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의 해석”(사도행전 21:7-14) 2013. 4. 7.
지난 주일이 부활절이었습니다만, 부활절은 부활주일 하루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부터 승천하신 날까지의 40일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시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도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사도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1:3).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어찌 시작하였으며 확장시켜 나갔으며,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시작된 부활신앙을 어찌 꽃 피우고 열매를 맺어 갔는지를 사도행전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사도행전 21장 본문은 사도 바울의 마지막 전도여행인 제3차 전도여행을 마쳐가는 귀로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가이사랴에 머물렀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물론 가이사랴에 오기 전부터 사도 바울은 앞으로의 일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면 어떠한 환난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며칠전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고별설교에서도 나타납니다.“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4)”
또 가이사랴에 오기 전 두로에서는 그곳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행21:3-4).
이제 가이사랴에서는 유대에서 내려온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가 나타나 사도 바울을 대하여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행동 예언입니다. 바울 사도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고 한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바울 사도의 일행들과 그곳 가이사랴의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일행들이란 11절 12절 14절의‘우리’라는 사람들인데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각 교회의 책임자들 6명(행20:4)과 바울의 수행기자와 같은 의사 누가입니다. 교회의 책임자들이란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거액의 연보인 선교비를 가지고 가는 각처 이방인 교회들의 대표들이지요. 또 그곳 가이사랴 제자들이란, 본문에 나타난 사람만 보더라도 유명한 빌립집사와 예언을 하는 그의 딸 넷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같이 바울 사도의 일행과 가이사랴의 제자들 모두는 하나같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그들 가운데는 빌립집사의 딸들 처럼 공인된 예언을 하는 자들도 있을 정도이니,저들이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을 따라 바울 사도를 위하여 취한 행동은 우리가 언뜻 생각해 봐도 올바른 조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가보가 누구입니까? 그는 이미 초대 예루살렘교회 당시 천하에 흉년이 있으리라 예언하였었으며 또 그 예언대로 성취됨으로 인하여 그당시 선지자로 공인된 사도행전 11장에 나오는 유명한 인물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저들의 권고를 뿌리치는 것입니다. 저들의 권고가 한낱 보통 사람들 같이 인정에 끌린 권고만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예언에 따른 권고였던 것입니다. 만일 저들의 권고가 사람의 인정에만 끌려서 된 것이라면, 예수님 수난 전의 베드로의 경우와 같이, 지탄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비슷한 상황에서 예수님으로부터 호된 질타를 당한 적이 있지 않던가요? 그당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을 하자 즉각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그때 예수님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크게 책망했습니다.“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당시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가이사랴에서의 다른 제자들의 경우는 베드로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봅니다. 성령의 감동과 너무나도 분명한 아가보 선지자의 행동 예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성령의 감동과 예언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기고 본인의 결심대로 막 밀고 나갔으니 잘못한 것이냐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른 입장을 취했으니 말입니다. 바울의 말입니다.“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으니 말입니다. 여기 바울은 분명히‘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죽을 것도 각오하고 간다고 하였습니다만, 그는 예루살렘 뿐아니라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위하여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일해 온 사람입니다. 그가 앞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고별설교에서도 복음증거를 위한 결사각오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만, 고린도후서 6장과 11장에 언급된 전도여정에서 받은 고난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을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3-28)”라고 고백하는 것만을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수고해온 바울 사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에 여하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하여 움츠러들 바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이방세계 전도결과를 이번 오순절을 맞아 총 마무리하는 보고를 하는 일과 함께, 그동안 이방인 교회들이 예루살렘 모교회로부터 받은 신령한 은혜에 대한 보답의 열매로써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는 거액의 귀한 연보금을 전달하는 아름다운 일을 생각하면 그 소임들은 더욱 회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차후 최후의 선교목표인 로마 경영을 구상하고 있었기에 더욱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예언의 해석’문제가 대두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향후 예루살렘에서 수난을 당할 것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성령의 감동으로 수없이 알려주신 듯 싶으며 또 두로와 가이사랴의 제자들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과 행동 예언으로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석이 달랐습니다. 한쪽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것으로 예언을 해석하고 받아들였고, 한쪽은 수난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주신 예언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양쪽 다 맞는 일입니까 아니면 어느 한쪽만 맞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성령의 감동’이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당할 수난까지는 양쪽 다 동일하게 성령의 감동으로 알았는데, 그 해석과 판단에까지 성령의 감동이 역사하였는지는 의문입니다. 아마도 올라가지 말라는 분명한 성령의 지시는 없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올라가지 말라고‘권하였다’고 하였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저들 모두는 사도바울을 아끼고 염려하는 뜨거운 사랑의 마음에서 올라가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면하였다고 봅니다.
사랑이 넘치는 저들의 마음 속에 성령의 감동은 있었겠지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성령의 지시는 없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는‘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대목입니다.
물론 형제인 바울 사도를 사랑하기에 그의 안위를 생각하여 간곡하게 권할 수는 있지만 이보다 우선해야 할 점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예수 그리스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예수님 사랑과 형제자매 사랑이 경합하여 충돌할 때가 있기에, 사랑에도 우선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망설이지 않으시고 단호히 말씀하시기를,“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고 하셨습니다. 아니 특별히 경합될 때 뿐아니라 많은 경우에 있어서 충돌되기 때문에“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항상‘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삶을 살아 왔기에, 예루살렘에도 각오하고 올라가겠다는 초지일관의 자세였을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당할 앞일을 선지자와 형제된 제자들을 통해서 아니 직접 본인에게 예언으로 알려주신 것이지만, 예언에 대한 해석과 판단 기준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며 주님이 맡기신 사명 완수가 우선이지 결코 자기 자신의 안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셋째는‘결박 당할 뿐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예언의 말씀은 항상 100% 성취되는 것입니다만, 자동판매기에서 물건 나오듯 저절로 성취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잡히시던 날 밤에 다가드는 험악한 무리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를 제지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26:53-54)”고 하셨으며, 또 그 이전에도“내가 땅에 불을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49-50)”고 말씀하신데서, 예언의 성취가 힘 안들이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환난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지,“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고 교훈하였던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다는 예언의 말씀을 모세를 통하여 받았지만, 아무 어려움 없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듯이 말입니다. 예언의 말씀의 성취에는 항상 굳건한 믿음이 수반되어야 함을 성경은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대할 때에 행여나 자기 위주와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 중심과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먼저 생각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신앙을 지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오직 주님을 따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신앙의 길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이 사도들, 특히 사도 바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보여주는 부활 신앙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2)”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주를 믿는 담대한 믿음으로 침노해 들어가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