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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오기 전에 회춘할 수 있는 청춘경영(三春경영) |
2009.12.25, 유영만 |
청춘경영: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의 꿈과 현실을 이어주는 7가지 생각법(명진출판사)
프롤로그 |
Step5_성숙의 시간에 도착했어
프롤로그 아무도 손 잡아 주지 않는 외로운 청춘들에게 스무 살의 나는 꿈이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제 1부 꿈을 꾼다는 것이 뭔지 몰랐습니다 부족한 환경은 심한 몸살과 같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주로 가난한 집에 태어난 아이가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개천에서 용 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개천은 용이 탄생하는 곳의 하나입니다. 어려운 일을 일컬어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합니다.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드물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개천에서 나온 용과 하늘에서 별을 따는 사람의 공통점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좋은 환경이 언제나 좋은 조건으로 작용하진 않습니다. 개천이라는 악조건과 별을 따기엔 너무도 드높은 하늘은 한계 상황에 가까운 삶의 터전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한계 상황이라고 도전을 포기할 때 누군가는 “왜 안 돼?”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은 그렇듯 “왜 안 돼?”라고 묻는 사람을 골라서 길을 열어 줍니다. 그러나 이렇게 묻는 데는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질 수 있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 장차 큰일이 맡겨지는 사람도 따로 있는 듯합니다. 그들이 가는 길엔 어김없이 시련과 역경이 ‘짠’하고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신기하게도 자신의 걸림돌이 큰일을 하는데 필요한 디딤돌임을 어느 날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고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나 별다른 고생 없이 부모님 도움으로 유학을 마치고 쉽게 대학교수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행운이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내 얼굴에는 시련과 역경을 겪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환경을 원망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환경은 단지 내게 심한 몸살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심하게 몸살을 앓고 나면 몸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래서 내게 누군가 ‘아름다움’이 뭐냐고 묻는다면 앓고 난 사람에서 풍기는 ‘사람다움’이라 답합니다. ‘아름다움’은 ‘앓음’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문암리 908번지, 이곳이 내가 태어난 곳입니다. 얼마 안 되는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어렸을 적에 돌아가셔서 어머니 홀로 저를 키우셨습니다. 근근이 학교를 다니며 낮에는 농사를 짓고, 산에 가서 땔감을 마련하고, 소를 몰고 들판에 가서 풀을 뜯어 먹이곤 했습니다. 봄에는 냉이와 달래를 캐먹고, 여름이면 토마토와 오이를 재배해서 먹고, 가을이면 논밭에서 나는 곡식을 거둬들였습니다. 개구리와 메뚜기는 참으로 맛있는 간식이었습니다. 들이나 산에서 나는 산딸기와 뽕, 머루 등은 배고픔을 잊게 해준 중요한 식량원이었습니다. 참나무에서 나오는 도토리로 겨울철에 묵을 쑤어 먹는 즐거움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가난했지만 가난함이 고통인 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려웠던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예 농사를 지었습니다. 어머니가 혼자 어렵게 꾸려가는 살림살이로는 중학교 입학금을 낼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 밭에 나가서 김을 매고 돌아오는 길이면 친구들이 학교에 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그 애들이 보이지 않는 길로 돌아서 집에 오기도 했습니다. 땡볕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밭과, 흰 쌀밥을 먹게 해주는 몇 평의 논이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일 년이 지났습니다. 중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더 배우고 싶었습니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어느 누구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어머니를 졸라 보았습니다. 어쩌면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마음 단단히 먹고 말을 꺼냈습니다. “어머니, 저도 이제 학교에 갈랍니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시더니 “공부하고 싶으면 그리 해야지 어찌 하겠나. 더 늦기 전에 중학교 가거라.” 하셨습니다. 학비는 농사지은 것으로 마련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했던 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투잡스를 한 셈입니다. 그렇게 학교가 가고 싶어서 들어갔건만 1학년 때는 성적도 별로인 데다가 어리바리하게 지냈습니다. 축구에만 몰입했습니다. 축구화가 없을 때는 맨발로 공을 찰 정도였습니다. 발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무식하게 했습니다. 어머니가 콩과 팥을 팔아서 축구화를 장만해주셨을 때는, 정말 하늘을 날 듯 기뻤습니다. 2학년 때부터 공부를 시작해 졸업 성적은 전교 5등이었습니다. 아무튼 남들 다 가는 중학교도 내게는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용접을 하며 남다른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은 대부분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인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그 학교는 전액 장학금에 기숙사 시설까지 완비된, 파격적인 공업고등학교였습니다. 중학교 졸업 성적이 좋은 편이었기 전액 장학금과 기숙사비 면제 조건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은 책과 필기구 대신 깎다 만 쇳덩어리와 쇠를 다듬는 줄이 담긴 무거운 가방이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던 나날이었습니다.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두 개의 철판을 붙이던 용접공으로 청소년기를 보낸 대학교수. 이것이 나입니다. 요즘도 거리를 지날 때 가끔씩 건설 현장 같은 데서 용접하는 모습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게 되질 않습니다. 용접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기에 용접공의 표정은 언제나 진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또 손이 시리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압니다. 추운 겨울날 철판을 만져본 사람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철판은 의외로 온도에 예민합니다. 추울수록 더욱 차가워졌던 철판과, 더울수록 더욱 뜨거워지는 용접질과 함께 십대를 보냈습니다. 밤늦게까지 실습실에서 용접질을 하며 용접 기능공 시험을 열심히 준비했으나 우습게도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습니다. 인문계로 치면 대입 수능시험에서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지요. 용접하다가 딴 생각을 했을까요? 나는 그때 도대체 왜 떨어졌는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일찍 아버님을 여의였기에 내겐 어머니의 존재감이 워낙 컸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런 어머니마저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삶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나를 궁지를 몰아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다가온 시련에 대해 내가 대응할 수 있는 길을 방황뿐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별 것 아닌 일이 커져 ‘후배 구타 사건’의 주동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무기정학을 당했고, 괴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처음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학교 근처 포장마차에서 하소연과 푸념으로 얼룩진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방황은 계속되었습니다. 방황하는 공고생. 기대도 희망도 없는 인생이 그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2부 나도 꿈을 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이 인생을 바꾸는 기적이 일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졸업 조건에 명시된 대로 무조건 한국전력공사에서 9년 동안 의무적으로 근무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첫 직장 생활이 평택화력발전소 운전 기능공이었습니다. 휴일과 국경일에 관계없이 사흘 일하고 하루 쉬는 근무 조건이었습니다. 물론 많은 젊은이들이 취업하고 싶어하는 선망의 직장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복지 혜택에, 어느 정도 미래도 보장되는 직장이었습니다. ‘안정’이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라면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이었습니다. 공고 출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감사해야 할 일자리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하루하루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불행하게도 내가 ‘청춘’이었기 때문입니다. 청춘이 아니었다면 별 문제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 내 심장이 뛰는 인생을 살고 싶다거나 이런 생각까진 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무덤덤하게 일을 했고, 월급날이 끼는 주에는 매일매일 술을 마셨습니다. 목적을 알 수 없는 방황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 지 방향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술친구를 구하지 못해 혼자 술을 마신 날이었습니다. 술집 근처에 서점이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 책을 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문득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서점 안의 시집과 소설책 코너를 차례로 어슬렁거렸습니다. 그러다 그 옆의 수험서 코너 한구석에 꽂혀 있던 책 한 권을 뽑아들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이라는 지독히 촌스런 제목의 책 한 권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지는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그 책은 고시 합격 체험 수기집이었습니다. 책을 쭉 훑어보던 중 공고졸업생이 고시에 합격하기까지의 여정을 절절하게 그려 놓은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때 잠시 멍한 기분이었습니다. 공고출신이 고시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엔 멍하더니 그 다음엔 명치끝이 아려왔습니다. ‘공부’. 이 두 글자가 아리는 명치끝을 파고들었습니다. 그 날로 술 마시던 습관을 끊었습니다. 고시공부를 해야겠다는 인생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독학으로 고시 패스할 자신은 없었기에 우선 법과대학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대학입시를 위한 사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주야를 겸행하는 강행군이었지만 인생의 목표가 생겼기에 피곤하지도, 두렵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내가 가진 것은 공고 졸업장과 공고에서 익힌 기술 몇 가지가 전부였습니다. 대입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과목은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고전이라는 과목은 고문처럼 느껴졌고, 영어와 수학 실력은 중학교 3학년 실력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곧 한 해 동안의 공부 계획을 세우고 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 공부였기에 좌절과 낙망이 계속되었지만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물러설 수 없다는 투지밖에 없었습니다. 집채 만 한 발전기가 돌아가는 기계들 틈에서, 그 엄청난 소음도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루 이틀,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습니다. 생각만큼 공부 진도는 안 나가고, 예상했던 점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삼 년 동안 용접만 하다가 다시 잡은 책은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슬럼프에 빠져 한동안 책을 놓기도 했고,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목표 없는 인생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진 않았습니다. 술을 끊고 공부를 시작할 때 아무도 모르게 써 놓았던 사직서를 꺼내 보았습니다. 다시 독기를 품었습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고, 밤에 일하고 낮에 공부하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안 자도 몸과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가벼웠습니다.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매일매일 깨닫고 있었습니다. 직장생활과 병행해야 했기에 학원이나 과외공부는 엄두도 못 내었습니다. 완전한 독학이었고, 도움을 받은 게 있다면 방송통신고등학교 라디오 방송이었습니다. 긴 방황은 우연히 끝났습니다 애초에 사법고시가 목표였기에 당연히 법학과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차선책으로 행정고시를 준비할 수 있는 행정학과를 모색해봤지만 역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교육행정고시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교육공학과’라는 아주 생소한 학과를 선택했습니다. 그때 내 경제생활은 이렇게 꾸려졌습니다. 등록금은 입학할 때 반액 장학금을 받아 등록금의 절반을 첫 학기에 낸 다음 그 이후부터 빌딩 야간 경비를 해서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자취방을 사글세로 얻어서 살았습니다. 한전에서 퇴직금을 받은 돈으로 한 학기를 버틴 다음 1학년 2학기 이후부터 훗날 대학원 마칠 때까지 과외를 해서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등록금은 반에서 1등을 하면 안 내도 되었기에 무조건 1등이 목표였습니다. 나는 그것밖에 대안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내가 다니던 학과에는 나처럼 독기 품고 다니던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런 친구가 또 있었다면 그것 또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다른 친구들이 나를 위해 살짝 자리를 비켜주었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4년 동안 등록금을 안 내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독하게 살아야 하는 형편에도 불구하고 방황은 계속 되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오면 뭔가 해결될 줄 알았는데 크게 해결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방황을 끝내지 못하고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방황의 끝은 우연한 행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한 후 나는 어느 날 내 마음 속에 ‘고시’가 있는 한 마음이 산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고시 관련 책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세레모니’였습니다. 내가 고시 때문에 방황할 수밖에 없던 것은 그것이 내 진정한 꿈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진정한 법조인의 길을 가기 위한 과정으로서 고시의 목표를 가졌다면 그렇듯 마음 산란한 방황이 필요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냥 ‘고시’ 그 자체가 목표였기에 내 방황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고시 책을 태워 버리는 세레모니가 내게는 진정한 꿈을 품게 해주었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내 전공학과인 ‘교육공학’이라는 학문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제 3부 사람이 성장하면 꿈은 바뀔 수 있습니다 독해지지 않으면 젊음은 너무 짧습니다 나는 1등 성적을 올리며 교육공학과를 다니면서도 정작 교육 공학이라는 학문이 사람과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공부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교육 공학 공부를 통해 그때 깨달은 것이 ‘삶의 방정식’입니다. 삶의 방정식은 앎과 삶이 모두 옮음이라는 가치를 추구할 때 풀 수 있는 답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진정한 용기는 앎과 삶이 일치되는 가운데, 어떠한 딜레마 속에서도 옮음을 지향하는 자세와 태도에서 발휘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금에 절이는 고통이 없다면 생선은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앎과 삶의 여정을 옳음이라는 소금에 절이지 않으면 앎도, 삶도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 공학은 그렇듯 사람들이 ‘앎’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일을 돕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교육공학을 제대로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문은 단지 전공서적만 파서는 해결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인문학의 바다에 빠지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어린 시절 위인전 한 권 읽은 적이 없는 나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학교 친구들은 ‘농담하지 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나는 자라면서 책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책의 세계에 그토록 미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미쳤습니다. 책 한권을 잡고 끝까지 읽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어도 천장 위로 활자가 어른거렸습니다. 바둑이나 당구에 빠졌을 때 그런 체험을 한다고들 하는데 나는 책이 그랬습니다. 책을 읽으면 지식이 쌓였다는 뿌듯함 보다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는 왜 지금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을까 하는 자의식이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한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정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맞습니다. 그때 나는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았지만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끝없는 질문과 성찰이 나를 잡아끌었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입니다. 나는 그때 담쟁이가 되고 싶었고, 하루하루 담쟁이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미쳐야 미친다’. 내가 아끼는 말입니다. 김종량 총장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석사 과정을 할 수 있었고 생활비는 과외를 해서 충당했습니다. 석사과정이 끝나갈 무렵 미국 유학을 생각했습니다. 물론 내 형편을 따진다면 미국 유학은 언감생심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미쳐 있었기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내 손을 잡아 줄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한양대 총장님, 허운나 전 정보통신대학교 총장님, 그리고 지금 교육공학과 교수로 나와 같이 후배들을 지도하시는 권성호 교수님과 류완영 교수님 이런 분들이 모두 내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분들의 따뜻한 손을 잡고 나는 태평양을 건너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참, 그때 나를 잡아준 따뜻한 손들 중에는 내 아내의 손도 있습니다. 그 와중에 나와 결혼해줄 여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돈 없는 젊은이의 미국 유학은 공부와의 싸움보다는 돈과의 싸움이 먼저였습니다. 첫 학기 목표한 등록금 전액면제 혜택을 얻기 위해 또 한 번 나 자신과의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연구조교를 하면서 월 7백~8백 달러 정도를 받았는데 한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일식당에서 접시를 닦고, 스시 바에서 일하면서 가난한 유학생활은 아슬아슬하게 지탱되었습니다. 스스로를 독하게 몰아부쳤기에 1차 목표했던 기간 안에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논문 최종 심사를 마치고 심사위원들이 의사 결정을 하는 동안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유영만 박사!”라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지도교수가 악수를 청해왔을 때, 벅차오르는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박사 학위가 흔한 시대이긴 하나 내겐 정말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꿈을 찾고자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 독한 청춘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 4부 꿈으로 가는 여정은 장밋빛 대로가 아닙니다
더 높이 날기 위해서는 더 넓은 활주로가 필요합니다
박사 학위를 빠르게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신 모건 박사님(Dr. Robert M. Morgan)의 크나 큰 도움 덕분입니다. 모건 박사님은 내 인생의 멘토이자 영원한 스승입니다. 그 분은 내게 제자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분이십니다. 나도 가르치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 분의 사랑을 흉내내 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늘 부족하다는 자책을 하게 됩니다. 박사 과정 마지막 학기에 삼성그룹에서 파견된 연수단 통역과 강의를 하면서 입사 제의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박사 후 과정(Post Doctoral Course)을 통해 연구 능력을 더 육성할 것인지, 회사에 입사해 경력을 쌓을 것인지 고민하다가 글로벌 삼성그룹에서 경력을 쌓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성에 입사하면서 스스로 약속했습니다. 짧게는 삼 년, 길게는 오 년 동안 일하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일하자는 약속이었습니다. 또 거기서 얻은 소중한 체험을 사장시키지 말고 논문과 책으로 남기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삼 년이 채 되기 전에 대학에서 교수로 와 달라는 몇 번의 제안이 있었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기에 현장에 머무르기로 했습니다. 삼성인력개발원에 있는 동안 정말 소중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박사(博士)는 박사(薄士)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박사’의 ‘박(博)’이라는 한자가 얇을 ‘박(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사의 지식이 현실 변화에 별로 도움이 안 될 수 있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은 관념적 파편이 될 수도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실행력이 없는 교과서적 지식은 관념적 사치로 전락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배운 지식이 절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겸허함을 배웠습니다. 집을 지을 때 현실에서는 결코 지붕부터 짓지 않는데, 집을 그릴 때 교육현장에서는 지붕부터 그리도록 가르칩니다.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입니다. 집 짓는 순서와 반대로 집을 그리는 교육은 현실적 실천력이 상실된 사이비 교육이라는 자의식이 만들어진 시간들이었습니다. 오 년 동안의 현장 경험을 마무리하고 대학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현장에 있는 동안 끊임없이 논문과 책을 쓰면서 다가올 기회를 준비했습니다. 안동대학교를 거쳐 2001년 9월에 드디어 모교인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로 돌아왔습니다. 내 공부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당신의 ‘해피엔딩’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은 누군가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미니 시리즈군!”하고 쿨하게 한마디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남루한 내 청춘의 긴 여정을 풀어놓은 이유는 해피엔딩 스토리를 자랑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느끼는 동질감 때문입니다. 지금 청춘들은 손잡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도와줄 어른이 아무도 없습니다. 혼자 일어서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아무도 손잡아 줄 사람 없었던 내 청춘을 다시 떠올립니다. 좌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절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과 절망의 뒤안길에는 언제나 희망과 용기라는 선물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꿈을 꾸지 못한다고 우울해 하지 맙시다. 꿈은 언제든 내 가슴에 깃들 수 있습니다. 청춘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 방황의 여정입니다. 모든 문이 다 닫혀 있는 듯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가능성은 부족함과 미완성에서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부족함이 있어야 채우려는 열망이 생기고, 완성되지 않은 일이 있어야 달리려는 노력이 꿈틀거립니다. 부족함과 미완성은 그래서 잘못이 아닙니다. 실력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계속 갈고 닦지 않으면 금방 녹이 슬지요. 그래서 실력은 언제나 진행형입니다. 지금 실력이 없다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은 얼마 되지 않는 재주와 기교로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는 사람보다 작은 실천 속에서 장애물을 넘기 위해 애쓰는 사람에게 곁을 내준다는 사실을 믿어봐야 합니다. 순진하다는 비웃음을 듣더라도 이러한 믿음이 소중합니다. 그러다 보면 없던 실력도 생기는 법입니다. 실패를 해본 사람만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실패를 해봐야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잘 못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 아파보고 상처를 받아봐야 남의 아픔과 상처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많이 실패하고, 아파보고, 온몸으로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이 순진해 보이는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청춘은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고 깨닫는 시기입니다. 급하게 이루고 성취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남다른 생각이 무엇인지 그것을 탐구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생각하는 법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각 너머의 생각을 하고 싶어집니다. 생각 너머의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은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상상력이 없는 청춘은 청춘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의 청춘이 남루해 보이더라도 상상력이 있다면 그 청춘은 결코 남루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의 해피엔딩을 믿습니다.
2009년 12월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2010년 1월 19일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저녁 7시부터 "당신의 청춘을 경영하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있습니다. 명사모 회원님들의 많은 참석 고대할께요^^강연회 관련 싸이트는 아래를 참고하세요 http://w.hankyung.com/board/view.php?id=community_event&no=291&ch=co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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