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산지역의 천주교
1. 조선의 개항
조선은 1875년(고종 12년) 일본이 도발한 운양호(雲揚號)사건으로 1876년(고종 13년) 조일수호조규(강화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가 맺어짐에 따라 쇄국정책이 무너지는 동시에 문호가 개방되었다.
1876년 조일수교조규 당시 부산항이, 1880년 통상장정(通商章程)을 협정하여 원산(1880. 3. 23 통상개시), 83년 인천항을 합해 모두 3개 항이 개항되었으며, 그 후 1897년 목포항 및 진남포항, 1899년 군산항 및 성진항과 마산항, 1906년 용암포, 1908년 청진, 1910년 신의주가 개항 되었다.
군산항은 1899년 5월 1일 개항 되 일제강점기시절 수탈의 통로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2. 개항전의 군산과 천주교의 관계
가. 군산 앞바다와 금강을 유유히 올라갔던 라파엘호
군산과 천주교의 인연은 군산항이 개항하기 훨씬 전인 18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36년 모방신부에 의해 조선인 사제 후보로 선택된 3명의 조선인 청년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3인은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들 중 최방제는 병사하고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학생은 공부를 하여 마쳤으나 당시 25세 이상이 되어야만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교회의 원칙에 따라 신부가 되지 못하고 중국에 있었다.(김대건, 최양업은 모두 1821년생)
김대건은 1844년 6월 2일경 차부제품을 1844년 12월 10일경 부제품을 받고 1945년 8월 17일 감격의 사제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은 1845년 8월 31일 부제때 조국에 잠시 들어왔다가 중국으로 타고나간 목선 라파엘호에 페레올주교와 다블뤼신부 등과 동행하여 조선으로 출항하였으나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1845년 9월 말경 제주도 용수리포구에 표착하여 라파엘호를 수리하고 물과 음식을 보충하고 서해안을 따라 올라와 군산앞바다를 지나 1845년 10월 12일 밤 강경포구 전에 있던 화산포구(나바위 뒤편의 포구)에 정박하고 꿈에 그리던 조선 땅을 밟게 된다.
페레올주교와 다블뤼신부 그리고 조선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신부 등을 태운 라파엘호는 1845년 10월 11~12일경 군산앞바다를 지나 군산북쪽의 금강을 유유히 거슬러 올라가며 군산에 천주교의 입김을 불어 넣었다.
나. 1847년 신시도 사건
김대건신부와 같이 유학을 떠났던 최양업은 김대건과 같이 1844년 6월 2일경 차부제품을 1844년 12월 10일경 부제서품을 받고 조선으로 들어오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47년 7월 28일 매스트로 신부와 함께 라피에르 함장의 군함을 타고 조선으로 출발하여 1847년 8월 10일 고군산군도에 난파하여 1847년 8월 12일 신시도에 표착하여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에서 한 달여간 생활하다가 1847년 9월 12일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1849년 4월 15일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감격의 사제서품을 받았다.
최양업부제는 한 달여간 신시도에서 생활하면서 육지로 들어오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라피에르 함장의 강권에 의하여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통역관 신분이로 군함에 승선하였고 신시도에서 조선말을 하고 조선의복을 입고 있는 동포를 보고 얼마나 울었겠으며, 대공소(부안 대소공소)의 천주교신자와 필답도 나누는 등 군산지역에 첫발을 디딘 사제로서 군산지역의 천주교에 부싯돌을 던져 놓았다.
최양업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조선인으로는 2번째로 감격의 사제품을 받고 1849년 12월 말경 봉황성 변문을 통하여 입국에 성공하여 1861년 6월 15일 선종할 때 까지 피와 땀으로 조선의 천주교를 이끌었다.
다. 천주교 선교사들의 입국통로 군산
19세기중엽 조선 천주교의 당면 과제는 박해에 따른 사제의 절대부족으로 사제들의 조선유입이 과제였다.
중국의 만주지역 팔가자를 전진기지로 하여 압록강하류의 변문과 두만강 하류의 훈춘을 통한 조선입국을 하였으나 국경경비의 강화로 더 이상은 변문과 훈춘으로의 사제입국이 어려워지자 조선천주교는 해상을 통한 사제의 입국을 위하여 해로개척에 매진하게 된다.
김대건신부의 순교도 김대건신부가 해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백령도를 방문했다가 신분이 발각 되어 순교로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최양업신부와 같이 신시도에서 한 달여간 생활해본 매스트르신부는 1852년 8월 고군산을 통하여 조선에 입국하였고 입국연락을 받은 조선천주교에서는 배를 보내서 매스트르 신부를 육지로 맞아들였다.
고군산열도를 통한 사제의 조선입국이 실현되면서 조선천주교회는 변문이나 훈춘을 통한 육로의 입국에서 고군산열도를 통한 해로로 조선입국을 실현 시켜 해로 개척이라는 일대 전기를 이루게 된다.
매스트르신부는 김대건신부와 최양업신부의 스승신부인 동시에 동료 사제로써 조선천주교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1857년 선종하였다.
라. 한불조약 후 군산과 천주교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면서 어느 정도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된 조선천주교는 성당건립을 추진함과 동시에 전교에 매진하게 된다.
1896년 11월 호남지역은 처음으로 교구장 사목방문의 경사를 맞았다.
당시 조선교구 교구장이던 뮈텔주교는 먼저 저성첨례날(모든 성인의 날, 11월1일) 되재성당(한강이남 최초성당, 조선 2번째 성당)의 성당 및 종 축성식을 하고 약 한달여간 산하공소방문을 하고, 전주성당(현 전동성당 전신)을 방문하여 보두네신부를 만나고 나서 전라도 감사를 방문해 사제들과 교우들의 각별한 보호를 요청하는 등 활동을 하고 수류성당으로 이동하여 성탄(12월 25일)을 지내고 또 한 달여간 산하공소를 방문한 다음 서울로 돌아갔다.
호남을 직접 사목방문을 행한 뮈텔주교는 전라도 지방에 본당증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1897년 피정이 끝난 후 2개의 본당을 증설하기로 하고 그 후보지로 강경 또는 군창(현재 군산)과 막 개항을 한 목포를 후보지로 선정 하였다.
전라도 북단과 남단에 본당을 설립하여 북단은 많은 신자들을 관리하고 신자가 거의 없던 목포는 천주교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전라도 북부지역의 본당설립을 위하여 뮈텔주교는 베르모렐신부에게 본당신설의 임무를 맡기게 되고, 임무를 맡은 베르모렐신부는 1897년 6월 초순 원산항에서 기선 현익호를 타고 남해를 돌아 1897년 6월 말경 군산항에 내려 군산을 후보지로 탐색한 결과 군창의 사정상 사제의 정착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을 내리게 되었고 작은 배로 금강을 따라 올라가 강경에 내려 안대동 공소에서 성베드로⦁성바오로 축일(6월 29일)을 지내고 강경에 정착해 보려고 하였으나 강경 역시 사제의 정착이 불가능하여 강경에서 멀지않은 화산 나바위를 후보지로 택하게 되었고 먼저 나바위언덕 아래 군수를 지낸 김여산의 규모가 큰집을 구입하여 12칸의 성당을 마련하였다.
나바위언덕 뒤편이 김대건신부가 조선땅을 사제서품이후 최초로 밟은 육지로 후에 봉수대가 있던 나바위산까지 매입하여 성역화하였으며, 나바위성당은 전라도 북부지역과 충청도 남부지역을 아우르는 모본당으로 자리매김한다. 군산성당 역시 나바위성당을 모본당으로 하여 설립된다.
1897년 당시 군산항은 군창이라하여 아직 개항이 이뤄지지 않은 조그마한 어촌이었으나, 조선천주교는 군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군산에 본당을 증설하려 하였으나 여러 여건상 군산지역의 본당 신설은 뒤로 미뤄지게 된 것이다.
3. 군산성당 태동기
가. 성산공소 설립
1899년 군산항 개항 이후 전라도 충청도의 사제들이 군산항에서 서울지역으로 왕래하면서 기착지인 군산항에서 사제들의 휴식공간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필요에 의해 성산면 산곡리에 주택을 구입하여 사용하면서 성산공소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시기 까지도 아직 군산에 천주교인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나. 군산공소시대
군산항이 일제에 의한 수탈의 항으로 커가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고 천주교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1913년경 공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공소의 위치나 크기 천주교인 수에 대하여는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홍안드레아가 군산항 개항 직후 일족(배우자 및 7남3녀)을 거느리고 개성에서 안면도를 경유하여 군산으로 들어와 ‘안동리토점’을 운영하면서 천주교인들의 항아리보부상을 지원하다가 영동에 터를 잡고 ‘개성상회’라는 포목점을 운영하면서 가족중심의 신앙생활을 이어 나갔다.
1920년대 군산 영동 22번지 김마리아의 사택에 공소를 개설하였다가 1925년경 신자들의 노력으로 신영동(현 중앙동주민센터)에 14칸의 큰집을 매입하여 경당으로 활용하면서 주일참례(예전에는 쳠례)와 춘추판공성사를 행하며 공소로 사용하였다.
1920년대에는 군산지역에 군산공소와 옥구공소 2곳이 운영되었으나 옥구공소에 대해서도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성산공소가 옥구공소라 개칭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뿐이다.
1911년 조선교구가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나뉘면서 전라도는 대구교구 소속이 되었으며, 1927년 대구교구 드망즈주교는 전라도를 사목방문하면서 1927년 11월 17일~18일 군산공소를 19일~20일은 옥구공소를 사목방문하고 21일부터 세실공소를 방문하기 위하여 떠났다.
드망드주교는 군산에 대한 사목방문 이후 군산지역 본당의 신설을 절감하고 드디어 1929년 5월 군산본당 설정을 공표하면서 새신부인 김영구신부를 나바위성당 보좌신부 겸 군산 신설본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냈다.
1929년 나바위성당에 새로 부임한 이약슬주임신부와 김영구보좌신부 겸 군산성당 주임신부를 군산공소회장 김야고버가 나바위성당으로 가서 기차로 이리역(현 익산역)까지 성모성심회장 양분도가 자동차로 이리역에서 군산공소로 모시고와서 신자들과 같이 성당건립을 위한 기도회를 했다. 당시 군산공소 신자는 약 250명가량 되었으며 원거주민 토착신자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군산항이 활기를 띠면서 외지에서 모여든 신자들이었다.
김영구신부는 나바위성당에 머물면서 군산본당설립에 박차를 가하여 1930년 군산 둔율동 156번지에 있는 옥구 군청 관사 대성원(大成院)을 매입하여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고 그 부속 건물을 사제관으로 개수하였다.
4. 감격의 군산성당의 시대
1931년 1월 19일 나바위성당 보좌신부 겸 군산성당주임신부인 김영구 신부가 나바위성당보좌신부의 지위를 면하고 군산성당주임신부로 발령을 받고 부임했다.
당시 본당의 교우는 약 200여명 산하공소에 약 400여명 합 600여명의 성당으로 설립된 군산성당은 대지 약 240평에 15칸의 성당으로 시작하였다.
본당설립은 신자들의 기도와 십시일반의 성금으로 완공하였고 그도 차차 증축하기로 하였다. - 군산성당은 1944년 성당 주위의 산을 매입하여 1955년 성당을 준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당설립 당시 군산성당의 관할은 군산 및 옥구전역과 고군산열도 및 어청도를 포함한 서해중남부 도서지역과 현재의 익산남부지역으로 익산 황등 까지 관할이었다.
군산성당은 이리천주교포교소 개설을 시작으로 1930년대 이리성당(현 창인동성당)을 분가하면서 1950년대 대야성당, 1960년대 월명동성당, 중동성당(현 팔마성당), 1970년대 오룡동성당을 직접 분가시켰으며 군산과 익산남부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의 모본당으로 군산성당에서 분가해나간 성당이 2014년 현재 24개 성당에 이른다.
군산성당은 월명동 성당이 분가한 1961년부터 월명동성당과 구분하기위하여 둔율동성당으로 개칭되었다.
군산성당 설립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