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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이색(李穡)
1328년(충숙왕 15) - 1396년(태조 5)
고려후기 대사성, 정당문학,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학자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이곡(李穀)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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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16권 / 행장(行狀)
목은 선생 이 문정공 행장(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 - 권근(權近)
공의 휘는 색(穡)이요, 자(字)는 영숙(穎叔)이요, 호는 목은(牧隱)이신데, 충청도(忠淸道) 한주(韓州) 사람이다. 공의 증조부는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를 추봉받았던 분으로 이름은 창세(昌世)이며, 할아버지는 봉훈대부 비서감승(奉訓大夫秘書監丞)을 선증(宣贈) 받았고, 본국에서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에 추봉받은 분으로 이름은 자성(自成)이며, 선친은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 본국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本國匡正大夫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을 선수(宣授) 받고, 시호(諡號)는 문효공(文孝共)이요, 이름은 곡(穀)이다.
원조(元朝) 원통 계유전 제과(制科)에 합격하니, 호는 가정(稼亭)이다. 문집 20권이 세상에 전해져 있다. 비(妣)는 요양현군(遼陽縣君)을 선봉(宣封) 받은 본국 함창군부인 김씨(咸昌郡夫人金氏)로서 천력(天曆) 무진 5월 신미에 공을 낳았다.
총명하고 슬기로운 지혜는 보통 사람과 다르고 글 읽을 줄을 알면서부터 글을 보면 곧 암송하는지라 지정(至正) 신사년에 공의 나의 겨우 14세로, 본국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니 이미 우뚝하게 명성이 높았다. 비로소 20세가 되어 곧 혼사를 하려 하니 일시에 높은 가문과 명망 있는 족속들로 사위를 택하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그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여 잔칫날 저녁까지도 다투고 있었다.
곧 안동 권씨에게 장가드니, 명위장군 제군만호부만호 본국 중대광 화원군(明威將軍諸軍萬戶府萬戶本國重大匡花原君)을 선수 받은 중달(仲達)이란 분의 딸이고, 원조 조열대부 태자좌찬선 본국 삼중대광 도첨의 우정승(元朝朝列大夫太子左贊善本國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인 한공(漢功)의 손녀이다.
무자년에 가정(稼亭) 선생이 원조(元朝)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있을 때 공이 조관(朝官)의 아들로 국자감생원(國子監生員)에 보충되어 재학 3년에 중국의 연원(淵源 근본 내력) 있는 학문을 수업하여 익혔다. 갈고 닦으며 물들고 젖도록 익히고, 더욱 크게 나아가서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글을 더욱이 공부했다.
신묘년 정월에 가정 선생이 본국에 돌아와 돌아가니 분상(奔喪)하여 거상을 끝마쳤다. 계사년 여름 5월에 공민왕(恭愍王)이 과장(科場)을 열어 선비를 시험할 때 공이 으뜸이 되어 숙옹부승(肅雍府丞)을 제수 받고, 가을에 정동행성(征東行省) 해원(解元)에 합격하였으며 이내 진봉사(進奉使)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북경에 도착하여서 갑오년 2월에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丞旨) 구양현(歐陽玄)과 예부 상서(禮部尙書) 왕사성(王思誠)이 같이 회시(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이 또 합격하게 되었다.
3월에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을 하였는데 제이갑(第二甲)이 제2명에 뽑히었다. 독권관 참지정사(讀卷官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彛)와 한림승지 구양현 제공(諸公)이 크게 칭찬하였다. 칙령으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仕郞同知製誥兼國史院編修官)에 제수되었고, 동쪽으로 돌아와 차례를 기다리는데, 공민왕이 곧 통직랑 전리정랑 예문응교 동지제교 겸춘추관 편수관(通直郞典理正郞藝文應敎同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을 더하여 주었다.
을미년 봄에 왕부 필도치 장서 비목(王府必闍赤掌書批目)이 되니 유림으로 명예로운 선발이었다. 봉선대부 시내사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奉善大夫試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으로 승진 발령을 받았다. 여름에 또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표(表)를 받들고 원나라의 서울에 갔다. 8월에 한림원에 예사(禮仕)되었다.
겨울에 경력(經歷 지방 행정관)에 임시로 임명되었으나 병신년 정월에 어머니가 늙으신 까닭으로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대개 또한 천하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을에 본국 관제(官制)가 행하여져서 중산대부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지제고 겸 춘추관편수관 겸 병부낭중(中散大夫吏部侍郞翰林直學士知製誥兼春秋館編修官兼兵部郞中)으로 고치게 되어, 문무의 선임을 관장하였다.
처음에 공이 그때 정사에 대하여 여덟 가지 일을 말씀하여 올렸던 바, 모두 시행되었다. 그 하나는 정방(政房)을 파하고 이부와 병부의 선거를 복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명(命)이 있었다. 정유년에 국자좨주 지각문 계중대부(國子祭酒知閣門階中大夫)에 시보(試補)하였다.
지인상서(知印尙書)가 되었으니, 이는 필도치(必闍赤)의 장(長)이므로 거기 선발된 것은 더욱 영광스러웠다. 7월에 우간의대부로 승진되고 계급은 대중대부를 더하니, 이 뒤로부터는 무릇 벼슬을 제수하는 데는 모든 관직(館職 춘추관)을 띠게 되었다.
무술년에는 간한 말로 일이 생겨 권귀(權貴)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에 한때의 간관이 모두 좌천되었는데, 공은 상주(尙州)로 가게 되어 행장을 꾸려 가지고 새벽되기를 기다리던 중 그날밤에 명이 내려, 공만이 승진되어 통의대부 추밀원 우부승선 지공부사(通議大夫樞密院右副丞宣知工部事)를 받았다.
왕이 재상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색은 재덕이 출중하여 보통 사람과 비할 바 아니니 등용하고 버리는 것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따르게 하지 못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금 가까이 후설(喉舌 목과 혀같이 가깝고 요긴한 자리)에 있으면서 나라의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장악한지 무려 7년 동안 좋은 계획을 진술하여, 임금에게 주입시키니 나라에 유익됨이 넓고 많았다.
신축년 11월에는 홍적(紅賊)이 서울을 함락시켜, 임금이 피난하게 되자, 신료(臣僚)들은 창졸간에 많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공은 왕을 따라 곁을 떠나지 않고 일심으로 호위하며 참모하고 협찬(協贊 협력하고)하여, 크게 많은 어려움을 건졌다. 모두 극복의 공을 이루니, 일등공훈에 책봉되고, 철권(鐵券 공신에게 나누어 주던 훈공을 기록한 문서)과 전지(田地) 1백 결과 노비 20명을 하사하였다.
계묘년에 봉훈대부 정동행중서성 유학 제거(奉訓大夫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선수(宣授) 받고, 겨울에 본국 단성보리공신 봉익대부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本國端誠輔理功臣奉翊大夫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을 받으니, 이때부터 나라의 정사를 참여하며 듣기를 20여 년이나 하였다.
비록 벼슬을 내놓고 한가하게 있더라도 큰 정사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찾아가 물었다. 을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 과거의 시관)가 되어 윤소종(尹紹宗) 등 28명을 뽑아서 정미년 겨울에는 조열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朝列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선수하니, 본국 판개성 겸 성균대사성(本國判開城兼成均大司成)으로서이다.
처음 신축년에 병란을 겪은 뒤로 학교의 교육이 폐기되었으므로 임금께서 다시 일으키려고, 성균관을 숭문관(崇文館)의 옛터에 다시 지었다. 강의를 받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한때 경술(經術)의 선비를 가려 뽑았으니, 영가(永嘉) 김구용(金九容)ㆍ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ㆍ반양(潘陽) 박상충(朴尙衷)ㆍ밀양(密陽) 박의중(朴宜中)ㆍ경산(京山) 이숭인(李崇仁) 등과 같은 이가 모두 다른 관직으로서 학관을 겸하였고, 공은 그 장이 되었다. 대사성을 겸함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음해 무신년 봄에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며, 여러 사람이 경서를 나누어 글을 가르치고 날마다 강의가 끝나면 서로 의심나는 것을 의논하여 각각 그 아는 것을 다하였다. 공은 즐거워하는 태도로 분석하고 절충하여 반드시 정주(程朱)의 뜻에 맞도록 힘썼는데, 저녁이 다 하도록 피곤함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되어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일어나 학자들이 그 기송(記誦) 사장(詞章)의 습관을 버리고 신심(身心) 성명(性命)의 이치를 궁구하여, 유교를 높일 줄 알고 이단(異端)에 의혹되지 않으며 그 의리를 바르게 하고 공리(功利)는 꾀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유교의 기풍과 학술이 환하게 일신되었으니 모두 선생이 가르친 공이었다. 여름 4월 왕이 구제(九齋)에 행차하여 친히 여러 생도에게 경서의 뜻을 시험하고, 공에게 독권관(讀券官 답안을 읽는 관리)을 명하여, 이첨(李詹) 등 7명을 취하여 급제를 주었다.
기유년 여름에 동지동거(同知貢擧)로 유백유(柳伯濡) 등 33명을 뽑았는데, 처음으로 중국 과거제도의 역서통고(易書通考)의 법을 썼다. 처음에는 공민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의 동쪽에 세웠는데, 사치를 다하고 극진히 화려하게 하여 몇 해가 되어도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다시 땅을 마암(馬巖)의 서쪽에 골라서 지었는데, 더욱 굉장함을 다하여 노력과 비용이 몇만 냥에 이르렀다.
시중 유탁(柳濯)이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ㆍ첨서밀직(簽書密直) 정사도(鄭思道)에게 말하기를, “마암의 역사는 다만 백성을 괴롭히고 제물을 낭비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술사가 말하기를, ‘여기에 집을 짓게 되면 나라에 불리하다’ 하였다. 나는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외람되게 백관의 수장이 되었으니 사직을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죽음으로써 간함이 옳겠소.” 하고 바로 글을 올려 불가함을 논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유탁을 옥에 가두었다. 이 일로 죄를 주려고 공에게 명하여 대중에 유시하는 글을 짓게 하였는데, 공이 죄명을 물어보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래 수상으로 있으면서, 불의의 일을 많이 하여, 하늘이 큰 가뭄을 부른 것이 죄의 하나요,
연복사(演福寺) 전토를 빼앗은 것이 둘째요, 노국공주가 죽었을 적에 3일 동안 제사를 거른 것이 셋째요, 그 장사를 강등(降等)시켜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예로 한 것이 넷째이니, 불충과 불의가 무엇이 이보다 크랴.”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근일에 유탁 등이 글을 올려 영전의 역사를 그만 두기를 청함에 비록 네 가지 일로 그를 죄 주신다 하옵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모두 상소 때문인 것으로 알 것이오며, 또 이 네 가지 일이 모두 죽일만한 죄가 아니오니, 다시 한번 생각하옵기를 원하옵니다.” 하였다.
왕은 더 노하여 쓰라고 더욱 급하게 독촉하니, 공이 엎드려 말씀하기를, “신이 차라리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감히 글을 지어 그 죄를 성립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상소의 사건은 영도첨의(領導僉議)께서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였다. 이때에 신돈(辛旽)이 영도첨의가 되어 극히 총애를 받은 신하로 세력을 부렸는데 마침 임금 곁에 있었다.
신돈이 마지못하여 바로 말하기를, “노신도 알고 있사옵니다. 다만 노하실까 하여 감히 고하지 못하였을 뿐이옵니다.” 하였다. 왕이 시중 이춘부(李春富)에게 명하여 옥새로 봉인하게 하니 춘부는 고개를 푹 늘어뜨리고 엎드려 감히 드리지 못했다.
신돈이 말하기를, “마땅히 말한 자로 하여금 이것을 봉인하게 하십시오.” 하여, 이내 공에게 명하니, 공은 임금이 노할까 두려웠으나, 바로 봉서하기를, “신 색(穡)은 삼가 봉합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부덕한 탓으로 내 말을 좇지 않으니 이것을 가지고 덕 있는 사람을 구하여 섬길지어다. 태조께서 어찌 처음부터 왕손이겠는가. 내가 임금의 자리를 피하겠노라.” 하고, 정비(定妃)의 궁으로 옮겨가 거처하면서 음식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다음날 신돈이 왕의 노여움을 풀려고 임금에게 공을 옥에 가두어 문책하기로 하고,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에 처하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신의 포의(布衣)로부터 외람되게 임금의 알아주심을 힘입사와 갑자기 재상의 자리에 이르렀사온데, 상감의 덕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이 있다 하오면 죽음에 이르더라도 애써 말씀드리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하옵니다.
이제 유시중(柳侍中)이 구속되어 있사온데 신이 감히 무죄를 극진히 말하옴은 상감께서 마음을 움직이시고 살펴 깨닫게 함으로써 대신을 함부로 죽이지 않게 하고자 함이옵나이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신이 우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서가 아니오라, 다만 이 한번의 실수로 말미암아 상감의 이름이 뒷세상에 아름답지 못할까 두려워서이옵니다.” 하였다.
옥관(獄官)이 갖추어 상감에게 말씀올리니, 임금은 드디어 감동하고 깨달아 유탁들을 석방하고, 공으로 하여금 목욕하고 조회에 들게 하였다. 신해년에 지공거(知貢擧)로서 김잠(金潛) 등 33명을 뽑았다. 가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배수 받고 문충보절 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이때에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지문하사(知門下事)가 되었다. 공민왕이 근신에게 이르기를, “근일에 여론이 어떠한고.” 하니, 대답하기를, “모두 나라에서 사람을 얻었다 하옵니다.” 하니, 왕은 웃으며 이르기를, “문관과 무관에서 모두 제 일류만 써서 재상을 삼았으니, 감히 의논하겠는가.” 하였으니, 대개 같은 날 두 어진 이를 채용한 것을 스스로 만족해 하는 것이었다.
왕은 매양 공과 성산(星山) 사람 이인복(李仁復)을 불러 대궐로 들어오게 하며, 반드시 좌우로 하여금 깨끗이 쓸고 향을 피우게 하였으니 행승(倖僧) 신조(神照)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신하를 만나는데, 하필 공경을 드림이 이와 같사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알리요. 이 두 사람의 도덕이 평범한 선비가 아니요, 또 색(穡)의 학문은 피부를 넘어 골수에 들어간 자이다.
비록 중국이라 하더라도 겨룰 자가 없는 사람들인데, 어찌 감히 소홀하게 하겠느냐.” 하였다. 대체로 왕이 일찍이 황제의 뜰에 입시하였을 때 조정 안의 사대무들이 공을 칭찬하는 것이 그전부터임을 들었던 까닭으로 이렇게 말을 하였다. 9월에는 어머니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사를 당하였다.
다음해 임자년 6월에는 왕께서 기복(起復)하게 하여,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복직시켰는데, 병으로 사양하였다. 계축년 겨울에는 한산군(韓山君)에 봉하고 대광으로 계급을 주었다. 갑인년 가을에 공민왕이 흥서하였다.
공이 어머니인 요양현군의 서거(逝去)로부터 슬프고 상한 것이 병이 되어 구토 설사로 병들었는데, 임금의 서거를 듣고 병이 더욱 위독하게 되어 문을 닫고 7, 8년 동안 누워 있다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지공(指空)과 나옹(懶翁) 두 화상의 부도(浮屠)의 명을 지었다.
그 무리들이 그로 하여금 많이 문하에 왕래하게 되었고, 무릇 시문도 구하였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곧 응대하니 부도(浮屠 불교)에 매우 아첨한다는 비방을 들었다. 공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그들이 임금과 어버이를 복되게 한다 하니 나는 감히 거절하지 못하노라.” 하였다.
정사년에 추충보절 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더하였고,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를 관장하였다. 임술년에 삼중대광 판삼사사(三重大匡判三司事)를 받았고, 계해년에 다시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였으며, 갑자년에 한산 부원군(韓山府院君)을 더하여 봉하였다.
을축년에 벽상삼한삼중대광 검교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檢校門下侍中)을 받았다. 병인년에 지공거로 맹사성(孟思誠) 등 33명 뽑았다. 무진년에 조정(朝廷 명나라)에서 철령위(鐵領衛)를 두고자 하니, 시중 최영(崔瑩)이 정권을 잡고 정치를 하므로 군사를 동원하여 요(遼)를 치려 하였다.
우리 태상왕이 거의(擧義 옳은 일을 주장함)하여 군사를 끌고 돌아와 집요하게 최영을 물리치고 공을 기용하여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공이 이르기를, “지금 국가에 틈이 있어 왕과 집정(執政 정권 잡은 사람)이 친히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변명할 수가 없을 것인데, 상감께서 어리시어 능히 행하지 못하시니, 이것은 이 늙은 놈의 책임입니다.” 하고, 곧 연경에 가기를 자청하므로 임금과 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이 늙고 또 병이 심하다고 말리니, 공이 말하기를, “신이 포의로서 지위가 최상의 품질에 이르러, 항상 죽음으로 보답하려 하였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사옵니다.
설사 길에서 죽어 시체로 왕명을 받들더라도 진실로 나라의 명을 천자에게 알리게 되오면,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산 것에 진배 없사옵니다.” 하고, 북경에 입조(入朝)하니, 고황제(高皇帝 명나라)가 가상하게 여기어 상주는 것이 보통보다 더함이 있었고, 융숭하게 대우하여 보내었다.
기사년에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가을에 물러가기를 청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다. 겨울에 공양군(恭讓君)이 등극하니 공을 꺼리는 자가 탄핵하여 장단(長湍)으로 내쫓기게 되었다.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으로 밀려났다. 5월에는 이초(彛初)를 상국(上國)에 보냈다는 것으로 무함되어 공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청주에 가두고 고문하기를 매우 준엄하게 하니 일이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생사는 하늘이다. 마땅히 의리와 운명에 순할 뿐이다.” 하고, 태연하게 자처하였다. 며칠 뒤 여명(黎明)에 시작한 비가 아직 한낮이 되지 못하여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솟아오르게 되어 성문을 무너뜨리고 넘어오니 집들이 모두 물에 잠겼다. 문사관(問事官 조사하던 관원)이 물에 빠져 떠내려가다가 나무를 붙들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역마로 급하게 나라에 보고하니 풀어주고 책임을 묻지 아니하였다. 이 고을이 수재가 이와 같이 심한 일이 오로지 없었으므로 모두 공의 충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왕은 본래부터 공이 다른 마음이 없음을 아는지라 누차 소환하였으나, 공을 꺼리는 사람의 탄핵을 받아 갑자기 쫓김을 당했다.
공이 왕래하여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다고 비방하는 자도 있었고, 또 공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는 사람도 있어서 병을 청탁하여 가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다. 신미년 겨울에 또 함창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돌아오니, 문인 권근(權近)이 또한 충주로 귀양가다가 길에서 공을 보고 남에게 들은 것을 고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거짓이다.
사람의 신하된 도리가 임금께서 명하는 것에 따를 뿐이므로, 부르면 가고 가라 하시면 와서 죽어도 또한 피하지 못할 것인데, 가고 오는 것을 어찌 생각할 것인가.” 하였다. 이미 오니, 다시 한산 부원군에 봉하였다. 임신년 4월에 다시 금주(衿州)로 폄직되시고, 6월에 여흥(驪興)으로 옮겼다.
7월에 우리 태상왕이 즉위하니, 공을 꺼리는 자가 극형을 가하려고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내 평생에 망녕된 말을 하지 아니하는데, 감히 거짓을 복종하겠는가. 비록 죽더라도 바른 귀신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이 상감에게 들리니, 상감이 그 점을 살펴서 특별히 용서하여 장흥으로 옮겨 가게 하니, 오로지 공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
겨울에 용서받아 한주(韓州)로 돌아왔다. 공양왕 초년으로부터 기필코 꺼려하는 사람들이 누차 계교로써 공을 기필코 죽을 땅에 두려고 하였으나 왕이 문득 구하여 온전하게 되었으므로, 이에 이르러 공을 꺼려하는 사람들이 다시는 그 계책을 도모하지 못하였다. 을해년 가을에 관동(關東)에 가서 놀다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대로 머물러 거처하였다.
임금께서 사신을 보내어 불러 맞이하고 다시 한산에 봉하니, 나가 뵙고 물러나올 때는 중문까지 보내고 대접하기를 옛친구의 예로써 하였다. 병자년에 공의 나이 69세가 되었다. 여름 5월에 여강(驪江)으로 가서 피서하기를 청하였는데, 배에 오르려 하는데, 병이 들어 아들 종선(種善)을 경성에 부르고 7일 날에는 병이 위중하자, 중이 불도를 말씀드리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손을 들어 휘두르며 말하기를, “생사의 이치를 나는 의심하지 않노라.” 하고, 말을 마치자 세상을 끝마쳤다.
부고가 보고되니, 임금이 대단히 슬퍼하고 조회를 사흘 동안 보지 않으며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제사 지내고 부의금을 보내는 데 더함이 있었다.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내렸다. 10월에는 자손들이 영구를 모시고 한주(韓州)로 돌아가서 11월 갑인년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밝고 깊으며 학문이 정미롭고 넓어, 처사가 자세하고 밝으며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사정을 잘 이해하여 주었다. 의론할 때에 가부를 정함에 있어서 명백하고 간절하되 반드시 충후함을 주로 하였다.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할 때에 겸손하고 공순하고 용모와 기상이 화락하며, 단아하시어 화기가 유연화되, 늠름한 기상을 범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재상이 되자 힘써 이루어진 법을 좇아 복종하고 새로 고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며, 대체를 가지도록 힘썼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생각이 늙도록 변하지 않아 매양 말과 얼굴빛에 나타나고 시문(詩文)에 나타났다. 후진들을 권면하여 진취시키되 반드시 윤리를 위주하여 부지런히 힘써서 게을리하지 않고 모든 책을 박람(博覽)하였지만 더욱 이학(理學)에 깊었다.
대개 문장을 짓기 위하여 붓을 잡으면 바로 써내려가는데 마치 바람이 가고 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으면서도, 말뜻이 정도(精到)하고 격률(格律)이 높고 넓어 도도하기가 강하(江河)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문집이 있는데, 시 35권과 문 20권이 있다.
원나라 말년 지정(至正) 계사년부터 황조(皇朝) 홍무 기사년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간에 나라의 문한을 장악한 사람이 많이 변경된 까닭으로, 험난한 즈음에 능히 사명(詞命)을 지어, 여러 번 감탄함을 받았고, 공이 폄직당하게 되니 공을 꺼리는 자가 글을 맡아 보게 되었는데, 비로소 표사(表辭) 문제로 황제에게 책망을 당하게 되었으니, 공의 문장과 지식이 세상에 도움이 있음이 이와 같았다.
아깝게도 공민왕이 한갓 공경만 다 할 줄 알고 그 말을 모두 쓰지 못하여 늦게 백료의 장이 되었으나, 얼마 아니되어 파면되고 마침내는 헐뜯고 미워함을 당하게 되어서 경제(經濟)의 학문을 끝내 크게 실시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하늘이 그런 것이다. 집을 다스리는 데 비용의 유무를 묻지 아니하여 비록 자주 끼니꺼리가 없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마음을 쓰지 아니하였다.
평생에 빠르게 말하는 일도 없어, 집사람이나 하인들이 혹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천천히 타일러 일찍부터 노한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연회 좌석에 참석하였을 때에도 여유롭고 느긋하게 행동하여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 마음이 소탈하고 말과 행동이 조용하여, 기쁨과 노함이 외모에 나타나지 아니하고 모가 나지 않아, 완전히 한 덩어리의 화한 기운으로 뭉쳐 있다.
오래도록 은총을 받고 이로운 자리에 교만하고 뽐내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늘그막에 어려움을 만나서도, 기개가 떨어지고 줄어듦을 보지 못하였다. 옥에 갇혀도 욕되게 여기지 않고, 높은 벼슬을 하여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공의 타고난 천성과 지키고 실천해 나아감이 또한 확고하여 뽑을 수 없다고 이를 만하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은 종덕(種德)인데, 추성익위공신 봉익대부 지밀직사사(推誠翊衛功臣奉翊大夫知密直司事)이고, 둘째 아들은 종학(種學)인데, 봉익대부 첨서밀직사사(奉翊大夫簽書密直司事)이고, 병진의 진사로 무진년에 성균관 과거를 맡아 보았고, 기사년에 지공거(知貢擧 과거를 맡아 보던 주시관)가 되었는데,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다.
셋째는 종선(種善)인데, 중정대부 전교령 지제교(中正大夫典校令知製敎)가 되었으며, 임술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장남인 밀직 종덕은 아들이 넷이 있는데, 맏아들 맹유(孟㽥)는 중현대부 감문위 대호군(中顯大夫監門衞大護軍)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맹균(孟畇)인데, 승봉랑 고공좌랑(承奉郞考功佐郞)이 되어 을축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셋째 아들은 맹준(孟畯)인데, 임신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넷째 아들 맹진(孟畛)은 인덕궁(仁德宮) 사연(司涓)이 되었다. 딸은 둘인데, 맏딸은 통정대부 승추부 우부대언(通政大夫承樞府右副代言)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중훈대부 종부령(中訓大夫宗簿令)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인 첨서(簽書) 종학은 아들이 여섯인데, 맏아들 숙야(叔野)는 조봉대부 사재소감(朝奉大夫司宰少監)이 되고, 둘째 아들 숙규(叔畦)는 성균관 생원이 되고, 셋째 아들 숙당(叔當)은 호용순위사 부사직(虎勇巡衛司副司直)이 되고, 넷째 아들 숙묘(叔畝)는 조산대부 사수소감(朝散大夫司水少監)이 되고, 다섯째 아들 숙복(叔福)은 성균관의 생원에 합격되었고, 여섯째 아들 숙치(叔畤)는 아직도 어리다.
딸은 둘인데, 맏딸은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아직 어리다. 셋째 아들인 전교(典校) 종선의 아들은 하나인데, 계주(季疇)라 불렀다. 증손(曾孫)에 남자 일곱 사람과 여자 아홉 사람이 있다. <끝>
[註解]
[주01] 해원(解元) : 해(解)라는 말은 지방에서 실시하는 초급 시험이요, 원(元)은 장원이란 말이다.
[주02] 기복(起復) : 예전에는 거상을 입고 있는 3년 동안 밖에 나가지 아니하므로 벼슬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그 사람
이 필요하면, 특명으로 그 사람에게 출사(出仕)할 것을 명한다. 그것을 기복이라 한다.
[주03] 이초(彛初) : 이(彛)는 윤이(尹彛)요, 초는 이초(李初)이다. 이 두 사람이 명나라 서울 북경에 가서 이성계(李成桂)가 왕씨는 아닌
사람인데, 자기의 친척이라 하여 요(瑤 공양왕)를 왕으로 세우고, 군을 동원하여 중국을 공격하려 한다고 고발하여서 그것이 큰 문
제가 되었었다.
[주04] 경제(經濟) :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준말인데,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건진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 양대연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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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權近]
公諱穡。字穎叔。號牧隱。忠淸道韓州人。曾祖追封奉翊大夫版圖判書昌世。祖宣贈奉訓大夫秘書監丞。本國追封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自成。考宣授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本國匡正大夫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謚文孝公穀。中元朝元統癸酉制科。號稼亭。有文集二十卷行于世。妣宣封遼陽縣君。本國咸昌郡夫人金氏。以天曆戊辰五月辛未生公。聦慧異常。自知讀書。見輒成誦。至正辛巳。公年甫十四。中本國成均試。嶄然已有聲。始冠將婚。一時高門望族擇東床者。皆欲歸其女。至婚夕猶爭。乃娶安東權氏宣授明威將軍諸軍萬戶府萬戶。本國重大匡花原君仲達之女。元朝朝列大夫太子左贊善。本國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漢功之孫也。戊子。稼亭先生在元朝。爲中瑞司典簿。公以朝官子。補國子監生員。在學三年。得受中國淵源之學。切磨涵漬。益大以進。尤邃於性理之書。辛卯正月。稼亭還本國卒。奔喪終制。癸巳夏五月。恭愍王開科試士。公爲魁。授肅雍府丞。秋中征東行省解元。仍充進奉使書狀官赴京。甲午二月。翰林學士承旨歐陽玄,禮部尙書王思誠。同掌會試。公又得中。三月對策殿庭。擢中第二甲第二名。讀卷官參知政事社秉彝,翰林承旨歐陽玄諸公。大加稱賞。勑授應奉翰林文字承仕郞,同知製誥兼國史院編修官。東歸須次。恭愍王就加通直郞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乙未春。爲王府必闍赤掌書批目。儒林榮選也。陞授奉善大夫試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夏又充書狀官。奉表如京。八月。禮仕翰林院。冬權經歷。丙申正月。以母老棄官東歸。蓋亦知天下將亂也。秋本國官制行。改中散大夫吏部侍郞,翰林直學士,知製誥兼春秋館編修官兼兵部郞中。以掌文武之選。初公上言時政八事。皆蒙施行。其一罷政房復吏兵部選也。故有是命。丁酉。試國子祭酒知閣門。階中大夫。爲知印尙書。是必闍赤之長也。其選尤榮。七月。遷右諫議大夫。階加大中。自後凡除授。皆帶館職。戊戌。以言事忤權貴。一時諫官皆左遷。擬公尙州。公理製待曉將發。其夜命下。獨公進拜通議大夫樞密院右副丞宣知工部事。王謂宰相曰。李穡才德出衆。非他人之比。用舍不如此。無以伏人心。由是昵居喉舌。參掌機密。凡七年。陳謨啓沃。裨益弘多。辛丑十一月。紅賊陷王京。乘輿播越。臣僚倉卒多潰散。公從王不離側。一心扞衛。參謀協贊。洪濟多艱。弼成克復之功。策勳一等。賜以鐵券。田一百結奴婢二十口。癸卯。宣授奉訓大夫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冬拜本國端誠輔理功臣奉翊大夫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自是與聞國政二十餘年。雖在罷閑。每有大政。必就問焉。乙巳。同知貢擧。取尹紹宗等二十八人。丁未。冬。宣授朝列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以本國判開城兼成均大司成。初自辛丑經兵之後。學校廢弛。王欲復興。改創成均于崇文舘之舊址。以講授員少。擇一時經術之士。若永嘉金九容,烏川鄭夢周,潘陽朴尙衷,密陽朴宜中,京山李崇仁等。皆以他官兼學官。以公爲之長。兼大司成。自公始也。明年戊申。春。四方學者坌集。諸公分經授業。每日講畢。相與論難疑義。各臻其極。公怡然中處。辨析折衷。必務合於程朱之旨。竟夕忘倦。於是東方性理之學大興。學者袪其記誦詞章之習。而窮身心性命之理。知宗斯道。而不惑於異端。欲正其義而不謀於功利。儒風學術。煥然一新。皆先生敎誨之力也。夏四月。王幸九齋。親試諸生經義。命公讀卷。取李詹等七人。賜及第。己酉夏。同知貢擧。取柳伯濡等三十三人。始用中朝科擧。易書通考之法。初恭愍王爲魯國公主。構影殿于王輪寺之東。窮奢極麗。數年不就。更相地於馬巖之西。尤極宏壯。勞費鉅萬。侍中柳濯謂同知密直安克仁,簽書密直鄭思道曰。馬巖之役。非止勞民傷財。術士有言。營作于此。不利於國。予以不才。濫長百官。不憂社稷可乎。寧以死諫。乃上書極言不可。王大怒。下濯等獄。欲以事誅之。命公製諭衆文。公請罪名。王曰。久爲首相。多行不義。致天大旱一也。奪演福寺田二也。魯國之薨。三日闕祭三也。其葬降用永和公主之例四也。不忠不義。孰大於此。公對曰。此皆旣往事也。近日濯等上書請停影殿之役。雖以四事罪之。國人皆以爲上書之故。且此四事。皆非可殺之罪也。願更思之。王益怒促愈急。公伏曰。臣寧得罪。安敢爲文以成其罪。且上書之事。領都僉議亦知之。時辛旽爲領都僉議。極寵幸用事。方在王側。旽不得已乃曰。老臣亦知之。但以王怒不敢告耳。王命侍中李春富封國印。春富俛伏不敢進。旽曰。宜令言者封之。乃命公。公恐王益怒。乃書封曰。臣穡謹封。王曰。以予否德。不從予言。持此去。求有德者事之。我太祖初豈王孫哉。予避位矣。乃移居定妃宮。不許進膳。翌日。旽欲解王怒。啓王下公獄。責問坐以不從王命。公曰。臣自布衣。濫蒙主知。驟至宰相。謂有可以益上德者。至死力言之。以報萬一。今柳侍中在縲絏。臣敢盡言無罪者。欲王動心省悟。以不濫殺大臣也。因泣下曰。臣之泣。非畏死。但恐因此一失。王之名不美於後世也。獄官具上聞。王遂感悟。放濯等出。使公沐浴而朝。辛亥。知貢擧。取金潛等三十三人。秋拜政堂文學。加文忠保節贊化功臣之號。時我太上王。爲知門下事。恭愍王謂近臣曰。近日物議如何。對曰。皆言國家得人。王笑曰。文武皆用第一流以爲宰相。誰敢議之。盖自多同日竝用兩賢也。王每召公及星山李仁復入內。必令左右灑掃焚香。倖僧神照白王曰。君見臣。何必致敬如此。王曰。爾何知。此二公道德。非庸儒。且穡學問。舍肌膚而得骨髓者也。雖中國亦罕比。烏敢慢之哉。蓋王甞入侍帝庭。聞朝中搢紳稱譽公有素故云然。九月丁毋遼陽縣君憂。明年壬子六月。王命起復政堂文學。以疾辭。癸丑冬。封韓山君。階大匡。甲寅秋。恭愍王薨。公自遼陽之逝。哀毁成疾。中惡嘔泄。聞王薨愈篤。杜門卧者七八年間。奉旨銘指空,懶翁二和尙浮屠。其徒因多往來于門。凡求詩文。扣者輒應。頗有佞佛之譏。公聞之曰。彼謂追福君親。予不敢拒也。丁巳。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之號。領藝文春秋館事。壬戌。拜三重大匡判三司事。癸亥。復封韓山君。甲子加封韓山府院君。乙丑。拜壁上三韓三重大匡檢校門下侍中。丙寅。知貢擧。取孟思誠等三十三人。戊辰。朝廷欲置鐵嶺衛。侍中崔瑩當國用事。擧兵謀攻遼。我太上王擧義回軍。執退瑩。起公爲門下侍中。公曰。今國家有釁。非王及執政親朝。無以辨之。王幼不能行。是老夫之責也。卽自請如京。王及國人。皆以公老且病固止之。公曰。臣以布衣。位至極品。常欲以死報之。今得死所矣。設死道路。以屍將命。苟得達國命於天子。雖死猶生。入朝于京師。高皇帝嘉賚有加。優禮以遣。己巳。還國。秋請退。拜判門下府事。冬恭讓君立。忌公者劾貶長湍。庚午四月貶咸昌。五月。誣以遣彝初于上國。逮繫公等數十人于淸州。鞠問甚峻。事叵測。公曰。死生天也。當順義命。且處之自若也。後數日。黎明始雨。未及日中。山崩水涌。壞城門漲入。屋舍皆沒。問事官漂溺。攀樹木僅免。驛聞于國。釋不問。自有是州。未甞有水災如此之劇。皆以謂公忠誠所感也。時王素知公無他。累次召還。爲忌公者所劾。輒見斥逐。人有譏公往來不憚煩者。又有爲公危之。欲其稱疾母行者。辛未冬。又自咸昌被召而來。門人權近。亦貶忠州。路見公。以所聞於人者告之。公曰。是則詐也。人臣之道。唯君所命。召之則來。揮之則去。死且不避。往來何恤焉。旣至。復封韓山府院君。壬申四月。復貶衿州。六月。徙驪興。七月。我太上王卽位。忌公者欲加極刑。公曰。吾平生不妄語。敢誣服乎。雖死吾爲直鬼也。語聞。王察其情特原之。移置長興府。賴公專活者多。冬宥歸韓州。自恭讓初年。忌公者屢以計必欲置之死地。王輒救之得全。及是忌公者不敢復施其計。乙亥秋。游關東入五臺山。因留居之。王遣使召迎。復封韓山。進見而退。送至中門。待以故舊之禮。丙子。公年六十九。夏五月。請往驪江避暑。將登舟疾作。召男種善于京城。初七日疾革。有僧進語其道。公擧手揮之曰。死生之理。吾無疑矣。言訖而卒。訃聞。王悼甚。輟膳停朝三日。遣使弔祭。賻贈有加。謚文靖公。十月。子孫奉柩歸于韓州。十一月甲寅。葬于加智之原。公天資明睿。學問精博。處事詳明。秉心寬恕。議論可否。明白簡切而必主於忠厚。待人接物。謙恭愷悌。和氣油然。而凜乎不可犯。其爲宰相。務遵成憲。不喜紛更而持大體。忠君愛親之念。至老不衰。每形於辭色。現於詩文。勉進後學。必以倫理爲主。孜孜不倦。博覽群書。尤深於理學。凡爲文章。操筆卽書。如風行水流。略無凝滯。而辭義精到。格律高古。浩浩滔滔。如江河注海。有集詩三十五卷。文二十卷。自元季至正癸巳。至皇朝洪武己巳數十年間。掌國文翰。多更變故。險難之際。能修詞命。屢見嘉嘆。及公貶斥。忌公者典文。始以表辭見責於帝。則公之文章智識。有補於世如此。惜恭愍徒知致敬而不能盡用其言。後長百寮而未幾罷免。遂見詆姍。經濟之學。卒莫大施。天也。爲家不問有無。費雖至屢空。不以動心。平生無疾言遽色。家人僕隷或有失。必徐以理曉譬之。未甞加以怒言。尊俎之間。油油然而處。亦不及亂。襟懷洒落。言動從容。喜怒不形。圭角不露。渾是一團和氣。久居寵利而不見其驕盈。晚遭屯難而不見其隕穫。縲絏非辱。圭組非榮。公之操存守履。亦可謂確乎不拔者矣。公三男。長曰種德。推誠翊衛功臣奉翊大夫知密直司事。次曰種學。奉翊大夫簽書密直司事。丙辰。進士。戊辰。掌成均試。己巳。知貢擧。皆先公卒。次曰種善。中正大夫典校令知製敎。壬戌。進士。密直男四。長曰孟㽥。中顯大夫監門衛大護軍。曰孟畇。承奉郞考功佐郞。乙丑。進士。曰孟畯。壬申。進士。曰孟畛。仁德宮司涓。女二。長適通政大夫承樞府右副代言柳沂。次適中訓大夫宗簿令河久。簽書男六。長曰叔野。朝奉大夫司宰少監。曰叔畦。成均生員。曰叔當。虎勇巡衛司副司直。曰叔畝。朝散大夫司水少監。曰叔福。成均生員。曰叔畤。幼。女二。長適正尹李漸。次幼。典校男一。曰季疇。曾孫男七人女九人。<끝>
동문선 제116권 / 행장(行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