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학벌과 능력
- 은유시인 -
사람의 능력을 잴 수 있는 잣대는 뭘까? 그리고 학벌과 능력 중 어떤 것이 우위일까?
사람들, 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나 배울 만큼 배웠다는 식자들은 흔히들 말하기를 좋아한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고……. 즉 사람은 학벌이나 가문, 경제력, 지위, 명예 등에 상관없이 모두가 두루두루 평등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법적 지위에 있어 대등하다는 것인데, 과연 그러할까?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가톨릭 수도원재단의 종합인쇄소에서 독일인 신부님 일을 도와 판화 일을 했었다. 당시는 한국의 전반적 인쇄수준이 상당히 열악하여 오프셋인쇄는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 인쇄방식은 활판인쇄 위주였다.
활판인쇄란 인쇄면적과 동일한 규격의 납 활자와 사진동판이 조합된 조판 틀을 인쇄기에 걸고, 볼록 튀어나온 부분에 잉크를 묻혀 그 위를 원통형 드럼에 말린 종이가 눌리며 지나가면서 인쇄되는 원시적 인쇄방식이다.
문자는 납을 녹여 주조하여 만든 납 활자를 문선하여 썼으며, 그림이나 사진은 주로 동판에 부식하여 사용하였다. 그런데 사진의 경우 클수록 이에 제작되는 동판비가 상대적으로 비싸서 당시엔 인쇄물에 사진이 많이 들어갈 경우 소요되는 제작비가 엄청났었다.
독일인 신부님께선 내가 머물던 가톨릭재단의 중고교 남학생기숙사 사감으로 계시면서 한편 비영리단체 ‘시청각종교교육연구회’란 종교관련 교재개발과 보급을 주업으로 하는 사업을 해오셨다.
신부님께서 특별히 제작하고자 했던 교재 가운데 성경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꾸민 교재가 있었으며, 이 그림들은 종류에 있어서는 수천 점에 이르고, 크기도 손바닥만 한 것부터 커다란 스케치북만한 것까지 있었으며, 대부분 그림들이 판화기법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그림들 뒷면에 까칠한 털을 붙이는 ‘후로킹(植毛인쇄)’으로 가공하여 융으로 만든 칠판에 갖다 대면 철썩 달라붙는 방식의 성경을 익히기 위한 교재인 것이다.
이 수천점이 넘는 판화들을 모두 동판으로 제작할 경우, 그 제작비용은 아마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수억 원대에 이를 만큼 엄청난 것으로 이의 비용조달은 사실 신부님 입장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수익성이 보장된 사업도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었고 학교 미술시간에 있었던 판화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었기에 친구들의 판화를 대신 제작해주어 쏠쏠한 수입을 챙기기까지 하였었다. 이러한 판화실력을 눈여겨보았던 신부님께선 나를 불러 외국에서 들여온 수많은 판화교재들을 보여주시며 이것들과 똑같이 만들 수 있겠는가를 물어왔다. 내가 보기에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자신 있다고 말씀드렸고, 신부님께서도 상당히 고무적인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고 얼마 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신부님께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및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님들과 학생들을 기숙사로 초대하여 판화제작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본격적인 판화제작에 들어갔다.
여름방학 내내 그들 교수님들과 또 대학생들과 함께 판화작업을 하였는데, 내겐 하루하루가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아쉬울 정도로 참으로 신나고 유익한 경험들을 쌓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교수님들은 물론, 대학생들 모두가 나를 여간 귀여워한 게 아니었으며, 나 역시 천방지축 날뛰고 까불어 대었어도 야단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땐 커피가 귀할 때임에도 난 커다란 주전자에 그득 커피를 타서 숭늉처럼 마셔댔었으니까……. 또한 고교생 신분으로서는 만질 수 없는, 아마 지금 돈으로 치면 이삼백만 원은 족히 될 거금도 손에 쥐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그렇게 제작된 판화를 인쇄소로 옮겨 인쇄 작업을 하는데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내가 작업한 판화는 원본과 손색이 없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제작한 판화는 하나같이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불량이었던 것이다.
실제 인쇄할 면과 선은 살리고 나머지 부분은 잉크롤러가 닿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파줬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얕게 파서 잉크가 묻어나오고 인쇄했을 경우도 원본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 보일 정도로 선과 면을 제대로 못 살린 것이었다.
결국 모든 작업을 내가 혼자 도맡아 하게 되었는데, 판화 한 건(A4규격짜리 10~20컷 정도) 끝날 때마다 만 원씩 받았으니 나는 부자가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다.
판화 한 건 제작에 걸리는 시간은 학교수업 이외의 남는 시간에 하더라도 2~3일이면 충분했으며, 일거리 또한 넘쳐났고, 또한 나 이외엔 할 사람이 없었으니 세상이 온통 내 것이라 여겨질 만큼 신바람이 절로 났었다. 그때 침식을 제공하고 빨래까지 다 해주던 최신시설의 기숙사비가 월 2만원씩이었으니까 매달 10만원이 넘는 돈을 고2 학생이 번다는 것은 주위사람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때의 재능이 인정되어 나는 대학을 중퇴하고도 종합인쇄소에 20년 경력자와 맞먹는 대우를 받고 취직하였다. 당시 내 나이는 23살. 첫 직장에서의 직책은 도안실장. 1976년도에 대구지방 인쇄계통의 디자인하는 사람 가운데 최고의 대우를 받던 사람이 월급 6~7만원을 받을 때, 난 부산으로 오면서 12만원을 받았다.
그리고 부산에 온 이후 내가 설립한 기획회사 ‘데코․브레인’이 93년6월말 부도나기까지 거의 20년간을 부산의 인쇄 및 광고 디자인계통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받았었다. 물론 그 기간 중 실질소득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부도나기 전 몇 년간은 매월 2~3천만 원은 족히 벌었으니까.
당시 부산 디자인계통에서는 나를 알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내 또래 사람들은 신분이나 사업규모 등의 차이로 감히 나와 어울릴 생각을 못했다.
디자인이나 인쇄계통의 각종 모임 등에 나가면 난 항상 상좌로 안내되었고, 내 소개에는 항상 ‘그 유명한 아무개 씨, 그 대단한 아무개 씨’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리고 회사 말아먹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관련모임이나 사람들 모인 장소에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누가 소개하길 여전히 ‘그 유명한 아무개 씨’이다.
난 나름대로 남들이 못 이뤄봤던 꿈들을 이루어 봤었고, 정상에 서서 남들이 못 겪었던 긍지도 느껴봤었다. 그렇지만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는 느끼지 않으려 해도 주변 여건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흔히들 내가 미술대학 디자인과를 나았으려니 생각했고, 실제로 초면인 경우 상당수가 인사가 오간 뒤엔 꼭 내게 물어오는 질문이란 것들이 ‘어느 대학 나오셨는지요?’나 ‘몇 학번이신지요?’따위였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스럽다거나 수치스러운 감정을 느낄 이유가 하등 없음에도 참으로 대답하기 더러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고등학교만 졸업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나? 아니면 ‘대학 다니다 말았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나?
꼭 그러한 질문을 받고 나면 괜히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들었고, 때론 치사한 생각도 들었다. 왜 대학을 졸업했다고 단정을 짓는 것인지, 그리고 대학 나온 것과 지금의 내 지위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그 질문을 해대는 사람의 마음보를 읽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난 내가 처한 처지나 나에 대한 개인적인 신상 등은 물론, 나이나 학력 등도 별 거리낌 없이 누구한테든 자유롭게 말하는 편이다. 크게 내세워 자랑해야 할 이유가 없듯이 숨겨야 하거나 비굴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능력만 있으면 됐지, 그까짓 껍데기가 무슨 상관이냐.’라는 것이 내 능력을 나 스스로가 인정하고 믿게 된 데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거나 들었을 때 상대가 멍청해 보이는 말들이 있다. 내가 어느 가문 출신이라든가, 내 친척 아무개가 누구라든가, 내 아들이 반장을 했든 1등을 했든 당사자가 이룬 것이 아니라면, 그런 말하는 그 사람 자체가 허깨비처럼 보이는 것이다.
간혹 보면 자기 자신에게 내세울 자랑거리가 없어서인지 사촌형님이 검사라든가, 아니면 사돈의 팔촌이 어느 경찰서 형사과장임을 큰 자랑처럼 내세우는 이들이 더러 있다. 하다못해 친구 아무개가 뭐라도 되기에 걱정 말라는 이들도 제법 있다. 그러한 과시욕 때문에 전두환 때는 그 동생 전경환이, 김영삼 때는 그 아들 김현철이 김대중 때는 역시 그 김홍길 때문에 대통령으로써 차마 겪지 못할 곤욕을 치렀음에랴.
우리나라 사람들은 별나게 학벌을 따지는 편이다. 그리고 그러한 학벌의식은 지연이나 혈연관계를 앞선다 할 정도로 강력하다. 그러한 학벌위주의 출세 지향적 성향은 명문대학 출신자들에 의해 조장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벌이든 지연이든 혈연이든 어디 출신인가를 놓고 출세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면 그처럼 무서운 이기주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한민족이란 민족개념을 송두리째 붕괴시키려 드는 반역적, 반민족적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그런 지엽적 이기주의에 둔감한 것인지 너그러운 것인지 집단적 푼수현상에 걸린 것인지 분간이 안 될뿐더러, 도무지 그러한 현상의 팽배를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소수의 엘리트들이 모든 부와 권력을 독점하려 함에도 거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뭇 대중들은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저지할 방법을 모를뿐더러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소수의 엘리트들이 서로 뭉쳐 밀어주고 끌어주며 주요 요직을 독점해 버리는 대신, 대다수 못 미치는 사람들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단결이 안 되는 것이다.
명문대학 출신이라 하여 개별적 능력이 모두 뛰어나다 볼 수 없음에도 그들이 사회의 요직을 다 차지하고 앉아 떵떵거리는 것은 학벌주의가 이미 이 사회를 장악하고 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사회 각층 최고자리를 독식한 명문대 출신들은 신입사원 등을 뽑는 자리에서도 개별적 능력보다는 같은 명문대 출신인가부터 따진다. 그러니 따라지 대학이나 지방대 출신들이 중앙에 서기가 점점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이엠에프(IMF) 이래 기업의 연공서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업은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붕괴되었다. 나이 어린 신참이 능력만 탁월하다면 10년 앞서 입사한 까마득한 대 고참을 앞지를 수 있는 능력제가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기업의 입사도 필기시험 위주에서 논술과 면접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졸업증명서나 성적증명서 대신 각종 자격증과 상훈, 입상경력 등을 더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학벌 대신 능력을 더 중시하겠다는 변화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한경쟁의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기업이 없겠기에 기업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될 필연적 요구에 의해서의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인식되어 왔던 기업과 공기관이 바뀌면 사회 모든 조직도 변화가 온다. 출세 전초기지인 대학도 모든 취업프로그램을 바꿔야 할 것이고 오로지 대학진학만을 위해 존재했던 학교교육 자체에 일대 체계변화가 올 것이다. 개인의 능력을 최고조로 도출시킬 수 있는 참교육이 절실할 때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이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얼마 전 모 대통령 후보가 공약으로 제시한 말이 생각난다. 교육부를 해체시키고 교육행정을 지방자치로 이관하겠다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중앙집중제로 인한 가장 큰 폐해의 산물이자 부실에 의한 희생물은 역시 우리 기초교육이 아니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능력은 철저히 도외시되고 지식만 축적하는 인간로봇을 양산시켜 왔으니 하는 말이다.
특출한 운동선수는 대우 받아야 한다. 특출한 예술인도 대우 받아야 한다. 특출한 문인들도 대우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특출한 사람들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구두를 잘 닦는 사람들도 대우 받아야 하고, 똥을 잘 퍼 나르는 사람들도 대우 받아야 한다. 쓰레기 잘 치우는 사람들도 대우 받아야 한다. 그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공로와 그들의 노력이 가상하다면 능히 판검사나 박사나 의사 등 사(士)자 돌림의 사람들 보다 못 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이다.
우리 사회에 도둑놈들과 깡패, 사기꾼들이 모두 없어진다면 판검사 절반은 실직할 것이다. 박사란 직책도 시대의 발전에 따라 무엇을 전공했느냐에 따라 명멸의 희비가 엇갈린다. 또한 의학이 보다 더 진보하여 만능컴퓨터가 알아서 병을 진료하고 처방하고 수술까지 담당하는 세상이 온다면 잘 나가던 의사들 대부분은 직업을 바꿔야 할 것이다.
이렇듯 모든 직업은 그 가치기준을 희소성과 수요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으로 그 직업자체가 인격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지닌 제 각각의 고유한 능력을 함부로 차별하려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들이 제 각자가 지닌 그 고유한 능력을 놓고 그 질적 우열을 따진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끝 -
(200자 원고지 34매 분량)
2002/12/06/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