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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하나님나라
2021.07.11.(성령강림후제7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27/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32/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마가복음 4:26-32)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는 완전한 민주주의가 실현된 나라인가요? 선거철만 되면 민주주의니, 독재니 하는 말이 등장합니다. 사실 어느 나라도 민주주의가 완성된 나라는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절대가치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독재국가인가, 아니면 민주주의 국가인가라는 선택의 문제로 본다면 우리나라는 80년대 민주화 이후, 국민에 의해 정권이 선택되는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으로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도시국가 그리스에서 꽃피기 시작한 민주주의는 오늘날도 완성되어가야 할 과정 중에 있습니다. 독재국가에서 민주주의는 먼 곳의 이야기지만, 민주국가에서 민주주의는 실현됨과 동시에 실현되어야할 제도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이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 속에서만 존재하며, 완성을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국가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교회와 하나님나라에도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은 나라일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앙 속에서 꿈꾸던 미래에 도래할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온 나라입니다.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나라가 현실로써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라는 씨를 뿌리고 실현하셨습니다. 민주주의를 선언한 나라들처럼 하나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교회가 받아들인 절대가치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가 받아들인 정체성입니다. 이제 이 나라는 더 이상 실현되지 않은 나라, 미래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그 씨앗이 뿌려져서 현재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교회가 실현하고 완성해 나가야 하는 교회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비적 이해
유비의 사전적 정의는 ‘두 개의 사물이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다른 속성도 유사할 것이라고 추론하는 일’입니다. 특히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 가운데 자연현상이나 사물을 하나님이나 신앙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을 유비적(allegorical) 해석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들에 대해 해석할 때는, 비유 전체가 말하는 핵심적 의미를 찾습니다. 가능한 유비적 해석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정확한 유비적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하면 씨 뿌리는 사람, 씨, 땅이 당시 유대인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각각 무엇에 상응하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비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나님나라의 모습이 분명해지며 나아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가 구체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비유에서 등장하는 것은 어떤 사람, 땅, 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비유하신다고 하셨으니,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씨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씨와 관련된 땅이 강조되며, 두 번째 비유에서는 씨 자체가 겨자씨로 구체화되어 강조됩니다. 이제 씨뿌리는 사람과 땅이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따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는 달라집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물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씨를 뿌린 분입니다. 이미 씨는 뿌려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사도들과 교회 지도자들도 씨뿌리는 사람이라고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것은 곧바로 혼동을 가져옵니다. 그럴 경우 씨가 자라는 곳은 비그리스도인, 전도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 상관없거나, 교회 자체가 되고 맙니다.
씨는 오직 하나님나라 자체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씨를 하나님나라의 다양한 모습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교회가 여러 가지 씨를 뿌리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전도의 씨, 건축의 씨, 선교의 씨 등등 말입니다. 전도의 씨를 통해 교회에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열매인 것처럼 보입니다. 씨와 열매는 같은 것인데 전도와 전도된 사람을 씨와 열매로 이해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건축헌금과 건축된 건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단체의 교주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이 뿌린 씨는 하나님의 나라 자체이며, 그 열매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땅은 세상입니다. 세상은 하늘나라의 씨가 뿌려진 곳입니다. 땅을 교회로 이해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지도 않았습니다. 비유 속의 상징들을 정확히 규정하지 않았을 때, 교회는 곧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며,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나라의 분봉왕들이 되고 맙니다.
교회에 관하여
29절까지 이어지는 하나님나라에 관한 첫 번째 비유에서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땅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그저 어떤 사람(a man)으로 표현됩니다. 이 사람은 분명 하나님나라의 씨를 뿌리는 예수님이지만, 한 농부라고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보통 농부는 땅을 일구고 거름을 주는 등 씨가 잘 자라도록 땅을 관리합니다. 그러므로 씨뿌리는 사람을 그저 ‘한 사람’으로 표현한 것은 씨뿌리는 사람을 농부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며, 그에게 포커스를 맞추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27) 사람으로 표현될 뿐이며, 게다가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도 못합니다.’(27) 그래서 성경해석자들은 그를 하나님의 나라를 무력으로 이루겠다는 당시의 혁명가들이거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시간을 계산하는 율법학자들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 경우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그들이 꿈꾸던 나라에 불과해 집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나라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아닌 땅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씨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의 역할은 뒤로 한 채, 땅이 열매를 맺게 하는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합니다. 모든 것은 땅이 스스로(all by itself) 해냅니다.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냅니다.’(28) 뿌려진 씨가 열매를 내는데 까지 모든 것은 땅이 합니다. 땅을 일구고, 물과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는 등의 일은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역할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세상에 뿌리셨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이제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씨를 뿌린 사람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추수할 때입니다. 그는 열매가 익을 것을 보고 곧 낫을 댑니다.(29)
세상은 하나님나라의 씨앗이 뿌려진 곳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뿌려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뿌린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서 자라날 수밖에 없으며,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교나 교회가 기다려야 할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곧 교회입니다. 이제 교회의 역할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 뿌려졌음을 보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가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즉 비유 속에서 빠져있는 농부의 역할인 것입니다. 뿌려진 하나님나라의 씨앗은 들풀처럼 저절로 성장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것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깨닫고 세상 속에서, 그리고 자기 밭으로 가져와(마태와 누가) 번성케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열매를 맺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 열매는 거두어져야 하며 그것은 또다시 하나님나라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협력자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두 번째 비유의 포커스는 씨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시면서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31)고 하십니다. 여기서는 씨를 심는 사람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1-9)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시는데, ‘하나님나라’에 관한 이 비유들에선 씨뿌리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역할을 부연설명하실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심겨진 씨들이 비교 대상이 됩니다. 마태복음은 밭, 누가복음은 정원에 겨자씨가 심겨지며, 그곳에 심겨진 모든 풀의 씨보다 작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유대교나, 교회에 뿌려진 여러 씨가 있다고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그냥 땅에 심겨진 씨들 가운데 가장 작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세상에 여러 가지 씨들이 심겨졌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씨앗들이 뿌려집니다. 그 가운데 하늘나라도 뿌려졌습니다.
하늘나라는 세상에 뿌려진 씨앗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마가복음은 이 씨가 어떤 토양에 심겨지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함께 심겨지는 다른 식물들과 같은 조건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아주 작지만 같은 토양, 즉 세상에서 다른 어떤 풀보다도 큰 가지들을 뻗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씨들이 심겨질 것입니다. 본문에서 비교되는 씨앗들은 모두 1년생 풀들입니다. 겨자씨는 우리나라의 유채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들판이나, 갈릴리 호수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겨자씨는 대단히 유용한 식물이 아니며, 어찌 보면 들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1년생 풀이 나무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실제로는 풀인 겨자풀을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가 항상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석 상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겨자풀이 겨자나무가 되는 것은 자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하나님나라는 보잘 것 풀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이 출발하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등장한 하나님나라는 매우 보잘 것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들에 널려 있는 겨자풀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세상 속에 드러난 다른 결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낼 것입니다. 세상이 만들어낸 가장 큰 것들은 결국 무기이며 전쟁과 파괴입니다. 예수에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 속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한 것 같지만,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끊임없이 실현해 왔습니다. 그것은 과학과 물질주의가 드러낸 것보다 더 큰 것을 인류에게 제공해 왔습니다. 눈에는 큰 가지를 뻗은 겨자나무(사실은 풀에 불과하므로)가 보이지 않지만, ‘어떤 풀보다 – 세상이 주는 위안은 정말 풀이 제공하는 그늘에 불과하다- 더 큰 가지를 뻗어 공중의 새들, 즉 세상 사람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되는’(32) 것입니다.
나가는 말
국가가 민주주의가 실현된 곳이 아니듯이, 교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가 실현된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가 이 세상 속에 실현된 하나님나라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세상에 뿌려진 민주주의가 어떤 국가에서는 더욱 빛나듯이, 세상에 뿌려진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어떤 교회에서는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한 국가가 민주주의의 열매를 끊임없이 맺어가야 하며, 민주주의라는 나뭇가지 아래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더 큰 자유와 평화를 제공해야 하듯이,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열매를 끊임없이 맺어야 하며, 하나님나라라는 나뭇가지 그늘에서 진정한 사랑과 평안을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이면서 동시에 실현된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는 교회 속에서 자라나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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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세상 속에서의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교회가 키워낸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겠지만, 세상은 교회, 즉 하나님의 나라를 소중히 키워 열매를 맺는 진정한 교회 때문에 아직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나라를 소유한 체하는 교만한 교회의 주장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를 품고 완성해가는 교회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들이 하는 일들은 보잘 것 없는 일들처럼 보입니다. 민주주의도 경제를 부흥시키고 먹고살아가기 바쁜 사람들에게는 쓸데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오늘날 경제와 바꿀 수 있는 가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높은 빌딩처럼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가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와 같은 것이며 교회는 생명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가꾸어야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가지를 뻗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