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동네
내가 자란 곳은 백운산과 함백산처럼 백두대간 서쪽으로 장엄하게 솟아난 장산(壯山)의 밑자락에 장산을 등지고 위치한 일제 강점기에 건축한 종업원 사택인 “교촌사택 또는 음지사택”으로 부르는 곳이다.
사택 앞에는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가파른 산이 있고 그 산 뒤에는 “상동광업소”가 자리잡고 있다. 집 앞에 있는 산의 상부는 절벽이 발달되어 있으며 절벽 우측에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 안에 들어가면 “황금 배틀”이 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전설의 내용은 싱겁기 짝이 없다. “누가 신력(神力) 받아서 황금으로 된 베틀을 그곳에 숨겼다는 것이다”
6하 원칙에 적용이 불가능한 그 이야기가 전설의 모든 내용이다. 우리들은 그 동굴에 산비둘기가 드나들기에 “비둘기 동굴”로 불렀다, 아래쪽으로는 “꼴뚜바위”가 있다. 꼴두바위는 바닥 넓이가 1,000평 정도되고 장엄하게 우뚝 솟은 바위며, 석영 성분이 많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아주 품격 있는 멋있는 바위다. 그 바위는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 송강 선생의 전설이 있다. 그 바위는 부르기에 따라 “꼴두바우” “꼴두바위” “고두암”으로 부른다.
우리집 앞과 옆에는 작은 운동장이 있었다. 그 운동장은 해방 전에 사택 두 곳이 불이 난 자리인데 “일본인들은 불이 난 자리에는 집을 다시 짓지 않는다”는 풍습이 있어서 그 자리를 평탄 작업을 해서 마당을 만들어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우리들은 그 마당을 운동장이라고 불렀다. 마땅히 놀 수 있는 공간이 없는 종업원 사택 단지에서 그 운동장은 항상 아이들로 가득 찼다. 그곳에서 공도 차고, 야구도 했으며, 깡통차기, 오자미던지기, 구슬치기, 주전자로 물을 부어 경계선을 그어놓고 사다리가이생, 오징어가이생 등의 놀이를 했다.
(나는 아직도 “오자미”라는 뜻은 알겠는데 “가이생”이라는 뜻을 모른다)
그 당시만 해도 제기차기 비석치기 같은 순수한 우리 민족의 놀이 보다 일본인들에게 전래된 놀이를 많이 했다.
한때 배드민턴이 유행되었을 때는 동네 아저씨들도 가족들과 함게 운동장에 나와서 배드민턴을 치곤 하셨다. 아저씨들과 우리들과 가끔 시합도 했는데 우리가 이기면 우리 모두는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아저씨들은 승리한 우리들에게 “아이스케키”도 사 주시고 잘 한다고 칭찬을 하시곤 하셨다. 장성해서 생각하니 그때 아저씨들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일부러 경기를 재미있게 하시기 위하여 아슬아슬하게 져주신 것이다. 지금쯤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아저씨들은 내 나이가 지금 고희에 닿아가니 아마 소천하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운동장은 통행로(通行路)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회사에 출,퇴근하거나 학생들이 등, 하교할 때 좁은 사택 골목으로 통행을 조금이라도 덜하기 위하여 운동장을 많이 이용하여 통행했다. 그 분주한 운동장 덕분에 운동장 앞에 사는 나는 친구와 형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아저씨들에게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 형들과 아저씨들은 내 이름이 지역 지명과 같아서 그런지 나를 보면 목적도 없이 내 이름을 부르시고 귀여워하셨다.
◼ 사내는 개구쟁이로 자라야
부모님께서는 항상 장남인 나와 내 동생들에게 “너희들은 친구와 싸우지 말고, 매를 맞고 오더라도 남을 때리지 말고, 윗사람을 보면 항상 인사를 해야 한다“고 교육을 시키셨고
운동장에 보기 흉한 너저분한 쓰레기는 먼저 줒으라고 하셨다. 우리 형제는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다.
자식을 잃은 깊은 ”트라우마“가 있는 어머니는 자식들이 혹여 ”아프지는 안을까 ? 다치지는 안을까 ?“를 항상 지나치게 걱정하시며 사셨다. 우리가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노는 것에도 소심하게 신경을 많이 쓰시는 반면 선친의 생각은 다르셨다.
선친께서는 ”사내들은 아무런 음식이나 다 잘 먹어야 하고,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해야 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개구쟁이로 자라야 한다“고 하셨다. 6. 25 때 부잣집에서 자란 아들들이 거칠고 열악한 음식을 잘 섭취하지 못해서 영양실조로 쉽게 죽었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고 ”넉넉한 환경에서 왕자나 공주 대접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며, 고생을 하며 사는 사람들 보다 생활력이 없기 때문에 재력이 없으면 평생을 힘들게 산다“고도 하셨다.
호탕하신 성격의 선친과 소심한 어머님의 자식 양육 방침이 다소 달라서 의견 충돌도 있었지만 어머니도 나중에 하는 수 없이 선친의 방침을 수용하여 우리가 개구쟁이로 자라는 것을 좋은 감정으로 지켜 보셨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어려서부터 어린애들이 기피하는 개고기를 먹었고, 나는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도롱룡과 개구리 알도 생으로 먹고, 뱀도 잡아 구워 먹기도 했다. 전쟁 놀이를 하거나, 산에 가서 놀다가 옷이 찢겨도, 도랑에서 망우리 등 불장난을 해서 옷을 태워도 별로 꾸짖지 안으셨다.
한번은 비석 치기를 하다가 상대방이 던지는 비석 조각이 튀어 쪼그려 앉아 있는 내 머리로 날아와서 부속병원에서 몇 바늘 꿰맸는데 그 비석을 던진 친구의 어머니가 송구한 마음으로 우리집에 찾아 왔을 때 어머님은 ”어린애들이 놀다가 한 일인데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고 다음날 친구 어머니가 백설기 떡을 가지고 오셔서 비석 돌을 던진 친구와 함께 먹기도 했다.
(그 당시는 6.25 휴전 이후라서 전쟁놀이를 많이 했다. 연소가 완료되어 밖에 버린 탄재을 주먹 크기로 조각 내어 던지거나, 장대 끝에 줄을 메고 쓰레기장에서 줒은 신발을 꿰어 돌리면서 상대방을 공격했다. 우리 동네는 고두암, 단양촌을 상대해서 싸움을 많이 했다. 그때도 연탄재에 눈을 맞아 안과에 간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일은 흔히 있었다)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도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 선친께서 식사를 하시면서 여러차례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사내들은 아무런 음식이나 다 잘 먹어야 하고,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해야 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개구쟁이로 자라야 한다“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사람과 어울려라“
”우등상 보다 개근상이 더 좋은 상이다“
(나는 어린시절 그 말씀에 잘 순종하며 살았던 것 같다. ”공부를 잘 하라”는 말씀보다 그 말씀이 따라 하기 쉬웠기 때문이 아닐까?!)
◼ 학창 시절
❏ 초등학생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학부모들은 입학한 자식이 스스로 등교할 수 있도록 며칠 간은 등교 길이 익숙해지도록 데리고 다니는데 대부분은 어머니가 데리고 다닌다. 그러나 나는 선친께서 데리고 다니신 것 같다. 왼쪽 가슴에 이름표와 코를 흘리면 닦을 수건을 단 차림으로 구래국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찍은 몇 장의 사진을 보면 사진 좌우에 많은 아주머니들이 자식의 손을 잡고 서 있는데 자식을 데리고 서 있는 남자는 두명 뿐이다. 그 중에 한 분이 선친이시다. 선친께서는 어렵게 늦게 낳은 아들이 건강히 자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게 되니 무척 대견하고 좋아서 데리고 다니신 것 같다.
학교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많이 계시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악기인 ”풍금“도 있고 38선이라고 하면서 중간에 칼로 파서 금을 그어 놓은 나무로 만든 책상과 혼자 앉는 의자도 있고 넓은 운동장도 있었다. 운동장의 울타리 중 토록산 방향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가시 철조망으로 되어 있어서 공을 찰 때는 조심을 해야 했다. 공이 철조망에 닿으면 영락없이 펑크가 났다. 우리들이 가지고 노는 공이란 거이 고무로 만든 공이기에 쉽게 구멍이 뚫렸다.
3학년까지는 오전 수업을 마치면 하교하였는데, 4학년이 되어서는 오후에도 수업을 함으로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는데, 그 당시 보릿고개가 있던 가난한 시절이라 학교에서는 미국과 UN에서 빈민국의 기아(飢餓)를 지원하기 위하여 원조한 옥수수 가루를 교육청에서 받아서 학교 급식소에서 스팀으로 쪄서 만든 노란색 옥수수 빵을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결식(缺食)학생들에게 지급했는데 그 맛이 고소해서 도시락과 바꾸어 먹기도 했다.
(옥수수 빵을 지급받은 친구는 도시락과 바꾸어 먹자는 친구들이 많으면 반찬이 좋은 도시락을 선택해서 바꾸어 먹으므로 가끔 그 빵이 먹고 싶으면 어머니께 ”계란후라이“를 해 달라고 해서 바꾸어 먹기도 했다)
겨울에는 광업소에서 큰 드럼통으로 만든 석탄 난로를 교실 가운데 설치하여 난방을 했는데 4째 시간이 끝나면 점심 시간이므로 4째 시간 직전에 난로 위에 도시락을 겹겹이 올려 놓고 덥혀 먹었다. 여기에는 힘의 질서가 작동한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친구는 난로와 접하는 아랫 면에 그렇지 않은 친구는 윗 면에 도시락을 올려 놓는데 수업 중에 밥이 타는 냄새가 나면 선생님이 도시락 위치를 바꾸어 놓곤 하셨다. 그때는 힘의 질서가 소멸되는 순간이다.
(우리 학교는 광업소에서 난로와 연탄을 제공해 주어서 비교적 따뜻한 겨울을 지냈지만 봉화나 풍기 지역에서 전학 온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겨울이 오기 전에 솔방울을 주워서 난방 준비를했고 매일 아침 난로를 피웠다고 했다)
학교 건물은 해방 전에 지은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서 교실과 복도 바닥에 틈이 많아 연필 등이 그곳으로 가끔 빠졌다. 때로는 연필을 줍기 위하여 친구들과 교실 바닥 환기구로 기어 들어가서 생각 외의 소득(?)을 올려 친구들에게 연필과 크레온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청소를 할 때는 가끔 양초를 마루 바닥에 문지르고 ”구구단“을 외면서 광이 나도록 닦았다.
한번은 집에서 구구단을 외우는데 선친께서 구구단을 다 외울 수 있냐고 묻으시기에 7단은 조금 힘들지만 다 외울 수 있다고 하니까 ”그럼 됐다“라고 하시고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선친께서는 ”초등학교 때는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는 한글과 구구단을 모두 익히면 되고, 건강하고, 친구를 많이 사귀면 된다”고 하시며 “공부를 잘하라”고 강요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어머님의 생각은 선친과 다르셔서 6학년부터 친구의 큰형님 되시는 분에게 과외공부를 받게 하셨다
5학년이 되니 친구가 많아졌다. 칠랑리에 분교가 있는데 칠랑리 지역에 사는 아이들은 4학년까지 분교에서 배우고 5학년 부터는 본교로 올라온다 그 덕분에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친구들과 잘 아는 형들을 따라다니며 가 본적이 없었던 조산골, 본구래, 고무래골도 가 보았고, 치랭이골, 신대골, 민골, 여네골, 박쥐골, 소눈갈굴, 등등 상동 골자기라는 골자기는 거이 모두 가서 쪼대흙도 캐고, 고기와 가재도 잡고 잣도 따고 머루 다래 등 산열매도 따면서 신발이 닳도록 피곤한지도 모르고 많이 어울려서 돌아다녔다.
(중학교 입학 전에 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지역 산천(山川)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다. 선친의 말씀처럼 초등학교 6년간은 건강한 몸으로 개구쟁이 짓을 하면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면서 씩씩하게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