 · 상서성 등을 없애버리고 6부상서로 고쳐서 국무를 분담시켜 직접 황제로부터 명을 받게 함으로써 권력의 고도한 집중을 기했다. 그러나 황제 한 사람이 결국 만사를 다 알아서 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부득이 전각 내에 일단의 고문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홍무 15년(1382) 당 · 송의 구제를 모방하여 둔 것이 내각 대학사(大學士)로서 중화전(中和殿) · 보화전(保和殿) · 문화전(文華殿) · 무영전(武英殿) · 문연각(文淵閣) ·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 등의 여러 명칭이 있었다. 이들은 대내(大內: 천자가 기거하는 대궐)에서 항시 대기하여 궁중에서 식사까지 제공받으면서 황제를 보좌하였는 바, 재상이란 이름을 피하기 위해 내각으로 일컫게 된 것이다.(《명사(明史) · 직관지(職官志)》 참조)
그들은 황제를 대신해서 상주문에 대한 비답(批答: 답변)과 정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직급은 비록 낮았지만 과거에 합격한 후 이곳에서의 근무를 영광으로 알았으며 이곳을 고친 사람들이 출세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빨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조선 태종 때 삼정승을 무력화시키고 의정부직계제(議政府直啓制)를 시행하여 왕이 모든 정무를 직접 챙겨 왕권을 강화한 것도 이런 제도를 본 떴다고 할 것이다.
《만주원류고》에서도 건륭제의 하명에 대해 대학사 4명의 명의로 된 보고서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주접(奏摺)이란 형식으로 함께 수록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1) 내각에 편찬 지시를 내리다
홍력은 건륭 42년(1777년) 8월 19일 내각(內閣)에 분부하기를,
"건주(建州)의 연혁과 만주(滿洲)의 시기(始基: 근원)를 저 고금의 지명의 이동(異同: 서로 다른 점과 같은 점) 더불어서 자세히 조사를 하고 고증을 해서 1권의 책으로 만들어 보라."고 하였다.
최초의 지시사항은 아주 간단하다. 만주족의 발상지였던 건주(建州)에 관한 연혁과 만주의 근원에 대해서 옛날과 지금의 지명이 어떻게 다르고 같은 지 그런 점도 아울러서 자세히 조사를 해보고 고증을 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책 입안자들은 주무부서 책임자를 불러 이런 저런 내용으로 어떤 것을 만들어 보라든지, 연구검토해서 보고하라고 하면 그 참모들은 바로 그 아랫 실무자들에게 같은 지시를 해서 최종적으로 어떤 안이 만들어지면 이를 지시를 한 상급자에게 보고해서 채택이 되면 정책이 되는 것이다.
(2) 내각의 편성지침인 범례(凡例) 7조목를 작성, 황제에게 결재를 올리다
범례란 말의 원래의 뜻은 책을 쓴 사람이 책 머리에 쓰고자 하는 책의 요지 및 어떤 식으로 책을 엮을 것인가 하는 체례(體例: 체제)를 기술한 글을 말한다.
이 책 권수(卷首)에 들어 있는 주접(奏摺)이란 문서에 의하면 내각에서 위와 같은 지시를 받고 아계(阿桂) 등이 편성지침이라 할 수 있는 범례(凡例) 7조를 만들어 건륭제에게 주접을 통해 결재를 올린 것은 같은해 9월 초 8일로 되어 있다. 날짜를 따져보면 지시를 받은 뒤 만 17일만에 하명 사항에 대해 보고서를 만들어 재가를 올린 것이다.
여기서 주접(奏摺)이란 명 · 청 양대에 관리가 황제에게 공사에 관해 아뢴 문서로서 차례차례 접어서 책처럼 만든 용지에 문안을 정서를 했기 때문에 주접이라고 하는 것이다.
당시 황제가 정무를 보좌하는 대학사들의 근무처가 자금성(紫禁城) 안에 있었으니 오늘날과 같은 문서의 수발절차가 많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단기간 내에 보고서를 올리게 된 것이다.
(3) 건륭제의 재가(裁可) 및 책 이름을 《만주원류고》로 흠정(欽定)하다
위 주접에 의하면 아계(阿桂) · 우민중(于敏中) · 화신(和珅) · 동고(董詁) 등 4명 명의로 같은해 9월 초8일 보고서를 올려 그 다음날인 9월 초 9일 건륭제의 최종 재가를 받았는 바,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알았다, 책 이름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로 하라"고 하여 그 공문을 다시 내려 보내게 된다.
이같은 경위로 책 이름이 비로소 정해진 것이다. 원류(源流)란 물이 흘러 나오게 된 근원이란 뜻도 있지만 어떤 사물의 기원과 발전이란 뜻도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이 있다.
옛날 군주시대에 공문서를 결재한 다음에는 어떤 표시를 해두었을까. 여기서는 "知道(zhidao)"라고 썼던 것으로 보인다. "쯔으따오"란 중국어로 "알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공문 끝에는 "흠차(欽此)"라는 말이 적혀 있다. 이는 전제 군주 시대에 공문 처리 방법의 하나로 어떠한 지시 사항이 끝났을 때는 꼭 이런 말로써 끝을 맺는 일종의 공문서에 사용하는 투식어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군주가 한 행위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흠(欽)자가 들어간 또 다른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의 왕정문서(王政文書)를 보면 하부기관에서 올라온 상소에 대해 일단 담당 승지가 사전 검토해서 답변의 초안을 써서 왕에게 올리면 그렇게 하도록 하라는 승인을 해서 다시 담당 주무 부처에 내려 가는데 바로 그 상소에는 왕에게 재가를 올렸다는 뜻의 "계(啓)"자 도장이 찍혀 있었다. 물론 결재를 올리지 않고 묵살했을 경우에는 계자 도장이 찍혀 있을 리 없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하달 공문에는 모모 승지를 통해서 결재를 올렸던 바, 왕이 이를 재가했다는 기록이 반드시 들어 있다. 이러한 결과는 실록 등에서 "종지(從之)"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왕이 해당 기관에서 올린 어떤 정책에 대해 임금이 그대로 시행토록 재가했다는 말이다.
5. 《만주원류고》는 실제로 누가 편찬했는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최고 통치권자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아서 그 지시를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은 그 밑에 있는 실무자들이다. 아계(阿桂)나 우민중(于敏中) · 화신(和珅) 등은 건륭제의 가장 신임을 받던 당시 문무 겸전의 실세들이었고, 실제로 아계는 산적한 국사로 인해 이런 지시를 받았을 당시 변방 지역으로 나가 있어서 황제의 특명사항을 처리하느라고 책 만드는 일에까지 관여할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저 이름 뿐이었고 실제로 책을 만든 사람은 명단에 3번째로 올라 있던 경연강관 · 태자태보 · 동각대학사(經筵講官·太子太保∇閣大學士)라는 직함을 가졌던 동고(董詁)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전기에는 《만주원류고》를 편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계 · 우민중 · 화신에게는 그런 말이 일체 없다.
이 책의 제신명단(諸臣名單)에는 책을 만드는 데 관여한 사람들의 관직과 성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모두 35명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김부식(金富軾)을 비롯해서 모두 11명이 편찬에 관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50 참조)
6. 이 책의 주요내용
이 책의 내용은 4개부문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로 부족에 관하여 (권1부터 권7까지) 숙신으로 거슬러 올라가 삼한(三韓) · 읍루(揖婁) · 물길(勿吉) · 백제(百濟) · 신라(新羅) · 말갈(靺鞨) · 발해(渤海) · 완안(完顔)의 여러 부족과 이들과 이웃한 색륜 · 비아객 등 부족의 흥망성쇠에 대하여 사적을 조사하여 거기에서 서로 다른 것과 같은 것(異同)을 고증하였고, 둘째로 강역에 관하여 (권8에서 권13까지) 숙신(肅愼)으로부터 시작하여 원(元)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책에 기록된 제 도시와 부락에 대하여 그 방위에 근거해서 그 당시 지리 형세를 검증하고, 조목을 나누어 변해(辨解: 분별하고 해석함)를 하고, 요 · 금(遼金)의 궁실건치와 고적을 기록하고, 《명위 · 소 · 성 · 참고(明衛所城站考)》를 덧붙였으며, 셋째로 산천(山川)에 관한 것으로(권16부터 권15까지) 거기에 있는 명천 · 승지(名川勝地)에 대하여 지지(地志)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고금을 서로 증명하고, 고증 · 분석하여 오류를 시정하되 의심스러운 것은 그냥 의문으로 남겨두었으며, 넷째는 국속(國俗)에 관하여(권16부터 권20까지) 만족(滿族) 및 그 선세(先世: 선조)의 습속 · 제사 · 물산 등을 조목조목 나열함과 동시에 기사(騎射)의 기원 및 음식의 특징 등 여러 방면에 대하여 널리 그 유래나 증거를 인용하여 논증하였다.
이 책은 청통치자들이 그 선세의 역사가 유구함을 자랑하기 위하여 썼던 것이기 때문에 여진(女眞)의 각 부에 대한 명나라 왕조와의 예속 관계 등을 숨긴 점이 많았으며, 건주(建州)의 삼위(三衛)에 대해서도 숨기느라고 생략하고 언급하지 않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 책 속에는 관련 자료가 체계적으로 수집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동북사지(東北史志) 및 만족 등 여러 민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생각 된다 할 것이다.
여기서 건주삼위(建州三衛)에 대해 약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바로 건주 삼위를 모태로 해서 만주족 형성의 주체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주원류고》에 대해서는 이 부분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명나라 정부의 여진에 대해 어루만저 편안하게 한다는 무수정책(撫綏政策)을 펴서 각각 기미 위 · 소 등을 세워 관할권을 행사하되, 칙명으로 여진 부족의 수령 등을 위 · 소의 관원으로 임명하여 명조정에서 인신을 주었다. 경제적으로 수봉을 받은 여진 수령등을 북경으로 가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도록 허가한 외에도 또 요동의 몇몇 지역에서 마시(馬市)를 개설해서 여진의 각 부족과 한족 사람들과 사이에 호시매매(互市買賣)에 편하도록 하였다. 명정부의 적극적인 초무책으로 아하추(阿哈出)와 멍꺼티무르(猛哥帖木兒)가 마침내 명나라에 귀부하게 되자, 이들을 각각 건주위지휘사(建州衛指揮使)와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로 임명하게 되었다. 그뒤 멍꺼티무르의 아들 동산(董山)(童倉)과 그의 숙부 범찰(凡察)이 권력 다툼을 하게 되었는데 명나라 정부에서는 분할통치(分割統治, Dvide and Rule))를 하여 모순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또 동산(董山)을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로, 범찰(凡察)을 건주우위지휘사(建州右衛指揮使)로 임명하였는 바, 이를 역사에서 건주삼위라로 일컬었다. 이 삼위의 관할범위가 건주여진으로 통칭되며, 그들이 그 이후에 만족형성의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멍꺼티무르(猛哥帖木兒)는 누르하치의 5대조요, 아하추(阿哈出)는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하던 이만주(李滿住)의 조부되는 사람이며, 범찰은 멍꺼티무르의 동생으니 동산과는 숙질간이 된다.
《만주원류고》의 강역 부문에는 《명위소성참고(明衛所城站考)》를 부록으로 실었는데 거기에는 만주일대에 명나라가 설치했던 위(衛) 376개소, 소(所) 24개소, 성(城) · 참(站) · 지면(地面) 58개소 도합 458개소에 대해 언제 어느 지역에 그 부장은 누구였다는 등의 건치연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명목상으로 명나라 요동도지휘사(遼東都指揮使)의 관할이지만 이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한 것이 아니라 벼슬 좋아하는 추장들에게 실직이 아닌 지휘동지(指揮同知) · 지휘첨사(指揮僉事) · 지휘(指揮) 등 임명장을 남발하여 다스렸던 소위 기미주(羈縻州)였다. 《명사(明史)》에 의하면 누르하치도 한 때 도독지휘첨사(都督指揮僉事) · 용호장군(龍虎將軍)이라는 벼슬을 받아 다른 추장 108명과 더불어 북경으로 가서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러한 정책은 우리 조선의 여진족에 대해 취했던 대외 정책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여진 지역의 추장 등을 서울로 불러 실직이 아닌 상만호(上萬戶) 등의 벼슬을 주어 환대하여 돌려 보낸 기록이 자주 나온다. 또 조선 선조 때 신충일(申忠一)이 왕명으로 누르하치의 거점을 직접 방문하여 누르하치를 비롯한 상대측 관원들과의 면담을 하고 그곳에서 견문한 내용을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 제출한 97개 조목의 정보보고의 내용 중(《건주견문록(建州見聞錄)》으로 학계에 널리 소개되어 있음)에는 당시 접촉했던 상대측 관원인 마신(馬臣)을 통해 누르하치가 조선으로 가서 벼슬을 받고 싶다는 의향을 표시한 바 있으나 신충일이 그러한 문제는 중국 조정에서 허가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며 거절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어떻거나 이러한 건주삼위 등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각설하고, 이 책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학자들은 당시 문무겸전한 고관을 비롯한 35명이 동원되었으며 17세기 청나라는 고증학(考證學)의 학풍이 꽃을 피워 이 책의 곳곳에 지명 · 인명 · 관명 등에 대하여 만주말 · 몽고말 등에 의하여 그 연원을 고증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았고, 우리의 역사와 관련하여서는 삼한(三韓)의 위치를 만주 지역으로 보았고, 당나라 때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慶州)를 일컬었던 계림(鷄林)을 음운이나 지리적 연혁으로 보아 오늘날의 중국 동북지방인 길림(吉林)으로 비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금나의 시조 아골타(阿骨打)의 선대가 신라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이 책의 편자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의 삼국 중 고구려(高句麗)에 대하여는 가급적 언급을 회피하고 백제나 신라만을 언급하면서 간접적으로 고구려를 언급하고 있다. 그밖에도 삼한(三韓)이나 삼국(三國)의 관명이나 지명 등에 대하여 만주말과의 관련성을 지어보려고 애를 쓴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비교언어학적 측면에서도 연구할 가치가 매우 많다고 생각 된다.
고구려사를 회피한 이유는...
고구려 당시 청나라 선조들의 지위가 낮아 회피했다는 이유도 있다...
관련링크는 2009년 12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2061818295&code=96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