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요리 당산제와 조자용(趙子庸) 에밀레박물관장 이야기
1992년 정월 대보름. 대보름을 맞은 부안읍 내요리 돌모산 마을의 당산제는 예년에 없이 활기차고 풍성한 축제로 온 마을에 기쁨과 희망이 넘쳤다. 에밀레박물관의 조자용 관장이 이끄는 민학회(民學會) 회원들이 이 마을 당산제에 대거 참여하여 마을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축원하며 함께 어우러져 흥겨운 한마당의 신명풀이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 행사가 이루어지기까지 내 작은 한편의 논문이 다리노릇을 했다. 우리 민속학계의 기인(奇人)으로 불리는 조자용 관장을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여름방학 때다. 그 때 우리 비교민속학회에서는 한국 민속학을 처음 정립한 1세대 학자 고 임석재(任晳宰 : 1903~1998) 선생의 미수(米壽)를 기념하는 논문집 증정행사를 겸한 하계세미나를 속리산 에밀레박물관에서 열게 되어 나는 처음으로 마련한 자가용에 아내까지 태우고 기아변속도 할 줄 모르는 위험하고도 서툰 운전 솜씨로 대전과 옥천을 거쳐 보은의 말치고개를 어렵게 넘어 이 모임에 참여하였다. 이때 회원들 부인들도 준회원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임석재 선생은 이능화(李能和), 송석하(宋錫夏), 손진태(孫晋泰) 등과 한국의 민속학을 개척 정립한 공로자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58년경의 여름방학 때인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계시면서 부안지방의 무속을 조사하러 와 제일여관에 묵고 있을 때 만났었다. 이때 옹정무당 성덕례, 줄포무당 박소녀, 위도무당 조금례 등의 무가와 대리의 풍어제(띠뱃놀이) 등이 처음으로 조사 수집되었으며, 이후 굿학회와 비교민속학회 등의 모임에서 가끔 뵈었었다.
에밀레박물관이 서울에서 속리산의 정2품 소나무 근처로 이전하기는 1983년 봄이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구조공학을 전공한 건축가 조자용이 우리 전통 고미술의 민화(民畵) 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수집과 연구, 저서로 학계에 큰 관심을 모았으며, 특히 도깨비 신앙에 대하여는 제1인자로 알려진 분이어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분이다. 그는 특히 초기 건축공사에 종사할 때부터 우리 옛 건축물 지붕 끝 망사(치미 悉尾) 등에 장식된 귀면와(鬼面瓦)에 매료되어 1990년대 초 경주 발굴 때에는 아예 경주에 이사하여 발굴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있으면서 20만장 이상의 귀면와 등을 수집하였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이 분은 우리 문화의 모태를 민화와 삼신신앙(三神信仰)에서 찾으려 한 분으로 이 분야에 관한 저서만도 40여 권에 이른다.
조자용 박사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명문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 건축공학 박사 학위까지 획득한 분인데, 이를 팽개쳐버리고는 우리 전통의 고유문화쪽(주로 민속학 분야)으로 방향을 바꾼 데에는 자신의 큰 실수를 깨닫고 속죄하는 뜻도 있다는 일화가 있다.
1960년대 말 군인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밀어붙일때 그의 자문에 응한 그가 농촌 지붕개량사업을 권유하며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여기에 미국에서 배워온 스레이트를 씌우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 우리 전래의 민속문화를 파괴하여 버렸음을 뒤늦게 깨닫고 매우 괴로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초가지붕을 없앤 아이디어는 한국의 건축사에 있어서 ‘6·25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비극’으로 ‘초가지붕 멸종사’라 혹평 받는 아이디어라는 평이다.
이후 우리 민속의 연구자가 되어 2000년에 서거할 때까지 평생을 참회하며 그 보존과 연구에 많은 공헌을 하신 분이다.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우리 나라를 방문했던 저 유명한 프랑스의 20세기 최대 문화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우리 농촌의 초가지붕의 독특한 예술미에 대하여 감탄하며 경이롭다고 극찬한 것을 이 분이 미처 몰랐던 것같다.
에밀레박물관에 도착하면서 초현대식의 으리으리한 박물관을 상상하였던 나는 내 눈을 의심하였다. 웅장한 현대식 건물은 찾아볼 수 없고 어느 시골의 수수하고 허름한 농가 창고 같은 여러 채의 집들이 돌맹이와 흙으로 축조되었는데 겉 미장도 하지 않은 채로 다소 거칠고 산만하게 배치되어 있을 뿐이어서 이것이 무슨 박물관인가 의심하였었다. 그러나 뚝배기 보다는 장맛이라고 여기에 소장 전시되어 있는 자료와 민화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진귀한 문화유산들로 원래 있어야 할 소박한 제자리에 놓여 있게 한 것임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였다.
에밀레박물관은 무속적인 탱화가 풍부하게 소장되어 있는 박물관이었다.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수(壽)에 관한 전시실, 복(福)에 관한 전시실 벽사(陽邪)에 관한 전시실로 꾸며져 있었고 그 풍부한 소장품들에 놀랐다. 특히 도깨비에 관한 그림과 자료들이며 삼신신앙(三神信仰)에 관한 자료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야외에는 노신(路神)이 깃든 서낭당과 누석조탑(累石造塔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역의 당산의 한 형태) 형의 당산들도 조성되어 있었고, 산 밑 둔덕을 깎아 삼신을 모신 삼신사(三神祠)가 세워져 있었다. 이 분이 받드는 삼신이란 성주, 조왕, 산신할미인 가택신 삼신이 아니라 우리나라 건국신화에 나오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 왕검(王儉)이다. 그리고 한쪽 공터에는 몇 백 개쯤 되는 옛 옹기항아리가 즐비하였다. 경내의 중심지에 소박한 세미나 공간이 있고 그 옆에 식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광장이 있어 거기에서 찰떡도 치고 탈바가지에 도깨비국물(막걸리)도 마시면서 민속문화놀이 등을 실연하고 체험도 할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학회의 회원들과 이야기 중인 조자용 관장을 얼른 알아볼 수 있어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키가 거구요 얼굴이 호랑이상으로 구렛나룻이 좌우로 푸짐하게 덥수룩한데 인자한 웃음을 손 위에 얹어서 덥석 잡아주는 장력이 훈훈한 정감을 느끼게 하였다. 내가 부안에서 왔다니까 학회지 《比較民俗學》 2집에 1986년에 쓴 내 논문 〈扶安地方의 石干堂山〉을 이미 읽은 듯 부안의 마을문화 잔존 현황 등에 대하여 물어보았으며, 특히 내요리 돌모산 마을의 짐대할머니 당산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다. 나는 이 논문에서 부안읍내 동서남 세 성안 솟대당산과 내요리 돌모산의 짐대당산, 그리고 대벌리 쌍조당산, 창북리의 중앙당산 등 6개의 당산이 그 형태와 재질이 돌기둥의 석간형(石干形)으로 조성되었음을 밝히고 그 설치된 위치와 기능, 형태, 제의, 제의후의 뒤풀이 놀이 등을 밝혔었다.
미수기념 논문의 증정식에 이어 임선생의 회고담과 연구발표 등을 마치고 무녀들과 양승종씨의 무당굿 실연과 양씨의 무당춤이 공연되었으며 찰떡치기에 이어 도깨비국물(그는 굳이 막걸리를 일러 도깨비국물이라고 칭한다)을 마시고 도깨비탈을 쓴 우리 회원들은 조관장의 도깨비춤에 이끌려 여름밤이 깊도록 흥풀이 놀이마당을 벌였었다. 조관장은 “한국예술의 극치를 맛보려면 무당과 기생과 막걸리의 술맛을 알아야 비로소 그 오묘한 경지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분이다. 행사가 끝나고 돌아올 때 조자용 관장이 부안 돌모산 당산제의 활성화를 위한 지원을 검토해 보겠다고 하였고 이후 계속 연락이 오고가 성사가 된 것이다. 당시 민학회에서는 마을문화 보존을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문화가 꺼져가려는 마을 한두 곳을 선정, 매년 보조를 해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1992년 돌모산 대보름 당산제를 위하여 조자용 관장은 200만원의 당산제 제수비를 마을에 지원하여 주고 대형버스 4대에 200여 명의 회원들과 함께 도깨비탈과 소고(小鼓) 등을 싣고 돌모산에 와서 마을지킴이 짐대할머니께 마을의 안과태평(安過太平)과 풍농 제액(除厄)을 비는 제사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도깨비국물에 취하여 밤이 깊도록 뿔 달린 도깨비가면을 쓰고 마을 사람들과 하나 되어 신명풀이를 하였으며 돌아갈 때는 탈과 소고들은 모두 마을에 주고 갔다.
이보다 앞선 1985년 경의 당산제 때도 우리 비교민속학회에서 돌모산 마을의 당산제 체험을 위한 행사가 있었다. 최인학 회장을 비롯한 최래옥, 김용덕, 임재해 교수 등 20여 명과 임돈희와 그 남편 제널리 교수 내외 그리고 일본인 민속학자 5~6명도 참여했고, 부안여고의 김한수 선생이 지도하는 민속반 학생들 20여 명도 함께 하였다. 이때도 마을 분들과 당제를 지낸 후 풍물굿 가락에 어울려 뒤풀이 마당으로 한바탕의 마을축제를 벌인 일이 있었다.
돌모산 마을 앞의 짐대할머니 당산은 전형적인 마을 지킴이 동구수호신(洞口守護神) 당산이다. 마을의 형국이 풍수적으로 행주형(行舟形)이라 하여 배가(마을이) 잘 순항하려면 균형을 유지하여야 하고, 그러려면 짐대가 있어야 하므로 마을 입구에 짐대를 세워 이에 의지하여 배가 항해하도록 한 것이 이른바 민간신앙의 짐대당산이다. 그래서 이 마을은 예부터 마을 안에 우물을 파면 배가 침몰, 마을이 망한다 하여 파지 못하고, 마을을 벗어난 서편 한쪽에 큰 공동우물을 파서 사용했다고 한다.
내가 이 마을을 드나들며 이 짐대당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5년 경부터였다. 이 무렵부터 나는 부안지방의 마을 지킴이신(주로 당산)을 조사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다른 곳에서와 같이 이 마을에서도 다소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이 마을은 고부이씨(瀛州李氏)들의 집성마을이다. 마을 분들이 순실하고 예의바르며 단합이 잘되는 이른바 양반 마을이다. 지금 캐나다 벤쿠버에 살고 있는 친구 이성수(李聖洙) 박사가 살고 있을 때부터 내가 드나들었던 마을이어서 친분이 있는 분들도 몇 분 있다.
그런데 이 무렵 마을에 교회가 들어섰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은 당산제에 참여하지 않음은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옛날부터 행하여오는 이 귀중한 문화유산을 보존은 못해 줄망정 적대시 하고 마귀로 몰아 밀어버리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와 내가 두어 번 가서 몇분을 만나고 설득을 하였으며, 그래도 불안하여 바로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신청하였다. 당시 나는 전라북도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을 하던 시절이다. 그리하여 전라북도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대벌리 쌍조당산이나 공작리 석장승들도 이와 유사한 일들을 겪었다.
그 후 경지정리로 위치나 형질의 변동이 염려되어 경지정리를 맡은 최병길 사장을 만나서 당산과 그 주변의 땅 50평 정도를 할애되도록 부탁하였고, 후에 군에 이야기 하여 그 주변 정화를 위한 지원을 받아 비로소 면모가 갖추어졌다. 그 후 마을 분들이 내게 예쁜 감사패를 주어서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이후로 정월 대보름이면 우동리당산제와 돌모산당산제, 대벌리당산제 등에는 멀리 안동대학의 민속학과 학생들을 비롯한 학자들과 부산의 민학회 분들은 물론이요 해마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분들이 찾아오고 있다.
나는 부안지방의 마을 지킴이 신앙에 관한 논문을 7편 쯤 써서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을 읽고 부안지방의 맥이 끊어지지 않은 마을문화의 원형을 공부하기 위하여 대학의 교수들이나 학생무리들, 일반 관광객들이 매년 수백 명이 찾아온다. 요즈음관광은 풍광의 경치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유적이나 그 고을에만 있는 고유하고 독특한 문화유적이 곁들여 있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부안읍내 동·서 성문안당산제나 대벌리쌍조당산제, 보안면 월천리 허씨집 뜰에 있는 한쌍의 단군신앙 석장승 등은 원형 복원이 제대로 되어 있어 그 맥을 이으면 이 고유한 향토문화 유물유적을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