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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평초등학교총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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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마당(하고싶은 말) 스크랩 목장길 따라 걷는 화양면 안양산둘레길
미평교 추천 0 조회 53 11.05.15 17: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수풀꽃사랑에서는 5월 21일 풀꽃답사를 화양면 안양산으로 간다. 오후 2시에 쌍봉사거리 나한의원앞에서 모여 22번 버스를 타고 화양고입구에서 내려 화동리, 화양초교옆, 안양동마을뒤에서 안양산 둘레길을 걷는다.

 

 

말을 방목하던 화양면

'말을 낳으면 제주도,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맞는 것이 아니다. 여수 화양면은 군사용 말, 군마를 기르던 순천부 소속 '곡화목장(曲華牧場)'이 있었다. 원래 이름은 '백야곶목장'이었다. 여기에서 '화양(華陽)'이라는 지명도 나왔다. 사서삼경 중 서경 주서편에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이라는 구절(句節)에서 화양이 나왔다고 한다. 곡화목장을 관리하던 감목관이 거주하던 돌고개마을의 뒷산 이름도 화산이었다.

 

 

 

곡화목장은 소호동 바닷가로부터 화양면 창무마을을 거쳐 오천마을까지 돌로 목장 경계성을 쌓았다. 만리성이라고도 하는데, 그 성의 돌에 흥양과 보성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고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쪽 화양반도를 목장으로 삼아 말을 놓아서 길렀다. 그 당시 곡화목장에서 길렀던 말은 1,027마리이고, 목자는 446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봄에는 통구미산, 여름에는 이영산, 가을에는 천마산, 겨울에는 서이산 등 철따라 이목구미의 5개산으로 말을 이동하면서 길렀다. 밤이면 말이 도망치지 못하게 이웃 장수 마을 사이 1㎞ 산등성이에 등불을 켰다고 한다. 목자들이 말을 이끌고 다니던 그림같은 모습이 화양의 산들과 잘 어울렸을 것 같다. 

 

 

목장을 관리하던 감목관은 종6품의 관리이다. 화동리에는 곡화목장 건물이 있었는데 1894년 동학농민군과 관군인 좌수영군과 전투에서 불타버렸다. 돌고개마을에 있는 화양고등학교 입구에 감목관 선정비가 있다. 1970년대까지 15기가 남아있었는 현재는 5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중 3기는 비를 만들어 세운 것이고, 2기는 고인돌의 덮개돌에 억지로 기록되어있는데 1기에는 2명, 다른 1기는 3명의 비액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는 순조 23년(1833년)과  철종 5년(1854년)에 세워졌는데 어떤 것은 윗부분의 1/3이 훼손되고, 읽기가 어렵게 비문이 훼손되어있다. 이것은 감목관의 지방민에 대한 횡포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다. 지금도 억지 춘향식의 공덕비가 세워지고 있는데 참고해야 할 일이다. 감목관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이충무공전서'에 보면 순천 감목관 조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돌고개와 화동리

화동리를 옛날에는 돌고개(乭古介)라고 부른 것은 화양고 입구에 고인돌이 있어서 그랬을 것 같다. 옛날에는 그 돌이 고인돌인지 모르고 편평하게 생긴 큰바위와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있어서 고개를 지나면서 많이 쉬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화동리라고 부른 것은 조선조 초기부터 곡화목장의 동쪽이라는 뜻에서 곡화의 ‘화(華)’와 동쪽의 ‘동(東)’을 합하여 지어진 마을 이름이다.

 

화동리 일대는 화양농공단지가 조성되기전에는 수백 기의 고인돌이 모여있는 고인돌의 천국이었다. 마을 장년층은 어린 시절 고인돌 주변에서 돌화살촉이나 돌칼을 주워서 놀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화동리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여러 이름의 마을이 있다. 시장이었던 저잣골, 건너 마을인 건너뜸, 말에서 내려 걸었던 하막등, 나무통샘, 뒤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통후동, 가죽을 다루던 사람이 살았다는 갓바치가 있었다. 화동리와 동쪽 안골 사이에 있는 들이 곡화목장에서 유일하게 장이 섰던 장터이다. 보름마다 만조가 되면 이웃 안정리 해안선을 따라 안골마을 아래까지 배가 들어와 장을 열었던 곳이다. 이 장이 조선 말기까지 열다가 조선 후기부터는 뱃길이 편한 나진마을로 옮겨겨 나지포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안양산과 안양동

옛날 노승 한 분이 마을 앞을 지나다 마을 이름을 안양이라 지어 부르면 자식들이 고이 자라 부모에게 효를 다해 받들어 모시고, 마음이 편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안양동(安養洞)이라는 이름을 한자 풀이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다. 동촌의 안쪽, 양지쪽 마을이란 뜻으로 자연스럽게 지어진 이름이다.

 

안양마을 남쪽 대청동(大淸洞)마을은 대청사라는 큰 절이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오지만 이를 확인할 만한 옛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안양마을 뒤 안양산(安養山)은 옛기록에 화산이라 하여 화양면 이름이 생겨난 까닭이 되었고, 산자락에는 안양사라는 절터가 있었던 흔적이 있다.

 

 

안양마을 회관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큼지막한 오이고추를 다듬고 계셨다. 화양면에서도 이렇게 크고 싱싱한 오이고추가 재배되고 있는 것에 놀랐지만 몇개를 건네면서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신 것이 보기 좋았다. 안양산을 오른다는 말에 무척 궁금해 하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이다.

 

 

동네 뒤에서 내려다본 건너 이영산과 안양산 사이 들은 분지를 이루는 큰들이어서 풍요롭게 보였다. 오르는 길이 냇가 징검다리 모양으로 넓적한 구들장 같은 돌을 놓아서 색다르게 느껴졌다. 언덕바지에 풀섶사이에서 백옥같이 흰 꽃을 주렁주렁 머금고 있는 왕둥굴레가 반겨주었다. 둥굴레는 산과 들의 양지 바른 곳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이곳 양지바른 안양동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안양산 둘레길

안양산 둘레에는 석교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이곳 안양동에서 올라오는 임도가 나진재쯤에서 만난다. 여기저기에서 묘를 가는 길인지 몰라도 길들이 많이 뻗어있어서 사람을 혼동케 한다. 오르기 좋은 숲길을 택하였지만 안양산이 기껏 229m 밖에 되지를 않다. 그것도 오르지 않고 중턱을 감고 휘돌아가니 홀가분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묵혀버린 길에 때마침 보랏빛 오동나무 통꽃이 심심찮게 깔려서 마음을 들뜨게 한다.

 

 

 

 

 

 

이에 질세라 '앞잡이'라는 벌레가 길을 안내하고, 참나무 토막에는 어김없이 '가죽두꺼비하늘소'가 영낙없는 두꺼비 모양의 단단한 얼굴에 새까만 점의 눈, 안테나 같이 쭉 뻗은 더듬이를 흔들면서 빠르게 옮겨다닌다. 어쩌다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 청춘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부끄러운 장면을 들키고 꼼짝을 하지 않는다. 이제 눈을 돌려서 조금만 나뭇잎을 들추면 보이지 않던 벌레들이 바삐 오가며 부산을 떨고 있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나뭇잎 안에 작은 알을 낳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여러 겹으로 접어서 가장 작은 부피의 집을 만든 애벌레 집도 있었다. 그 나뭇잎을 애벌레가 깨어나면서 먹이로 먹는다는 것을 들었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찮은 미물이라는 벌레도 이렇게 세상을 사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을 보고서 오만불손한 인간으로서 부끄럽기만 하다.

 

 

 

차들이 다니지 않은 임도에는 지금 국수나무가 국수 가락처럼 치렁치렁 가지를 뻗고서 찬물에 담궈서 한 그릇 말아주기를 기다리는 듯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좁쌀 같은 흰꽃들이 가지 땜시 누르스럼하게 비춰지지만 숲으로 외부인 침입을 막는 역할을 가시달린 산딸기나무와 같이 충실하게 잘 하고 있었다. 때죽나무꽃도 곧 한철이 될 것 같다. 꽃망울이 물이 오를 때로 올라서 툭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마을 사람이 암시를 한 것처럼 임도에는 맷돼지가 다닌 흔적이 보였다. 아직은 꽃이 피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우산살을 활짝 펴고 있는 우산나물이 많이 보였다.  간간이 솜사탕 터진 것마냥 흰꽃을 피우고 있는 노린재나무도 이름처럼 노린내는 나지 않고 시집 가는 새색시 드레스처럼 화사하기만 하다.

 

 

 

조금 널따란 임도만 걷는 것이 약간 단조로울 때 오르막길에서 더 이상 큰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홀아비꽃대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편백나무가 일렬로 줄을 맛춰 하늘높이 키 자랑을 하고 있는 편백숲을 지난다. 원시림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지게 하는 음지의 오싹함이 온몸을 감싼다. 요즈음 피톤치드가 가장 많이 나온다고 해서 사람들이 즐겨찾는 건강숲이어서 더 오래 걷고 싶지만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싶어진다.

 

 

 

숲속 사이로 숨바꼭질

 

이제부터는 소사나무숲이 시작된다. 누가 언제부터 이 길을 걸었는지,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오래된 길이 발길을 인도한다. 조금만 한눈을 팔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숲속, 정신 바짝 차리고 고개를 숙이고, 암호를 따라서 오리엔테링하는 기분으로 걷는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일 필요가 없다. 발길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나진고개에서 석교마을 가는 길이 보이고, 멀리 나진앞바다가 보이는 바위까지 오른다. 혹독하게 여린 나무 줄기 곳곳에 잔뜩 성이 나있는 가시가 꽂혀있는 엄나무 묘목이 눈에 많이 보인다.

 

 

뿌리를 캐서 한방에 쓴다는 백선꽃이 드문드문 피었다. 안양산 둘레길에서는 풀꽃을 보기가 쉽지 않아서 백선꽃을 보아서 그래도 반가웠다.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니 잘 다듬어진 임도를 만나서 내려왔다. 다시 포장된 석교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나서 숲속을 완전히 벗어난 것 같다.

 

 

 

소나무 3대가 한가지에 오손도손 살고 있는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또, 엄청나게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암술과 수술이 잔뜩 벼르고 있다. 햇볕이 덜 나고 습기가 많아서 꽃가루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오므라들고 있다는 김정일님의 친절한 소개에 또 식물의 위대함, 자연 적응 능력에 감탄하였다.

 

 

 

아스팔트길을 포기하고 올라선 장군산

나진리에서 화양중학교를 지나 옥적으로 가는 고개를 '나진재'라고 한다. 여기에서 나진리쪽으로 아스팔트길을 따라 걸으면 쉽게 갈 수 있다. 지금껏 숲속길을 살포시 걸었던 감촉이 딱딱해지면서 발끝에서 온몸으로 천근만근 힘이 들어간다. 그래서 어렵사리 찾아낸 장군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선뜻 초입에 들어서기가 어렵지만 안양산에서 걸었던 숲속을 헤치면서 걷는 길은 혹시나 뱀이 나오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걷는다.

 

 

 

 

 

 

장군산은 투구봉이라고 하기도 한다. 128m 밖에 안되지만 나진쪽으로는 급하게 뻗어내려서 오르는 길이 조금 힘이 든다. 정상에는 덕석을 깔아놓은 듯 넓적한 바위가 쭉 이어진다. 가막만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오르면서 흘렸던 땀을 식혀준다. 모장골쪽으로 내려다보면 '이렇게 깊은 숲이 여수에 또 있구나'하는 감탄이 감사의 마음으로 바뀐다. 산소 공장인 숲이 앞뒤 지척을 가릴 수 없이 우거져 있고, 이미 소나무는 지나가고 상수리나무 같은 참나무 종류가 산꼭대기를 점령하여 숲의 진행 속도를 가늠케 해준다. 벼랑에는 맑은 공기를 웅변해주듯 표면이 깨끗한 바위손이 여기저기 푸릇푸릇 자라고 있었다. 동양 최대 석유화학산단이 있으면서 이 정도로 맑은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숲이 있기 때문이다.

 

 

 

장군산등성이를 따라서 축지법을 쓰듯 걷다보면 나진리로 내려온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옆 골짜기를 가는 골이라고 부르며 초등학교 때 불렀던 교가 속의 '장군산과 소장쪽 천마산'을 ?조린다.

 

나지개, 화양면 소재지 나진리

화양면 소재지인 나진(羅陣)마을은 바다의 깊이가 낮아 물이 빠지면 배가 다닐 수 없는 낮은 개란 뜻의 '나지개'가 옛 이름이다. 한자로 바뀌면서 나지포(羅之浦)라고 하다가 비단 같이 아름다운 포구, 나진(羅陣)이라고 한다.나진마을 남쪽 큰나지개마을나진마을에서 처음 사람이 살았다고 하여 10가구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큰나지개'라고 부른다.

 

 

나진마을이 화동리보다 마을이 작지만 화양면소재지가 된 것은 조선시대 때 곡화목장이 있었던 화동리 주민들이 감목관의 횡포에 시달려서 면사무소 설치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항로표지기지창 건물 뒤편 언덕을 당머리라고 하는 것은 여러 지역처럼 닭의 머리처럼 생겨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한자로는 계두(鷄頭)라고도 하며 나진마을은 바닷가에 있어서 나루가 있던 곳이 많은데 현재는 나루꼬지조금나루 등의 마을 이름이 남아있다.



나진마을 안 골짜기는 골짜기마다 재미있는 이름이 많다. 나진초교 뒤편 골짜기가 가늘게 이어졌다고 가는골, 화양중학교 올라가는 쪽 밭이 많은 전골, 건너 논이 많아서 논골, 복숭아밭이 있던 복성밭골, 살쾡이가 살았던 바위 씰가지박골, 피가 많이 자라던 피밭골, 입구가 넓어서 아귀 같이 생겼다는 아구창골 등 저마다 지형의 특징을 잡아서 특색 있는 이름으로 부른다.

나진마을을 지나 웅동마을고무골이라는 땅이름이 ‘곰[熊]골’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한자로 바뀌면서 ‘곰 웅(熊)’ 자를 써서 웅동이라 하였다. 예전에 곰이 많이 살아서, 이 마을 주변의 땅 모양이 곰의 모습을 닮아서 '고무골'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지만 고무골은 움푹 들어간 곳을 뜻하는 구무와 골이 합쳐 이루어진 말로서 지형이 구멍처럼 들어간 마을이라는 뜻이다.



나진마을 남쪽 2㎞ 지점에 자리한 소장마을 남동쪽에 있는 해안가 굴구지마을은 마을이 해안으로 깊이 들어온 후미진 곳이 굴(窟)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굴구지라고 한다.

 

 

 

목장길 따라 도착한 곳 목장원 식당

나진마을에서 창무쪽으로 빠지면 용주리로 갈라지는 곳 언덕에 '목장원식당'이 있다. 이 식당에서 앞바다를 바라보면 백로와 왜가리 천지인 밤섬이 보인다. 용주리 고돌산진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치좋은 곳에 있어서 맛을 보기 전에 경치에 반한다. 식당 바깥 쉼터와 정자에 앉아 바깥 경치를 구경하면서 식사를 하면 절로 입맛을 당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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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에 만원하는 행복한 밥상은 아기자기하게 그림처럼 반찬 그릇을 진열을 하여서 주인의 미적 감각에 깜짝 놀란다. 거기에다 우리 지역 한국화가 송암 강종래 선생님의 여러 미술 작품까지 걸려 있어서 호사스러운 곳에 초대받은 느낌이다. 요즈음 사람들이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건강식으로 마련된 음식은 혀를 자극하여 천년만년 살것 같은 자신감을 갖게 한다. 주위에서 뜯은 나물과 직접 기른 채소로 조리를 해서 더욱 믿음이 간다. 음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조금씩 담은 센스에 계속 나오는 여수 정통 음식 순서에 따라 맛을 다 보아도 크게 배가 부르지 않는다. 

 

 

곡화목장이 있었던 화양면, 감목관이 근무를 하였던 화동리에서 시작하여 안양산과 장군산을 거쳐 목장길 따라 걸었다. 꿈에 그리던 그림 같은 너른 초지를 따라 거닐지는 못해서도 마지막은 목장원에서 마치게 되었다. 옛날에 불렀던 '목장길 따라' 노래를 부르면서 추억을 더듬어본다.

 

"목장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 님 함께 집에 오는데

목장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 님 함께 집에 오는데

스타도라 스타도라 스타도라 품바

스타도라 품바 스타도라 품바스타도라

스타도라 스타도라 품바 스타도라 품바 품품품"

 

여수풀꽃사랑 금오도 비렁길 1박2일 안내

▣ 때 : 5월 28일(토) - 29일(일) 1박 2일

▣ 곳 : (첫째날) 금오도 함구미 - 용두 - 불무골 - 두포 - 가는고지 - 굴등 - 세밭골 - 직포(점심) - 응봉산 - 못동 - 안골 - 은금동 - 심포(1박)

(둘째날) 심포 - 망산 - 장지 - 안도 상산 - 이야포 - 점심

▣  숙식 : 민박, 첫째날 점심, 저녁, 둘째날 아침 가정 식사, 둘째날 점심 - 횟집

▣ 출발과 도착 : 09시 40분 교동 여객선터미널 출발, 18:00 교동여객선터미널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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