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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동우회 안보현장 체험행사로 강화도 평화전망대를 찾아 강 건너 송악산과 북한주민들이 실제 농사를 짓고 있는 현장을 살펴보았으며, 역사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고려궁지, 성공회 성당, 철종의 잠저였던 용흥궁, 갑곶돈대와 전쟁박물관, 그리고 신미양요 격전지인 광성보 등을 돌아보면서 힘 없는 나라의 비애를 느껴 볼 수 있었다.
광성보 단체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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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방문지인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 입니다(성인 입장료 2500원)..
【강화평화전망대】
강화평화전망대는 2006년 말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양사면 철산리 민통선 북방지역 임야에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타 지역에선 전망하기 힘든 이북의 독특한 문화 생태를 아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고 비교할 수 있도록 준공되어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 2층에는 고성능 망원경과 전쟁의 참상과 흔적을 볼 수 있는 전시실이, 3층에는 이북의 온 산하가 한눈에 가까이 볼 수 있는 북한 땅 전망시설과 흐린 날씨에도 영상을 통해 북한 전경 등을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시설이 되어 있다.
2층에 위치한 전시실에는 강화의 국방체험과 북한의 도발,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 통일정책을 볼 수 있는 끝나지 않는 전쟁과 우리는 한민족, 북한으로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통일로 가는 길, 끝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배경과 국내·외 전쟁 발발과정 및 그 이후 생애 잊지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상황 등을 영상시설을 통해 볼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북한 땅 조망실에서는 전방으로 약 2.3㎞ 해안가를 건너 흐르는 예성강, 개성공단,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출처 : Daum백과] 강화도제적봉 평화전망대 –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강건너 북한 마을이 조망됩니다(수확을 끝낸 볏단들이 널려 있고) ..
3층에서 북한 땅을 보면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뒷산이 송악산인데 민둥산이네요..
북한 마을들과 주민들도 보이고 일부 논들은 수확을 끝냈네요(좌측의 솟아 오른 탑 김일성 주체사상탑입니다)..
이곳 좌측으로 연백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이곳에서 북한의 쌀의 30%가 생산된다고 합니다..
2층의 전시실을 잠시 둘러 봅니다..
북한의 도발로 연평해전 당시 6명이 전사하고 ㅂ8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그 명단이 여기 적혀 있습니다..
바깥에서 본 송악산과 북한 마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있습니다..
제적봉은 공산당을 제압한다는 의미입니다..
평화전망대를 뒤로 하고 역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이 있는 고인돌유적지로 이동을 합니다..
북방식 고인돌입니다..
【강화 고인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무게가 수십 톤 이상인 덮개돌을 채석하여 운반하고 무덤에 설치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의 권력과 경제력을 상징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강화군에는 하점면과 양사면에 걸쳐 40여 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탁자식 고인돌을 볼 수 있다. 탁자식 고인돌이란 지하에 돌방을 만들지 않고 시신을 노상에 안치하고 사면을 판석으로 가린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형태를 말한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의 고인돌은 우리나라의 탁자식 고인돌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위엄 있는 탁자식 고인돌의 형태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부근리 고인돌은 주변의 여러 고인돌과 함께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강화군에서는 부근리 일대에 공원을 조성하고 청동기시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시설들을 설치하여 방문객들의 편의를 돕고 있다. [출처 : 강화군청]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역사박물관에 있는 고려시대 서민들의 실생활 용기인 도기..
역사박물관에 있는 강화 동종으로 고려궁지에 가짜 동종이 있다고 합니다..
강화동종은 보물 제11-8호. 높이 176㎝, 지름 145㎝, 두께 21㎝. 종신에 있는 명문을 통해 1711년(숙종 37)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의 정상부에 있는 용뉴에는 쌍룡이 조각되어 있고, 종신을 상하로 구분하는 중앙의 횡대는 한국종의 전통형태에서 벗어난 이례적인 형식이라고 한다.
선두포축언시말비,,
선두포축언시말비는 선두포 제방공사과정을 기록하여 세운 것으로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 이름까지 다 기록돼 있어 조선후기 축언의 구체적인 과정이나 개간의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이라고 한다.
강화 마니산에 있는 첨성단의 모형..
1871년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에서 미군과의 전투장면 ..
고려청자..
철종을 모시러 오는 왕실의 강화도 행렬을 그린 것으로
북한 평양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 소장의 행렬도를 사진 찍어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
강화읍의 명물 참게게장백반으로 식사를 하고 휴식을 하면서 주변을 잠시 돌아 봅니다..
1947~2005년까지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인 심도직물이 있던 자리..
직조기..
오후 일정의 첫번째로 고려궁지 인근에 있는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을 둘러봅니다..
【용흥궁】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출처 : Daum백과] 용흥궁 –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용흥군으로 들어 갑니다..
용흥궁은 원래 초가였는데 철종4년 1853년 강화 유수 정기세가 지금의 집을 지었다고 한다(안채)..
사랑채..
성공회 성당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성공회강화성당 입구 입니다..
이곳은 1894년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 학당 군사교관 콜웰(W. H. Callwell) 대위의 관사가 있었던 땅으로
건물 측면과 뒷면의 아치형 출입문 4개는 영국에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성공회 강화성당】
강화읍 내 성공회(聖公會) 강화성당 터는 ‘구원의 방주’ 형국이다. 한옥 건물은 자연스럽게 배의 선실이 된다. 터키 아라라트(Ararat)산 구원의 방주가 떠오른다. 개화기 때, 성공회 초기 선교사들이 이곳 강화도에 한옥 성당을 세운 건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이오나(Iona) 섬처럼 신앙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뜻에서였다.
언덕배기가 일어서는 서남쪽 초입, 뱃머리쯤 해당되는 곳에 솟을대문이 서 있다. 한국 전통 건축양식의 외삼문이다. 절의 일주문에 해당한다. 계단을 오른다. 외삼문 대문 중앙에 태극문양을 배경으로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문을 지나면 내삼문이 나타난다. 절의 천왕문에 해당하는데 종루(鐘樓)를 겸했다. 범종과 흡사하다. 당좌(撞座, 종을 치는 부위)의 돋을새김 십자가 문양이 다를 뿐이다. 애초 영국에서 들여온 종은 1943년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정문 계단 철재 난간과 공출해갔다. 지금의 종은 1989년 다시 만든 것이다. 조금 전 지나쳐온 철재 난간은 2010년 일본성공회 측에서 한일 양국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봉헌했다고 한다.
[출처 : Daum백과] 성공회 강화성당
한국 전통 건축양식과 바실리카 양식을 혼합해 지은 성당 내부로
백두산에서 뗏목으로 엮어온 목재로 지었다고 하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성당 뒤편에 있는 건물로 숙소나 사제관인것 같습니다..
처음 볼 때는 사찰 같은 느낌이지만 자세히 보면 지붕에 십자가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강화 주문도에 가면 1905년 설립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강화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도중앙교회를 볼 수 있는데 이 교회도 한옥 모양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의 모습은 1923년 주문도 교인들이 헌금을 모아 개축한 것으로 인천시 문화재 자료 14호이다.
이곳은 서도중앙교회의 선교백주년 기념예배당입니다.'라고 적혀있다.(1923년 7월 건립)
강화고려궁지로 들어 갑니다..
고려궁지에는 고려궁의 유적과 행궁의 유적은 보이지 않고 강화유수부의 동헌인 명위헌과 이방청 그리고 종각만 서 있으며 최근에 외규장각이 복원되었다.
유수부 동헌으로 앞의 나무는 400여년 된 느티나무로 인조9년(1631년) 심은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강화유수부 동헌
조선시대 관아의 건물로서 강화지방의 중심 업무를 보던 동헌으로 영조 45년(1769)에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이름을 붙였으나 현재는 명위헌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글씨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인 백하 윤순이 썼다. 강화유수부는 인조가 1627년 정묘호란으로 강화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뒤 설치되었다. 강화의 유수는 종2품의 당상관으로 왕(王)의 신임을 받는 중신이 임명되는 것이 보통인데 진무사도 겸했다. 건물은 겹처마에 단층 팔작지붕이며, 이중의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골의 주처석을 놓고 네모로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유수부 동헌인 명위헌..
보수중인 외규장각..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이곳의 자료 의궤(儀軌)를 비롯한 340권의 책과 문서 및 은궤 수천냥이 약탈되었다.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의궤 297권은 현재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프랑스의 미테랑대통령이 1993년 TGB의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의궤상 1권을 반환하며 프랑스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이후 2010년 11월,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고, 2011년 5월 환수가 완료되었다.
이방청..
강화부 종각에 동종이 있으나 이는 새로 만든 종이며 진짜 종은 균열이 생겨 역사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고려궁지를 견학하고 전쟁박물관과 갑곶돈대로 이동하였다..
강화 성곽쌓는 모습으로 고려시대 강화 성곽은 토성이었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들를 용두돈대 원경에 대한 설명..
조선의 활인데 요즘의 활과는 전혀 다른 형태네요..
역사박물관을 관람하고 갑곶돈대로 이동하면서 본 탱자나무로 탱자가 많이 열렸있네요..
갑곶돈대의 포
갑곳돈대(사적 제306호)
갑곳돈대는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세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주둔지를 설치할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실제 대포라고 한다.
갑곶리 탱자나무는 사기리의 탱자나무와 함께 탱자가 사해안에서 자랄 수 있는북방한계선에 위치한 것으로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것이다. 강화에 탱자나무를 심게된 사유는 성벽에 적군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용도였다고 한다..
비석군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유수, 판관, 경력, 군수의 영세불망비 및 선정비와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표, 삼충신을 기리는 삼충사적비 등총67기 비석이 모여있다. 조상들의 자연보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표석인 금표는 1703년 (숙종 29년)강화유수부(고려궁지) 앞 등지에 세웠던 것으로 "가축을 놓아 기르는 자는 곤장 100대, 재나 쓰레기를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를 친다" 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다.
오늘의 마지막 관람지인 광성보로 이동하였다..
【광성보】
강화 12진보(鎭堡) 가운데 하나이다. 1658년(효종 9)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하였다. 그 뒤 1679년(숙종 5)에 축조된 오두(鰲頭)·화도(花島)·광성 등의 돈대(墩臺)와 함께 오두정 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 21)에는 돌로 성벽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두어 ‘안해루(按海樓)’라고 하였다.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곧 이 해에 미국 함대가 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광성·초지(草芝)·덕진(德津)·덕포(德浦)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하여 물리쳤다. 하지만 4월 23일에 초지진은 미국 해병대 450명의 상륙으로 인해 점령되었고, 이튿날에는 덕진진이 함락되었으며, 곧 광성보가 공격을 받았다. 당시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1823∼1871)과 수하의 장병은 열세한 무기로 힘껏 싸웠으나 중상을 입어 움직이기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1976년에 파괴된 성가퀴와 문루 등을 복원하고,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출처 : Daum백과] 강화 광성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반대편에서 본 모습..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성문 안쪽 전경..
용두돈대 가기 전에 있는 손돌목 돈대..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5년(1679년)에 축조된 돈대로 덕진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 돈대 넓이는 778m2에 성곽 길이가 108m이다. 고종 8년 (1871년) 신미양요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용두돈대에서 조망..
손돌목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용두돈대에서 본 모습으로 물살이 엄청 센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손돌목의 이야기로 이번 강화 안보체험을 마무리 합니다...
1627년 정묘호란때, 청군이 물밀듯이 쳐내려오자 인조는 황급히 강화로 피난길을 떠났다. 급작스럽게 떠난 바람에 대곶항부근에서 강화섬으로 건너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때 손돌이라는 청년어부가 배를 대자 황급히 그배를 타고 섬으로 향했다. 하지만 배가 물살이 거센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왕은 '이놈이 나를 물에 빠뜨려 죽이려는구나' 생각하고 신료들에게 사살을 명했다. 그러자 손돌은 바가지 하나를 내밀며 '이 바가지를 물에 띄워 흘러가는대로 따라가면 강화섬에 닿을 것'이라 말하고 죽임을 당했다. 왕 일행은 바가지가 흘러가는 물살이 드센 곳을 따라가다가 드디어 섬에 닿아 목숨을 구했다.그뒤 왕은 자기의 성급함을 후회했다고 한다.
강화 안보체험을 위하여 수고해 주신 국방동우회 문점수 회장님과 김현수 사무국장님의 수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김형의 부지런함이 체험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해주는군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항상 건강하세요.
너무 멋진 작품사진 잘 보고 갑니다!!^^*